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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고려인(高麗人), 달단몽고(韃靼蒙古), 여진(女眞)? [제1편]
2024년 07월 14일
○ 「조선(朝鮮)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 그는 누구일까?」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는 누군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우리들의 직계(直系) 선대국(先代國)이며, 왕조(王朝)의 백성(百姓)으로 살아왔다는 엄연(儼然)한 사실을 부인(否認)하는 국민(國民)들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라고 사료(思料)된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는 누구냐?」 하는 질문(質問)에 선뜩 “그는 누구다”라고 자신(自信) 있게 말할 수 있는 국민(國民)이 있을까? 「그분은 고려인(高麗人)인가? 몽고계(蒙古系) 여진인(女眞人)인가? 달단(韃靼) 몽고인(蒙古人)인가?」 현재(現在)까지 명확(明確)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이 정답(正答)이다.
➡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다 이 모양(模樣)이다. 오늘의 주제(主題)는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이단(李旦)’와 그의 선조(先祖) 가계(家系)에 대하여 역사통설(歷史通說)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의 해설서(解說書)에 이해(理解)될 수 없는 여러 의문점(疑問點)이 있다.
이러한 여러 의문점(疑問點)을 해소(解消)해 보고자 함이므로, 전주이씨(全州李氏) 가계(家系)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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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주이씨(全州 李氏) 시조(始祖) 이한【李翰 : ? ∼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이한【李翰 : ? ∼ ?】: 〈시조(始祖) : 본관(本貫) 전주(全州) / 사공(司空) : 『선원계보(璿源系譜)』·『태조실록(太祖實錄)』·『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에 의하면,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로 신라에서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하여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다. 그 뒤 대가 이어져 안사(安社 : 뒤에 穆祖로 추존)-행리(行里 : 뒤에 翼祖로 추존)-춘(椿 : 뒤에 度祖로 추존)-자춘(子春 : 뒤에 桓祖로 추존)-성계로 이어졌다. 그는 전주의 호족으로, 신라 때의 혼인 관계와 벼슬 등은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왕실의 선대인 관계로 상세한 편이다. 중략(中略)〉이라고 하였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AD 1,679년(肅宗 5)에 처음 편찬하여 1,931년까지 100여 회 수정 보간된 조선왕실의 족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1,400년대도 아니고, 수백(數百) 년(年)이 지난 17세기(世紀)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마저도 AD 1,931년도(年度)까지도 계속 수정(修正)되거나 첨삭(添削) 등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결국(結局) 일제(日帝) 강점(强占) 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입맛에 맞게 개수(改修)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또 다른 해설(解說) 역시(亦是)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내용(內容)으로 점철(點綴)되어 있는데 : 의문(疑問)은,
➊ 「이성계(李成桂)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시조(始祖) 이한[李翰 : ? ∼ ?]의 21대손(孫)이다. 「신라(新羅) 말기(末期)의 인물(人物)로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婚姻)하였고,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 이한의 선대와 언제부터 전주에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전주에 세거하면서 본관으로 삼았다.」라고 열심(熱心)히 설명(說明)하고 있음에도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여식(女息)과 혼인(婚姻)했음에도 출생(出生)도, 사망년도(死亡年度)도 모른다? 그럼 그가 무열왕(武烈王)의 10세손의 여식(女息)과 혼인(婚姻)한 것은 무엇으로 고증(考證)할 수 있으며, 무엇으로 증거(證據)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고,
➋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했다고 전(傳)해지는데, 「신라(新羅)의 관직(官職)에 사공(司空)이라는 이름(名)은 없다」라고 전(傳)해지고 있으니, 뭔가 잘못된 기록(記錄)임은 확실(確實)하다.
한 가지 유추(類推)해볼 수 있는 것은, “사공(司空)”이라는 관직(官職)은 고려(高麗) 때에 있었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신해년(辛亥年) 【恭愍王 20, 1,371年】 에, ‘사공(司空)’으로 있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任命)되었다.」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李成桂)의 시조(始祖) 이한(李翰)은,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 때가 아니라 고려(高麗) 문종(文宗) 【11代 : 재위(在位) : 1,022년~1,046년 (23年) : 이때 ‘사공(司空)’이 나온다.】 때 인물(人物)이라고 한다면 오류(誤謬)일까? 또 “이한(李翰)”에 대한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사공(司空)을 지냈다”라는 말은 후손(後孫)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출생(出生)도 모른다? 사망(死亡)도 모른다? “사공(司空)”이라는 관직을 했다고 하면서도 신라(新羅)에는 사공(司空)이라는 관직명(官職名)이 없다는 말은, 아쉬운 이야기지만 “믿을 수 없는 시조(始祖) 이야기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또 그분이 “전주(全州)”에 토착(土着)해서 “전주이씨(全州李氏)”라고 했다고 하는데, “출생(出生)도 모르며, 사망년도(死亡年度)도 모르는 분이 전주(全州)에 토착(土着)했다”라는 말은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후대(後代)의 가필(加筆)이 아니고는 설명(說明)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➌ 또 하나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한【李翰 : ? ∼ ?】은, 당인(唐人)으로 신라(新羅)에 왔다”라고 하는 주장(主張)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무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고 기록되며 당(唐) 천보(天寶)[AD 742~756년] 말(末)에,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으며, 문중(門中)에서도 이런 주장(主張)을 하는 계파(系派)가 있다.
이 설명(說明)대로라면 : 「전주이씨(全州 李氏)는 본래(本來) ‘한민족(韓民族)=조선족(朝鮮族)’이 아닌 이민족(異民族)인 당(唐)나라 사람【당인(唐人)】이었다」라는 뜻이 된다.
도대체 어떤 주장(主張)이 올바른 것인가?
결국(結局)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도, 조선(朝鮮)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도 선대(先代) 가계(家系)를 알 수 없는 자손(子孫)이다」라는 말이 된다.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면 : 「전주(全州)」는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祖)에 의하면 :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이남(以南) 땅에 있는 도회지(都會地)다.
