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하나가 나라를 뒤흔든 시대가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지(碧蹄館址)는 조선시대 명‧청 사신이 한성으로 들어오기 전 묵었던 객사다.
이들이 서대문 바깥 모화관에 이르면 국왕이 나아가 사신을 영접하곤 했다.
임진왜란 동안 반파된 벽제관은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선조실록’)
인조 3년인 1625년 고양군 관아를 5리 북쪽으로 이전하고 벽제관도 함께 이전했다.
6‧25 때 불탄 뒤 주춧돌만 남은 폐허가 지금 벽제관지다.
사신 옆에는 사신보다 유세를 떨며 자기나라를 등쳐먹은 자가 있었다.
직업은 역관(譯官)이었다.
청나라 권세에 올라타 오로지 일신영달에 매진했던 매국노 역관 정명수(鄭命壽)다.
누르하치의 만주 문자 창제
1599년 후금 태조 누르하치가 몽골문자를 응용해 만주문자를 창제했다.
1632년 그 아들 홍타이지가 이 문자를 개량해 반포한 이후 청은 모든 문서를 한자와 만주어와 몽골어로 기록했다.
청 관리는 한문을 읽지 못했고 조선관리는 만주어를 읽지 못했다.
청 예부 관리들은 심양에 있는 소현세자에게 “모든 일은 말로 하고 문자는 쓰지 말라”고 했다.
(소현세자, ‘심양일기’, 이석호 역, 양우당, 1988, p78)
한문 못 읽는 청나라 관리와 만주글 못 읽는 조선관리 틈에서 권력이 자라났다.
조선출신 청나라 역관이다.
문자는 몰라도 조선어와 만주어 회화에 능했던 사람들이다. 정명수가 그랬다.
조선 노비, 청나라 칙사가 되다
‘연려실기술(이긍익)’에 따르면 정명수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간 사내였다.
원래는 평안도 은산 관노였다가 만주어를 익히며 병자호란 이후 조선전담 역관으로 활동했다.
청으로 귀화한 그는 굴마훈(孤兒馬紅)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토끼’라는 뜻이다.
조선은 그를 ‘본래 교활하여 본국사정을 몰래 고해바친 자’라고 했다.(1637년 ‘인조실록’)
청에서는 ‘조선을 다스리며 황명을 어기고 법도를 거스르며 권력을 남용한 자라고 했다.(‘동문휘고’1(한국사료총서 24집)
난세였다. 숱한 백성이 청나라로 잡혀갔고 숱한 여인들은 폭압적 수모를 겪었다.
부국강병에 더더욱 매진해야 할 숱한 권력자들은 권력으로 금력으로 자기네 몸을 보전했다.
난세를 극복하는 졸렬한 방법을, 천출인들 배우지 못했겠는가.
정명수는 호역(胡譯), 정역(鄭譯)으로 불리다가 칙사로 임명돼 정사(鄭使)라 불렸다.
그리고 본 대로 배운대로 흉내 내며 나라를 영달 도구로 삼았다.
노비 정명수의 분풀이
병자호란 이후 기록에 나오는 조선인 출신 청나라 역관은 스무 명 정도다.
김돌시, 박돌시, 이엇석 같은 이름으로 추정컨대 노비출신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조선정부 역관들과 함께 소현세자가 살고 있는 심양관과 조선을 오가며 활동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명과 청 사신들은 하루를 묵고 한성으로 향했다.
섭정왕 도르곤과 그 수하 용골대, 마부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정명수는 권력을 휘둘렀다.
조선 지도부는 ‘굴마훈’으로 개명한 이 노비 위세에 눌려 인사와 외교를 농단 당했다.
굴마훈 정명수는 그 권세로 자기일신과 혈족출세를 앞뒤 가리지 않고 추구했다가 청 황실에 의해 다시 노비로 추락했다.
조선은 용골대와 마부대가 전담했다.
두 사람은 홍타이지 이복동생 도르곤의 심복이었다.
정명수는 조선사정을 고해바치는 스파이를 자임해 칸(汗)에게서 신임을 얻었다.
청나라 실세를 등에 업은 정명수는 그 권력을 마음껏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1633년 정명수는 황해도 평산에서 관아로 달려가 현감 홍집에게 행패를 부렸다.
은산 노비 시절 자기를 곤장 때린 분풀이를 한 것이다.(1633년 10월 22일 ‘인조실록’)
행패를 익히 알고 있던 평안도관찰사 홍명구는 병자호란 때 평양에서 정명수 사위 목을 베어버렸다.
(이식, 택당집 별집 9권 ‘홍명구 행장’)
설움과 원한은 복수심을 동반한 권력남용으로 증폭됐다.
하늘 찌르는 오만한 권세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굶주리던 조선정부 관료들에게 청나라 역관 이신검이 귀띔했다.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면 강화가 가능하다.”
인조는 정명수에게 은 1000냥,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각각 3000냥을 은밀히 바쳤다.(인조실록)
17일 뒤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2월 5일 소현세자가 청으로 끌려갔다.
세자가 걸음을 멈추자 정명수는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해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인조실록)
그 위세는 이용가치도 높았다.
용골대는 정명수를 통해 소현세자에게서 여자 속환금 명목으로 은 200냥을 받아 갔다.
정명수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여자도 돈 내고 속환하라고 요구했다.
도르곤 또한 병이 있다며 귀한 약을 ‘몰래’ ‘넉넉하게’ 구해달라고 정명수를 통해 요구했다.(앞 책 1643년 9월 6일)
호란 당시 조선 총사령관이던 김류는 용골대에게 자기 서녀 속환금으로 천금을 제시해 가난한 백성 원망을 샀다.
답을 듣지 못한 김류는 정명수를 끌어안고 “판사와 더불어 일을 하게 됐으니 한 집안이니 판사 청은
내가 꼭 따르겠다”며 서녀 속환을 간청했다.
일국 사령관이 일개 역관을 종1품 판사라 불렀다.(‘병자록(남한산성 항전일기p138)
[박종인의 땅의 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