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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종손 황재천(黃載天)씨, 분당서 학원운영하며 선현 잠언 등 교육… 낙향 채비
▲ 금선정 전경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의 종택은 예로부터 십승지로 이름난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 있다.
십승지란 조선 시대 민간예언서 <정감록>에 나타난 ‘전쟁 등 국난이 있을 시 숨어야 할 안전한 피난처 10곳’으로 보은의 속리산, 안동의 화산, 남원의 운봉, 부안의 호안, 무주의 무풍, 영월, 예천, 계룡산, 합천의 가야산, 풍기의 금계촌을 말한다.
금계리는 십승지의 명성 외에 황준량 선생의 종택과 선생께서 노니시던 명승으로도 이름났으니 이 지역 출신의 어떤 이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12번 소풍을 떠났는데 그중 9번을 금선정(錦仙亭) 계곡으로 갔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금선정은 바로 금계 선생이 자연과 벗하며 노니셨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금선정, 우선 그 이름부터 멋스럽다. 금선정이란 정자는 금계가 생존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아름다운 계곡의 풍광을 감상하던 널찍한 대(臺)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평생을 벼슬보다는 자연을 벗삼아 스승을 따라 학문하며 후진을 양성하려는 생각을 지녔던 선비였다. 그의 처조부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어부가(漁父歌)라는 가사는 어쩌면 금계가 가장 참맛을 아는 독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한 속내를 지녔던 분이었다.
문과에 급제해 입신양명의 길이 열렸지만 청빈한 선비의 삶을 지향한 그에게 재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공부에 몰두할 아담한 집을 평생 동안 꿈꾸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스승이나 후임 풍기군수들 모두 애석해 마지않았던 사실이기도 하다. 금계 사후에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금선대 위의 금선정과 산 속의 금양정사(錦陽精舍)가 바로 그곳이다.
금계를 기리며 후학들이 공부했던 배움터인 금양정사는 총애했지만 일찍이 세상을 떠난 제자를 기린 퇴계 선생의 관심과 교시, 그리고 동문수학한 후배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서애 류성룡의 맏형)에 의해 오늘날의 규모로 완성되고 의미가 부여됐다.
퇴계와 겸암이 각각 지은 금양정사 완호기문(完護記文)에 보면 금계는 천신만고 끝에 정자 건축을 시작해 완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주목사 직을 그만두고 귀향을 결심한 배경에는 정자 완성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퇴계는 당시 풍기군수 조완벽(趙完璧)에게 부탁해 이 정자에 대해 면역의 혜택을 주고 아울러 이곳을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로부터 29년 뒤 이러한 퇴계 스승의 교시를 이어받은 후임 풍기군수 류운룡은 “이 정자를 황폐하게 만든다면 이는 수령은 물론 온 고을 사군자(士君子)들의 수치이다”라고 전제한 뒤 퇴계 선생의 기문과 군수 조완벽의 결정문을 지역의 향사당(鄕射堂) 벽에 걸어 영구히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금계의 혼이 배어있는 유서 깊은 금양정사가 지금은 잊혀진 채 쇠락해 가고 있다. 몇 개의 현판만 남아 있을 뿐 많은 자료가 도난당했고, 큰 화재마저 겪었다. 마을에 아직도 의식 있는 사군자가 있다면 의당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겠지만 현실은 어찌 그러랴. 문중과 지역 유지와 지식인들이 금양정사의 옛 모습과 역할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 역사성으로 인해 근자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건물 퇴락에 대한 걱정의 절반은 던 셈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금선정 옆에 양기와를 올린 집 마당 중심에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뒤로 골기와가 얹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그곳은 금계 선생의 종택이었다.
▲ 불천위 사당
▲ 종손 황재천 씨
종택에는 퇴계 제자 백암(栢巖) 김륵(1540-1616)의 후손인 노종부 선성 김씨 김옥남(金玉男, 1935년생) 여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사당 수호는 종손의 의무이지만 생계에 쫓기다 보면 그렇지도 못하는 게 현실인지라 모친인 선성 김씨가 홀로 이 넓은 집을 지키고 있다.