【이성계(李成桂) AD 1,335【忠肅王 復位 4年】 ~ 1408年【太宗 8年】 本貫 : 全州 / 태조(太祖 : 高皇帝) AD 1,392 ~ 1,398年 [再任 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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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서 설명(說明)하는 바에 따르면 :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는, 몽고(蒙古)에 투항(投降)하여, 호족(豪族)이 되었다가 원(元)나라가 쇠퇴(衰退)해지기 시작(始作)하자, 고려(高麗) 조정(朝廷)에 귀화(歸化)하여, 또 호족(豪族) 세력(勢力)으로 급부상(急浮上)했다고 전한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동각잡기(東閣雜記), 위키 백과,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總序) 등을 참고(參考), 인용(引用)하여 필자(筆者)가 편집(編輯)한 것이다.】
(1) 〈사공(司空) : 휘(諱)가 한(翰)이며,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10세 손(孫)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았고〉
(2) 〈시중(侍中)이,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고〉
➡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이자춘(李子春) 신도비(神道碑)’를 보면 : 「사공(司空) 이한(李翰)과 시중(侍中) 자연(自延)에 대한 기록(記錄)이 아예 없다.」
또 사공(司空)이란 관직(官職) 이름 자체(自體)가 신라(新羅)에는 없었으며, 또 “이한(李翰)”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신라(新羅)에 왔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3) 〈복야(僕射)가, 아간(阿干) 광희(光禧)를 낳았고〉
(4) 〈아간(阿干)이,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고〉
(5) 〈사도(司徒)가, 긍휴(兢休)를 낳았고〉
(6) 〈긍휴(兢休)가, 염순(廉順)을 낳았고〉
(7) 〈염순(廉順)이, 승삭(承朔)을 낳았고〉
(8) 〈승삭(承朔)이, 충경(充慶)을 낳았고〉
(9) 〈충경(充慶)이 경영(景英)을 낳았고〉
(10) 〈경영(景英)이, 충민(忠敏)을 낳았고〉
(11) 〈충민(忠敏)이, 화(華)를 낳았고〉
(12) 〈화(華)가, 진유(珍有)를 낳았고〉
(13) 〈진유(珍有)가, 궁진(宮進)을 낳았고〉
(14) 〈궁진(宮進)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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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용부(勇夫)가, 내시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
➡ 「‘위키백과’에 의하면 :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이 1,174년(고려 명종 4년) 피살되자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李璘)이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이린은 이양무를 낳았는데, 이한에서부터 이양무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한다. 선원(璿源)이란 아름다운 옥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선(璿)은 조선 왕가를 의미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도무지 상식적(常識的)이지 않은 설명(說明)은 :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도(主導)한 이의방(李義方)이 AD 1,174년에 피살(被殺)되었는데, 그의 동생(弟) “린(璘)”은 살아남아 전주(全州)로 가서 호족(豪族)이 되었다.」라는 것은, “당시(當時)는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였다”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후손(後孫)의 작품(作品)일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곧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혹(惑), 겨우겨우 홀로 살아남아 고향(故鄕)으로 피신(避身)했다고 해도 이해(理解)가 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고도 살아남아 “전주(全州)”에서 급부상(急浮上) 호족(豪族)이 된다? 이건 희극(戲劇)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의방(李義方)
〈이의방(李義方)은 1,170년(의종 24)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무신이다.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로서 대장군 정중부를 끌어들여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다. 정변의 동료인 이고를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등 권력을 휘둘렀으나, 조위총의 난 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고 중방의 기능을 무신정권의 주요 통치 기구로 활성화하는 등 초기 무신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이의방(李義方)【필자(筆者) 주(注) : 출생(出生) ?∼1,174年】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의종(毅宗) 말에 산원(散員)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보현원(普賢院)에서 대장군 정중부(鄭仲夫), 견룡행수 이고(李高) 등과 더불어 무신란(武臣亂)을 일으켜 성공한 뒤 응양용호군(鷹揚龍虎軍)의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고, 형 이준의(李俊儀)는 승선(承宣)에 임명되었다. 정중부 등과 더불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明宗)을 맞아 무신정권(武臣政權)을 수립한 뒤 대장군 전중감 겸 집주(大將軍殿中監兼執奏)에 임명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그 형상이 각상(閣上)에 그려졌다.
1,171년(명종 1) 대장군 한순(韓順), 장군 한공(韓恭) · 신대예(申大譽) · 사직재(史直哉) · 차중규(車仲規) 등이 비방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차중규는 귀양을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또한 이고(李高)가 무뢰배들, 법운사(法雲寺)의 승려 수혜(修惠), 개국사(開國寺)의 승려 현소(玄素) 등과 결탁해 분수에 넘치는 뜻을 나타내므로 미워하게 되었다. 여정궁(麗正宮)에서 태자(太子)에게 원복(元服)을 가하는 잔치가 베풀어지자 선화사(宣花使)로 참여해 난을 일으키려 한 이고를 죽이고, 순검군(巡檢軍)을 풀어 이고의 어머니와 나머지 무리들을 잡아 죽이고 아버지는 귀양을 보냈다.
1,173년(명종 3)에 왕녀를 봉해 궁주(宮主)를 삼았다. 중방(重房)에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기생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떠들고 북치는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벼슬은 위위경(衛尉卿) 흥위위섭대장군(興威衛攝大將軍) 지병부사(知兵部事)에까지 올랐다. 이해 8월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다수의 문신을 살해하였다.
1,174년(명종 4)에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백여 명이 성(城)의 북문을 침범해 승록(僧錄) 선유(宣諭)를 죽이자 병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물리쳤다. 또 중광(重光) · 홍호(弘護) · 귀법 · 홍화(弘化) 등 여러 절의 승려 2천여 명이 숭인문(崇仁門)을 불사르고 자신과 형을 죽이려 하므로 부병(府兵)을 모아 승려 백여 명을 죽이고, 나아가 중광 · 홍호 · 귀법 · 용흥(龍興) · 묘지(妙智) · 복흥(福興) 등 여러 절을 허물고 불사르며 많은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형 이준의가 이의방을 꾸짖어 “너에게 삼대악(三大惡)이 있으니 하나는 임금을 쫓아내어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취함이요, 둘은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해 간통함이요, 셋은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다.”라고 하자, 형을 죽이려 했으나 문극겸(文克謙)의 만류로 그쳤다. 이때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군대를 일으켜 개성 근교에까지 이르자, 서경 사람인 상서(尙書)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을 모두 잡아 죽여 저잣거리에 효수하였다. 이후 서경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대동강까지 갔으나, 흩어졌던 서경 군대가 다시 모여 성을 굳게 지키므로, 성 밖에서 한 달 정도 주둔하다가 모진 추위로 인해 돌아왔다.
