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란조와 숙주새 간의 기묘한 군비경쟁
며칠 전 서대문 자연사박물관 이정모 관장님의 페북에서 발견한 재밌는 기사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온 기사인데요, 페친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 편집하여 번역했습니다.
1. 고전적 군비경쟁
뻐꾸기를 전문용어로 기생 새(parasitic birds) 또는 탁란조(託卵鳥, brood parasite)라고 한다. '자기가 낳은 알의 부화를 다른 새에게 떠넘기는 새'라는 뜻이다. 이에 반대로, 뻐꾸기에게 속아 알을 대신 부화시켜 주는 새를 숙주새(hosts)라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윗줄에 있는 알들은 모두 뻐꾸기의 알이며, 아랫줄에 있는 알들은 모두 (뻐꾸기에게 희생되는) 숙주새의 알이다. 어떤가, 섬뜩할 정도로 닮지 않았는가? 그 덕분에,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놓고, 뻔뻔스럽게 부모의 의무를 떠넘길 수 있다. 만일 숙주새가 자기 알과 뻐꾸기 알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뻐꾸기 새끼를 자기 새끼로 알고 키우게 된다. 그 결과 숙주새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왜냐하면 뻐꾸기 새끼가 종종 숙주새의 새끼를 죽이거나 둥지에서 밀어내기 때문이다.
뻐꾸기와 숙주새 간의 관계는 진화적 군비경쟁(evolutionary arms race)의 고전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뻐꾸기는 숙주새와 똑같은 알을 낳도록 진화했고, 숙주새는 자기 알과 뻐꾸기 알을 구분할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을 진화시켰다.
2. 이상한 군비경쟁
그러나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한 탁란조와 숙주새 사이에서는, 이상(以上)과 같은 고전적 스토리가 왜곡되어 특이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클레어 스포티스우드 교수에 의하면, 꿀잡이새(honeyguide)라는 탁란조는 뻐꾸기와 동일한 전술을 사용한다고 한다. 즉, 꿀잡이새는 벌잡이새(bee-eater)라는 숙주새의 둥지에 침입하여, 벌잡이새의 알과 크기 및 형태가 똑같은 알을 낳는다. 하지만 이같은 '흉내내기 전술'이 벌잡이새를 속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잡이새는 아무리 다르게 생긴 알이라도 모두 받아들여 품어주는 멍청이기 때문이다. 즉, 벌잡이새는 내 알과 남의 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꿀잡이새는 어째서 쓸 데 없이 벌잡이새의 알과 비슷하게 생긴 알을 낳는 걸까?
그건 놀랍게도, 벌잡이새가 아니라 다른 꿀잡이새를 속이기 위해서다. 그게 도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이제부터 동족(꿀잡이새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군비경쟁의 실상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
3. 꿀잡이새의 비밀
2011년 스포티스우드 교수는 동영상 촬영을 통해 꿀잡이새의 비밀을 밝혔다.
벌잡이새는 땅돼지(aardvark)가 버린 땅굴 속에 둥지를 짓는데, 꿀잡이새는 이 둥지에 침입하여 자신의 알을 낳는다. 그런데 꿀잡이새는 알을 낳기 전에, 먼저 벌잡이새의 알을 부리로 쪼아 구멍을 뚫는다. 구멍이 뚫린 알 중 일부는 즉사하고, 나머지는 부화되더라도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따라서 나중에 알에서 나오는 벌잡이새의 새끼들은 비실거리다가 꿀잡이새의 새끼들에게 처치된다. 꿀잡이새의 새끼들은 (갈고리 모양의) 부리로 쇠벌잡이새 새끼들을 사정 없이 쪼아 죽인다.
스포티스우드는 벌잡이새의 감식안(鑑識眼)을 테스트하기 위해 실험을 해 봤다. 벌잡이새의 알 사이에 다른 새들(비둘기, 딱따구리, 물총새 등)의 알을 섞어 놓자, 벌잡이새는 그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꿀잡이새는 달랐다. 꿀잡이새는 (스포티스우드가 집어넣은) 다른 새의 알이 섞여 있는 벌잡이새의 둥지를 방문할 때,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구멍을 뚫었다. 꿀잡이새는 벌잡이새의 알과 다른 알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색다른 알을 파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꿀잡이새의 알은 벌잡이새의 알과 크기와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스포티스우드는 "벌잡이새는 제 알과 남의 알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꿀잡이새의 알은 벌잡이새를 속이도록 진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논리적으로 타당한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꿀잡이새의 알이 벌잡이새의 알과 비슷한 모습으로 진화한 이유는 뭐지?" 스포티스우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스포티스우드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꿀잡이새의 알이 벌잡이새의 알과 비슷한 모습으로 진화한 것은, 벌잡이새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꿀잡이새들) 끼리 서로 속이기 위한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꿀잡이새의 입장에서는, 벌잡이새의 알과 비슷한 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꿀잡이새 1이 아무리 벌잡이새의 알과 비슷한 알을 낳아도, 나중에 그 둥지를 침범한 꿀잡이새 2에게 희생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꿀잡이새는 벌잡이새의 둥지에 침입하여 알을 낳기 전에 벌잡이새의 알을 모조리 아작내지는 않는다. 만일 둥지에 있는 알을 완전히 전멸시킬 경우, 어미 벌잡이새가 둥지를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꿀잡이새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벌잡이새의 알에 조금만 구멍을 뚫는 것'이다. 꿀잡이새의 벌잡이새 알 공격 전략은 이렇게 요약된다: "나중에 내 새끼들에게 덤비지 못할 정도로 비실비실하게, 그러나 어미 벌잡이새가 둥지를 버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게..."
만일 꿀잡이새의 알이 벌잡이새의 알과 확연히 다르다면, 그것은 벌잡이새의 둥지를 방문하는 다른 꿀잡이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모방 작전이 성공한 꿀잡이새의 알은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높다.
4. 진화는 때로 我-我 간 투쟁의 산물
우리는 진화를 '我-非我 간 투쟁'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동족 간의 투쟁이 진화의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