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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가 정권을 틀어쥐고 있었지만, 그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기록에는 천추태후가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했었다고 하는데, 일단 대량원군은 모두들 말하는 '착하고 어질지만 야심이 없던 인물' 이 아니었다. 대량원군에게는 임금이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 천추태후가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이는 야심이 있는 황족을 제거한다는 정상적인 책략일 수 있다. 게다가 천추태후가 정말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했는 지 자체가 의문이다. 기록 속에 있는 천추태후의 대량원군 살해 방식은 몹시도 소심하다 못 해서 황당하다. 아예 중국의 고사를 그대로 써놨기 때문이다. 애당초 천추태후가 대량원군을 죽이고자 했다면 그렇게 뻔하디 뻔한 방법으로 죽이려 했을 리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목종과 유충정의 동성애도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유충정은 놀라울 정도로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조의 정변 이후 거란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고, 흥요국 건설에 참여해 개국공신이 된다. 이후 흥요국이 거란에게 멸망하자 거란은 한 번 배신을 했던 인물인 유충정을 다시 등용하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한다. 유충정이 그 만큼이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고려에서 목종의 측근으로서 목종의 곁에 항상 있다보니 헛소문이 돌았거나 이를 시기했던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가 동성애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의혹은 이쯤해두고, 결국 '대량원군의 정변' 이 시작된다. 천추태후가 머물던 천추궁이 불타는데, 목종은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아 침전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걸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천추태후가 머물던 천추궁이 불탔으면 이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고 이에 대한 조사를 해야만한다. 목종이 유약해 시름시름 앓았다고 되어있는데, 이 또한 말도 안된다. 정변으로 실각한 후 천추태후가 황주로 돌아가는 중에 태후의 말고삐를 직접 잡고 태후를 이끌었을 정도로 건강했던 게 목종이다. 쉽게 말해서. 누군가가 천추궁을 습격해서 천추궁을 불태우고 목종을 침전에 유폐했다는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든다. 바로 그 유명한 강조 되시겠다.
강조는 거의 명백한 천추태후의 사람이었다. 그는 태조 왕건의 부인 중 한 명이었던 강씨의 친정쪽 집안인 신천 강씨의 호족 출신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군벌이었다. 천추태후는 그런 그를 '중추사 우상시' 라는 중대한 자리를 맡긴다. 그리고 이후에는 당시 고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었던 서북면의 최고 군사 지휘관인 '서북면도순검사' 가 되어 서북면으로 떠나게 된다. 이를 보아서 강조는 거의 확실한 천추태후의 사람이었고, 아주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었다. 이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강조가 정변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 역시도 뭔가 미심쩍다. 강조는 목종을 호위하기 위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천추태후가 못 오도록 막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강조의 아버지가 강조에게 목종에게 변이 있으니 군사를 데려와라라고 편지를 보냈고, 강조는 정병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출정한다. 하지만 막상 개경 인근에 도착하자 목종이 변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강조는 목종을 폐하기로 결정하고 개경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의 행동에 대한 기록에서 제일 먼저 지적해야하는 것은 바로 강조가 목종을 호위하러 오는 것을 왜 천추태후가 막느냐이다. 처음에는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목종을 호위한다는 명분으로 오는 것이었는데 천추태후가 왜 이걸 막아야 했을까? 목종과 천추태후가 정말로 불화를 일으켜서 양측이 대립했을까? 아니면 목종이 정말 대량원군에게 선위하려는 의도를 가졌는데 이를 천추태후가 막았고,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강조를 불렀다고 봐야할까? 확실한 건 목종이 강조를 부른 이유는 호위를 위해서였을 리 없다. 겨우 왕을 호위하자고 서북면이라는 중요한 최전선에 있었던 무장을 부를 리 없다. 게다가 강조가 처음부터 군사를 이끌고 왔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목종이 강조의 군사력이 개입되길 원했을 리도 없다. 즉, 이 기록은 완벽하게 꾸며진 기록이다. 애당초 천추태후의 사람이었던 강조를 천추태후가 막을 이유가 어디있겠냐는 것이다.
사료를 훓어볼 수록 혼돈에 혼돈, 결국 패닉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강조의 정변이다. 뭔가 추가적인 기록이나 금석문이 나오지 않는 한 아마도 그 어떤 학자들도 이 정변에 대해 제대로 해석할 수 없으리라. 결론은 딱 하나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목종이 죽었고, 천추태후는 황주로 되돌아갔으며, 대량원군이 즉위했다. 강조는 정권을 잡았고, 거란은 명분을 잡았다. 이게 중요하다. 거란에게는 고려를 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하지만 성종이 거란인 부인까지 맞이한 상황에서 조공을 열심히하며 친분을 다지고 있던 고려를 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다. 이것은 고려 침략의 완벽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거란은 고려의 내분을 전혀 감지하지 못 했었던 것 같다.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알게 된 경위는 여진의 밀고였다.
당시 동계에 하공진과 유종이라는 고려의 관료가 있었는데, 하공진이 조정에 보고도 하지 않고 여진 부락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아마 북방의 군벌들이 자주 벌이는 약탈 행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공진은 황당하게도 여진에게 패전을하고 되돌아온다. 이를 분하게 여겼던 하공진의 친우가 있었는데, 바로 유종이라는 자였다. 그는 여진인 95명이 고려 조정에 조공을 바치러 화주관에 도달하자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이 사실을 안 여진은 고려에 있었던 정변을 거란에 고해바친다. 이로서 고려의 내분을 알게 된 거란은 고려를 공격할 생각을 가지게 되고, 전국의 정예병과 황제의 친군까지 포함한 최정예군 40만명을 이끌고 출전하게 된다.