좌승선(左承宣)에 임명되자 딸을 바쳐 태자비(太子妃)를 삼았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등,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원망이 일어나 1,174년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공모한 승려 종참(宗旵)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형 이준의와 같은 무리인 고득원(高得元)·유윤원(柳允元) 등도 함께 죽임을 당하였고, 딸은 태자비에서 폐출되었다.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로서 정중부를 끌어들이고 중방의 기능을 무신정권의 주요 통치 기구로 활성화하는 등 초기 무신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라고 하였는데,
➡ 이렇게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정적(政敵)들을 살해(殺害)하고, 길거리에 효시(梟示)하는 등의 잔인무도(殘忍無道)했던 이의방(李義方)과 그 가족(家族)을… … ‘자신(自身)들 원수(怨讎)’의 가족(家族)을 살려주고, 그것도 고향(故鄕)인 전주(全州)로 귀향(歸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라는 이야기는, 당시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하에서 불가능(不可能)하고,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반역(反逆), 왕가(王家) 또는 체제(體制)에 대한 도전(挑戰) 등은 대역죄(大逆罪)로, 본인(本人)은 물론이거니와 자녀(子女), 부모(父母), 형제자매(兄弟姉妹), 삼촌(三寸), 사촌(四寸), 외가(外家), 또는 친족[親族 : 8촌 이내(以內)]까지도 연좌(連坐)시켜 ‘멸문(滅門)’시키고, 친지(親知)와 교우(交友)한 주변인(周邊人)들에게도 연좌(連坐)시킬 정도(程度)로 봉건체제(封建體制) 하(下)에서의 반역(反逆)의 대가는 처참(悽慘)하고 처절(凄切)했다.】
물론(勿論) 21세기 오늘날에는 연좌제(緣坐制)가 없어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이전(以前)까지도 살아있었다고 전해진다. 「12세기(世紀) 당시(當時)의 체제(體制)로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당시(當時)의 권력가(權力家)이자 명문가(名門家)였던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의 사위가 되는 바람에 문극겸(文克謙)의 덕택으로 살아남았을 것이다”라는 해설(解說)도 하고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이야기일 뿐이고,
또 어떤 기록(記錄)에서는 ‘이린(李璘)과 그의 아우(弟) 이거(李琚)는 문극겸(文克謙)’과는 ‘겹사돈(査頓)이었다’라는 설명(說明)까지 하고 있는데, 이린(李璘)의 아우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하였고, ‘린(璘)과 린(隣)’이 동일인물(同一人物)인지, 형(兄)과 아우(弟)를 말하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희극(戲劇) 같은 이야기들이다.
➡ 다만 ‘이린(李璘)의 아우(弟)로 이거(李琚)’가 있었다고 하는데, 문극겸(文克謙)과는 겹사돈(査頓)이었다고 설명(說明)을 하기도 한다. 문극겸(文克謙, 1122~1189)과 겹사돈(査頓)이라는 이야기는 : 「AD 1,174년(年)의 이의방(李義方)이 살해(殺害)될 때 가족(家族) 모두가 모두 살해(殺害)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점을 설명(說明)하기 위한 밑그림이 아니었을까?」하는 점이다.
즉(卽), 「AD 1,174년 이의방(李義方)이 살해(殺害)되고 나서 그 가족(家族)들은 어떻게 죽음을 피(避)했는가? 하는 점이다. ‘피할 수 있는 재간(才幹)이 없었다’라는 것이 당시(當時) 사회체제(社會體制)였다.」라는 점이다. 곧 죽임을 당한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원수(怨讎)들이 이의방(李義方) 가족(家族)을 그대로 놔뒀겠는가? 하는 것이다.
‘고려(高麗) 왕실(王室)’ 측(側)에서 봐도 “이의방(李義方)은 반역도당(叛逆徒黨)의 수괴(首魁)”였다는 엄연(奄然)(儼然)한 사실(事實)이었다.
곧 형(兄) ‘이준의(李俊儀)’가 ‘이의방(李義方)’에게 말했듯이 : 〈너에게 삼대악(三大惡)이 있으니 하나는 임금을 쫓아내어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취함이요, 둘은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해 간통함이요, 셋은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다〉라는 죄(罪)를 열거(列擧)하며 꾸짖었다고 전(傳)해지지 않는가! 이러고도 그 가족(家族)이 고향(故鄕)으로 귀향(歸鄕)하여 ‘호족(豪族)=토호(土豪)’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로 편집(編輯),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자(者)들이 그 후손(後孫)들을 파렴치(破廉恥)한 무리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고증(考證)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결국(結局), 「전주이씨(全州李氏) 가계(家系)를 신라(新羅) 말기(末期)로 끌어올리기 위한, 당시의 명문가(名門家)였던 남평문씨(南平文氏)를 끌어들인 후대(後代)인들의 가필(加筆)로 만들어낸 것이다」라는 주장(主張)에 힘이 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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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린(璘)이, 시중 문극겸(侍中 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武)를 낳았고〉
➡ 「이의방(李義方)과 이준의(李俊義)」는 고려사(高麗史)에 반역(反逆) 열전(列傳)에 실렸고, ‘전주(全州)이씨(李氏)’ 족보(族譜)에도 없다고 한다. 또한 그의 가족(家族)은 모두 살해(殺害)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이의방(李義方)과 이준의(李俊義)」에 대해서는 : 「AD 1,970년대에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을 국역(國譯)으로 간행(刊行)하는 과정(過程)에서 “이의방(李義方)의 제(弟) 이린(李璘)이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의 사위라는 점과 내시집주(內侍執奏)를 역임한 점의 유사성(類似性)이 확인(確認)되었다.」라는 말은 참 당혹(當惑)스러운 이야기다.
AD 1,970년 이전(以前)에는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을 공부(工夫), 연구(硏究)한 학자(學者)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얘긴가? 아니면 한자(漢字)를 몰라 그 내용(內容)을 몰랐다는 말인가? 이건 분명(分明)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임이 분명해 보인다.
우선(于先) 여기서 중요(重要)한 첫 번째는 : ‘AD 1,174년도(年度)’의 이의방(李義方)·이준의(李俊義) 형제(兄弟)가 살해(殺害)당할 때 ‘이린(李璘)과 이거(李琚)’는 어떻게 목숨을 부지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게 먼저 해결(解決)되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問題)다.
「그렇게 확인(確認)되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유사성(類似性)이 확인(確認)되었다」라는 말은 「서로 비슷한 내용(內容)을 갖고 있다」라는 뜻이나, 「확실(確實)하게 증명(證明), 또는 고증(考證)되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이 같은 사실(事實)은, “선원보략(璿源譜略)과 전주이씨(全州 李氏) 족보(族譜)”에도 내시집주(內侍執奏)【한국고전용어사전 / 내시집주[內侍執奏] : 고려 때 내시부(內侍府)의 관직】이며, 문극겸(文克謙)의 딸과 혼인(婚姻)하였다고 되어 있다고 하였다.
