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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樊巖集)』 : 조선의 ‘글값’은 자손 몫의 후불제
글쓴이 김학수 / 등록일 2023-11-20
병호시비가 치열함을 더해가던 1823년 7월 영남유림이 도산서원에서 도회를 개최했다. 안건은 ‘도산시사단비(陶山試士壇碑)’ 중건에 따른 임원 구성 및 재정조달책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본안을 처리하기가 무섭게 좌중에서 누 군가 『번암집(樊巖集)』 간행을 발론하였다. 사전에 입을 맞춘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두 사업의 주인공은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에 대한 영남유림의 보은사업은 이런 과정을 통해 단초를 열었고, 이것은 경남·영남 제휴의 또 하나의 명장면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당초 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 등의 교정을 거친 『번암집』은 정조의 특별한 관심 속에 그의 치세에 간행될 예정이었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1801년 신유옥사 등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천연을 거듭하다 1823년 채제공이 신원됨으로써 재점화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번암집』 간역을 이끈 것은 채제공과의 정치 그리고 인척적으로 친연성이 컸던 하회마을의 류상조(柳相祚)·류태좌(柳台佐)와 해저마을의 김희주(金熙周)였다. 특히 류상조와 김희주는 도도청(都都廳)으로서 간역의 제반 업무를 지휘했고, 도감 류태좌의 용의주도했던 실무적 지원은 여러 난관을 돌파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출판인프라가 탄탄하게 갖춰져 있었던 안동 봉정사(鳳停寺)에 간소를 치릴 수 있었고, 도도청을 비롯하여 도청·도감·교정·감인·감각 등 총 9개 직임에 약 90명에 이르는 인원을 선임하여 간역에 들어갔던 것이다. 류심춘(柳尋春)·김시찬(金是瓚)·이희발(李羲發) 등 19세기 초반 영남학파를 대표했던 석학들이 임원진의 주축을 이루면서 간역소는 사림들의 축하와 격려의 발길이 답지하는 가운데 병호시비의 기세마저 누그러뜨릴만큼 잠시나마 화합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현안은 역시 간행 비용의 조달이었다. 번암가 자부담금 1,000냥을 종자돈으로 하여 간역에 착수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태부족이었다. 이에 간역소에는 통문을 돌려 각 군현 및 원우에 지원금을 배당하는 한편 유림 각가에도 협찬을 촉구했다. 호응은 예상보다 컸다. 강좌 및 강우지역 17개 군현에서 523냥, 13개 원우 및 유소에서 82냥을 부조하며 호응해 왔던 것이다. 부조의 하이라이트는 문중 및 개인 찬조금이었다. 영남 일원의 71개 집안에서 무려 50냥을 부조했고, 31인의 개인 부조도 195냥에 달했다. 문중 부조의 최고액은 경주 양동 경주손씨 손중돈(孫仲墩) 집안의 30냥이었고, 개인 부조의 최상위 랭킹에 이름을 올린 것은 20냥을 쾌척한 류상조와 류태좌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돈의 성격이다. 대부분의 집안과 개인은 채제공과의 의리적 공감에서 부조금을 납부하였지만 거기에 못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문자 찬술에 따른 자발적 비용 지불이었다. 채제공이 찬술한 영남 관련 문자는 비문·행장·서문·발문 등 줄잡아 70편을 상회하며, 이 가운데 강좌 퇴계학파권이 56편, 강우 남명학파권이 16편이다. 문중 부조 71개처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35개처가 채제공으로부터 문자적 시혜를 입은 집안이었던 것이다. 『번암집』과 같은 대관(大官)의 문집에 선대의 문자가 실린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고, 누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부조에 부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조선시대의 ‘글값’은 찬술자의 문집 간행 때 부조금 형식으로 지불되는 ‘후불제적’ 성격이 다분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후원에 힘입어 『번암집』은 1824년 4월 20일부터 동년 6월 하순에 이르는 4개월의 공역 끝에 59권 27책으로 완간되어 영조∼정조 시대의 정치사는 물론 학술문화사의 보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글쓴이 : 김학수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한국사학 전공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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