거란이 황제가 친정해옴을 고려에 알리자 고려는 계속 사신을 보내 거란의 출전을 막도록 했으나, 거란이 듣지 않자, 결국 강조에게 30만 병력을 맡겨 거란과 전쟁을 벌이게 한다. 여기까지가 강조의 정변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 추이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거란의 국구상온 소적열이 반대를 하고 나섰던 것. 소적열은 거란이 송나라와의 전쟁으로 군사들이 피로해있으며, 거란 성종이 상중에 있다는 것을 들어 원정을 반대했고, 이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고 한다. 이미 거란인들은 고려의 군사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란 성종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동안 벌어졌던 군사적 행동은 모두 거란 성종이 아닌 모후, 소태후의 정책이었다. 소태후가 죽고 간신히 직접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성종으로서는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한 전 국가적인 군사 행동이 필요했다. 하지만 거란의 주변에는 이미 고려 이외엔 대규모 군사행동을 필요로하는 적이 없었다.
결국 거란의 침략은 기정 사실화되었고, 고려 역시 준비를 하게 된다. 위에 말했 듯 30만 병력의 사령관이 된 강조는 통주로 이동해 진지를 꾸렸고, 아마 30만 병력 중이 일부는 북계의 각 성들에 적절히 배치되었을 것이다. 방수군인 주진군 역시도 동원되어 북계를 방어할 준비를 마쳤다. 이로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해 30~40만의 병력을 전선에 배치하는 공격적인 전략을 선보인다.
뱀다리) 강조의 정변 이후 황주로 떠난 천추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천추태후는 이후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이는 의도적으로 실록에 실리지 않았거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하는 과정에서 빼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천추태후가 죽는 곳이 바로 숭덕궁이기 때문이다. 숭덕궁은 개경에 있는 별궁이고, 본래 천추태후가 태후로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곳이다. 천추태후가 개경의 숭덕궁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현종과 천추태후 사이에 정치적 화해가 있었다는 의미이며, 이 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말했 듯 어느 쪽에서든 의도적으로 기록을 빼버린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6) - 고려군, 첫 전투에서 승리하다
유럽이나 중동에 비해서 동아시아쪽은 기원전부터 거대한 규모의 전쟁이 많았다. 그 이유를 따져보자면 먼저 인구수를 생각해보면 된다. 기원전부터 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사해라는 이름하에 구분했는데, 일단 중심인 중국의 인구가 수천만에 달했다. 유럽의 로마, 중동의 페르시아와 함께 중국땅은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던 셈. 그런 상황에서 중국의 북쪽에는 전쟁에 단련되고, 압도적인 기마병을 갖춘 유목제국이 있었다. 중국의 남쪽에는 베트남이 있었고, 서쪽에는 고원의 기마족들이 있었다. 동쪽에는 우리나라의 전신인 고조선을 비롯해서 동호라고 불리우는 세력과 부여등의 여러 국가들이 존재했다. 중심인 중국을 두고 사방이 모두 강력한 군사력을 확실히 갖춘 거대한 세력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중국 지역도 국가들이 분열하고 통합되기를 반복하는데, 여기에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하면, 거대한 전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아시아 지역에는 특히나 뛰어난 전쟁 영웅들이 존재했다. 몽골제국까지만 하더라도 전세계에서 전쟁을 가장 잘 하는 지역은 바로 아시아였다. 송나라대에는 화약을 활용한 최첨단 무기까지 등장했을 정도. 몽골제국이 등장해서 아시아 인구를 반으로 줄여버리지 않았다면, 송나라나 금나라에 의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란 추정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최첨단 전략의 시대의 선두주자로 활약했던 괴물 명장들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손자병법의 손무부터 당나라대의 위징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는 을지문덕부터 김유신에 이르기까지 괴물같은 명장들의 뛰어난 전적을 여전히 기리고 있다. 그리고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도 이런 명장이 존재했는데, 바로 양규다.
살수대첩 상상도
양규는 1010년 11월 17일, 2차 여요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흥화진성 전투에서 흥화진의 수비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의 직책은 서북면도순검사. 서북면의 책임을 총괄하는 중요한 직책이며, 당시 천추태후를 밀어내고 임금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강조가 전임이었다. 즉, 양규는 강조의 신임을 얻고 있던 인물이었다고 추정이 가능하다. (아마 이 부분과 천추태후와 얽히면서, 양규에 대힌 기록이 누락된 것이 아닐까?)
2차 여요전쟁의 시작인 흥화진성 전투에서 고려는 승리를 거둔다. 7일에 걸쳐서 40만 대군이 흥화진을 공격했지만, 흥화진은 끄떡하지도 않았다. 얼마나 흥화진이 강한 성이었고, 많은 병사가 있었는지는 거란의 대응에서 알 수 있다. 거란은 흥화진 함락에 실패하자 무로대에 20만 대군을 남겨두어, 흥화진의 병력이 거란군의 배후를 치는 것을 차단했다. 서북면도순검사인 양규가 직접 이끈 공성전이었으므로 흥화진 성에는 아주 많은 병력이 주둔중이었다고 추정이 가능하다.
송나라 기병
그런데, 거란군은 본디 한 곳에 집중하는 성향의 군대가 아니다. 그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데 아주 능하다. 혼자서 정찰병이 되었다가 적군을 교란시키고 혼자 도망쳤다가 며칠뒤 유유히 진영에 합류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일 정도. 그 정도로 기동력과 생존력 뛰어난 거란군인데, 거란군의 총사령관직에 해당하는 도통을 소배압이 맡고 있었다. 소배압은 송나라와의 전쟁을 비롯해 여러 전장에서 과감한 결단력과 기동력을 바탕으로 하는 기만 전술로 적군을 무찔러 신임을 얻고 있던 장군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고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여진 역시도 거란군의 원정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여진인들은 고려의 내부 지역, 특히 북방에 대해서는 아주 밝았다. 그게 문제다.
