01. 이집트 문명(Egyptian civilization)
나일 강 중류, 하류에서 번성한 세계 4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더불어 서양 문명과 중동 문명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다. 석기시대 무렵부터 정기적으로 범람해 풍부한 식량을 확보하게 해준 나일강으로 인해 성립되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하필 이집트에서 발달한 데에는 나일강의 특성이 크게 기인했다. 나일 강의 가장 큰 특징은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한다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범람의 이유는 청나일강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 5월에 내리는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이런 범람은 9~10월쯤에 나일강 하류 이집트에 도달해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11월쯤부터 다시 드러난 땅은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
이처럼 나일강의 범람시기는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만들고, 범람 시기에 맞춰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대략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10월에 다시 홍수가 와서 지력을 보충해주었다. 이러한 나일 강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이집트는 비료나 농법이 발달하기 전, 농경 사회를 이어나가기에 최상의 환경이었다.
공간적 이유는 이렇고 시간적으로 상당히 오랜 시기부터 발달해온 것은 구석기 시대에 있었던 인류의 대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생 인류는 해당 시기 아프리카 초원을 벗어나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집트는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맞닿뜨리는 비옥한 토지이자 강 유역이었다. 나일 강 처럼 문명을 만들기 좋은 지역이 다른 곳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까지 정착하는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가장 먼저 정착을 시작하고 고효율의 농업 생산이 이루어진 이집트에서 문명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천 년 정도 전(대략 기원전 36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유럽 끝자락에 매머드가 남아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하였다. 2016년도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300년 전, 기원전 5316년 무렵의 도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사 참고 청동기 시대 원시인 외치가 태어나기 2000년도 전에 이집트에선 이미 도시 문명이 등장하였다.
기원전 3100년 무렵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였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단군처럼 이집트인들에게는 메네스가 시조로 여겨진다. 다만 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이후 널리 알려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토목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하였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고대 이집트의 통일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인 기원전 32세기 즈음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기원전 22세기 즈음까지 약 1000년간의 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기원전 21세기 이후부터 힉소스인에게 정복당한 기원전 18세기 때까지 약 300년간의 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인 기원전 16세기부터 아시리아에 정복당한 기원전 11세기 때까지 500년간의 신왕국 시대이다. 이게 얼마나 기냐면 각각의 기간과 간극은 대략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원전이 안 끝난다. 피라미드가 처음 건립된 시기부터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던 시기 사이 간격보다 클레오파트라가 있던 시기와 iPhone이 출시된 시기 간격이 더 짧다.
고대 로마 시절 로마인들에게도 피라미드는 이미 고대 유적 취급 받았고 그 시절에도 이미 관광코스였다.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등, 로마인들이 남긴 건축물들도 현대인들에겐 고대 유적으로 취급 받는 걸 보면 얼마나 그 간격이 긴지 알 수 있다.
유구한 역사 만큼 인류 역사에서 강대국의 자리를 매우 오랫동안 유지했다. 이집트라는 지역은 항상 고대 지중해 세계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중세 이슬람 제국 시절에도 중요했으며 현대의 이집트 역시 중동에서는 역량 있는 지역 강국 중 하나이며,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손꼽히는 강대국이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와 현재 이집트 주민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 검출한 DNA를 다른 지역 고대인들의 DNA와 비교해 보면 사하라 이남 지역보다는 레반트 지역 주민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 이집트인의 DNA를 고대 미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현대 이집트인의 DNA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고대 미라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영향이 15~25%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크라우스 박사팀에 의하면 이는 나일 강 유역에서 노예 무역을 포함하여 상호 교역을 많이 했기 때문이거나, 중세에 이슬람이 사하라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사하라 이남 지역과 접촉한 결과인 듯하다.#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인 것이, 역사가 시작되던 무렵의 혈통을 현대까지 있는 그대로 쭉 유지해오고 있는 집단은 고립된 원시부족 말고는 없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발원한 나일 강 유역은 예로부터 축복받은 지역이라고 불릴 정도로 토질이 비옥했다. 매년 주기적인 범람이 일어나 상류의 진흙과 양분들을 쓸고 내려왔고, 생산량이 극도로 높은 거대한 충적평야를 형성했기에 이집트에서는 이미 약 백 만년 전부터 구석기가 시작되었을 정도로 인류가 일찍 거주했다. 이집트는 구석기와 중석기, 그리고 신석기를 거쳐 점차 거대한 도시들과 성읍들이 형성되었고, 본격적인 정착과 함께 농경 문화가 이루어지면서 빠르게 발전했다. 당시 이집트는 크게 남쪽 나일 강 상류 쪽의 상이집트, 그리고 북쪽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 쪽의 하이집트로 나뉘어진 상황이었다. 다만 아직 하이집트는 제대로 개발이 된 곳이 아니었기에 갈대와 진흙이 가득한 늪지대에 불과했고, 때문에 문명의 발전도나 문화는 인류가 더 일찍 개척한 상이집트가 훨씬 더 뛰어난 상황이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 전 인류의 정착부터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시대까지를 이집트의 '제0왕조', 즉 이집트 선왕조라고 부른다. 선왕조 시기 상이집트에서는 3기에 걸친 나카다 문화(Naqada Culture)가 나타나 진보된 형태의 도자기를 만들거나 무기를 제작하는 등 초기적인 국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결국 상이집트 출신의 나르메르가 기원전 3150년 경 하이집트를 정복하고 전 이집트를 통치하는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이집트 초기 왕조가 시작된다.
