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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 하루, 나는 경호팀의 눈의 피해 일탈을 감행했다. 학교에 등교해서 강의실로 가는 척하다가 뒷문으로 빠져나가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문을 활짝 여니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는 솜사탕처럼 풍성해 보이는 뭉게구름이 평화롭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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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이 너무나 가슴 벅차고 두근거려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아.”
어머니의 손에는 꽃자줏빛 한복이 들려 있었다.
“수석으로 졸업을 하는데 옷 한 벌 안 해주고 입던 옷을 입으라고 해서 미안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옷을 깨끗하게 손질해 입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더 뜻 깊은 일이었다. 수석 졸업이 어머니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되었던 듯하다. 뒤늦게 나는 이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한 처음이자 마지막 효도였다는 걸 깨달았다. 불행은 소리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전문■
굵직한 행사들에 초청받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차근차근 외교 훈련을 쌓아가고 있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다양한 외국어 능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방을 청소할 때, 뜨개질을 하거나 양치질을 할 때 등 조금이라도 자투리 시간이 나면 새로운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암기하거나 테이프를 들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탈무드 등의 유명한 명작들을 원서로 읽을 만큼 영어가 익숙해진 뒤에야 비로서 어느 정도 영어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영어에 자신감이 붙자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다른 나라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진다는 의미였다. 언어는 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수단이었다. 다른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컸다. 책을 통해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만족감은 맛있는 음식이나 새 옷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행복이었다. 나는 점점 공부벌레 여대생이 되어갔다.
내 또래 여대생들은 강의가 끝난 뒤 삼삼오오 어울려 음악감상실이나 영화관에 드나들며 다양한 관심사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대학시절의 낭만을 즐겼다. 대부분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들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을 비교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다. 솔직히 가끔은 그런 자유가 부럽기도 했지만 자유가 제한된 생활을 받아들여야 했던 나는 지식을 쌓는 일에서 새로운 만족을 느꼈다.
평범한 대학생활이 지나고 있었다. 내 뜻대로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간 것은 후회없는 선택이었지만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전자공학과에 가기 위해 문과에서 이과로 바꾸었기 때문에 수학을 비롯해서 공부할 것이 남들보다 더 많았다. 친구들과 봄 햇살을 맞으며 꽃구경을 하고 같이 몰려다니긴 했지만, 내가 가장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수업시간이었다.
남자 동기들은 수업이 끝나면 한 무리씩 몰려나가 주점으로 향했다. 막걸리 파티가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가끔은 그런 생활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나는 남자애들 사이에 혼자 끼어서 막걸리를 마실 만큼 대범하지 못했다. 스무살 언저리, 적당히 수줍은 나이였다.
하루는 남자 동기 중 한 명이 내게 성큼 다가오더니, “근혜 씨, 나 데모하러 갑니다” 하고 말을 건넸다. 잠시 뒤 그 친구의 등에 대고 “무슨 이유로 데모를 하는데요? 하고 물었다. 그 남학생은 뒤를 돌아보더니 씩 웃으며 “몸 좀 풀려고요.” 하면서 사라졌다. 마치 ‘나 운동하러 간다’는 말처럼 일상적으로 들렸다.
데모를 하더라도 과 동기들은 수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수업시간마다 빈자리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출석률이 높았다.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온 남학생에게 교수님이 이유를 묻자, “데모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성큼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남학생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보다 수업시간에 늦은 쑥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나는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버지가 알려진 분이셨기에 내 대학생활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운신의 폭이 좁았다. 혹여 내가 실수라도 한다면 부모님 얼굴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항상 긴장하며 지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흔한 미팅 한번 나가지 못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거리를 돌아다닌 적도 없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였다. 돌출 행동이나 엉뚱한 일을 만들어 경호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단 하루, 나는 경호팀의 눈의 피해 일탈을 감행했다. 학교에 등교해서 강의실로 가는 척하다가 뒷문으로 빠져나가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문을 활짝 여니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는 솜사탕처럼 풍성해 보이는 뭉게구름이 평화롭게 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명동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거리를 걷던 중 중앙극장 앞에서 영화 「천일의 앤」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나는 무작정 표를 끊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까지 세 사람 정도가 앉아 마치 개인 전용 영화관처럼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는 16세기 튜더 왕조의 국왕인 헨리 8세와 왕후 앤 볼린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앤 볼린의 기구한 삶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졸였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명동 거리를 걸으며 봄날의 기운을 만끽했다. 사람들의 가벼운 옷차림에서 봄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쇼윈도에 걸린 옷들을 구경하다가 맘에 드는 옷이 있으면 들어가서 걸쳐보기도 했다. 간혹 옷가게 점원이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아요. 혹시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으셨어요?” 하고 물으면, “흔한 얼굴이라서 누구랑 비슷하다는 말 많이 들어요”라고 웃으며 답하곤 했다.