거란군이 한참 흥화진을 공격하고 있던 그 시기 11월 18일에 갑자기 흥화진보다 한참 동쪽인 귀주에 거란군이 출현했다. 흥화진을 기준으로 고려에서 대군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은 두가지 길이 있었는데 바로 흥화진-통주-안주-서경에 이르는 서쪽 길과 안의진-귀주-안주-서경에 이르는 동쪽길이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동쪽길의 귀주를 습격한 것이다. 당시 고려는 강조가 통주에서 대군을 이끌고 거란군과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귀주에 거란군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최사위가 군을 이끌고 귀주로 향했다. 그리고 귀주 인근에서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거란군은 승리하고 귀주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군을 돌려서 본진에 합류해버린다. 그 이유가 뭘까?
고려사절요
먼저 가장 높은 가능성은 귀주에 주둔중이던 고려군이 상당히 많았을 가능성이다. 거란군이 최사위가 이끌고 온 지원병을 패퇴시키고도 퇴각해야 했을만큼 병력이 많았다는 것. 왜 이게 가능성이 많냐면, 이후에 거란이 고려땅에서 퇴각할 때 귀주 별장 김숙홍이 거란군 1만을 사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 것 때문이다. 거란의 퇴각은 신속하고 빠르다. 그런 거란의 퇴각로를 읽고 공격해서 1만의 병력을 사살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전과다. 전투에서 1만명이 죽으면 사실상 3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전멸시킨 것과 다름이 없다. 1만명이 죽는 동안 나머지 병력들은 멀쩡하게 살아돌아갈 리 없지 않은가. 전투 불능 상태의 부상자가 죽은 자와 맞먹는 게 보통이다. 이 사실은 귀주에 주둔 중이던 고려군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거란기병
두번째로 가능성이 높은 가설은 거란군이 기만전술을 시도했을 가능성이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은 최소 10만 최대 30만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거란 역시도 대군이었지만, 강조의 군대와 맞상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런데, 마침 강조는 거란이 통주쪽으로 이어지는 서쪽길로 올 것이라 여겨서 통주에 주둔중이었다. 그럼 거란은 여기서 강조의 주력군을 분산시키고 적을 혼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동쪽길의 귀주를 급습했던 것이고, 거란의 예상대로 강조는 최사위를 보내 지원케 했다. 그리고 거란은 당연하다는 듯이 최사위의 군대를 격파한다. 거란의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간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강조도 천추태후 시절에 서북면도순검사를 맡았을 정도로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던 지라 거란의 유인술에 더 이상 군사를 분산시키지 않고 통주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을 검차
어느 쪽이 맞는 가설이든 강조의 뚝심이 전쟁을 고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 시작했다. 거란은 서북면 최고 군사 지휘관 양규가 있는 흥화진을 함락시키지도 못 했고, 귀주 공략에도 실패했으며, 통주에 주둔 중이던 고려의 주력군을 분산시키지도 못 했다. 결국 양규가 이끄는 군사력을 두려워해 20만이나 되는 군대를 후방에 남겨두고 통주로 남하해야했는데, 아마 거란의 임금 성종과 소배압은 처참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고려 역시도 난감하긴 매마찬가지였다. 본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전쟁 방식은 촘촘히 짜여진 성들을 바탕으로 적군을 막고 후방에서 조직된 주력군으로 적군을 패퇴시키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만약 적들이 함락시키지 못 한 성을 우회해서 들어올 경우, 주력군으로 막고, 방어선의 성에 머물러있던 군사들이 적의 후방을 공격해 적군을 패퇴시켜왔었다. 그런데, 거란은 무려 20만이나 되는 병력을 무로대에 남김으로서 흥화진과 그 일대에 주둔 중이던 양규의 최정예부대를 묶어버렸다. 당시 거란이 양규의 병력이 정예부대라고 확신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신의 한 수였다. 왜냐하면, 전쟁의 후반에 들어서서 양규와 양규의 병력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전과 이상을 올리기 때문이다.
결국 거란군은 20만을 이끌고 남하, 통주에 이르른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과 거란군이 통주성을 끼고 격돌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성을 생각할 때, 서울의 한양성이나 수원의 화성 정도를 생각하고는 하는데, 고려시대까지 한국의 성들은 지금 남아있는 성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남아있는 성벽만 7~13미터에 이르는 삼년산성
일단 산성이든 평지성이든간에 성벽의 높이는 8~20미터. 서울의 한양성의 가장 높은 성벽 높이가 약 8미터 정도이고, 수원 화성은 7미터이다. 중국의 장안성이 13미터로 우리나라 성들은 대략 이 정도 높이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엄청난 높이의 성벽이 험한 산세위에 우뚝 서있었다. 어떤 느낌일 지 상상이 가는가?
