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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장보고의 일생
1. 당나라에서 활동한 시기
장보고는 완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였다. 이는 우리말로 '활보', 즉 '활 잘 쏘는 이'라는 뜻으로서 그가 활을 매우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일찍부터 정년(鄭年)이란 자와 기예를 겨루던 사이였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잠수를 잘하였으며, 그들이 당에 건너가 활약할 때도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두 사람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장보고와 정년은 출신이 미미한 지방민이기 때문에 출세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때문에 두 청년은 중국에서 특출난 무예로 출세하고자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시 당나라는 지방의 번진(藩鎭)들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펴던 때였다. 특히 산동지방에서는 고구려 유민 출신인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 이정기(李正己) 일족이 번진세력으로서 활동하였다. 장보고는 당에서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李師道)를 토벌하는 부대의 하나였던 무녕군(武寧軍)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 공로로 군중소장(軍中少將:하급 장교)까지 진급하였다.
819년, 이사도의 토벌이 끝난 후 장보고는 군을 나와 무역활동에 뛰어들었다. 아마 무녕군의 감축이 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산동반도 남쪽으로 회수(淮水)와 양자강(揚子江) 어구를 낀 중국 동해안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자치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동서 무역의 일익을 맡아 본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장보고는 이들을 장악하여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표자로 급속히 부상하였던 것이다.
2. 해상왕국의 건설
무역활동에 뛰어든 장보고는 제법 부를 축적하자 820년대 초반경 산동의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고, 824년에는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법화원은 장보고의 원찰(願刹)이자 재당 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이기도 하였다. 장보고가 신라에 귀국한 후인 840년에 이 곳에서 큰 신세를 졌던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이 절은 상주하는 승려가 24명이나 되고, 정월 대보름의 법회에는 신라인 250여 명이 모여들 정도였다고 한다. 법화원에는 매년 500석을 수확하는 장원이 딸려 있었는데, 이는 장보고가 기진한 것이었다.
장보고는 828년을 전후하여 신라에 귀국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노비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신라인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는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노예로 파는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 귀국한 직후 장보고는 흥덕왕을 만나, "해적들이 신라인을 끌고가 노비로 삼는 것을 막겠다"며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때가 828년이었다. 당시 신라 중앙정부는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제대로 단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보고의 건의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완도 주변의 주민 1만여 명을 징발(?)하여 군대를 창설하고, 서남해안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을 모두 소탕하였다. 이때 장보고는 중국과 일본, 신라를 잇는 해상교통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당시에 이곳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장보고의 보호와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였다.
장보고는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중국과 신라,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독점하였다. 그는 회역사(廻易使)·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라고 부른 무역사절을 일본과 중국에 파견하였으며, 특히 그의 무역선을 교관선(交關船)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일본정부에 외교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벌인 바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라이샤워박사는 청해진 세력을 '상업제국(commercial empire)'이라고 불렀으며, 그 지배자인 장보고를 '무역왕(merchant prince)'이라고 표현하였다. 장보고는 중국에서 주로 서역산의 진귀한 사치품을 싼값으로 수입하다가 신라와 일본의 귀족에게 비싼 가격으로 팔아서 많은 이익을 챙겼다.
3. 중앙정계로의 진출과 좌절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대외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세력기반을 확장할 즈음에 중앙정계에서 귀족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장보고는 838년에 김우징(신무왕)을 도와 그를 왕위에 즉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장보고는 이 공로로 '감의군사(感義軍事)'란 칭호를 수여받고, 동시에 식읍(食邑)도 하사받았다. 이 무렵이 그의 전성기였다.
