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함월산(584m)은 경주국립공원 토함산지구에 속하며 추령을 사이에 두고 토함산과 마주하고 있다.
추령의 모차골은 ‘신문왕 호국 행차길(왕의 길)’의 시작점.
‘함월산(含月山)’은 ‘달은 품은 산’이라는 뜻이니 이름만 갖고도 풍류가 넘쳐난다.
무엇보다도 고찰 ‘기림사(祇林寺)’와 ‘골굴사(骨窟寺)’를 품고 있고, 지역신문에도 소개되어 더욱 알려진 산이다.
기림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 불렀다.
원효가 중창하여 기림사로 개칭하였고, 철종 13년(1862)에 불이 났으나 대적광전(보물 제833호)만 화를 면했다.
기림사엔 보물 5점과 지방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3점이 있다.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보물 제415호), 대적광전(보물 제833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958호),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보물 제959호), 비로자나삼불회도(보물 제1611호)가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는 경주 기림사 삼층석탑(제205호)과 응진전(제214호)이고, 문화재자료는 경주 기림사 진남루(제251호)와 약사전(제252호), 기림사 소장 유물 (제301호)이 있다.
함월산 기림사를 나오면 선무도(禪武道)의 총본산이자 ‘한국의 소림사’라는 별명이 있는 골굴사(骨窟寺)가 있다.
인도의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사원을 본떠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석굴사원으로 기림사와 함께 창건되었다.
‘골굴사 마애불상’은 보물 제581호.
우리는 이러한 산행 전단계로 주요한 산을 하나 넘는다.
바로 백두산(白頭山 449.1m)이다.
보잘것없는 산세지만 그 이름이 갖는 가치만으로도 산행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함월산엔 ‘신문왕 호국행차길(왕의 길)’이라는 테마 걷기길이 있다.
이 길은 신문왕이 아버지가 잠든 대왕암(문무대왕릉)을 찾아간 길로서 통일신라 격동의 역사와 만파식적 신화가 담겨 있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은 한번 불면 나라의 모든 근심·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
궁궐을 출발한 신문왕의 행차는 수렛재를 넘어 용의 전설을 품고있는 용연폭포를 지나 기림사에 이르게 된다.
‘대왕암’은 681년 문무왕이 죽자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며 잠든 곳.
다음해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도록 만들었다.
‘대왕암’은 ‘경주 대왕암(문무대왕릉)’과 ‘울산 대왕암’이 지자체끼리 서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경주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이라면 울산 대왕암은 문무대왕비의 수중릉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산길엔 생소한 이름들이 나온다.‘모차골’은 마차가 다닌 곳이라해서, ‘수렛재’는 수레가 넘어다닌 고개라서 생긴 이름.
‘말구부리’는 경사길에서 수레를 끄는 말들이 구부러져서이고, ‘세수방’은 신문왕이 잠시 쉬며 손을 씻었다고 붙은 이름.
한편 그 길목에는 조선 순조 때 입산을 금지한다고 새겨진 ‘불령봉표(佛嶺封標)’도 있다.
산행코스: 범곡정류장-백두산-<호미지맥>-골굴사갈림길-수렛재사거리-전망바위-함월산-<도통골>-용연폭포-기림사-주차장(6시간)
궤적.
파일.
조금 더 크게.
13km조금 모자란 길을 6시간 정도.
고도표.
참고 <국제신문>
참고 <국제신문> 왕의 길.
미리 준비한 표지기.
'경주시 문무대왕면 장항리 879-1'을 입력하였더니 밑의 도로에 댄다.도로는 두 개가 나란히 있고, 이 주소는 두 도로를 포함하였다.
'경주 범곡정류소'로 하면 정확하겠다.
도로 위로 살짝 올랐더니 '범곡리 상범마을'
범곡정류소다.
그 50m 위에 '오르막차로'라는 표지판이 있다.
들머리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 대나무숲이 있는 도로턱을 올라서야 한다.
정확히는 범곡정류소에서 30m 위, '오르막차로' 표지판에서 20m 아래가 정확한 지점.