➡➡➡ 그러나 선원보략(璿源譜略)【AD 1,681년(肅宗 7)에 처음 간행되어, 1,931년(年)까지 계속(繼續) 보완(補完)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문제는 1,931년까지라는 것에 있다.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20년이 넘는 동안 계속(繼續) 보완(補完)되었다는 말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입맛에 맞게 왜곡(歪曲), 조작(造作)되었을 확률(確率)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족보(族譜) 또한 동일(同一)하다.】은, 「17세기(世紀)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라는 것이고, 전주이씨(全州李氏) 족보(族譜) 또한 이와 연계(連繫)되고 있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이 17세기(世紀)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족보(族譜)는 그 후대(後代)에 만들어졌다는 말과 같은 것은데, 문제(問題)는 「일제(日帝) 식민(植民) 통치(統治) 20년(年)이 넘는 동안【AD 1,931년도(年度)까지】계속 보완(補完)되고, 보정(補正)되고를 거듭했다」라는 점이다.
일제(日帝)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21년(年)【AD 1,931년도(年度)까지】 동안 ‘선원보략(璿源譜略)과 전주이씨(全州李氏)’ 족보(族譜)를 그대로 보관(保管)만 했을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 세계인구(世界人口) “81억” 명 중(中)에서 가장 순진(純眞)한 0.0000001%’에 속한 사람들일 것이다.
➡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21년(年) 동안’ 아마도 수십(數十) 차례에 걸쳐 총독부(總督府) 입맛에 맞게 고쳐지고, 또 고쳐지고, 또 고쳐지고를 반복(反復)했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이치(理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께서는 너무나 순진(純眞)한 분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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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양무(陽武)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목조(穆祖)이니,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高祖父)다〉
➡ 위의 가계(家系) 기록(記錄)이, 사실(事實)이라고 한다면 :
당시(當時) 권력가(權力家), 명문가(名門家)와 사돈(査頓)으로 연결(連結)되었다고 본다면, 굳이 ‘몽고(蒙古)’로 귀화(歸化)해야 할 이유(理由)가 전혀 없었으며, 귀화(歸化) 이유(理由)가 전혀 이해(理解)될 수 없다.
다만 의주(宜州) 병마사(兵馬使)로 있을 때, ‘산길대왕(散吉大王)’에게 항복(降伏)한 이후(以後)부터, 이곳 지방의 호족(豪族)으로 성장(成長)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當時) 병마사(兵馬使) 자리에 있었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根據)한 것인가?
또 여기서 ‘산길대왕(散吉大王)’이라는 자(者)가 등장(登場)하는데, 산길대왕(散吉大王)에 대하여 어디에서도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즉(卽), AD 1,254년 산길대왕(散吉大王)은 쌍성(雙城)을 침입(侵入),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 목조[穆祖]】에게 투항(投降)을 요구(要求)하고, AD 1,258년 재차 침입(侵入), ‘탁청(卓靑)과 조휘(趙暉)’ 등은 철령(鐵嶺) 이북(以北)의 땅과 함께 귀순(歸順)해버렸다. 몽고(蒙古)는 이에 화주【和州: 영흥(永興)】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고, 조휘(趙暉, ?~?)를 총관(總管), 탁청(卓靑)을 천호(千戶)로 하여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라는 것이 이때의 상황(狀況)이라고 설명(說明)한다.
그러나 「‘산길대왕(散吉大王)’이 누군지, 몽고(蒙古)의 이름은 무엇인지, 왕족(王族)인지, 장군(將軍)인지 무엇도 아는 바가 없다」라고 전해진다. 결국(結局) 「이런 인물(人物)은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때의 ‘산길대왕(散吉大王)’이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면 : ‘이안사(李安社)의 투항(投降)’은 없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自明)한 일일 것이다.
➡➡ 특히 : 「당시(當時)의 권력가(權力家), 명문가(名門家)인 남평문씨(南平文氏)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과 겹사돈(査頓)을 맺을 정도(程度)였다면, 전주(全州)의 지방관리(地方官吏)와 기생(妓生) 수청(守廳) 문제(問題)로 다퉈, 죽게 생길 일도 없으려니와 그 상대(相對) 관리(官吏)는, 아마도 ‘이안사(李安社)’에게 적당(適當)히 해결(解決)하자고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곧 도주(逃走)할 일은 없었다. 더구나 “이린(李璘)”의 동생인 “이거” 역시 문극겸(文克謙)의 딸과 혼인(婚姻)하여, 두 자매가, 두 형제(兄弟)와 혼인(婚姻)하는 바람에 “겹사돈이 되었다”라고 전하는데, 이게 사실(事實)이었다면 : 전주(全州)에서, 이들의 위세(威勢)를 막을 만한 인물(人物)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도주(逃走)할 필요(必要)는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첨삭(添削)한 것이다.」라는 의문(疑問)은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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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목조【穆祖 : 이안사(李安社)】 :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였으나, 1,254년 원(元)의 ‘산길대왕(散吉大王)’ 에게 항복하고, ➡ 「1,255년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천호(千戶) 겸(兼)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 1,274년 12월 흉(薨)하였으므로 성(城) 남(南)쪽에 장사를 지냈다가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 달단동(義興部 韃靼洞)’에 이장(移葬)하였다.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행리(行里)를 낳았으니, 이분이 곧 익조(翼祖)다.〉
➡ 위의 글 (17)과 연계(連繫)되는 글이다. 여기서 「알동(斡東)」이란 곳은 : [네이버 한자사전] : 「땅 이름. 함경북도 경흥(慶興)의 두만강(豆滿江) 건너 러시아 영내에 있었다. 조선 태조(太祖)의 고조부(高祖父) 목조(穆祖)가 덕원(德源)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 가서 익조(翼祖) 때까지 살던 곳이다. 《龍飛御天歌 1, 1章》」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안사(李安社)”는 고려(高麗) 영토(領土)가 아닌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의 여진(女眞) 땅에서 살았다는 것이고, 이곳의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달로화적【達魯花赤 : 다루가치 : 총독(總督)】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高麗)와는 관계(關係)없는 땅이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고려(高麗)에서 그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任命)하였다면 그 기록(記錄)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고려(高麗)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되어 있어야 함은 상식(常識)이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이후(以後)’의 기록(記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를 검색(檢索)해 보면 :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이전(以前)의 기록(記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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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익조【翼祖 : 이행리(李行里)】 : 적도(赤島)로 피란하였다가, 뒤에 덕원(德’原)에 옮겨 살았다. 1,275년 아버지인 이안사(李安社)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했다. 1,290년 의주(宜州)로 이주하여, 쌍성총관부 등지의 다루가치(달로화적)가 되었다. 안변호장(安邊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에게 장가들고 아들을 낳았는데 이분이 곧 도조(度祖)로 이름은 “춘(椿)”이다.〉
➡ 「1,275년 아버지인 이안사(李安社)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했다.」라고 하였는데, 이안사(李安社)는 이미 1년 전(前)에 사망(死亡)했다. 또 1,275년에 아버지인 이안사(李安社)의 천호(千戶)를 계승(繼承)했다면 : 이곳은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의 알동(斡東)에서의 일이다. 그러함에도 또 이주(移住), 「AD 1,290년에 의주(宜州)로 이주(移住)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등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의 이성계(李成桂) 선조(先祖)들은 이주(移住)를 밥 먹듯 하고 있다.