중국 장안성
통주성 역시도 그런 압도적인 성이었다. 이곳은 흥화진, 귀주와 함께 가장 공들여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서희가 서북면의 방어선을 짤 때 가장 중요한 요지에 쌓은 성이 바로 흥화진과 통주와 귀주다. 신라시대 삼년산성이 그랬던 것 처럼 요지에 쌓은 성은 다른 성들보다 높고, 복잡하며, 성의 방어 시설이 확실하게 갖춰져있다. 게다가 고려는 그런 성의 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왕건은 삼년산성을 공격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패퇴했다. 삼년산성은 축성된 이후 단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무적의 신화를 갖추고 있는 성이다. 이런 성을 경험해본 이상, 고려가 방어선을 짤 때 비슷한 느낌의 성을 쌓으려고 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방어를 위한 성이 아니었던 천리장성만 하더라도 높이7미터 폭7미터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강조의 대군과 압도적인 통주성이 버티고 있는 통주. 안 그래도 그곳으로 이동하면서 고려의 방어선을 전혀 허물지 못 하고 병력까지 나눈 거란으로선 통주성과 강조의 진지를 보고, 그 위엄에 압도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거란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과의 초전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기를 반복한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우회해서 바로 통주로 들이닥쳤다,
이전에도 잠깐 설명했지만, 강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자. 그는 분명한 천추태후의 사람이었다. 천추태후 정권에서 그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천추태후 정권의 후반부에는 서북면이라는 중대한 지역의 도순검사로서 사실상 군부를 총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뜬금없이 천추태후를 실각시키고, 김치양과 목종을 살해함으로서 정권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정권을 잡고 1년만에 거란과의 전쟁에 맞서게 된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정상적으로 거란의 전쟁에 대비할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은 꾸준히 강조에 대해 언급하며 항복을 권유한다. 그리고 항복 권유를 강하게 거부했던 흥화진을 제외하면, 대부분 상당히 논의를 거쳐서 거절하거나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등의 선택을 한다. 이것은 거란이 대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조의 정변 이후 고려가 아직 봉합되지 않은 상황임을 말해주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하는 부분은 바로 강조가 이끌고 있는 병력의 성격이다.
강조가 이끄는 병력은 중앙군인 6위에 전국의 군벌들을 끌어모아 만든 30만 광군이다. 그런데, 이 광군은 성종대에만 하더라도 제대로 소집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약 10년만에 30만 병력이 단 번에 모였던 것은 천추태후가 광군을 모집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광군의 존재는 천추태후의 권력하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천추태후는 강조에 의해서 실각했고, 강조는 정권을 잡은지 1년만에 이 광군을 소집해서 대전을 치뤄야했다. 이 광군이 강조의 지휘 아래에서 완벽하게 하나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강조는 통주에서 거란과 부딪히기 전에 2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1. 광군의 힘을 너무 믿었다. 2. 거란을 얕봤다. 강조로서는 두가지 실수 모두 따로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 강조가 매우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을테고, 천추태후대에 벌어진 군사력 강화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을 수 있다. 강조는 자신과 자신의 군대에대해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리라.
11월 25일, 거란이 통주에 도달해서 강조의 고려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거란은 처참하게 패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의하면, 강조는 통주 앞 청강을 둘러싸고 진을 친 뒤에 거란과 싸웠고, 검차를 이용해 몇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정도로 간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상당히 축소되어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기록과 연이어서 나타나는 기록이 강조의 패전과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는 기록인데, 이 황당무계한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은 무리다. '역도' 강조의 악행과 그에 인한 인과응보를 강조하기 위해서 강조의 전과를 축소했다고 보는 게 옳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먼저, 단순하게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기록한 게 아니라 '검차' 라는 병기를 이용해서 승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냥 전투에서 승리를 했다로 정리하기엔 그 규모와 성과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강조는 병법에 대해 통달해있는 인물이었다. 강조는 강을 끼고 병력을 배치한데다 통주성과 통주성 근방의 산에도 군대를 배치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산과 강을 끼고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대규모 병력을 지니고 있는 적을 상대할 때는 단 한가지 방법 뿐이라고 병법서에 적혀있다. '도망'. 강조는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방에 엄청난 규모의 요새인 통주, 거기에 강조가 구축한 강력한 방어진지. 거란은 그 광경만으로도 이미 압도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강조의 성과가 어중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즉, 거란은 서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 강조의 자신감은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하필 그 자신감이 엉뚱한 곳에서 표출되었다.
유목의 군대는 생존력이 강하다. 1번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고 무시했다가는 큰일난다. 2천년의 시간 동안 유목제국의 군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투를 벌였고, 덕분에 많은 경험이 쌓여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유목민 군대의 전술에 처참히 패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은 유목 군대는 생존력을 바탕으로 양동작전과 기습작전을 좋아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넌센스다. 아무리 유목민이 전투하는 방식을 잘 알아도, 그들을 상대로 방심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유목제국에게 패배했던 수많은 장수들이 그랬듯 강조 역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군영 안에서 여유를 부리며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마, 병졸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상대가 거란인 이상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던 실수다.
아마도 거란은 몇차례의 전투에서 패전하면서도 고려군이 구축한 진지에서 약점을 파악했던 모양이다. 기록 속에서 거란이 고려군을 향해 쳐들어오자 강조는 "입 안의 음식과 같으니 많이 들어오게 해서 섬멸하라" 고 명령한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나타나는 기록이 "이미 거란병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라는 보고다. 이후 기록은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서 어쩌구하는 기록인데, 우습게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유학자들은 역도 강조의 인과응보를 강조하느라 중요한 기록을 사서에 싣지 않았다.