이어지는 산길에서...
철망 두른 묘지를 지나고...
좌측 사면을 비스듬히 에두른다. 일부 회원들은 바로 능선으로 치고 오르기도 하였다.
길흔적이 뚜렷한 사면길에서 이젠 능선으로 꺾어 오른다.
능선에선 수월하고 편한 데로 오르기.
초입 바람 한 점 없는 가파른 오름길에서 땀은 온몸을 적셨고, 목에선 헉헉 가쁜 숨소리가 절로 난다.
이윽고 올라선 철망두른 묘 2기.
백두산이다. 준비해간 표지기를 걸었다.
백두산을 살짝 넘어서자 거짓말 같이 계절도 한 비를 넘어선다.가을로 착각했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와 목덜미를 스치더니 다시 셔츠 안으로 들어와 열기에 달은 몸을 식혀준다.
준족들은 벌써 해달리고 보이지 않는다.
등로의 늙은 소나무."우리들은 얼마 안있어 모두 이승을 떠나겠지만 너는 앞으로도 몇 백 년은 더 이곳에서 붙박고 살아 가겠지"
'준·희'님의 함월산 방면 표지판.
커다란 석축이 앞을 막아선다. 성돌(城石)? 무슨 군사적 용도의 흔적? 아니었다.
석축의 위에는 묵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토록 정성들여 묘지를 조성하였으나 망자도 자손도 모두 떠난 듯 풀만 무성하다.
능선에 올라서서 잠깐 다녀오는 494.2m봉은 어떤 지형도엔 함월산으로 나온다.그래서 구분하기 위해 '옛날 함월산'이라고 부른다.
삼각점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무심코 반대편 반듯한 등로로 내려서고 말았다. 그 길은 추령으로 내려서는 길로 알바.
"빠꾸~ 헥헥"
뛰어난 경관이나 기암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길을 때묻지 않은 청정산길이라고 부르는 것.
'수렛재(고도 약 400m)'에 내려선다.
수렛재의 안내판.
지명과 관련한 안내판.
수렛재의 이정표.
다시 함월산 방향으로 치고 오르지만 완만한 산길에 시원한 바람까지 거들어 준다.
549.8m 바위 전망대가 있는 봉우리.
암봉에 올라서 조금 더 이어가자...
함월산이다. 준비해간 표지기부터 걸고...
함께한 권 형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권 형님은 구망(九望)을 바라보지만 정정하시다.
갈림길에서 좌측 나무로 막아 놓은 곳으로 우리는 내려섰고, 계속 능선을 타고 가면 봉우리 하나 넘어 불령고개에 닿을 것.
돌아본 모습. 우리는 계곡으로 내려서게 되고..
장마기간 중이지만 건계곡.
계곡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르다.
계곡을 건너면...
산길은 탄탄대로.
널찍한 임도에 내려섰더니...
얼마안가 '탐방로 아님' 현수막이 붙어 있다. 뭐가 잘못됐나? 지역신문의 가이드대로 내려왔는데.
그 바로 밑에 수렛재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모차골로 가는 길이 '왕의 길'이다.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수렛재 가는 길.
곧 용연폭포 안내판을 만나고...
'출입금지' 현수막이 쳐진 용연폭포로 내려선다.
폭포 전망데크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연폭포를 카메라에 담는다.
안내판.
목교 건너에 폭포가 있다.
왕의 길 안내.
신문왕 호국 행차길.
기림사 안내판.
숲속 걷기 좋은 길에...
공원 지킴터를 지난다.
왕의 길 안내판과...
코스(위성 지도)
기림사로 들어오자 하산시간 완료시간(16:30)에 괜히 바빠지는 마음이다. 명부전과...
삼성각.
삼천불전.
범종각을 두서없이 담은 뒤...
매월당 영당으로 들어가...
3칸 맞배지붕의 '매월당 영당' 앞에 섰다.
매월당은 조선 세조 때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 학자이자 문인.매년 음력 2월20일에 지역 유림들이 봉향하고 있다.