이주(移住)할 때마다 ‘가계(家系)’는 ‘신분세탁(身分洗濯)’을 하게 되는 과정(過程)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이미 「AD 1,258년 재차 침입(侵入), ‘탁청(卓靑)과 조휘(趙暉)’ 등은 철령(鐵嶺) 이북(以北)의 땅과 함께 귀순(歸順)해버렸다. 몽고(蒙古)는 이에 화주【和州: 영흥(永興)】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고, 조휘(趙暉, ?~?)를 총관(總管), 탁청(卓靑)을 천호(千戶)로 하여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의 알동천호(斡東千戶)를 계승(繼承)한 사람이 어떻게 또 이주(移住)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달로화적(達魯花赤)’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점이다.
또 여기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 전주(全州)에서 170 여호(餘戶)를 데리고【170 여호(餘戶)는 곧 850명 이상(以上)의 무리(衆)가 된다】와 삼척(三陟)으로 몰래 도주(逃走)해 왔는데, 전주(全州)에서의 그 원인(原因)이 된 자(者)가 또 삼척(三陟) 안렴사(按廉使)로 오는 바람에 또 몰래 170 여가(餘家)【170 여호(餘戶)는 곧 850명 이상(以上)의 무리(衆)가 된다】와 함께 함경도(咸鏡道)로 야반도주(夜半逃走)한다고 전해지는데… …그것도 “이의방(李義方)의 직계(直系) 손孫)이 말이다” 아마도 “전주(全州) 일대(一帶)”가 계엄(戒嚴)에, 왕사(王師)가 파견(派遣)되는 대(大) 사건(事件)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850명 이상(以上)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주(移住)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3세기(世紀), 뭔 재주로 전주(全州)에서 삼척(三陟)으로, 다시 함경도(咸鏡道)로, 이곳에서 다시 1,000 여호(餘戶)와 함께 몽고군(蒙古軍)에게 항복(降服)하고… …를 반복(反復)하는데,
➡➡➡ 〈언뜻 떠오르는 것이 “유랑집단(流浪集團)”이며, 고려(高麗) 때의 “유랑집단(流浪集團)”은, 바로 「양수척(揚水尺). 화척(禾尺). 재인(才人). 백정(白丁)」등이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居處)도 없이, 가축(家畜)을 기르며, 이들 가축(家畜)이 먹이로 하는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하며 사는 무리(衆)를 칭(稱)하는 것이다.
이들은 : 「신라(新羅) 말기(末期) 및 고려(高麗) 초(初)에 유입(流入)된 북방종족(北方種族)이었던 “글란(契丹 : 거란)과 여진(女眞 : 말갈(靺鞨), 또한 달단(韃靼 : Tatar) 족(族)”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북방종족(北方種族)’이란 말은,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신라(新羅), 고려(高麗)가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을 때 가능(可能)한 설명(說明)이다.】
특히 여기서 “백정(白丁)”은, ‘색목인(色目人) 장정(壯)’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유목민(遊牧民)으로 가축(家畜)을 도살(屠殺)하는 것에는 전문가(專門家)다〉라는 의심(疑心)을 지울 수가 없다.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 이안사(李安社)가 1,000 여호(餘戶)와 함께 ‘몽고(蒙古)’에게 항복(降服)했다」라는 말은 곧 「반역자(叛逆者)」라는 것이고, 「의주(宜州)에서 투항(投降)했으면 이곳의 1,000 여호(餘戶)를 안무(按撫)시키려 의주(宜州)의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임명(任命)하는 것이 순리(順理)일진대, 그곳으로부터 북(北)쪽 ‘5, 6 백리(百里)’ 떨어진 연고(緣故)가 전혀 없는 고려(高麗) 땅도 아닌 여진(女眞)의 땅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의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천호(千戶)로 보냈다」라는 것은 이해(理解)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 모든 설명(說明)이 순리적(順理的)이지 않다. “억지(抑止)로 무언가를 만들려 한다”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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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도조 【度祖 : 이춘(李椿)】 : 〈원(元)으로부터 아버지인 이행리(李行里)의 천호(千戶)를 계승하였고, 몽골식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이다. 문하시중 박광【朴光 : 알동백호(斡東百戶)】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차남이 “이자춘”이다.〉
➡ 이 설명(說明)에 따르면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 땅도 고려(高麗)의 영토(領土)였다는 것이 된다. 관직(官職)으로 보면 겨우 백호(百戶)임에도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말은 뭔가? 이것은 후대(後代)에 추서(追敍)한 것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은, 고려시대 국왕을 보좌하며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한 중서문하성의 종1품 관직이다. 수상으로서 백관을 통솔하였고, 국가 중대사를 논의했으며, 중서문하성의 재신으로 판이부사를 겸직하여 문반의 인사를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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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환조 【桓祖 : 이자춘(李子春)】 : 몽고(蒙古)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며, 이름은 자춘(子春)이다. 원(元)의 천호(千戶)를 세습(世襲) 받았고, 원(元)의 후원으로 부원세력(附元勢力)인 이복동생의 외척(外戚), 조씨(趙氏)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만호(萬戶 : 쌍성총관부 만호)가 되었다. 그 뒤 원(元)에 회의(懷疑)를 느끼게 되어, 1,355(고려사절요엔 1354년)년, 고려에 투항(投降)하여,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소부윤(少府尹)이 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었다. 정효공(靖孝公)인 최한기(崔閑奇)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원 원년(至元元年), 충숙왕(忠肅王) 4년[을해 1,330] 10월 11일 영흥부(永興府)에서 태조[太祖 : 이성계(李成桂)]를 낳았다〉
➡ 「이자춘(李子春)의 신도비(神道碑)」 : 목은문고(牧隱文藁) 15, 동문선(東文選) 119에 있다. 목은문고 제15권 / 비명(碑銘) 【동문선(東文選) 119에도 똑같은 비명(碑銘)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내용(內容)이 조금 다를 뿐 대략(大略)은 같다.】
