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월27일, 범초의 생일 -
공교롭게도 단재 김달호 선생 추모비 제막식과 내 생일이 겹치게 되었다.
제막식은 상주시 외곽, 선생 묘소에서 거행되었다.
나같은 범인의 생일이 무에 그리 의미가 있겠는가,
미역국 한 그릇 먹을 새도 없이 새벽에 집 나서 상주로 향했다.
나의 선친과 갑장으로 자유당시절부터 419민주공간까지,
천석꾼 집안의 부와 모든 기득권을 초개 같이 여기며 이 나라 민초들을 위해 나의 선친과 함께 진력하셨던
단재 김달호 선생의 추모비 제막식이 돌아가신지 31주년만에 거행되는 것이다. .
작년 봄 선생 묘소를 참배한 직후, 선생추모사업회가 결성되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선생은 죽산 조봉암 선생과 함께 자유당 독재 정권 하에서 진보당을 결성하여 부위원장을 맡아
이승만 자유당독재정권의 <북진통일>에 반대하며 <평화통일>을 일찌감치 주창하신 분이다.
악랄한 자유당 정권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간첩으로 몰아 419 불과 몇 달 전에 처형, 천인공노할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당시 단재 선생도 모진 고초와 옥고를 치르셨고 드디어 419 민주공간에서는
이 나라 진보정당의 효시가 된 사회대중당을 창당하여 진력하시다, 얼마안가 516군사쿠데타!
516세력은 소급법인 특별법을 급조해 사회대중당이 친북행위 했다하여 선생은 15년형 선고를 받고
7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었다(나의 선친은 42데모, 교원노동조합운동이 역시 친북행위라 하여 무기형에다 10년 옥고).
1968년 출옥하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채 <김달호 법률상담소>란 초라한 간판을 내걸고 힘없고 서러운 민초들의
무료법률상담(돈을 한 푼이라도 받으면 변호사법 위반)을 매서운 감시 하에 해 오시다가 1979년 3월4일에 위암으로 별세.
천석꾼 집안살림 다 털어 혁신정치에 무료변론에 종생하시다가 돌아가신지 31년만에 그 업적이 추모비에 기록되었다.
역시 의롭게 사신 분들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언젠가는 반드시 추앙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날이
또한 내 생일이니 참으로 공교롭기도 하려니와 감개무량한 일이다.
나의 선친이나 다름 없는 端齋 김달호 선생! 눈물 나도록 반갑고 뜻 깊은 행사였다.
허나 오호통재라!
죽산 조봉암 선생은 아직도 신원이 되지 못한 채, 망우리 공동묘지 달빛 아래 원혼으로 남아 계시고,
마찬가지로 나의 선친 역시 판교공원묘지에서 오늘도 호랑이해의 첫 보름 달빛을 쓸쓸히 맞고 계실 것이다.
오늘(2월28일) 정월 보름은 또 내 처의 생일이기도 하다.
대구서는 228 기념식이 경북 도지사, 대구시장 주관 하에 성대히 치러질 거라는 소식이다.
나는 419의 신호탄인 228데모 주역의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런 성대한 기념식장에 참석하는 게 내키지 않아
오늘(28일) 집에서 조촐한 생일상을 처와 겸할 것이다.

단재 선생 세째 따님 경희 여사(독일서 철학박사학위, 목원대 교수)의 추도사(단재 선생은 1남 7녀를 두셨음).

이기형 원로 시인의 추모시 낭송, 맨 왼쪽이 장남 김기식 옹(78세, 모습이 단재 선생 쏙 닮았음)
단재 김달호 선생 영전에
김달호는 천석꾼의 아들이었건만
마르크스 엥겔스가 울린 유령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대중을 깨달았다.
소작료를 받지 말라고 했다.
"고연지고!" 아버지는 대노했다.
달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중략)
온갖 가시밭길을 헤치고 일본중앙대학교에 입학,
재학생으로 일본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는 천재였다.
합법 비합법을 통해 반제반일독립투쟁 선두에 나섰다.
일제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1956년 조봉암의 진보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 4월혁명 때는 그 이름 사회대중당을 창당했다.
1962년 친일역적 박정희 혁명재판소에서 15년 징역형을 받았다.
1975년 여러 가시밭길을 헤치고 변호사활동, 국가보안법 수감자들을 무상변호했다.
(중략)
우리들은 뜨거운 눈물을 적시며 민주사회건설과 자주통일의 결의를 뜨겁게 다집니다.
우리들은 지금 선생이 그 옛날 그랬듯이 상주 앞마을 뒷산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분단은 어언 65년을 헤아립니다.
선생 앞에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종략)
2010년2월27일 이기형 배제.
(**이기형 시인은 이미 80이 훨씬 넘으셨다)

단재 선생과 진보당을 함께 하셨던 원로 박충서 선생(민족정기 선양회장)께서 눈물의 추도사를!

진보연대 상임대표 전창일 선생의 추도사.

단재 선생 묘소 앞에서, 선친을 비롯한 민족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 각오를 새로이 다지는 범초.

이번 제막식에 세운 <단재 김달호 선생 추모비>

옛일을 회상하시며 통곡하시는 원로 박충서 선생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 박중기 선생의 추도사.

3녀 경희 여사와, 단재 선생의 신원을 위해 범초와 함께 진력하고 계심.

범초, 단재 선생 묘소 앞에서 반세기 전의 엄혹했던 선인들의 일생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시다.

단재 선생의 후손들!

단재 선생 묘소가 있는 청리 마을의 소박한 교회, 이곳이 묘소 들머리.

제막식을 마친 후 회식.

단재 선생 장남인 김기식 옹께서 인사말, 건강이 나빠 거동조차 불편하시다.

장남 김기식 옹과, 김옹은 상주 고향 땅(상산)에 살고 계신다.


휘장을 이제 막 벗겨낸 추모비석 (외람스럽게도, 범초도 비석명단에 건립위원으로 이름이 새겨졌다).
사상이나 종교가 달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화이부동>의 통일선진조국을 우리는 언제나 맞이할 수 있을까,
범초가 자나깨나 희구하는 세상은 화이부동( 和而不同 )의 선진사회!
비록 생일에 집에서는 미역국밥 한 그릇 못 먹었지만, 이 얼마나 뿌듯한 하루였던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감격스러운 생일이었다.
범초.
워낙 일정이 빠듯해서 단지님 생각이 나면서도 연락을 안 했드랬어요!
김달호 선생님은 예전에 상주의 큰 인물이었지요.
다음 번에는 미리 연락 드리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범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