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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값이 계속 뛴다고 걱정한 아내가 진작 예약을 해서 어제 김장을 담갔습니다. 절인 배추를 받았지만 그 뒤에 따르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배추 절이는 일만 해도 하루거리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거 하나 절약하는 시간도 대단하지요. 아무튼 김장 속을 만드는 일부터 속을 배추에 일일이 넣어 김치냉장고에 넣을 때까지 하루를 일합니다. 아내가 대부분 맡아 하지만 가만서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늘 생강 다듬고 무채 썰고 하면서 남편도 한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한 겨울 반찬 걱정 없지요. 마음마저 든든해집니다. 까짓것 겨우 두 사람 먹을 것 준비하는데도 이 야단입니다. 자랄 때 어머니는 다섯, 여섯 식구 김장을 챙기셨습니다. 보통 배추 100포기,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그 때는 누구네 집 김장한다면 돌아가며 품앗이 했습니다. 동네 잔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날짜를 정하여 돌아가며 진행합니다. 그러니 한달 정도의 시간을 걸리며 잔치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동네 아낙네들 모여 일하는데 조용할 리가 없습니다. 즐거운 시간입니다. 한바탕 하고 점심 먹고 새참도 먹으며 하루가 갑니다. 요즘은 이런 문화 시골에서도 보기 쉽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어려서 동네 아주머니들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김장하는 모습 눈에 선합니다. 요즘은 집에서 담그는 것조차 힘들다 싶으면 통째로 구입합니다. 아니면 일일이 사서 먹습니다. 어쩌면 그게 더 경제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사람의 손맛은 없지요. 우리 둘이서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ㅎㅎ
이제 11월도 하순, 한 주 남았습니다. 한해의 한 장 남은 달력을 쳐다봅니다. 아쉬운가요, 기대가 되는가요? 좀 더 조용하게 편안하게 사는 날을 꿈꿔붑니다. 아무튼 즐거운 주말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
2024년 11월 23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아가 2 : 1 - 2)
<한 여름의 판타지아>
남녀 연애는 어떻게 시작될까요? 이야기 속에 많이 등장하지만 막상 내가 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와 현실의 차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세상사 요지경이라고 합니다. 정말 모릅니다. 그리고 당하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그 기분은 조금 안정이 되고 나서 느끼는 것이고 당하고 있을 때는 마음 졸이느라 신비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감정이 가장 깊이 그리고 폭넓게 작용하는 경우가 연애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겨우 두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인데 말이지요. 때로는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갈피를 잡기 어렵지요.
사람의 감정이 비교적 예민하게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일상의 일들 속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특별한 감정 말이지요. 특히 이성간의 연애감정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 보다 쉽게 그 감정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이 위기 속을 함께 헤쳐나갈 때, 그래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두 사람이 보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행 중 낯선 곳에서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일으킵니다. 소위 들떠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여행 속에는 흔히 낭만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 때이고 낯선 장소에 대한 기대도 있고 자연히 사람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조금이라도 친절한 대우를 받는다면 말이지요.
예를 들어 나이 차가 그리 많지 않은 남녀 두 사람이 함께 일을 하거나 공동의 작업을 한다고 해봅시다. 두 사람 사이에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관심과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요? 시간이 좀 흐르면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설령 사업상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오래 지내다보면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내 불륜사건이 종종 발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찌 보면 집에 있는 배우자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지냅니다. 종종 점심이나 저녁, 식사도 같이 하겠지요. 자연스럽게 대화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꼭 업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이야기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 영화감독이 일본 여행을 합니다. 촬영지를 물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여성이 통역 겸 가이드로 동행합니다. 아주 조용하고 낯선 곳입니다. 더구나 번화한 도시와는 떨어진 시골입니다. 지금은 젊은이들 거의 도시로 나가고 나이든 사람들만 살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 소개를 받아 어른들을 만나서 그들의 역사를 이야기 나눕니다. 그 마을의 숨은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지요. 사실 어디를 가나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 사람들의 역사가 숨어있게 마련입니다. 마을 풍경과 담겨있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비교도 합니다. 감독만 가지는 감정일까요? 동행하고 있는 통역안내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여성이 홀로 일본여행을 합니다. 일본어도 꽤 하기에 불편함은 없는 듯합니다. 일본 소도시 역전 안내소에서 한 청년을 만납니다. 낯선 곳에서의 낯선 만남입니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로 보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스케’라는 이 청년은 자기 아버지의 고향에 내려와 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직접 재배한 감을 맛보게 하고 선물로 한 봉지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여행 안내를 자청합니다.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고 악한 감정을 지닌 것도 아닌 듯하니 굴러들어온 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함께 여행을 합니다. 자기 이름도 밝혀줍니다. 그렇게 한국인 ‘혜정’은 일본인 유스케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즐깁니다.