먼저 강조가 "입 안의 음식과 같으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강조가 이렇게 자신감있게 명령을 내린 것은 거란의 습격을 예상하고 있었고,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승리했던 이전의 전투와 비슷한 방식의 공격을 받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강조는 거란을 깊이 들어오게 만들어서 포위섬멸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갑자기 "이미 거란병이 많이 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강조는 바보가 아니다. 그가 만든 진지는 견고했을 것이고, 거란군이 아무리 노력해도 뚫지 못 하는 방어선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방식으로 공격해온 거란에게 그렇게 쉽게 방어선이 무너질 리 없다. 이 기록은 거란이 '양동작전'을 시도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거란은 강조가 예상하고 있던 경로로 공격하는 척 하면서 별동대를 구축, 경기병 위주로 미리 발견해두었던 고려군의 약점을 파고들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고려군이 기존 방식대로 검차등을 이용해 거란군을 막고 있는 사이에 다른 경로로 다른 거란군이 파고들어왔던 것이다. 거란군이 발견한 고려군의 약점은 그야말로 굉장히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모양이다. 거란군은 쾌속의 속도로 고려군의 방어선을 무너트리고, 사령부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던 강조와 장군들을 싸그리 포로로 잡아가버린다. 고려군은 최소 10만 최대 30만에 이르는 병력이었다. 그 정도로 대규모 병력이 삽시간에 지휘부 전체를 잃어버렸다. 당연하게도 집단적 공포에 빠지고, 도시 몇개를 세우고도 남을 인원이 이리저리 날뛰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거란군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통주에서 곽주로 이어지는 27km의 구간은 고려군 시체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사실 여기서 고려군은 회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바로 후방에 통주성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란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거란군은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해 신속하게 고려군과 통주 사이를 틀어막아버렸다. 그러자 도망칠 곳을 잃은 고려군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살육과 살육. 흩어지는 와중에 거란군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으나, 도망치는데는 실패한 고려군은 그대로 곽주로 통하는 길로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아마 거란군은 전군 돌격을 외쳤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전투는 바로 추격전이다. 상대의 진형을 허물고 진형이 허물어진 상대가 도망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진짜 살육이 시작된다. 곽주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 고려군은 사냥감, 그 뒤를 쫒는 거란군은 사냥꾼. 이 격렬한 추격전은 완한령에서 좌우기군장군 김훤이 거란군을 차단하기 전까지 이어지는데, 거기까지 고려군의 사망자가 3만이었다. 그렇다면 전투불능에 빠진 병력은 6만이 넘었다고 봐야한다. 게다가 지휘부를 한 순간에 잃어버린 순간 각기 다른 지역에서 모인 군벌의 사병들은 각자 멋대로 흩어져버렸을 게 뻔하다. 사실상 살아남은 고려군은 통주 인근에 흩어지거나 곽주성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거란군에게 곽주마저 함락되면서 군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병력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통주 인근에 흩어져있을 병력은 어떤 고위 장군에 의해 소집되기 전 까지는 패잔병에 불과할 뿐 군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이로서 고려는 주력군을 상실했다. 이제 남은 병력은 동계에 배치했던 병력과 각 성에 배치된 병력 뿐인데, 성들에 배치했던 병력은 움직일 수 없다. 거란군은 기만술을 즐겨 사용했는데, 성을 함락시키지 못 하고 우회할 경우, 몇몇 병력을 남겨두어 성과 성 사이의 정보를 차단하고 많은 거란군이 인근에 있는 것 처럼 꾸며서 성에 주둔중인 병력을 묶어버리는 식이었다. 고려의 성들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했을 것이으므로 성에 배치된 고려군은 움직일 수 없었다. 고려에겐 거의 최악의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강조는 서경 이남에 있는 병력을 모조리 이끌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한편, 거란군에게 사로잡힌 강조는 끝까지 고려인으로서 죽었다. 거란 황제는 강조의 살을 찢으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강조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현운이 거란에게 항복하자 분노감에 이현운에게 발길질을 하기까지 했고, 결국 거란은 강조를 처형한다.
참 기묘한 인생이다. 만약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면, 강조는 무신정권 최씨일가 이상의 권력을 쥘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강조가 이끌던 고려의 대군이 거란군에게 죽거나 뿔뿔히 흩어지면서, 고려는 철저하게 방어선에 배치한 병력만으로 거란을 상대해야하는 최악의 상황과 마주해야했다. 통주 전투 이후로 거란에게 곽주까지 함락되면서 곽주 이남에 거란의 공격을 방어할만한 요새는 안북부, 숙주, 서경, 황주 정도가 전부였다. 여기서 숙주와 황주는 단 한번도 방어선으로서 역할을 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거점 정도의 역할을 할 뿐 실질적인 방어선은 청천강의 안북부와 주변 요새들, 대동강의 서경과 주변 요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안북부의 역할이었을텐데, 안북부의 부사 박섬을 비롯한 안북부의 지휘부가 도주하는 바람에 안북부가 함락당하고 만다. 중요한 요새를 책임지는 지휘자로서 박섬이 자격부족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미 고려의 주력군이 와해되었기 때문에 도망칠만도 했다. 주력군이 와해된 상황에서 고려군에게 남은 방법은 요새 방어를 바탕으로 지구전을 펼치는 것 뿐이었을텐데, 안북부의 병력으로는 그 지구전조차 펼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도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법이다.
안주성 백상루 -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8미터인데, 사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성벽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20미터였던 성도 성벽이 무너지면서 개보수를 하지 않고 무너진 잔해를 치운 뒤 그 위에 여장을 세우는 바람에 10미터로 줄어들게 만든 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다.