노종부의 사랑어른이었던 황봉섭(黃鳳燮, 1929년생, 1982년 몰) 씨는 조선 시대 그 지역의 마지막 급제자로 명망이 높았던 금주(錦洲) 황헌에게 사사해 조선 선비의 맥을 이었던 이다.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을 신조로 생활했지만 어려운 종가 살림에 봉제사와 접빈객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현 16대 종손 황재천(黃載天, 1957년생) 씨는 ‘금계 선생의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선친의 가르침에 따라 풍기 북부초등학교, 금계중학교를 거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유학해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으며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회로 나온 종손은 대학에서 강의도 하였으며 대기업 기획실과 통신회사의 간부를 역임한 뒤 현재는 경기도 분당에서 독서·논술 학원(점핑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번화가 빌딩에 입주해있는 학원을 찾았을 때 원장실 벽에 걸어둔 퇴계 선생의 교육 잠언(箴言)이 먼저 눈에 번쩍 들어왔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영남의 명문가 종손이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런 느낌은 인터뷰를 하면서 더했는데, 차분한 설명과 함께 고향의 노모와 사당을 지금처럼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조만간 낙향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30여 년 동안 산 위의 금양정사에 거처한 종손에게 고향과 금양정사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
종손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 ‘선현들의 교육 잠언’을 많이 인용한다고 한다. 선현의 지혜는 그냥 간직해서는 안 되고 디지털시대에 오히려 참된 삶의 방향을 알려줄 나침반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성적뿐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 생활에서도 우등생으로 커가는 것을 보면서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만난 지 며칠 뒤 종손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사업 관계로 잡힌 선약으로 점심을 같이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미안해 했다. 이런 따뜻한 심성으로 보아 머지않아 금선정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울울창창한 소나무를 벗하며 종손으로 맑게 살아갈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독성현서(讀聖賢書) 열친척화(悅親戚話)’ 성현의 좋은 글을 읽고 친척 간에 즐겁게 이야기하는 삶을 살아갈 그런 청복(淸福)을 누리길 빌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saenae61@hanmail.net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 주간한국 종가기행 ⑮
금계 황준량 1517년(중종12)-1563년(명종18)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조선 중기의 명신. 본관은 평해(平海)다. 안동 출신 명신이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학자였던 농암 이현보의 손서(孫壻)요,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의 사위며, 퇴계 이황의 대표적 제자다.
현재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태어난 금계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해 '기동(奇童)'으로 불렸다. 21세에 생원(生員)이 되고 24세에 문과 을과 이인(二人)으로 급제했다. 24세 문과 급제는 회재 이언적, 동갑인 소고 박승임 등이 있는데 당시로 보면 매우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성취였다.
지역 선배 중엔 농암 이현보가 32세, 충재 권벌이 30세, 퇴계 이황이 34세, 학봉 김성일이 31세에 급제했다. 그는 급제 후 성균박사, 공조좌랑, 호조좌랑, 병조좌랑 등을 거쳤지만 모함을 받고 신령현감으로 나간 이후 단양군수, 성주목사에 이르렀다.
그의 20여 년에 걸친 관료 생활은 중앙 무대에서보다 지방의 목민관으로서 그 성과와 명성이 더 높았다. 금계는 "관(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거늘, 그들을 이 지경으로 버려두고서야 관은 있어서 무엇하랴!"고 절규했다고 한다.
4년간의 성주목사 재임 시에는 목민관으로서 뿐 아니라 퇴계 학파의 맏형으로 그리고 중심 학자로서 연구와 책자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기본서로 애독되었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0책 간행이다. 퇴계는 주자서를 '마치 신명처럼 받들었다(敬信如神明)'고 했다. 그러한 유림의 숙원사업을 금계가 이룬 것이다.
금계는 공직자로서 행정능력이 탁월하고 청백리의 모범이었다. 신령현감 시절,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신의 일같이 여겨 보살피며, 전임 현감이 관의 재정을 많이 축낸 것을 절약과 긴축으로 메웠다고 한다. 또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거의 파산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진폐소를 올렸는데 4, 800여 자의 명문장으로 임금을 감동시켰다.
그가 죽었을 때는 20여 년의 벼슬에도 불구하고, 염습을 쓸 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교육자로서 금계는 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흥한 공이 크다. 성주목사 재임 때 전임자가 세운 염봉서원을 증축하고, 문묘를 증수하는가 하면 교관을 두어 지방의 제자들을 가려서 가르치고, 매달 강회를 열어 성적에 따라 상벌을 베풀었다.