'매월당 영당' 현판 글쓴이는 '동주 이영상(東洲 李英相)' 선생. 선생은 금정산 고당봉 정상석도 썼다.
매월당 영당 안내판.
다시 거꾸로 천왕문을 들어서...
진남루는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7칸 길다란 건물을 한 화면에 다 담지못해 뒷걸음을 친 뒤 겨우 한 화면에 담았다.
진남루 편액.
주련.
진남루 안내판.
기림사 삼층석탑을 중앙에 두고 문을 활짝 연...
응진전.
응진전엔 500나한을 모셨다.
기림사 삼층석탑 안내판.
응진전 안내판.
응진전 주련.
기림사대적광전(祇林寺大寂光殿 보물 제833호)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이다.
약사전.
약사전 주련.
약사전 안내판.
대적광전 주련.
대적광전 안내판.
천왕문을 벗어나...
기림사 연혁을 일별하고...
함월산 일주문을 나선다.
기림사 일주문 편액의 글쓴이는 '심천 한영구(心川 韓永久) 선생.
널따란 주차장 끄트머리에 뒷풀이 중인 우리 버스.산행마감 시간을 정확히 지켰지만 때문에 기림사 탐방은 주마간산이었다.벌컥벌컥 몇 잔의 냉막걸리를 연거푸 들여 마셨다.
이제 귀가길에 골굴사를 들릴 계획으로 버스가 출발하는데, 절집 앞에서 고성능 확성기가 귓청을 찢어댄다.
소위 종교 마찰이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현수막을 보아하니 종교적 양심은 이미 물건너 갔다.
내 종교가 존중을 받기 위해선 남의 종교도 존중해야 할 터인데.
골굴사로 깊숙히 올라왔다. 탐방시간은 30분.
배불뚝이 포대화상을 지나...
계단으로 이어지는 마애석불을 올려다 본다.
더 가까이로 오르는 길은 궁궁지지(弓弓之之).
마애여래좌상 아래에 서서 올려다 본다.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으로, 제작 시기는 9세기 중엽.
당시 서라벌의 신라인들이 기림사(祇林寺) 골짜기의 가장 높은 암벽에 올라가 불상을 새긴 것이다.
처음 만들 당시에는 몸 전체가 완전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는 암벽 석질의 차이 때문에 무릎 아래 부분이 떨어져나갔다
안내판.
닉 네임이 '나한'인 '나한' 님은 절집에 가면 꼭 나한을 모셔놓은 '응진전'을 빠뜨리지 않는다. '라한굴'을 다녀오는 '나한' 님.
석굴의 석불은 왼손에 약항아리를 들고 있으니 약사불(藥師佛)인 듯. 합장~
'골굴사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은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되었다.
석회암 재질의 암벽에 조성된 불상으로 골굴사의 주불이라 할 수 있다.
동해를 바라보는 이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상호에 화려한 연꽃과 불꽃이 조화를 이룬 광배가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법당굴에서...
현판의 글쓴이는 남령(南嶺). 남령 최병익 선생은 경주의 서예가로서 단석산 정상석도 썼다.
날아갈 듯 산뜻한 골굴사 대적광전 3칸 팔작지붕.
이제 버스로 돌아간다.
두 번 째 읽고 있는 데이비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이다.
이 책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어록을 옮겨 적는다.
'피카소'는 "사람들은 60세부터 젊어지기 시작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62세에 "자고 일어날 때마다 전날보다 삶이 더 하찮게 느껴진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67세에 "나는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죽는 법을 배워왔다"
BBC의 첫 사장이었던 '리스 경'은 78세에 말했다.
"나는 사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너무나도 늦게 삶은 살기위한 것임을 발견했다"
17세기의 모럴리스트 '장 드 라 브뤼예르'는 "인생은 세 가지 사건이 전부이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
우리는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죽을 때는 고통속에 떠나고, 사는 것은 잊어버린다"
첫댓글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노고에 감사합니다^^
수고했어요
좋은 추억으로 남을거 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