이렇게 허무하게 청천강 방어선까지 무너지자 이제 남은 것은 대동강 방어선의 서경뿐이었다. 기록을 보아할 때 서경 이남에는 더 이상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수도인 개경에도 금군조차 몇십명 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마도 강조가 이끌고간 30만은 방어선의 병력을 제외하면 고려의 상비군 전체였던 모양이다. 물론, 남도(개경 이남)에는 아직 병력을 전부 보내지 않은 귀족들도 있을 것이고, 해군도 좀 있을테지만 다 합쳐봐야 수천명 정도에 불과한데다 이들을 단기간에 규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서경은 고려 제2의 수도였다는 것. 서경은 고구려의 장안성을 의미하는데, 성벽의 높이나 너비, 성벽의 규모에서 이미 고려 내 다른 성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규모에 걸맞지않게 철저하게 방어를 위한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대동강이라는 큰 강을 해자로 삼고 있고 산의 능선에 살며시 올라가있어서 수십미터 성벽보다도 더 견고한 것이 서경성이었다. 그 뿐이 아니라 서경성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규모가 장대한 요새인 황룡산성과 대성산성이 존재했는데, 아쉽게도 이 전쟁에서 이 성들이 이용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서경이 워낙 큰 성이었기 때문에 서경에만 군사를 배치하는 것도 버거웠던 것 같다. (참고로 서경성에서 제대로 방어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5만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
서경성(평양성) - 고려시대 당시에는 평지 부분은 15미터, 산등선에 지어진 부분은 4~10미터 정도였다.
여기서 고려 조정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데, 바로 동북면에 배치되어있던 병력을 빼내어 서경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여진에게 동북면을 침략당하더라도 먼저 거란의 공격을 막고 봐야하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이었을텐데, 만약 이 결정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서경은 거란에게 함락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서경은 거란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황은 급속도로 전개되었다. 거란은 안북부 즉 안주성을 함락시킨 다음날, 서경 인근의 중흥사로 약탈부대를 보내어 중흥사를 불태웠고, 그 다음날엔 주력군이 숙주에 도착하여 숙주를 함락시켰다. 숙주가 함락되던 날 동시에 서경에 거란의 사신이 도착해서 항복을 요구했다. 청천강에서 대동강 사이는 그리 먼 길이 아니긴 하지만, 이 파격적인 기동력은 정말 경이롭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 기동력에 겁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천추태후가 실각하면서 서경이 소외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경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란에게 항복을 결정한다. 그리고 모든 항복 절차가 끝나가던 그 절묘한 타이밍에 동북면의 중랑장 지채문이 증원군을 이끌고 성천에 도달하는데, 이 때 서경에서 항복을 반대하던 세력이 지채문에게 서경이 항복하려고 한다고 급히 연락했고, 지채문은 황급히 서경성으로 도착해서 조자기의 도움으로 입성하게 된다.
여기서 서경성이 어떤 상황이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나타나는데, 당시 서경성에서 항복을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의 세력이 엄청나게 막강했던 모양이다. 지채문은 서경성에 입성하자 항복을 위해서 거란에게 가려던 사절을 살해하고, 서경인들에게 항전을 강요했다. 그런데, 서경인들의 반발이 어찌나 거셌는지 지채문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성의 남쪽으로 빠져나와 주둔하게 된다. 즉, 자칫했다간 지채문의 군대와 서경군이 내전을 벌일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던 셈이다. 동시에 지채문의 병력만으로는 서경군을 상대하기 버거웠던 부분도 있던 것 같다. 다행히 이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탁사정이 이끄는 동북면의 주력군이 서경에 도착함으로서 서경의 항복파는 탁사정과 지채문이 이끄는 군세에 위압당해 항전하기로 결정한다.
지채문은 북성과 내성의 사이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에 고려 조정의 영리한 작전이 한 번 더 거란의 발목을 잡는다. 탁사정과 지채문이 이끄는 항전파와 서경내부의 항복파가 대립하는 순간에 거란이 공격을 했다면 서경성은 함락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거란에겐 개경에서 보낸 사절이 도착해있었다. 고려 임금이 강화 요청을 해온 것인데,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관련해서 거란군 내부에서 논의가 있었을 것이고, 결국 군대의 출정을 늦추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경은 항전으로 완전히 돌아선다.
그런데, 거란은 서경이 항전으로 돌아선 것을 눈치채지 못 했던 것 같다. 거란은 고려 임금이 항복을 했다는 사실을 서경에 알리고자 거란측이 내세운 개경유수 (개경을 지배하는 관리)를 대동하고 기병 1천을 서경으로 보낸다. 그리고 서경을 압박하기 위해서 돌기병 200기를 서경성 문 앞까지 보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거란은 분명히 서경성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지 못 했다. 게다가 돌기병 200기는 서경성 문 앞에서 거란 임금의 칙령을 받으라며 외치기까지 한다. 이 때 서경성의 문이 열리고 갑작스럽게 고려의 기병이 돌진해왔다. 고려의 기병들은 거란의 돌기병 200가운데 100명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고 100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둔다. 비록 거란군이 방심하고 있었다곤 하나, 고려의 기병이 얼마나 강력했는 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패퇴시킨 게 아니라 기동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거란의 기병들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 하고 모조리 죽거나 생포당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북면의 병사들은 여진의 공격에 방어하기보다 여진의 소국이나 부족들을 약탈하는 일이 훨씬 많았을 것이므로 기동력을 앞세운 기병활동에 더 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고려군의 위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경앞으로 온 거란의 돌기병 가운데 살아돌아간 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개경유수와 함께 온 1천의 거란 기병은 서경성 고려군의 동향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1천의 거란 기병은 지채문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했고, 지휘관인 울름은 간신히 도망쳐서 거란의 본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거란의 임금, 성종은 분노하며 전군을 이끌고 서경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란 임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거란군을 압도해버린다. 일단 첩보활동에서 고려의 승리였다. 거란은 고려군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 했지만 고려는 거란군의 움직임을 확실히 감지했다. 지채문은 거란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자마자 또 다시 지채없이 9천여 병력을 이끌고 서경 외곽의 임원역에서 거란군과 조우하고 거란군을 박살내버렸다. 거란군에 비해서 훨씬 부족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지채문의 놀라운 기동력과 결단력 덕분에 거란군을 박살냈고, 거란군은 3천의 병력을 잃고 급히 후퇴한다.