어찌 보면 여행도 여행이지만 두 남녀가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듯합니다. 유스케는 이미 자기가 하는 일을 밝혔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 혜정도 자신이 배우라고 소개합니다. 좀 색다른 직업이지요. 때로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놀라기도 합니다. 이런 곳에서 외국인 배우를 만난다는 것이 보통의 일이겠습니까. 그러잖아도 묘한 감정을 일으키고 있는데 더욱 호기심과 동경심에 강한 매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정을 알고 보니 내일 떠난답니다. 이대로 그냥 헤어져야 한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해도 이미 감정을 너무 쏟은 듯합니다. 오늘 밤 여기 불꽃놀이가 있습니다. 같이 가보지 않을래요? 돌아서려다 혜정이도 그럴까요? 멈칫합니다.
두 이야기가 엮여 있습니다. 영화감독 ‘태훈’과 통역 겸 안내인 ‘미정’의 이야기는 흑백영화로 보여줍니다. 뒤에 이어지는 혜정과 유스케의 이야기는 천연색 영화로 나옵니다. 두 영화가 ‘불꽃놀이’로 끝납니다. 뭔가 연결되는 느낌이지요. 조금 난해하기도 하지만 제목으로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흑백영화의 장점을 볼 수 있습니다. 명암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느낌이지요.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입니다. 아주 잠간 재개봉하여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취향으로는 쉽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정말 조용하게 진행됩니다. 과하게 표현한다면 잠들기 딱 좋은 분위기입니다. 영화 ‘한 여름의 판타지아’(A Midsummer's Fantasia)를 보았습니다.
듣고 지키면 그냥 천국인가요?
우리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 들으려고 나온 줄 압니다. 교회는 세상 이야기 전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세상이야기 들으려고 교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라는 간판은 걸렸는데 하늘 이야기가 아닌 세상 이야기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더 큰 문제는 신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무엇을 아멘하고 있는지 도무지 분별을 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목사님이 전해주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참으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교회도 많고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해마다 많은 목자들이 여기저기서 배출되어 나옵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이 택하시고 기뻐하시는 목자이기를 바랍니다. 현실은 어떠할까요?
어느 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마 15 : 1 - 2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지금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보겠습니다. 마 14 :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게네사렛 땅은 갈릴리 지방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사해 근처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까지 왔다는 것이지요. 서울에서 대전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차 타고 오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 만나러 멀리 왔습니다. 게다가 일반 백성처럼 기대를 가지고 무엇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따지러 온 것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왜 자기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네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것을 왜 안 지키느냐 하는 것이지요.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까짓 손 씻고 먹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돼지고기를 ‘먹고 안 먹고’가 대단한 일인가? 하는 질문과도 비슷합니다. 먹든 안 먹든 그게 죽고 사는 일입니까? 씻고 먹든 안 씻고 먹든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 일인가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렇다 그겁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레 11 : 43 - 45 “너희는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기어다니는 것은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건강에 좋다, 정력에 좋다 하면서 우리는 잘도 먹습니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안 먹습니다. 왜요? 부정해집니다. 하나님은 거룩하라 명하시는데 부정해지면 어떻게 합니까? 정결해지는 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씻는 작업입니다. 씻지 않고 하나님 백성의 진 안에 들어올 수 없고 성전에는 더더구나 어림없겠지요. 행여나 걸리면 돌 맞아 죽습니다.
