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5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 하나는?
사람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계는 왜 안 될까요? 나의 교만을 누군가가 꺾어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관계에 있어서는 무능력자가 되고 그 때문에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57세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초4 아들’ 편에서 아이는 “난 왜 이렇게 나쁘게 태어났을까? 난 왜 태어나서 고통받을까?”라는 생각을 글로 썼습니다.
자기의 교만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찌검하는데도 엄마는 아이를 믿어주고 공감해주려고만 합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를 훈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방송국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호전됩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울 때 아빠 없이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아빠도 또 누군가에게 의존합니다.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 실천됩니다.
가지가 가지인 줄 알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 이 사람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께 붙어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의 『하늘 아래 첫 동네: 말기 암 환자 호스피스 사목일기』에서
‘정을 떼려고’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넉 달 전 초등 5학년 아들, 3학년 딸을 둔 9세 아빠가 간암 치료 불가 판정받았습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무료 호스피스 시설인 성모 꽃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끝까지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자살 시도까지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다시 살아보기로 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술 때문에 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환자의 여동생으로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가 100만 원을 주며 착한 일 한 번 안 해 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시누이에게 그 돈을 준 것에 서운해했지만, 아내에게 주었다면 분명 자식을 위해 쓸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그렇게 한 것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자기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며 하느님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환자는 이것으로 무언가 큰 숙제를 끝냈다고 느끼고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자기가 나무가 아니라 ‘가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더 보이’(2019)는 슈퍼맨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한 부부는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웁니다.
아이는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짜 ‘슈퍼맨’은 자기 아버지가 이 지구를 지키라는 사명으로 자기를 지구에 보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준 힘과 지식을 배웁니다.
그렇게 지구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 명령에서 도망칩니다.
그 결과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히고 맙니다.
빛에서 도망치면 어둠뿐입니다.
사랑의 계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인 줄 모르고 나무인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께 붙어있게 하시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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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5일 [부활 제6주일]
복음: 요한 15,9-17
우리 각자와 친구 맺기를 신청하시는 예수님!
저희 집 근처에 저희 공동체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 센터 큰 행사 때도 초대하고, 여름 겨울 캠프 때는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마음껏 뛰고 즐기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 할아버지들은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입니다.
한번은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 때였습니다.
막내가 꽤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긴 전례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주례하는 저는 하나도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존재 자체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그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아무리 큰 허물과 상처투성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저 넉넉한 미소와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 중의 친구, 진정한 친구, 절친을 의미합니다.
절친의 의미에 대해서 과거 인디언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절대로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함을 통해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함을 통해 우정은 깊어갑니다.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집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됩니다.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물의 창조주, 자비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부당한 죄인,
결핍투성이인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일 강론>
(2024. 5. 5.)(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9-13).”
1) 이 말씀을 뜻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면(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가 나의 계명이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말씀과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고, ‘기쁨의 충만’은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해서, “사랑하신 것처럼”은
“사랑하시는 것처럼”으로, “사랑하였다.”는 “사랑하고 있다.”로, 또 “사랑한 것처럼”은 “사랑하는 것처럼”으로 조금 바꾸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항상
‘현재 진행 중인 사랑’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하시는 일’입니다.
번역문의 표현만 보면 ‘과거의 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현재의 일’입니다.>
2) 요한 사도는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요한 사도는 “궁핍한 형제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일의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을 수가 있나?”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받는 쪽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나누어 받는 것과 같습니다.
3) 사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형제들(친구들, 이웃들)을 위해서 죽으라는 뜻은 아니고, 목숨을 나누어 주듯이 ‘모든 것’을 나누어 주라는 뜻입니다.
그 ‘나눔’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큰 사랑’인데, 예수님 혼자서 죽고 끝나버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력을 나누어 준 일이고, 예수님과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살기 위한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은, 함께 살기 위해서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그 사람 혼자만의 희생으로
끝나버리는 일이 아니라......
4) 요한 사도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라는 말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하자.”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야고보서 2장’에 있는 다음 말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아프면 병원에 가지 왜 그렇게 누워만 있는가?”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아파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업고 병원에 갈 것입니다.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고, 진짜 사랑입니다.
실제로 아파서 누워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기쁨’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되는 생명, 구원, 행복, 평화 등을 총체적으로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하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구원받고 싶으면 사랑을 실천하여라.”인데, 가르치는 예수님 입장에서는 ‘서로’ 라고 표현하셨지만, 실천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 실천’은 ‘나부터’ 해야 하는 일이고, 남이 안 하더라도, ‘나 혼자서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