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신혼여행, 감동의 46일
- 제41회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91)
1991년은 분단 이후 남북 스포츠교류에 있어서 가장 큰 획을 그은 한 해였다. 분단 46년 만에 남북의 대표선수들이 한 깃발을 들고 출전한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막강 중국의 벽을 허물고 한민족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과시한 것이다.
단일팀 구성의 시초는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기간에 열렸던 남북체육회담. 당시 세계탁구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단일팀 구성에 원칙적 합의를 본 남북은 이듬해인 91년 초 여러 차례의 회담을 거쳐 팀 이름을 코리아로, 한반도 지도를 단기로, 아리랑을 단가로 할 것과 선수선발 및 훈련방법 등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해냈다.
그 후의 행보는 일사천리였다. 박성인 당시 대탁 부회장이 남측 위원장을, 장웅 북한 올림픽위원회 서기장이 북측 위원장을 각각 맡아 구성된 남북 5명씩의 실무위원회는, 통일각과 평화의 집을 오가며 56명의 선수단을 구성, 단장에는 북한의 김형진, 총감독에는 남한의 김창제 당시 탁구협회 전무를 선임하는 한편, 남북의 선수들을 혼합하여 복식조를 꾸리게 하는 등 양측의 균형과 선수들 간의 화합을 고려한 최선의 선수단 구성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남북탁구대표팀 코리아 선수단은 나가노, 나가오카, 지바로 옮겨 다니면서 전지훈련을 계속했으며 4월 24일, 역사적인 감동이 기다리는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힘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우승이었다. 형, 언니, 동생, 친구로, 개막 3일 전부터 폐막 때까지 2인 1실로 섞여 지내기도 한 남북 선수들은 이미 아무 거리낌 없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최선의 성과를 이끌어냈다.
여자단체전 결승이 있던 날 북측 선수인 유순복이 우승을 확정짓고 환호하는 순간, 남측의 현정화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관중석에서는 조총련과 재일거류민단이 한데 뒤섞여 푸른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깃발을 휘두르며 아리랑을 목청껏 불러댔다. 난공불락이었던 중국도 하나 된 코리아의 힘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남자부에서는 에이스 김택수가 세계대회 사상 첫 남자 개인 3위에 입상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사라예보 이후 18년 만에 다시 찾은 코르비용컵은 그러나 분단된 조국의 아픈 현실을 또다시 상징할 수밖에 없었다. 감격적으로 되찾은 이 컵은 함께 보관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2년 뒤 다시 반환하기 전까지 남북 양측이 1년씩 나눠 보관하게 된 것이다. 대회 폐막 하루 전날 북한탁구협회 김희진 서기장이 헤어진 친누나를 50년 만에 상봉한 것도 분단의 설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 사건이었다.
헤어져 있던 46년에 비해 46일 간의 만남은 턱없이 짧았다.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민족의 최대 과제인 통일에 대한 열망과 가능성을 보여줬고, 이후의 모든 남북교류에 있어서 모범적 선례로 남아있다. 현정화와 이분희가 조총련과 민단의 환송을 받으며 서로 손수건을 적시던 장면은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