학계에서는 사료가 부족한 제1왕조와 제2왕조를 묶어 이집트 초기 왕조로 부른다. 초대 파라오 나르메르를 비롯하여 덴, 카아, 세네지 등 그의 뒤를 이은 군주들은 상하 이집트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 힘썼다. 또한 이 시기에 이집트의 전통적 종교관, 세계관, 사회관의 기반이 형성되면서 이후 몇 천년 간 지속될 이집트 문화의 토대를 놓았다. 기원전 2686년에는 파라오 조세르가 등장하여 제3왕조를 개창하면서 이집트 고왕국이 열린다. 고왕국 시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의 황금기로 불리는데, 세계 7대 불가사의들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바로 고왕국 시대의 쿠푸 왕 때 지어졌다. 또한 쿠푸의 뒤를 이은 카프레, 멘카우레 등 명군들이 그 옆에 2개의 피라미드를 더 세우면서 현재 우리가 기자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3기를 완성했고, 이와 같은 크기의 피라미드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더이상 지어지지 않았다. 고왕국은 멘카우레 이후에도 페피 1세 등 걸출한 명군이 등장하며 오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고왕국도 점차 쇠락했으니, 제6왕조 출신의 페피 2세가 지나치게 오래 장수하면서 후계 구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약화된 것. 결국 얼마 가지 않아 고왕국은 붕괴했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도래한다.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찾아온 중간기인 제1중간기에 수많은 파라오들이 즉위와 암살을 반복했다. 이 시기 이집트를 다스렸던 제8왕조, 제9왕조, 제10왕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조차 별로 없는데, 확실한 것은 70일 간 파라오 70명이 설칠 정도로 당시 이집트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이집트는 하이집트를 차지한 제9, 10왕조와 상이집트 일대를 차지한 제11왕조로 반토막났다. 끝없는 내전이 반복되다보니 고왕국 시절 기껏 지어놓았던 신전과 도시들이 불타 무너져 내렸고,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이 시대는 제대로 남긴 유물조차도 몇 없다. 결국 제11왕조 출신의 멘투호테프 2세가 마침내 기원전 2055년 경에 하이집트의 제10왕조를 무릎꿇리고 130여 년 만에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제1중간기가 끝난다.
멘투호테프 2세 이후의 통일 이집트를 이집트 중왕국이라고 부른다. 멘투호테프 2세는 즉위하자마자 제1중간기 시절 지나치게 강화된 지방 귀족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 다양한 술수를 썼다. 곳곳에 파라오 직속의 지방관들을 파견하여 귀족들을 견제하는가 하면 귀족들의 자제를 볼모로 잡아 은연 중에 귀족들을 협박했다. 멘투호테프 2세의 이같은 노력 덕에 그를 이은 중왕국의 파라오들은 훨씬 안정된 왕권을 가지고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쳐 중왕국의 영토를 사방으로 넓혔고, 워낙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설로 남았던 덕분에 나중에는 그가 유럽 일대까지 원정을 갔다는 믿거나말거나식 설화가 전해지기까지 했다. 세누스레트 3세의 후계자 아메넴헤트 3세는 내치에 신경을 써서 거대한 건축물들을 건립하고 중왕국의 문화 예술을 크게 후원하며 이집트 중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파이윰에 신전을 짓거나 운하를 파는 등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들이 연달아 삽을 떴고, 중왕국은 풍요를 만끽했다. 그러나 중왕국 역시 아메넴헤트 3세 사후 왕권이 약화되며 서서히 몰락하더니 결국 기원전 1650년 경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왕국이 무너지면서 두 번째 혼란기인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힉소스인들은 전차라는 이집트인들이 듣도보도 못한 신무기를 가지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전차의 뛰어난 기동성에 무력했던 이집트 군대는 그대로 쓸려나갔고, 힉소스인들은 하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일대를 장악한 후 파라오를 칭했다. 이를 제15왕조라고 부른다. 한편 이집트 원주민들은 남쪽으로 밀려나 상이집트를 중심으로 제16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도 상황은 녹록치 않았으니, 북쪽에서는 힉소스인들이 행패를 부렸고 남쪽에서는 쿠시 왕국의 누비아인들이 허구한 날 약탈하러 들어오면서 양면에서 치이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원전 1582년 경 힉소스인들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제16왕조의 수도 테베가 함락되며 제16왕조는 그대로 멸망했고, 그 잔해 위에 또다른 이집트계 왕조인 제17왕조가 세워졌다. 제17왕조는 천천히 힘을 기르며 이집트를 통일할 기회만을 노렸다. 초기에야 힉소스인들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기에 굽히고 들어갔으나, 점차 국력이 커지면서 목소리도 함께 커졌다. 힘을 기른 제17왕조는 세케넨레 타오의 지휘 하에 힉소스인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몇 십여년에 걸친 수복 전쟁 끝에 아흐모세 1세가 마침내 기원전 1550년 경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인 이집트 신왕국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