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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묵상글 들 ( 2022년 12월 23일. -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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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래서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더구나 하느님의 운동선수인 우리는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습을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또한,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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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요,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 할 것이다.”(시 35,9)라는 시편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찬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들어 높여 앉게 되고, 당신께서는 ‘모후’의 “왕좌”에 올려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욥처럽,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합니다.
이는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러한 구체적인 찬미를 말합니다. 그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30).
결국,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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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야훼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쓴 순간 즉시 혀가 풀렸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었을 때 입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말에는 공수표가 많지만,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역사에 순종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여 있던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거추장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입이 열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지만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성탄이 늦어진답니다. 자가격리를 하고 오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혼란 속에서 주님의 손길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주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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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림특강이 있어서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에 갔었습니다. 같은 서울교구라서 하루 전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강의를 시작하는데 1시간 전에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봉사자들이 왔습니다. 음향을 점검하는 분도 있었고, 제단의 꽃에 물을 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성령기도회 봉사자들이 와서 찬양으로 교우들을 맞이했습니다. 대림특강은 제가 하지만 대림특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특강이 끝난 뒤에는 여성구역에서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교우들은 차와 간식을 드시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매주 미사를 가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10시 30분에 미사를 하는데 9시면 성가대에서 와서 연습을 합니다. 비슷한 시간에 성모회는 그날의 친교 음식을 준비합니다. 형제님들은 탁자와 의자를 준비합니다. 전례 봉사자들은 미사 준비를 합니다. 복사들도 미리 와서 연습합니다. 재정 봉사자들은 미사예물을 받고, 교무금도 받습니다. 미사는 제가 주례하지만 미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주님의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서를 보면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탄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주님이 오시기 전에 길을 닦을 사람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사자는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나의 뒤에 나보다 더 크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 질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날 것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입니다.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언덕은 평평해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평등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즈카리야의 아내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마리아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에게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아직 남자를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성령의 힘으로 그리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의 꿈에도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고,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가 있었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십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며, 이런 이들은 형제의 고통과 절망,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런 자신의 행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임을 깨닫게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이 임박해지면서 우리는 엘리사벳의 축복과 마리아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엘리사벳처럼, 마리아처럼 우리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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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으신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서간집(1842-1860, 스승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을 읽고 있습니다. 순교하지는 않으셨지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셨습니다. 12년 동안 127개나 되는 교우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당신을 찾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찾아가셨습니다. 매년 7,000리(약 2,749km) 이상을 걸으며 어떤 고난과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신자들을 찾아 나셨습니다. 그 결과 탈진해서 만 40세의 한창나이에 병사하시지요.
이런 사목적 열정이 서간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음을 신자들의 열성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를 만나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신자들을 외면하실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제는 훌륭한 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과거와 달리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고, 미사 참석도 자기 편안한 시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계속해서 편안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합니다. 단적인 예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때, 잠시 방송 미사를 허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계속 신앙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당에 가서 미사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아예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어도 주님께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그 시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주님께 대한 열정보다 세상 것에 관한 관심이 더 많은 지금 시대 중, 누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실까요?
주님께 대한 열정을 키워야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관점보다 주님을 더 윗 자리에 모실 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 세상의 눈으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아이를 갖기에는 자기나 엘리사벳 모두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즈카르야의 입을 닫은 것입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부르려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으면서, 세상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이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요? 너무나 편하고 쉬운 신앙생활만 따르다가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게 입이 닫히고 혀가 굳어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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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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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출생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은총이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4-5ㄱㄴ)
12월17일부터 시작된 대림 2부의 매일미사 말씀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이 모두 12월25일 탄생하실 구원자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마침내 예수님의 절친이자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합니다. 새삼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오심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현재의 우리들 모두에게도 오시는 우리 주님은 새삼 우리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즉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오 임마누엘 우리 임금이시요,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대림2부 마지막 날 7일째 12월23일 M후렴 “오! 임마누엘(O Emmanuel)”, 애절한 가사와 곡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신비스런 출생에 앞서 잠시 수도원내의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요즘 근래 보기 드문 겨울 강추위가 더불어 참 많은 흰눈이 내렸습니다. 2000년대 들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예전 어렸을 때의 많은 눈과 강추위를 연상케 합니다. 어제 오후부터 수도관도 꽁꽁 얼어붙어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끝기도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려고 방에 들어가던차 마르코 수사님이 완전 군장한 듯 차림새로 나가기에 어디 가느냐 물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순대를 만들고 들어 온 수사님입니다.
