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
(시편 71[70],9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나이 들고 쇠약해졌을 때에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사회에서의 역확이 줄어들었을 때에도, 우리 삶이 덜 생산적이고 쓸모없다고 치부될 위험에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심지어 단신을 배반하여도 언제나 당신의
자비를 보여 주신다는 위로에 찬 확신을 줍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70,9참조)라고 주님께 올리는 간청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하게,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기까지 한 말입니다.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교구장 주교였을
때, 요양원들을 방문하면서 여기서 지내는 이들을 만나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곳에서 다른 어는 곳보다도 가난한 구가들에서 노인들은 혼자라고 느낍니다. 자녀들이 이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와 마을에서 많은 노인이 홀로 남겨집니다.
노인이 '젊은이의 미래를 훔친다.' 비난은 요즈음 어디에서나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노인들이 필요로 하는 값비싼 사회
복지비로 노인들이 공동체 발전과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지원들을 전용하고 있다는 확신이 현재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입니다.
앞서 인용한,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시편은 노인의 삶을 둘러싼 음모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이 과장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외로움과 버려짐은 우연이나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개개인
의 무한한 존엄을 인정하는 데에 실패한 정치적, 사회적, 개이적 결정들의 결과임을 생각한다면 과장이 아닙니다.
나이 들고 쇠약해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회적 유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개인주의의 환상
은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더 이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옆에 없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때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너무 늦은 시점에서야 이를 깨닫
습니다.
우리는 룻기에서 나이 든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이 죽은 다음 두 며느리 오르파와 룻에게 고향과 집으로 돌아가도록 격려
하는 이야기(룻 1,8참조)에 묘사 되는 체념이라는 감정을 여러 노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노인처럼
나오미는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나오미
를 놀라게 하는 말을 합니다.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익숙한 우리 모두에게 "저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간청에 대하여 "저는 당신을 버려 두지 않을 거에요."라는 대답이 가능하다는 것을 룻이 가르쳐 줍니다.
룻의 자유와 용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선택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도 룻의 발자취를 따릅시다. 많은 희생이 따르지
만 룻을 본받아, 노인들을 돌보는 이들 또는 곁에 더 이상 아무도 없는 친척들이나 지인들에게 날마다 친밀감을 느끼게 해
주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조부모와 노인 여러분 모두에게, 또한 여러분과 가까운 모든 이에게 저의 기도와 축복을 전합니다. 그리고 부디
잊지 말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전문은 교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