금계는 또 민생의 근본적 대책으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균전의(均田議)'· '책문(策問)'을 통하여 당시 빈부격차의 극심함과 농민의 유리(流離)를 심각히 인식하여 이를 중대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그는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면서도 우리 나라 형편에 따라 우선 한전제(限田制) 실행을 추구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 경세치용의 발단을 보인 것이다. 후일 퇴계학파에서 성호학파-경세치용파가 나왔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주목할 만하다.
금계는 급제 후 '재기가 탁월하여 글을 잘 짓는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실록 편수관에도 이름을 올렸다. 중종실록과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호조좌랑에 있었던 그는 이조좌랑 직에 있던 청천당 심수경, 초당 허엽과 함께 참여했다. 심수경과 허엽은 모두 동문수학한 이들로 관료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다.
영남 지역에 '영유소고(榮有嘯皐)요 풍유금계(豊有錦溪)'라는 문자가 있다. 이는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이 있고 풍기에는 금계 황준량이 있다'는 말인데, 퇴계 선생보다 16년 연소한 동갑나기인 두 사람은 영주와 풍기를 대표하는 학자라는 의미다. 만약 안동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많은 학자들이 소고와 금계의 문하에 몰려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고와 금계 두 사람만을 놓고 비교하면 금계가 우위라고 할 수 있다. 금계가 퇴계 선생을 배향한 욱양서원(郁陽書院)에 종향(從享, 현종3년, 1622)된 것으로 우열은 판가름 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승보다 먼저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려 퇴계는 제문을 지어 애도했고 행장을 찬해 그의 생애를 정리했으며, 그가 남긴 글을 교열해 문집으로 엮었을 뿐 아니라 관상명정(棺上銘旌)에 '선생(先生)'이라고 썼다. 이는 퇴계에 의해 '세상을 밝힌 유학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모두가 아쉬워 하는 점은 수(壽)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갔을 때 권문세가에 협조해 깨끗한 선비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 오해를 한 이는 다름 아닌 후일 영의정을 지냈고 사림으로 명망이 있었던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좌의정을 지낸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1548-1622)였으니 이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래서 급기야 욱양서원에 종향된 그를 스승인 퇴계를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위폐를 철거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물론 숙종 당시에 행해진 출향(黜享) 요구에 맞서 '황준량은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써 퇴계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것과 조광조를 신원한 강유선이라는 선비를 배척하여 죄를 입게 했다는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하지만 끝내 사당에서 위패가 퇴출되었고 그의 유적지 및 종택은 사림들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재 금양정사 옆에다 퇴계와 금계의 단소(壇所)를 마련해 서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금계의 평가와 관련 또 하나의 오해가 있었다. 금계는 풍채가 빼어났을 뿐 아니라 도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다.
그러나 기이한 야사 한 토막이 사랑방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다. 금계가 성주목사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하급관리의 아내가 그를 흠모해 상사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했다.
생전의 연정을 풀지 못한 여인은 원혼으로 나타났고 금계는 준엄하게 타일러 거절했다. 그래서인지 금계는 성주목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이 중해졌고 세상을 떠날 때도 손을 모으는 시늉을 하면서 '남녀 간에는 분별이 있어(男女有別)'라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한다.
성호는 이를 기록한 뒤 '굽힐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사랑방에서는 당사자 이름까지 그대로 거명돼 전해지고 있다. 요점은 금계가 여원(女怨)으로 비명횡사(非命橫死) 했다는 것.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하다고 판단된다.
금계는 퇴계로부터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를 특히 꼼꼼하게 배우고 토론했던 학자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주목사 재임 중에는 주자서절요를 간행했을 뿐 아니라 문교를 진흥한 교육자였다. 이는 퇴계도 인정한 것으로 결코 여원에 휘말릴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1550년(명종5)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스승을 찾아온 제자 금계에 대해 퇴계는 시 한 수를 써서 반겼다.
'퇴계 초옥으로 황금계가 찾아온 것을 반겨(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라는 퇴계의 작품이다.