➊「신라(新羅)의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가 사도(司徒)인 삼중대광(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하였으니, ➡ “시조(始祖)인 이한(李翰)과 그 아들이 없다”
➋ 또 「嘗知宜州有惠政。以姻婭故。移居江陵府之三陟縣。蓋樂其土風也。旣而入中原。仕于蒙古氏。爲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 일찍이 의주【宜州 덕원(德源)의 옛 이름】의 장관이 되어서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는데, 인아(姻婭)【사위 집 편의 사돈 및 동서(同壻) 집 편의 사돈의 두루 일컬음. 사위의 아버지 곧 사돈을 인(姻)이라 하고, 여자(女子) 형제(兄弟)의 남편(男便)끼리 곧 동서(同壻)끼리를 아(婭)라 한다】와 관계된 일로 그만두고는 강릉부(江陵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이는 그곳의 풍토(風土)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있다가 중원(中原)으로 들어가서는 몽고씨(蒙古氏)를 섬기고, 남경(南京)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를 하다가 이곳에서 인아(姻婭)【사위 집 편의 사돈 및 동서(同壻) 집 편의 사돈의 두루 일컬음. 사위의 아버지 곧 사돈을 인(姻)이라 하고, 여자(女子) 형제(兄弟)의 남편(男便)끼리 곧 동서(同壻)끼리를 아(婭)라 한다】문제(問題)가 생겨 삼척(三陟)으로 이주(移住)했다가 중원(中原)으로 들어가서 몽고(蒙古)에 의탁(依託)하여 섬기고, 남경(南京)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라는 것이다.
➡➡➡ 「이자춘(李子春) 【AD 1,315∼1,361年】의 신도비(神道碑)」에서는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이나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자춘(李子春)【AD 1,315∼1,361年】의 신도비(神道碑)」는, 즉(卽) 한 시대(時代)를 함께 풍미(風味)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 관리(官吏)를 역임(歷任)했으니 당연(當然)한 이치(理致)다!
첫째 : 전주이씨(全州 李氏)의 시조(始祖)는, 「이한(李翰)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 「전주(全州)에서 기생(妓生)의 수청(守廳)드는 것과 관리(官吏)와 문제(問題)가 생긴 것이 아니다.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 재임(在任) 중에, 인아(姻婭)【사위 집 편의 사돈 및 동서(同壻) 집 편의 사돈의 두루 일컬음. 사위의 아버지 곧 사돈을 인(姻)이라 하고, 여자(女子) 형제(兄弟)의 남편(男便)끼리 곧 동서(同壻)끼리를 아(婭)라 한다】의 문제(問題)가 생겨 관리(官吏)【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를 집어 던지고 의주(宜州)에서 삼척(三陟)으로 이주(移住)했다.」라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 「移居江陵府之三陟縣。蓋樂其土風也。旣而入中原。仕于蒙古氏。爲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 강릉부(江陵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이는 그곳의 풍토(風土)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삼척(三陟)에서 얼마 동안 있다가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몽고(蒙古)를 섬기니, 몽고씨(蒙古氏)로부터 남경(南京)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라고 한 것이다.
위의 「이자춘(李子春) 신도비(神道碑)」 내용(內容)은 당시(當時)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작품(作品)이다. 17세기(世紀)에 만들어졌다는 선원보략(璿源譜略)이나 전주이씨(全州李氏) 족보(族譜)에서 말하는 것과는 천지차이(天地差異)다.
해설자(解說者)들은 “중원(中原)으로 들어갔다”라는 말은, “몽고(蒙古)에 귀부(歸附) 하였다”라고 말한다. 그게 맞는 말일까? 알 수 없다.
또 의심(疑心)스러운 점은 「남경(南京)」이다. 도대체 “남경(南京)”이 어딘가? 「몽고씨(蒙古氏)로부터 남경(南京)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任命)받았다」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남경(南京)”이 어디에 있는 어떤 곳이냐? 하는 것이다.
몽고(蒙古)의 남경(南京)이 한반도(韓半島) 동북방(東北方) 구석진 모퉁이에 설치(設置)되었다는 말은 ‘역사(歷史) 무뢰한(無賴漢)’이다. 더불어 “남경(南京)은 ”몽고(蒙古) 땅의 남변(南邊)에 있어야 함은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라 할 수 있다“
「몽고(蒙古)가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의 연해주(沿海洲) 땅에 있었는가?」 무식(無識)하면 용감(勇敢)하다는 말도 상식(常識)은 상식(常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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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모든 설명(說明)은 그럴싸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의문(疑問)은 꼬리를 문다. 즉(卽),
➊ 위에서 말하는 것들이, 어떤 증거(證據)나 근거(根據)가 있는지는 모른다. 또 어떤 기록(記錄)을, 어떻게 고증(考證)한 내용(內容)인지도 모른다. ‘동각잡기(東閣雜記)’는 ‘대동야승’속에 수록(收錄)되어 있다.
시작(始作)은,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가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의 향리(鄕吏)였으나, 기생(妓生)을 수청(守廳)들게 한 문제(問題)로, 관리(官吏)와 다툰 일로, 죽음에 이르게 되자, 170여 가(家)를 이끌고 삼척(三陟)으로 이주(移住)했다.」라고 하는데,
이게 당시(當時)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를 생각해 보면 :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왕(王)의 어명(御命)이 있었다면 가능(可能)한 일이나, 기생(妓生)을 서로 차지하려는 이런 일에 다툼이 생겨 170 여가(餘家)를 이끌고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했다」라는 말은, 고려(高麗) 조정(朝庭)의 힘이 전라도(全羅道)와 강원도(江原道) 땅에는 미치지 않았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➋ 「그 후(後) 다시 동북면(東北面)의 덕원(德源)으로 이주(移住)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그 이유(理由)가 완전 희극(戲劇)이다. 즉(卽) 전주(全州)에서의 다툼의 상대(相對)였던 그 관리(官吏)가, 삼척(三陟)의 관리(官吏)로 오는 바람에 또 이주(移住)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건 100% 희극(戲劇)이다.