택함 받은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모두 부정한 자들입니다. 접촉을 했다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예, 씻어야지요. 씻지 않고 무엇을 건드렸다, 그러면 그 만진 것도 부정해집니다. 부정한 상태로 이스라엘 진에 들어갈 수 없고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부정한 자가 만지는 모든 것이 더러워집니다. 민 19 : 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부정해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씻어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는데 다시 말해서 부정해지는데 어떻게 씻지 않고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외출했다가 들어오면 씻는 것이 습관이요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따른 전통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활동하였습니까? 그러잖아도 시간이 없는데 다니다보면 씻지 못하고 식사도 하고 그러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빌미가 된 것입니다. 자기네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율법의 다른 내용으로 그들을 꼬집어주십니다. 마 15 : 3 - 6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대지 못했다는 것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잇속 차리는 것이지요. 마땅히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해야 하는데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되니까 하나님께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지극히 적은 부분 드리는 척하고 몽땅 삥땅치는 거죠. 그러한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는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백성을 정죄하고 압박하는 일을 이 종교지도자들이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힘없고 백 없는 백성은 그냥 당하는 겁니다. 로마에는 정치적 노예요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는 종교적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래저래 백성은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꾸짖어 지칭한 말이 있습니다. 마 15 :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여기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한다면 ‘겉을 꾸민다’는 것입니다. 겉을 꾸미고 속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적용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키는 시늉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 선지자 곧 이사야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질타하십니다. 사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말씀이 예수님 때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8 - 9절 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고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신앙하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지요. 그래서 무엇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는 겁니까? ‘사람의 계명’으로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합니다. 무엇을 봉독하고 설교합니까? 그야 당연히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하늘 이야기일까요, 땅의 이야기일까요? 하나님 말씀일까요, 사람의 말일까요? 하나님의 계명일까요, 사람의 계명일까요?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단지 교회에서 설교하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그랬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율법 곧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곧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다, 아니다?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면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이런 것을 분별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드리면 되겠습니까? 잘 생각해보면 자기가 누구에게 드리는지도 모르고 예배드리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가인과 아벨이 누구에게 제사를 드렸습니까? 그야 당연히 하나님께 드렸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의 제사는 받으시고 누구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 이유를 알아야 되겠습니까, 몰라도 되겠습니까? 아니 시간 드려, 돈 드려, 정성 드려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면 그 얼마나 억울합니까? 차라리 드리지나 말지,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배 다 드리고 교회를 나서는데 혹시 뒤에서 하나님이 네가 드린 예배는 안 받았다 하신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이게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망정이지 보인다면 억울해서 복창 터지는 신자 많을 것입니다.
왜 씻지도 않고 먹느냐는 문제로 시비를 건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일침을 놓으시고 예수님이 거기 모인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15 : 10 - 11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답니까, 입에서 나오는 것이 부정하게 만든답니까? 예,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답니다. 그 무슨 뜻인지 뒤에 가서 해석해주십니다. 17 - 20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결국 무엇이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마음입니다.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율법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겁니다. 어떻게 보면 기특하고 갸륵하지요. 그러나 그 율법 때문에 신앙의 갈등을 겪는 일도 생깁니다. 물론 신앙이 어리다보니 일단은 문자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초기 단계이지요. 문자로도 읽지를 못하는데 그 의미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단 읽고 문자대로의 뜻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초등학문입니다. 그러나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가야지요. 시간은 흘러가는데 자라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계속 초등학교만 다닐 겁니까? 나이 열다섯이 넘어가는데 계속 초등학교 6학년으로 지낼 겁니까? 부모님 속 터집니다. 여태 문자로만 보던 성경을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풀어주십니다. 그것이 신약입니다.