하지만 거란군은 워낙에 대군이었다. 지채문이 뛰어난 용병술로 거란군을 패퇴시켰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란군의 남하를 잠시 저지시킨 것일 뿐 실질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투는 그 다음날에도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또 고려군의 강력함이 드러난다. 임원역에서의 전투가 선봉군끼리의 전투에서 고려의 승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면 두번째 전투인 12월 13일의 전투는 고려군의 완승이었다. 거란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전력을 다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보통의 거란군 전술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유인작전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때 거란은 무려 40리를 넘게 도망쳤다. 절대 유인작전일 수가 없다. 아마 이러한 도주 상황에서 거란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게다가 거란군의 도주 경로는 동쪽이었다. 유인작전이라면 거란의 다른 부대가 있었을법한 북쪽으로 도망쳐야 옳을 것이다. 즉, 이 당시 거란군은 지채문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완벽하게 패퇴 당한 셈이다.
이 그림을 통해서 각 지역의 위치를 파악해보자. 그럼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서경성 내의 고려 지휘부는 멍청한 결단을 내리고 만다. 거란군이 완벽히 패배하고 도주하기 시작하자 병력을 총동원해 거란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려는 분명히 수비하는 입장이었고, 거란군은 도무지 이동 경로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있는 것으로 유명한 군대인데, 서경성의 선택은 최악의 실수였다. 거란군은 무려 40여리를 도주했고, 이 거리는 추격하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부담되는 거리다. 추격하면서 전열이 흐트러지고 병사들간의 거리는 아주 길게 늘어섰을 것이다. 거란군이 마탄까지 도망쳐온 순간, 갑자기 거란의 다른 부대가 나타났다.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거란군이 패퇴하고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부대가 급히 지원하러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고, 우연히 그쪽을 지나가면서 약탈하던 거란군과 마주친 것일 수도 있다. 이쯤되면 고려군은 추격을 접고, 뒤로 물러서는 센스를 보였어야했는데, 이미 고려군은 서경성부터 마탄에 이르는 40여리에 걸쳐서 흐트러져있던 모양으므로 그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거란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고려군은 처절하게 살육당하며, 간신히 일부 병력만이 서경성에 살아서 들어갔다. 선봉에 서서 추격하던 지채문은 자신의 목숨만을 간신히 건져서 개경으로 도망친다.
다시 언급하는 바이지만, 서경군의 추격은 지나쳤다. 거란군은 워낙에 대군이었던데다 기동력도 뛰어났다. 거란에겐 2차례의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크게 패배했을지라도 다시 공격을 준비할 여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서경은 정반대였다. 1번의 패배도 돌이킬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무모한 추격으로 인해 병력의 대다수를 잃고 말았다. 이 전투의 결과, 고려는 거란에 대항할 동북면의 병력마저도 대부분 잃고 만다. 또한 나머지 병력이라 할 수 있었던 탁사정의 군사도 탁사정이 도망치면서 사라지고, 이젠 정말로 거란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서경성의 내부에서는 다시 한 번 항복과 항전이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번에는 항복할 여지가 없었다. 몇차례의 전투에서 거란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고, 고려는 거란의 사절을 비롯해 많은 관리들과 장수들을 살해했다. 항복을 결정한다한들 거란이 받아줄 가능성은 미비했던 것. 다행스럽게도, 서경내에는 천추태후 시절, 천추태후가 서경을 중시하면서 배치시켰던 뛰어난 재능의 관리들이 있었다. 훗날 귀주대첩에서 활약하게 되는 강민첨과 조원 등의 인물들이 나서서 서경성의 민심을 진정시키고, 거란에 항전하기로 다시 한 번 결정한다. 그리고 거란군의 맹공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거란인지라 공격이 예전같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경은 거란의 공격에 그럭저럭 버티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2차 여요전쟁에서 가장 큰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양규의 곽주 탈환.
서경성의 영웅이자, 3차 여요전쟁의 영웅인 강민첨
서경이 거란군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던 12월 16일. 흥화진을 굳게 지키며 뛰어난 지휘력을 과시한 바 있던 서북면도순검사 양규가 700명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몰래 빠져나와 통주에 도착, 통주에서 패잔병 1천을 규합하여 곽주를 탈환한다. 이는 고려에게나 거란에게나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거란이 아무리 보급선을 무시하고 공격이 가능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최북방의 보주에서부터 거란이 공격하고 있던 서경까지는 엄청난 길이다. 이 길이를 아무런 보급거점없이 이동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거란은 곽주를 보급요새로 결정하고 무려 6천이나 되는 거란군을 배치해놨었다. 그런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양규가 이끄는 700명의 정예병에 패잔병 1천명이 탈환하고 6천의 거란군을 모조리 살해했다는 경이로운 성과를 거둔 것이다. 애당초 이런 정신나간 공격을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양규는 이 공격으로 6천명의 거란군이 전멸시키고 곽주성을 탈환한데다 7천명의 포로를 통주성으로 이동시켰다. 정말 놀랍다.