선비의 기개는 상소문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중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역사적인 상소로 회재 이언적이 49세 때 올린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퇴계 이황이 67세 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남명 조식이 55세 때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일명 丹城疏)를 손꼽는다. 필자는 여기에 더해 영남의 지성 금계 황준량의 '민폐십조소(民弊十條疏)'를 더하고 싶다. 물론 금계는 지명도에서 위에 예시한 인물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곤궁한 백성들의 실상과 그 해결방안을 4,800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에 담은 이 상소문은 문장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목민관으로서의 극진한 마음씨와 함께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논리적 장치가 읽는 이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41세 때인 1557년(명종12) 가을에 단양군수가 된다. 막 부임한 단양은 자신의 고향과 큰 산을 사이에 둔 이웃 고을이며 스승인 퇴계 선생도 산수향(山水鄕)으로 즐겁게 봉직했던 곳이다. 그러나 고을의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민폐는 감내할 정도를 넘어섰고 그래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금계는 우선 고을의 상태를 '잔폐(殘廢, 쇠잔하여 다 없어짐)'로 진단하고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에서 단양 고을의 현실을 이렇게 그렸다.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 쪽은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田地)는 본래 척박해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제일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 늘 있는 수입)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 고단한 민초(民草)들의 삶이 참으로 절절이 담겨 있다. 금계는 상·중·하로 나누어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단양을 살리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정해 부역과 조공을 면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上策)이며, 군(郡)을 혁파하여 현(縣)으로 강등시켜 아직 살아 남은 백성들을 다른 고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 그 다음 계책(次策)이요, 이 둘을 모두 선택할 수 없다면 마지막으로 해 볼 일이 있다(下策)고 설정했다. 그런데 앞의 두 정책은 현실적으로 채택할 수 없는 이상론이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계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치밀한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조정에서는 그가 열거하는 하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금계는 가장 못한 정책으로 10가지 항목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백성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다. 목재, 종이, 산짐승, 약재, 꿀 공납(貢納) 등 열 가지의 폐단을 일일이 나열하며 그것을 없애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이 상소는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중에 영의정에까지 이른 윤원형은 단양 고을만 잡역(雜役) 면제의 특혜를 줄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마침내 명분에 밀려 주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뢴 대로 하라"는 전교가 그것이다. 애민의식이 투철했던 작은 고을 수령의 지혜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금계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유려한 문장도 일조했다. 문장을 통해서 나라를 명예롭게 한다는 의미로 '이문화국(以文華國)'이란 말도 있지만 금계의 경우는 '이문활민(以文活民)'이라 할 수 있다. 이 상소문은 현 시점에서 읽어도 가슴을 울리게 한다. 450여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 농촌의 현실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금계는 목민관의 착취와 함께 수재와 한재라는 자연재해 때문에 고을이 잔폐했다고 했는데, 최근 단양 주민들이 큰 물난리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니 고금의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닮아 있는 것이다.
금계 황준량의 문집이다. 대학자인 퇴계 선생이 손수 쓰고 편집한 금계집은 명문장가요 글씨로 이름났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명종21년 1566, 당시 28세)의 발문, 퇴계 문하의 대표적인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글씨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시문집이다. 목록과 내집 5권, 목록, 외집 9권, 합 9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66년 이전에 간행되었다. 당초 문집은 4권 분량으로 집안에 남아 있었다. 이를 단양군수 손여성과 아우 황수량이 유집을 수습하여 퇴계에게 편찬을 부탁해 단양군에서 간행했다.
사후에 이 문집이 그곳에서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재임 시 단양군수로서 끼친 업적 때문이다. 단양군수에 부임한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는 1584년 초간본의 잘못된 글자 13자를 정정하여 판목을 수정했다. 그리고 1607년, 한강 정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해 초간본에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모아 외집 8권을 만들어 손수 글씨를 써서 간행하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후손가에 정고본(定稿本)을 남겼다. 외집의 발문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썼다. 그 뒤 초간본 판목이 화재로 소실되자 욱양서원에서 1755년에 간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문집의 목판은 풍기 금계리의 종택 불천위 사당에 보관 중인데 수십년 전 당시에 당한 화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830제(題)가 넘는 그의 시는 처조부인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의 창작에 끼친 영향과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경기체가를 논한 그의 이력으로 인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saenae61@hanmail.net">saenae61@hanmail.net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금꼐와 금선정, 그런 관련이 있었네요? 난 무식하게 "금계"단순히 금닭인줄만 알았거든요.ㅎㅎㅎ근데 故 계삼정 교장선생님 작품의 금계는 무슨 상징인가요? 영남의 지성 황준량과는 어떤 관련이 있구요?황선배는 명문가의 자손이네요?우와~~~~~~~~~~~~~~~~~~안그래도 정숙이 한테 학원 하신다는거 얼핏 들었는데 긴가민가 해서 물어보려다 기회가 없어서요.
우- 존경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