명동 거리에는 멋쟁이들이 많았다. 그 무렵 유행하던 나팔바지부터 미니스커트까지, 경쾌한 여대생들의 옷차림이 보는 눈을 즐겁게 했다. 기타를 둘러매고 오가는 남자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맘에 드는 찻집을 발견했다. 창이 넓어 햇살이 잘 들어오는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피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나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활기차 보였다. 봄이 오니 사람들의 표정에 한결 여유가 묻어나는 듯했다.
맞은편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도 나처럼 수업을 땡땡이친 모양이었다.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먼저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찻집 안에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흘렀다. 그저 평화롭고 나른한 한때였다. 혼자만의 자유, 참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명동성당에 들러 저녁 미사에 참석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간절한 바람들이 느껴졌다. 내 마음도 알 수 없는 경건함으로 고요해졌다.
성당을 나오니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충동적으로 감행한 일탈이지만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걱정하고 계실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아 경호원 또한 애를 먹고 있을 터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꾸중 들을 각오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부모님은 담담한 표정이셨다. 이것저것 물으실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녁식사를 하셨다.
다음 날 태연한 모습으로 학교에 가니 한 친구가 다가와 물었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찾던데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천일의 앤」 봤나요?”
친구는 뜬금없이 무슨 얘기냐는 표정이었다.
“어제 그 영화 봤거든요.”
그제야 친구도 이해하겠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근혜 씨, 다음번엔 혼자 보러 가지 말고 같이 가요, 봄인데 강의실에만 있자니 답답하네요.”
우리는 서로 너스레를 떨며 강의실로 향했다.
그 후로 별다른 사건 없이 조용하게 시간은 흘렀다. 연구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도 점점 공대생의 모습을 갖춰갔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느라 밤늦게 집에 가는 날이 종종 있었다. 독한 화학약품 때문에 스타킹에 구멍이 뚫리기도 했다.
“근혜 씨, 스타킹 땜질해야겠어요. 구멍이 크게 났네요.”
과에 여학생이라곤 단 둘뿐이었기에 가끔 농담스런 말을 듣곤 했다. 이런 일이 잦아서 나중에는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구분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냈다.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앞 음악다방에 앉아 봄 햇살을 즐기며 수다를 떨었는데, 남학생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는 참기 힘들었다. 학교 앞 다방이라는 게 지금의 카페 느낌이 아니라 너구리굴 속처럼 어두운 곳이 많았다. 주로 김추자, 신중현, 송창식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가끔 장발의 남자가 통기타를 치며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 점심은 도시락을 싸가거나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학교 구내식당의 점심 메뉴는 딱 세 가지였다. 자장면, 볶음밥, 오므라이스, 이 중 자장면이 가장 싸고 맛있었다. 자장면 30원, 볶음밥 50원, 오므라이스는 70원쯤 할 때였다. 친구들마다 식성이 달랐기 때문에 세 가지 메뉴를 시켜놓고 나누어 먹으며 수다를 떠는 점심시간은 대학생활의 재미 중 하나였지 싶다.
서강대학교 개교 10주년이 되면서 과별 행사가 있었다. 전자공학과는 생긴 지 2년밖에 되지 않아서 다른 과에 비해 임원수도 적고 모아놓은 과 활동비도 적었다. 강의가 끝나면 남학생들이 우르르 한자리에 모여 가장 행렬 때 무엇을 할 것인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돈도 없는데 입는 것보다 벗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역시 머리가 좋아. 우리 그냥 다 벗고 뛰죠.”
가방을 챙기며 잠자코 남학생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근혜 씨, 우리가 뭘 해야 멋있다고 소문이 날 것 같아요?”
“글쎄요∙∙∙.”
결국 우리 과의 남학생들은 아프리카 토인으로 변신하기로 합의를 본 것 같았다. 나에게는 전자공학과 기를 들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토인 복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감사한지 나는 두말없이 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신촌까지 가장행렬을 벌였다. 웃통을 벗은 남학생들이 토인 복장을 한 채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있으니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아졌다. 보는 사람마다 깔깔거리며 웃고 박수를 쳤다. 나 또한 남학생들의 몰골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과 동기들도 서로의 꼴을 바라보며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 유쾌한 하루였다.