그리고 원(元)이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자 1,000 여호(餘戶)를 거느리고 항복(降伏)하여, 원(元)의 지방관(地方官)이 되었다〉라는 것이 대략적(大略的)인 이야기다.
➌ 여기서 문제(問題)는 : 「전주(全州)의 향리(鄕吏)로, 처(妻)도 아닌, 기생(妓生)의 수청(守廳)드는 문제로, 다툼이 생겨 죽게 되자, 그것도 170여 호(戶) 무리를 이끌고, 삼척(三陟)으로 이주(移住)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理解)할 수 없다. 한 가족(家族)이 몰래 ‘야반도주(夜半逃走)했다’라면 그런대로 이해(理解)할만한 이야기나,
그러나 ‘170 여호(餘戶)’라는 이야기는 ‘170호(戶)가 넘었다’라는 얘기며, 5명씩만 따져 봐도, 850구(口)인데, 이 많은 인원(人員)이, 전주(全州)를 빠져나가, 삼척(三陟)까지 옮겨간다고 했을 때, 조정(朝廷)에서 정상적(正常的)으로 이주(移住)를 명(命)한 경우(境遇)라면, 그런대로 갈 수 있었겠지만, 850명 이상(以上)이 “야반도주(夜半逃走) 성격(性格)의 이주(移住)”는 불가능(不可能)하다고 봐야 한다.
이는 “전주(全州) 감영(監營)이나 삼척현(三陟縣)이 없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요, 이곳은 당시(當時)에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➍ 더 중요(重要)한 사실(事實)은,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는 전주(全州)에서 터를 잡고 산 지방의 호족(豪族)으로 그의 출생(出生)도, 사망년도(死亡年度)조차 알려져 있지않다. 이것은 그 이상(以上)의 가계(家系)는 믿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위키백과는 사망년도(死亡年度)만 1,274년이라고 하였다】
➎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은,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 이전(以前)에는 별볼 일없는 가문(家門)이었으나, 「이안사(李安社) 때 몽고(蒙古)의 천호(千戶)로,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임명(任命)되면서부터 이 지방(地方)의 토호(土豪)로 성장(成長)하게 된 것이다.」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問題)는 고려(高麗)에서의 행적(行跡)이 거짓이라면, 그 가문(家門)은 「고려인(高麗人)이 아닌 이민족(異民族)일 수밖에 없다」라는 점이다.
주목(注目)해야 할 것은, 「달단동(韃靼洞)」이다. 말 그대로 「달단(韃靼) 마을(洞)」이라는 뜻이다. 달단동(韃靼洞)이란 달단(韃靼)들이 사는 마을이니 당연(當然)히 그곳은 달단(韃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 「달단(韃靼)」은,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없는, 대륙(大陸)의 서(西)쪽 우랄산맥(山脈) 서남(西南)에 본거지(本據地)가 있으며, 우랄산맥[烏拉山脈] 동(東)쪽의 서(西) 시베리아[Siberia] 분지(盆地)에서 활동(活動)했던 몽고족(蒙古族) 일파(一派)로 색목인(色目人)들이다.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활동(活動)했던 이성계(李成桂)를 반도(半島) 땅으로 이식(移植)하여 만들다 보니, 달단동(韃靼洞)은 구석진 곳으로 이동(移動)된 것이고,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 역시(亦是)도 조작(造作)되고,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의 행적(行跡)도, 이해(理解)될 수 없는 해괴(駭怪)한 이야기로 채워진 것이다.
➠ 실제(實際)로 반도조선(半島朝鮮) 전주(全州)에서의 고조부(高祖父) 때의 사건(事件)이 사실(事實)이었다면 :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된 후(後), 사가(史家)들에 의해,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지워지고 미화(美化)된 영웅(英雄)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일제(日帝)와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에 의해 반도조선(半島朝鮮)으로 만들다 보니, 반도(半島) 전주(全州)에서 살았다는 증거(證據)가 필요(必要)했고,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활동하도록 만들어야 했으므로 이주(移住)하고, 또 이주(移住), 또 이주(移住)하는 모양(模樣)을 연출(演出)해 낸 것이다
또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의 무덤과도 연계(連繫)되는 이야기로, 「서책(書冊)마다 다르게 기록(記錄)이 되어 있어 알 수 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 참 답답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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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덕릉(德陵)과 안릉(安陵) 【고조부(高祖父), 고조모(高祖母)의 묘(墓)】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에서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는 중요(重要)할 수밖에 없는 인물(人物)이고, 그 터전을 만들어 준 인물(人物)이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로, 몽고(蒙古)에 투항(投降), 천호(千戶) 곧 달로화적(達魯花赤)이 되어 알동(斡東)의 토호(土豪)로 성장(成長)하게 된 인물(人物)이다. 바로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의 주인공(主人公)인데, 이 분의 봉안(奉安)과 이봉(移奉) 사실이 사책(史冊)마다 다르게 기록(記錄)되어 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렇게 핵심적(核心的)인 인물(人物)이지만 출생(出生)과 사망년도(死亡年度)조차 불분명(不分明)할 정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高祖父)임에도 말이다.
(1)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總序)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總序)에 : 「至元元年甲子五月, 欽受宣命, 仍充斡東千戶句當。至元十一年甲戌十二月薨, 葬于孔州 [卽慶興府] 城南五里, 後遷葬于咸興府之義興部 韃靼洞, 卽德陵 : 목조(穆祖)는 지원(至元) 원년(元年)(1,264) 갑자(甲子) 5월에 임금의 선명(宣命)을 받아, 그대로 알동 천호(斡東千戶)에 충원되었다. 지원 11년【AD 1,351年】 갑술(甲戌) 12월에 훙(薨)하니, ➊ 공주(孔州)【곧 경흥부(慶興府)】 성 남쪽 5리에 장사하였다. 후일(後日)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이다.」라고 하였다.〉
(2) 북관기사(北關紀事) 왕업이 흥기한 사적〔興王事蹟〕 : 〈謹考德、安陵舊在斡東地。 : 삼가 살피건대, ➋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은 예전에 알동(斡東) 지역에 있다.〉
[주-D004] 예전에 …… 있었습니다 : 덕릉과 안릉의 봉안과 이봉(移奉) 사실이 사책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總序)에 “목조는 지원(至元) 1년(1264) 갑자 5월에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아, 그대로 알동 천호(斡東千戶)에 충원되었다. 지원 11년 갑술 12월에 훙(薨)하니, 공주(孔州) 곧 경흥부(慶興府)이다. 성 남쪽 5리에 장사하였다.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이다.” 하고,
동각잡기 상(東閣雜記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에는 ➌“강(江) 북(北)쪽의 알동(斡東)과 해관성(奚關城) 사이는 옛날의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으니 …… ” 하였다.
