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한 납자(衲子)처럼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홀로
의연히 순결을 지키는 삶이여.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 누구와 비할 바 없어
몸은 항상 흰 구름을 데불고 있구나.
발은 비록 물에 젖어 있으나
위로 위로 오르려는 염원.
너는 일찍이
번뇌와 욕망의 불덩이들을 스스로 말끔히
밖으로 토해내지 않았던가.............................................................오세영 <한라산> 부분
호텔에서 새벽 6시 반에 출발하여 성판악에 도착하였다.
추억의 성판악휴게소는 철거되어 주차장으로 변하였다.
한라산국립공원에서 받은 QR코드를 제시하고 입장하였다.
한라산의 공기는 서늘하였고, 가을빛이 완연하였다.
등산로에 깔린 낙엽을 보며 지난 여름의 불볕더위를 생각하였다.
약 20분 만에 속밭대피소에 당도하였다.
속밭은 넓은 초원지대로 인근 주민들이 우마를 방목했던 곳이다.
지금은 삼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초원이었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하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고정희 <천둥벌거숭이의 노래 1> 부분
진달래밭대피소는 아침 식사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곳에서 오돌오돌 떨며 컵라면을 먹던 옛 추억이 떠올랐다.
우리 일행들도 이곳에서 간식을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하였다.
이곳에 올 때마다 제주스런 화장실에 감탄한다.
현무암으로 제주 오름을 형상화한 건축가의 지혜가 번뜩인다.
이곳은 2022년 아름다운 화장실 대상 공모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한라산을 첫경험하는 프란치스카의 표정이 상기돼 있다.
조릿대가 한라산을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제주도는 조릿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다.
하지만 이것도 생태계 전이의 한 부분이니 그냥 놔둬야 할 것이다.
한라산
사제비동산 가는 길가에
넋이 나간 고사목(枯死木)
죽어서도 미래를 사는 고집
살아서 청청했다
죽어서 꼿꼿한 뼈대
마른 주먹엔 무엇을 쥐고 있을까................................................이생진 <한라산 고사목> 부분
길가에는 빠알갛게 익은 마가목 열매가 즐비하였다.
해발이 높아질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한라산은 해발 1,700m 부근까지는 대체로 완만하다.
그 이후부터 삐죽삐죽한 돌길이 이어져서 꽤 힘들어진다.
오름과 감귤밭과 땅에 엎드린 낮은 집들이 보인다.
그 뒤로 해안선과 제주 바다가 해무 속에 뒤섞여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평선은 일어서고 해안선은 깊어지고 있었다.
백록담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길로 접어들었다.
동쪽 경사면에 마치 갈 지(之) 자를 그려놓은 듯이 길이 나 있다.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간호사관학교 군인들과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왔다.
이들이 뿜어내는 젊고 풋풋한 에너지가 몸으로 느껴졌다.
백록담 표지석 앞에 늘어선 줄이 100m 이상이다.
우리 팀은 이곳에서 줄서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였다.
젊음의 열기로 인해서 한라산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상을 알리던 옛 표지목 앞에서 인증샷~
휘몰아치는 바람이 어찌나 추운지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고어 자켓과 패딩을 꺼내입었지만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백록담은 동서 600m, 둘레가 3km쯤 된다.
어제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록담 둘레에는 기암괴석들이 병풍을 친 듯이 둘려 있다.
오세영 시인은 그것을 ‘해수관음탑’이라고 표현하였다.
한라산에 처음 오른 여인의 자태가 늠름하다.
모두가 내심 걱정했는데 발걸음이 가볍게 올라왔다.
오늘의 자신감으로 다음 주에 지리산 천왕봉에 함께 가기로 했다.
어찌나 추운지 계단 밑에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동지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산을 준비한다.
이분들은 끝까지 줄을 서서 정상석을을 차지했다.
기다림의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모두 하산했지만 이분들은 30여 분 늦게 도착하였다.
나는 정상석 대신 아름다운 여인을 택하였다.
한라산을 처음 오른 여인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한라산은 하늘과 바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정상의 인파들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사람들은 관음사 혹은 성판악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자, 이제 내려가자!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몸이 휘청인다.
삼별초의 말발굽소리, 차귀도의 숨비소리가 들려온다.
구상나무를 빼놓고는 제주도의 식물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자라는 기상이 경외롭기만 하다.
구상나무는 기후나 병으로 고사하는 게 아니라 멸종의 과정에 들어섰다고 한다.
다시 진달래밭대피소에 당도하였다.
이제는 사람들이 느긋한 표정으로 몸을 말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남은 김밥을 먹으며 하산할 힘을 비축하였다.
응급환자를 후송하는 모노레일을 만났다.
에너지와 시간이 남아서 사라오름으로 갔다.
2010년 11월에야 개방되었으니 신비감을 더해 주는 오름이다.
흑돼지구이 식당으로 이동하여 제주도의 마지막 밤을 즐기었다.
첫댓글 대단들 하십니다~
작년 나의 첫경험이 생생하여 프카의 심장박동이 오롯이 전해져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