한쪽에서는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캠퍼스 안은 평화로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화사한 색깔의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과 잔디밭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기타를 치는 남학생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학교 규칙에 매우 엄격해서 수업에 빠지면 진급이 어려웠고 제때 졸업을 할 수도 없었다. 교수님들은 학점에 매우 엄격했다. 정말 열심히 하지 않고는 A학점을 받기 어려웠다. 전자공학이라는 학문이 어려우리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선택했으니 더 잘하고 싶었다. 나는 무거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연구실과 강의실을 열심히 넘나들었다.
3학년이 되니 실험과제가 많았다. 물리실험은 2인1조로 진행했는데, 그날 내 파트너는 ROTC 후보생인 친구였다. 그 친구는 후보생 교육이 끝나는 저녁 7시에 실험실에서 만나 과제를 하자고 그랬다. 시간에 맞추어 실험실에 도착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늦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덧 30분이 훌쩍 지나더니 한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급한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다면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텐데, 그 당시는 삐삐조차 없었으니 기다리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친구는 세 시간 가까이 흘러 모습을 나타냈다. 그때까지 실험실에 남아 있는 날 보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몹시 미안한 얼굴로 자신이 임원직을 맡고 있어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그냥 가지 그랬냐고 했다. 나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고 답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12시 통금을 생각해서 우리는 실험을 다음 날로 미루고 공학관을 빠져나왔다. 친구와 학교 정문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래 희망, 가족 이야기, 전자공학에 거는 기대까지 자못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갔다. 나는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누군가의 의지와 소망, 미래를 향한 꿈과 열정을 상상하고 있으면 인생이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세월이 흐른 뒤 우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차가운 밤공기를 맡으며 친구는 먼 미래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살고 있다면 좋겠어요.”
“근혜 씨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데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것은 없어요. 다만 꾸준히 공부해서 학자나 연구원이 되었으면 해요.”
유난히 공기가 차갑고 맑은 가을밤이었다. 밤하늘에 북두칠성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졸업이 다가올 무렵 나는 수석 졸업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예상 못한 일이라 무척 놀랐지만 정말 기뻤다.
다음 날 가족이 모인 점심식사 자리에서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크게 기뻐하셨다. 그날 오후 아버지 집무실 복도에서 비서실장을 만났는데 축하인사를 받았다. 부모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라 의아해 물었더니, 아버지가 너무나 기뻐하시며 이야기를 전해주시더라고 했다.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졌다.
졸업식을 앞두고 내가 입을 한복을 골라주는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네 일이 너무나 가슴 벅차고 두근거려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아.”
어머니의 손에는 꽃자줏빛 한복이 들려 있었다.
“수석으로 졸업을 하는데 옷 한 벌 안 해주고 입던 옷을 입으라고 해서 미안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옷을 깨끗하게 손질해 입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더 뜻 깊은 일이었다. 수석 졸업이 어머니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되었던 듯하다. 뒤늦게 나는 이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한 처음이자 마지막 효도였다는 걸 깨달았다. 불행은 소리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첫댓글 하나부터 열까지 존경가는 분입니다.
우리 대통령님 ~👍👍👍
그쵸~~ 저도 그래요^^
하늘님
고맙습니다.
건데요?
복사 안되요
복사금지 해놨는데, 풀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하늘 어제 올리신 것도 부탁드립니다
@ok 일베 했습니다~
굳모닝~오늘 쾌청
맘은 우울~ㅎㅎ
대통령님 매력에 갈수록 매료되어 가고 있어요
몰랐던 사실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 옛날 추억들도 꺼내게 해주는......
덕분에 감사 해피합니다
LOVE YOU ♡♡♡
읽는 것보다 듣는게 편한 분들은 도미샘이 차분히 읽어주시니 더 좋을거 같아요.
왜 우울하신지 모르겠지만 털어내시고, 맛점, 맛차 하시고 오후는 마음도 쾌청하시길요~😘😍
이쁜 하늘님
수고하심에 감사드려요. 💕
매일 읽어주신다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
천일의 앤
저도 그영화 봤어요
우리 대통령님 구속
되신후 그영화 생각
많이 했어요 설마
대통령님도 천일을
넘기실까 생각했지만
천이백일이 지났어요
부디 건강하시기만
빕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오시길 기도드립니다.🙏
건강하게 견뎌주시길 기도드립니다. 🙏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