“얼어붙은 수도관 물을 나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밤 12:30분에 기상하여 수도꼭지를 틀으니 지하수 물이 콸콸 나오고 있었고 순간 감동했습니다.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수사님은 얼어붙은 수돗물이 나오도록 고쳐놨던 것입니다. 새삼 “신의 한 수” 같은 하느님이 부르신 수도성소임을 깨닫습니다.
마르코 수사님만 아니라 공동체 12명 수도가족형제들 모두가 "신의 한수" 같은 보물寶物, 하느님의 귀한 선물膳物같은 수도자들입니다. 마침 어제부터는 수도생활을 해보고자 젊은 성소자 한 형제가 함께 했기에 밖의 강추위와는 달리 공동체 분위기도 화기애애했습니다.
살아갈수록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하느님의 섭리 은총 아니곤 해명할 길이 없는 하느님의 선물, 보물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수도가족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60대 성모님을 닮은 피정온 어머니들을 위해 미사중 강론시 ‘아침이슬’을 함께 불렀습니다. 웬지 이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완전히 20대 젊은이들같은 모습으로 열창했습니다. 역시 70-80년대 민주화 운동당시 애국가와 같은 노래임을 새삼 깨닫고 감동했습니다. 이어 “아침바다 갈매기는”으로 시작되는 바다 동요도 힘차게 불렀습니다.
아마 자매들에게 이 두 노래를 부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넉넉하고 푸근한 모성애 향기 가득한 50-60대의 어머니들을 보면 마리아 성모님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절로 마음 끌리는 모성애 가득한 어머니들 덕분에 나라도 가정도 건재함을 깨닫습니다.
요즘 또 산책중 즐겨 부르는 노래가 70년대 후반부터 널리 불려졌던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몇 번 소개했지만 1절의 가사와 곡을 부르며 주님의 평생 전사로서의 신원을 확인하는 참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수도원)’에 ‘군인이(수도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30년(4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꽃다운 내청춘, 푸른옷(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말마디는 반복하곤 합니다. 흡사 군가같아 주님의 전사, 수도자로서 영적전의(靈的戰意)를 새롭게 하는 참 제가 뒤늦게 사랑하게 된 노래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두루두루 우리의 성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제게 다시 살라해도 이렇게 뿐이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성소에 불림받지 않았다면 가정법의 질문도 참 부지없는 질문처럼 생각됩니다. 이렇게뿐이 살 수 없는 수도성소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분들 역시 잘 깊이 들여다보면 최상, 최선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섭리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하느님의 절대적 섭리 은총에 참 신기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불림 받은 이름을 쓰는 순간,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요한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입니다.
새삼 아무도 하느님의 섭리 은총을 막지 못함을 봅니다. 막혔던 둑이 터지듯 저절로 흘러나오는 즈카르야의 하느님 찬미는 내일 나올 것입니다. 즈카르야에게 생긴 기적같은 사건으로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말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은 대림시기 우리 자신에 대한 물음이 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끊임없이 물으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보살필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시고 한결같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제1독서 말라기 예언서 말씀대로 엘리야의 재림같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그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는 제련사의 불같고, 염색공의 잿물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세례자 요한과 함께 주님의 길을 닦으며, 회개의 삶으로 주님께 돌아와 본연의 참나를 살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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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이 올 때까지>
루가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내셨으니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따름이
될 터인데
스스로
하느님 모습을 버린
사람 때문에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거스름이
되었지만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 모습
새로 부어주시어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따름이 되는
그날이 꼭 오기에
그날이 올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곧게
머뭇거리지 않고 힘차게
지금여기에서
사람을 거슬러
하느님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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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3. 2022년 12월 23일.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이야기(루카 1,5-25 참조)에 이어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 1장 57-58절이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은
천사를 통한 탄생 예고와 잉태 보도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뒤 아홉 달이 지났음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은(1,24.26.36.56 참조)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보도는 짧습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1,61; 1마카 2,1-2 참조).
그러나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요한’은 천사가 알려 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사회 규범 사이의 충돌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에게서 아기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였고,
이러한 의심으로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18-20 참조).
즈카르야는 의심과 불순종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뒤늦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분을 찬양합니다(12월 24일 아침 미사 복음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을 마주하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 상반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저마다 과거에서 현재로 변화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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