이 신의 영역에 가까운 양규의 지휘력과 전략, 결단력 덕분에 고려는 삽시간에 구제받았다. 특히 서경성의 고려군과 백성들은 정말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른다. 곽주가 함락당한 상황에서 거란은 서경을 더 공격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사는 먹어야 싸울 수 있다. 이것은 유목제국의 군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곽주가 함락당하면서 거란의 보급이 끊겨버렸다. 이제 거란군은 그 동안 보급받은 식량과 서경 인근을 약탈하면서 얻은 식량으로 버텨야하는 상황.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거란군 전체가 고려의 방어선 안에 갖혀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거란군은 더 이상 서경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양규의 카운터펀치 한 방에 고려와 거란의 입장은 반대로 뒤집혀버렸으며, 서경은 구제받았다. 이것은 모두 양규라는 인물이 곽주의 중요성을 완전하게 알고 있었고, 그 곽주를 공격하여 탈환함으로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통주전투에서 강조나 서경공방전에서 지채문은 전투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지만, 전쟁 전체를 총괄하는 전략을 세우는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양규는 전쟁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고, 자신의 지휘력과 전투력을 믿었다. 그리고 전쟁의 흐름을 삽시간에 뒤바꿔버렸다. 괴물도 이런 괴물이 또 있을까?
이로서 서경공방전은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쯤에서 곽주 함락으로 거란군이 처한 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거란은 흥화진을 공격했지만 무너트리지 못했다. 7일간의 공격에도 굳건히 버틴 흥화진은 심지어 거란 성종을 비웃기까지 했다. 그래서 무로대에 20만 병력을 남겨두고 남하하게 된다. 두 번째로 벌어진 큰 전투는 통주 전투다. 당시 통주에는 강조가 이끌던 고려의 주력군에 도착해 있었고, 병력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거란에 엄청난 부담이었을 게 분명했다. 거란은 이 주력군과의 전투에서 고전하다가 한 번의 양동작전으로 고려군을 무너트린다. 살아남은 고려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거란은 고려의 패잔병이 흘러들어 간 곽주성에 도착해서 곽주성을 함락시켰다. 여기까지는 꽤 좋은 성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경에서 뜻밖의 관문에 도달한다.
청천강 방어선의 핵심이었던 안주성의 부사 박섬이 달아나면서 고려는 위기에 처했다. 개경 북쪽으로 서경과 황주 이외엔 방어선이 없었던 것. 그래서 조정은 병력을 모아 서경에 보내서 거란에 대항하게 했는데, 여기서 지채문이란 명장이 나타나 거란을 크게 격파했다. 그러나 탁사정을 비롯한 성을 지키던 장군들의 미련한 용병술을 펼치다 반격당해 군사 대부분이 죽고 만다. 지채문은 간신히 혼자 살아서 개경으로 도망쳤고, 탁사정이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 탁사정에게 속았던 대도수는 거란에 항복했다. 거란엔 최고의 기회. 서경이 무너지면 황주뿐이고, 황주에 병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세상사라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당시 서경성은 고려에서 가장 큰 성이었다. 고구려 시절 '장안성'이라 불렸던 성으로 축조되었던 당시 성 안에 머물 수 있는 인구가 엄청났다고 한다. 고려는 청야전술을 택해왔으므로 서경성엔 인근 주현의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즉, 서경은 성민을 동원해 공성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서경은 그렇게 했다.
지쳤다는 건 군대엔 끔찍한 재앙이다. 당시 거란군은 확실하게 지쳐있었는데, 그들은 고려 내지 깊숙한 곳까지 쾌속전진해왔다. 그냥 전진한 게 아니라 대규모 전투를 수차례 벌였고, 패배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이렇게 지친 마당에 서경성은 항전을 택했고, 거란은 서경성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전쟁에 익숙한 거란군이라고 해도 너무 힘겨운 전쟁이다. 이럴 때 날아온 소식이 곽주 함락 소식이다. 서경 이북에 가장 중요한 보급 거점이었던 곽주성이 함락되었다니 병사들 뿐 아니라 지휘부도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으리라.
이순신이 없었다면, 양규의 곽주성 탈환은 한국 역사에서 둘도 없는 명장면으로 손꼽혔을 최고의 전략이었고, '무쌍'이었다. 700명의 정예병과 1000명의 패잔병(!)으로 곽주를 지키고 있었을 거란군 6000명을 격멸(!)하고 곽주성을 차지하면서 보급을 끊어버린 위대한 전투. 이렇게 되면 거란은 북쪽에 남아 있는 고려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꼴이 된다. 남쪽에 있는 개경에서 군대를 보내 장기전으로 나가면 거란군은 끝장이었다. 이제 서둘러 퇴각하는 수밖에 없달까. 그런데 여기서 거란 성종이 무모한 전략을 세운다. 퇴각하는 게 아니라 개경을 향해 진군하는 전략이었다.
정상적인 군운용이 아니다. 지친 군대가 먹을 것조차 잃었다.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진군이라니. 그러나 보통은 무모하다 했을 법한 이 전략이 고려군의 의표를 찔렀다. 거란군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알고 있었다 해도 미친 군운용이다.), 서경 남쪽엔 고려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고려의 임금은 아무런 방어책도 없이 개경에 남아 있었고, 임금을 사로잡으면 먼 훗날 병자호란과 비슷한 결과를 추구해볼 수 있게 된다. 거란 성종의 결정은 무모했지만, 의표를 찔렀다는 점에서 합격점이었던 셈이다. 역사 속 어느 전쟁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둘 땐 이런 의표를 찌르는 전략이 유효하곤 했다. 이 결정이 바로 그런 전략이었다.
전략이 결정되자 거란군은 남하를 시작했는데, 이전처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남하하진 못하고 꽤 차분하게 움직였다.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부족한 병량을 얻기 위해 약탈하면서 남하한 게 아닌가 싶다. 뭐, 어떤 식으로 남하했건 간에 고려에 멸망의 위기가 닥쳐왔음은 확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경에서 도망쳤던 지채문이 개경에 도착해 전황을 보고한 것이다. 그는 서경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는데, 사실은 아니었지만, 고려 조정에 충격을 안겨주기엔 충분했다.
엑박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