(3) 임하필기(林下筆記)》 권32 〈순일편(旬日編) 북관(北關)의 고적(古蹟)〉에는 ➍ “처음에는 알동 향각봉(香角峯)에 있었는데, 태조 4년(1,395)에 경흥부로 이봉하였다.” 하였다.
(4) 북새기략(北塞記略) 북관고적기(北關古蹟記) : 〈舊德陵, 穆祖寢園, 舊安陵, 孝妃寢園。 : 옛 덕릉(德陵)은 목조의 침원(寢園 능)이고, 옛 안릉(安陵)은 효비(孝妃)의 침원이었다. 初在斡東地香角峯之陽, 陵之左山腰稍低, 鑄鐵爲龍埋之, 以補地脈云。 : ➎ 처음에는 알동의 향각봉(香角峯) 남쪽에 있었는데, 능의 왼편 산허리가 조금 낮아 철로 용을 주조해 묻음으로써 지맥(地脈)을 비보(裨補)하였다 한다. 太祖四年, 移奉于慶興府南十五里。 四野下濕洳淖, 中起小阜, 無來脈, 堪輿家謂之沒泥龜。 二陵相望可數里, 皆前臨豆江, 土人謂之陵坪。 : 태조 4년(1395)에 경흥부(慶興府) 남쪽 15리로 이봉(移奉)하였다. 사방의 들판이 낮고 습하여 질펀한데 그 가운데 작은 언덕이 솟아 있고 내맥(來脈)이 없으니, 감여가(堪輿家)가 진흙 속의 거북 형상이라 하였다. 두 능이 수(數)리의 거리에서 서로 바라보듯 있으면서 모두 앞으로 두만강(豆滿江)을 임하였으니, 토민(土民)이 능평(陵坪)이라고 불렀다. 太宗十年, 以地隣女眞, 又移奉于咸興府。 : 태종 10년(1410)에 능이 여진(女眞)과 가까운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함흥부(咸興府)로 다시 이봉하였다.
➡➡➡ 위의 기록(記錄)을 순서(順序)대로 정리(整理)해 보면 :
➊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總序) : 공주(孔州)【곧 경흥부(慶興府)】 성 남(南)쪽 5리에 장사하였다. 후일(後日)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德陵)이다.〉
공주(孔州) : 함경북도(咸鏡北道)의 가장 북동(北東) 쪽에 위치한 ‘경원(慶源), 경흥(慶興) ’지역을 가리킨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➋ 북관기사(北關紀事) 왕업이 흥기한 사적〔興王事蹟〕 : 〈謹考德、安陵舊在斡東地。 : 삼가 살피건대,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은 예전에 알동(斡東) 지역에 있다.〉
➌ 동각잡기 상(東閣雜記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 〈“강(江) 북(北)쪽의 알동(斡東)과 해관성(奚關城) 사이는 옛날의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다”〉
➍ 임하필기(林下筆記) 32 〈순일편(旬日編) 북관(北關)의 고적(古蹟): “처음에는 알동 향각봉(香角峯)에 있었는데, 태조 4년(1,395)에 경흥부로 이봉하였다.”〉
➡ ➎ 〈북새기략(北塞記略) 북관고적기(北關古蹟記) : ㈠ 처음에는 알동의 향각봉(香角峯) 남(南)쪽에 있었는데, ㈡ 태조 4년(1395)에 경흥부(慶興府) 남쪽 15리로 이봉(移奉)하였다. ㈢ 태종 10년(1410)에 능이 여진(女眞)과 가까운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함흥부(咸興府)로 다시 이봉하였다〉라고 하였다.
➡➡ 본시(本是)의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은 알동(斡東)에 있어야 함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일 것이다. 이곳의 천호(千戶)로 달로화적(達魯花赤)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두만강(豆滿江) 건너 북안(北岸)에 있는 여진(女眞)의 땅이다. 곧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으로 한정(限定)된 조선(朝鮮)의 강토(疆土)가 아니었다.
그래서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경흥부(慶興府)인 공주(孔州)에 장사(葬事)를 지냈다고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분명(分明) 그만한 사유(事由)가 있어야 한다. 위의 글 “➎”에서 말하는 것이다.
문제(問題)는 : 여진(女眞)과 달단(韃靼)은, 전혀 다른 종족(種族)이라는 것이다.
여진(女眞)은, 옛 숙신씨(肅愼氏)를 말하는 것으로,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으로 불린 조선족(朝鮮族)의 일파(一派)이지만,
달단(韃靼 : Tatar)은, 글란(契丹 : 거란)에 의지(依支)하여 살아가며 옛 몽고족(蒙古族) 부락(部落)의 일파(一派)로 이민족(異民族)인 색목인(色目人)이다. 이러한 달단(韃靼)=타타르(Tatar)가 모여 살던 달단동(韃靼洞)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조선사(朝鮮史)의 비극(悲劇)이요, 희극(戲劇)이다.
즉(卽) 달단동(韃靼洞)은, 일만(一萬) 몇 천리(千里)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지명(地名)을 동북방(東北方)으로 옮겨놓은 대표적(代表的)인 사례(事例)다. 곧 「“이성계(李成桂)는 몽고계(蒙古系) 달단족(韃靼族)이었다”라는 사실(事實)을 숨기기 위한 고육책(苦肉策 : 苦肉之計)이었다.」라고 보는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주장(主張)이다.
○ 이 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또는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에 대한 합리적(合理的)인 의문(疑問)을 해소(解消)해보고자 함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또는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에 대해서 「비난(非難) 또는 비하(卑下)하고자 함이 아니다」라는 것을 밝혀둔다.
● 「AD 1,931년도(年度)까지에 걸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무엇을 했을까?」 를 생각해 보면 : “전주이씨(全州李氏) 또는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입맛에 맞게, 2등 국민(國民)이라는 존재(存在)에 맞게, 반도(半島)를 식민(植民). 통치(統治)할 수밖에 없다는 일제(日帝)의 일방적(一方的)인 주장(主張)에 맞게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의심(疑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현실(現實)이다. ‘제2편’으로 계속(繼續)된다.
2024년 07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1-3편 정도로 생각하며 게재될 예정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이성계 가계'는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라고 보아집니다.
모든 기록에 대한 고증(考證)이 전혀 없다는 것은, 후대인들에 의한 가필이 아닐까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성계와 납합출'과의 관계가 중요 대목일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