전에 예를 든 성경을 다시 보겠습니다. 신 25 : 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잘 아는 대로 이것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지켜야 해요, 안 지켜도 돼요? 반드시 지켜야지요. 옛날 탈곡기라는 기구가 없을 때에는 추수하고 곡식을 판판한 땅에 깔아둡니다. 소위 타작마당입니다. 거기에 곡식을 깔아두고 소를 빙빙 돌리는 것입니다. 소 발바닥이 돌처럼 단단하잫아요. 그 힘으로 탈곡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곡식은 우리 주인어른이 먹어야 하는 것이니 잠잠히 돌기나 하자 하고 돕니까? 사람이 먹을 곡식을 누가 다 먹어버립니까? 소가 먹지요. 그러니 망 씌워요, 말아요? 아니 하나님, 도대체 우리보고 살라는 말입니까, 죽으라는 말입니까?
예수님 다녀가시고 이제 중학교 들어갑니다. 초등학교 때는 문자대로 신앙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뜻을 살펴야지요. 그래서 해석해줍니다. 고전 9 : 9 - 10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다시 말해서 소를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즉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꾼, 목자를 위해서 하신 말씀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여기 ‘소’는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다? 바로 목자를 가리키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말씀이 설명을 확실하게 해줍니다. 11절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목자는 백성에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줍니다. 그러면 백성은 육신의 것으로 목자들의 먹을 것을 채워줘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 뜻을 알고 나서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없다? 없지요.
보이는 문자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문자를 지키려다 본래 의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에 매여 있는 백성을 가엾게 보십니다. 어린 백성은 목자들이 주는 대로 받아서 그것을 지키며 살기를 노력합니다. 더구나 성경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당시 백성은 가질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그들에게 가야 합니다. 목자라 칭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백성은 아멘 하여 화답하고 그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해주는 그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그대로 강해해줍니다. 부정한 손으로 무엇을 건드리면 모두가 부정해집니다. 부정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서로 교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이 닿는 모든 것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음식을 먹는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정해지는 겁니다. 그것을 본 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도무지 용납할 수 없기에 와서 따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율법을 멋대로 어기고 안 지키며 무시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잘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도도 없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마 5 : 17 - 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다 이루려고 오신 것입니다. 율법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이미 배워서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입니다. 구약, 신약, 말하듯 약속입니다. 약속은 뭐하려 합니까? 깨려고, 지키려고? 예수님은 그 약속을 이루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이루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선포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요 19 :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나무는 보지 않고 가지만 보는 것입니다. 율법의 주체를 보지 않고 자기 의를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경고하셨습니까? 마 5 :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저들처럼 율법을 지키면 천국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 마음은 모르고 문자에 매인다든지, 하늘의 말씀을 땅의 말로 이야기한다든지, 약속은 모르고 현재에 안주한다든지 하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을 가지고 신앙합니다. 역시 약속입니다. 무슨 약속인지 알아야 지키지요. 우리도 그냥 현재에 안주하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약속인지, 무엇이 어떻게 이루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겠습니까, 몰라도 되겠습니까? 막연히 하늘 쳐다보는 신앙으로는 하나님 나라, 천국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말씀이니 그냥 아멘, 하고 따라가고 싶습니다. 모두 그런 교회와 목자이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일부러 그렇게 하였을까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아닌 목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든지 사람도 목자들도 가지각색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올바른 것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사는 것입니다. 특히 올바른 목자와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 붙어있고 교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고 해서 당연히 하나님의 종이고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시며 먼저 경계를 하신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 24 : 4 -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많은 사람들 특히 목자들이 나타나 당연히 ‘하나님의 종’이라 지칭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조심하라 경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미혹당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성경을 들고 하나님 말씀이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요? 교회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초림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 말을 듣고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의 말씀을 찾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알아야 분별을 하지요. 때문에 찾아야 합니다. 소위 ‘참 목자’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전해주는 목자를 찾아야 하고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의 이야기를 해주는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의 신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이미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부지런히 다니며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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