그로부터 7년 뒤인 845년, 장보고는 그의 딸을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 하였다. 본래 이것은 신무왕이 군대를 빌린 대가로 장보고에게 약속한 사항이었다.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은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앙의 진골 귀족들은 그가 출신이 미미한 섬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결국 중앙정계로 진출하려던 장보고의 꿈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이에 분개하여 84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신라 중앙정부는 그를 무력으로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염장이란 인물을 시켜서 846년에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던 장보고의 꿈은 이렇게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장보고가 암살당한 뒤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 등이 반란을 계속 일으켰으나 결국 염장에 의하여 진압당하였다. 이에 장보고의 부하들은 망명처를 찾아서 중국 혹은 일본으로 떠났다. 염장의 부하 이소정(李少貞)은 일본으로 망명한 장보고의 부하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다. 신라정부는 851년에 청해진을 폐지하고, 그의 주민을 벽골군(전북 김제)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부터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교역활동은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졌고, 이로써 장보고의 해상왕국도 종말을 맞이하였다.
4. 장보고의 역사적 역할
장보고에게 주어졌던 '대사'라는 칭호나 '감의군사'.'진해장군' 등은 정식 신라 관제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귀족들의 폐쇄성은 권력의 공유를 허용치 않았다. 그러나 지방의 섬 출신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중앙 정계 진출을 꿈꿀 만큼, 폐쇄적인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의 지배체제가 틈새를 보이고 있었다. 이처럼 장보고의 등장과 몰락은 40여 년 뒤의 호족의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Ⅳ. 장보고의 연보와 그와 관계된 인물
1. 장보고 연보
790년 전후한 시기에 완도에서 출생.
810년대 무렵 당에 건너가다.
819년 무렵을 전후하여 武寧軍 軍中少將에 진급.
821년 唐 정부에서 藩鎭의 군대 감축. 이 무렵을 전후하여 軍에서 퇴역하여 商人으로 변신. 平盧軍節度使 薛平이 신라인을 노비로 약탈하는 행위의 근절을 건의. 당 황제는 이를 금지하는 勅令을 반포.
820년대 초반 山東半島 文登縣 赤山村 法花院 건립.
822년 웅천주(충남 공주)도독 김헌창 반란.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 약화.
823년 신라인 노비 放還 반포. 신라사신 김주필이 당 황제에게 신라노비 귀환을 위한 선박의 편의를 요구.
824년 장보고 일본 방문.
825년 김헌창 아들 김범문 반란.
828년 평로군 절도사 설평의 건의를 받아들여 821년에 반포한 칙령의 시행을 촉구.
이 해에 장보고가 신라에 귀국하여 흥덕왕을 알현하고, 청해진 설치를 건의. 완도 주변의 1만명을 징발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에 취임. 이후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해적들을 소탕하고 당과 일본, 신라를 잇는 삼각무역을 독점하고 해상왕국 건설.
836년 흥덕왕 사후 김균정과 제륭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균정이 살해되고 재륭이 왕에 즉위(희강왕).
837년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도망가서 의탁.
838년 김양이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에 합류.
김명이 희강왕을 핍박하여 왕위를 차지(민애왕)
김우징과 김양이 장보고의 군대 5천과 더불어 민애왕을 공격.
839년 대구에서 김우징 군대가 민애왕의 10만군대를 격파하고 왕을 살해. 김우징이 왕에 즉위(신무왕). 신무왕이 장보고에게 感義軍使란 명칭을 수여하고 食實封 2천호를 사여. 신무왕이 즉위 6개월만에 사망. 문성왕 즉위. 장보고에게 鎭海將軍이란 칭호를 수여.
이해에 장보고가 당에 보낸 交關船 2척이 登州 赤山浦에 도착.
840년 일본에 廻易使 파견. 崔暈十二郞兵馬使가 탄 교관선이 등주 적산포와 長江 연안의 揚州 사이를 왕래.
장보고(張寶高)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는데, (일본의) 大宰府에서 (신라왕의) 신하된 자로서 다른 나라와 교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續日本後紀}).
841년 {續日本後紀},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에서는 이 해에 장보고가 신라정부에 반기를 들고 사망한 것으로 서술. 이후 장보고의 副將 李昌珍 등이 반란을 일으킴({續日本後紀}). 위의 사실과 다음 해 3월에 김양의 딸이 문성왕의 왕비로 들어간 사실을 근거로 장보고가 시해된 해를 841년 3월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842년 일본의 前筑前太守가 그 전해에 회역사 李忠.楊圓 등이 갖고온 교역품을 압수. 이 해에 염장의 부하 李少貞 등 30명이 일본에 와서 회역사 이충 등이 맡겨놓은 교역품을 돌려달라고 하였으나, 일본측이 이를 거절({續日本後紀}).
845년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次妃로 삼으려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 장보고가 이에 분개하여 신라정부에 반기({三國史記}).
* 관련자료
봄 3월에 청해진대사 궁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조정의 신라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夏나라는 塗山氏로 인하여 흥하였고, 은나라는 신씨로 인하여 번창하였으며, 주나라는 때문에 망하였고, 晉나라는 驪嬉 때문에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한 즉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있는 것이니, 신중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사람인데, 그의 딸이 어찌 왕실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 말에 따랐다({三國史記} 신라본기 문성왕 8년)
846년 武州別駕 염장이 장보고를 시해({三國史記}).
→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킨 연대에 대하여 기록마다 차이가 나는데, 續日本後紀의 기록처럼 841년이 보다 사실에 가깝다고 보인다.
851년 청해진 폐지, 진의 주민을 벽골군(전북 김제)으로 강제 이주.
2. 장보고와 관련된 주요인물
1) 정년(鄭年)
장보고의 친구. 보고(保皐)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기예는 더 출중하였다. 함께 武寧軍에서 활약하다가 퇴역. 중국에서 고생하다가 신라에 귀국하여 장보고에게 의탁하여 신임을 받았다. 838년 김우징.김양 등이 민애왕을 공격할 때, 장보고는 정년에게 그의 5천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정년은 중국에서 장보고와 원한을 샀던 적이 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후에 정년에게 중국인 풍원규가 '장보고와 너는 원한을 품은 사이인데, 어찌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하는가'라고 만류하였지만, 그 말을 듣지 않고 그는 신라에 귀국하여 장보고에게 갔다. 장보고는 옛 원한을 모두 잊고 정년을 매우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목이 두사 람의 전기를 써서 후세에 장보고를 소개하였던 것도 이러한 의리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2) 염장(閻長)
장보고를 시해한 인물이다. 본래 무주출신으로서 김우징을 도와서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武州(光州)의 차관직인 別駕(州助)에 임명되었다.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자,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 청해진에 투항하였는데, 장보고가 장사를 아껴서 의심하지 않고 불러들여 그와 더불어 술을 마셨다. 염장은 궁복(장보고)이 술에 취하자,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달래니,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3)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
장보고 밑에서 兵馬使의 직책을 가진 인물. 주로 당나라에서 교역을 책임졌던 大唐賣物使로서 활동. 장보고가 시해당한 이후에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정치적 망명을 하였다.
4) 이창진(李昌珍)
장보고의 副將. 장보고가 시해당한 이후에 장보고의 반란군을 지휘하다가 염장에게 평정.
5) 김우징(金祐徵)
836년 흥덕왕 사후에 일어난 김균정과 김제륭 사이의 왕위계승분쟁에서 아버지 균정이 패배하자, 김우징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에게 의탁. 839년에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서 왕에 즉위(신무왕)하였으나 6개월만에 사망.
6) 문성왕(文聖王)
김우징의 아들. 장보고의 딸을 次妃로 맞이하려다가 귀족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7) 김양(金陽)
제륭과 균정의 왕위계승분쟁에서 균정을 지지한 인물. 838년에 군사를 모집하여 장보고에게 합류하였고,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즉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 이후 중앙정계의 막강한 실력자로서 군림.
8) 이사도(李師道):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서 산동지방의 藩鎭으로 활약하던 李正己의 손자. 819년에 당정부에 의하여 토벌당하였다.
9) 기타
① 圓仁: 일본의 승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저자. 일본에서 당으로 갈 때,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다.
② 李忠, 楊圓: 일본에 廻易使로 파견된 인물.
* 한국역사연구회 23회 특강자료( 진덕규, 장보고와 골품제사회)에서 발췌 인용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