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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詠 八景 – 제8권
석주집 제7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권필(權韠)
임하 십영(林下十詠)
1
이른 봄 숲의 나무 담담히 고고하고 맑은데 / 早春林木澹孤淸
무수한 산새들은 오르내리며 울어대누나 / 無數山禽下上鳴
어젯밤에 무단히 남쪽 시내에 비 내리니 / 昨夜無端南澗雨
시냇가에 다소의 풀싹이 돋아났도다 / 澗邊多少草芽生
위는 조춘(早春)이다.
2
성근 울타리 낮고 낮은 두세 집 / 疎籬短短兩三家
물은 지당 가득해 개구리 소리에 개 짖는다 / 水滿池溏吠亂蛙
산객이 꿈 깨니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 / 山客夢回山鳥語
새벽바람은 벽도화 재촉해 피우는구나 / 曉風催發碧桃花
위는 모춘(暮春)이다.
3
봄이 저물어 가도 비가 아니 오니 / 春事闌殘雨不來
들판 논엔 물이 없어 누른 먼지 이누나 / 野田無水起黃埃
늙은 농부 새벽에 문을 열고 나와 / 老農淸曉開門出
산 아래서 물줄기 찾느라 낮에도 안 돌아온다 / 山下尋泉午未回
위는 ‘가뭄 걱정〔悶旱〕’이다.
4
시냇가에 푸른 풀은 점차 자라고 / 澗邊靑草漸看長
섬돌 위 한가한 꽃은 흡족히 향기롭다 / 階上閑花滿意香
봉호에 발 걷으니 종일 내리는 비 / 蓬戶捲簾終日雨
작은 지당 그득한 푸른 물에 오리가 목욕한다 / 小池鳧浴綠汪汪
위는 ‘반가운 비〔喜雨〕’이다.
5
세속을 피하느라 연래에 시내 안 건너고 / 避俗年來不過溪
소당은 백운에게 나눠 주어 깃들게 했어라 / 小堂分與白雲棲
맑은 창 정오가 되도록 오는 사람이 없고 / 晴窓日午無人到
오직 있나니 나무 위에서 우는 산새들뿐 / 唯有山禽樹上啼
위는 무위(無爲)이다.
6
솔개와 물고기 태화 중에서 날고 뛰노니 / 鳶魚飛躍太和中
만물이 부침하는 건 한 기운의 움직임일세 / 萬物浮沈一氣融
봄비가 그칠 때 뜰의 풀은 푸르니 / 春雨歇時庭草綠
풀의 이 생의는 사람과 같아라 / 這般生意與人同
위는 관물(觀物)이다.
7
숲 아래는 맑은 시내요 시냇가에는 정자 / 林下淸溪溪上亭
정자 가엔 무수히 어지러운 봉우리 푸르다 / 亭邊無數亂峯靑
유인은 술 취해 누웠고 해는 저무는데 / 幽人醉臥日西夕
만학에 부는 솔바람에 술이 절로 깨누나 / 萬壑松風吹自醒
위는 계정(溪亭)이다.
8
이미 이내 신세를 산림에 부쳤으니 / 已將身世寄山樊
속객이 연래에는 문에 이르지 않누나 / 俗客年來不到門
네 벽에는 도서 쌓였고 등잔 하나 / 四壁圖書燈一盞
이 중에 참된 뜻엔 말을 잊었노라 / 此間眞意欲忘言
위는 독락(獨樂)이다.
9
이 마음은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닌데 / 此心非色亦非空
방촌 속에 만 가지 이치 융회되었어라 / 方寸之間萬理融
본지풍광을 뉘라서 알 수 있으리오 / 本地風光誰解得
본래부터 모두 적연한 중에 있는 것을 / 向來都在寂然中
위는 관심(觀心)이다.
10
세간의 만사를 모두 잊어버리니 / 世間萬事摠相忘
안씨의 단표 그 일미가 유장하여라 / 顔氏簞瓢一味長
맑은 새벽 책을 덮고 눈을 감노니 / 淸曉卷書聊合眼
주렴 너머 가랑비 향을 사를 만하여라 / 一簾微雨可燒香
위는 존양(存養)이다.
[주-D001] 숲의……맑은데 :
당나라 진자앙(陳子昂)의 〈감우(感遇)〉에 “임하(林下)에 살며 병든 때 오래인데, 물과 나무는 담담히 고고하고 맑아라.〔林居病時久 水木澹孤淸〕” 하였다.
[주-D002] 울타리 낮고 낮은 :
육유(陸游)의 〈소원(小園)〉에 “좁디좁은 사립문에 낮고 낮은 울타리, 산가는 분수에 따라 정원과 연못 가졌구나.〔窄窄柴門短短籬 山家隨分有園池〕” 하였다.
[주-D003] 시내 안 건너고 :
진(晉)나라 때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하면서 절 앞의 시내를 건너 속세에 발을 디디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넘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이를 호계삼소(虎溪三笑)라 한다. 《東林十八高賢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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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집 제7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해장 팔영(海莊八詠). 윤경망(尹景望)을 위해 짓다.
천 겹의 봉우리들 그림 병풍 펼친 듯 / 千疊峯巒展畫屛
아침마다 시원한 기운이 창문에 가득해라 / 朝朝爽氣滿窓櫺
유인이 홀로 턱 괴고 구름을 보는 곳에 / 幽人拄笏看雲處
하늘 저편 한 올 푸른빛 가장 사랑하노라 / 最愛天邊一髮靑
위는 ‘영산의 푸른 산빛〔瀛山挹翠〕’이다.
바다는 망망해 아스라이 허공에 잇닿았나니 / 鯨海茫茫逈接空
풍이가 우레와 바람 타고 물결을 일으키도다 / 馮夷鼓浪駕雷風
건곤은 예로부터 동남방이 넓게 트였나니 / 乾坤自古東南豁
일월이 천지의 원기 속에서 부침하는구나 / 日月浮沈元氣中
위는 ‘바다의 파도〔溟海觀濤〕’이다.
동쪽 나루는 멀고 물은 허공과 잇닿았는데 / 東津迢遞水連空
일진의 돛대 위 까마귀는 안개 속에 아득해라 / 一陣檣烏杳靄中
평생에 물결을 헤치고 싶은 종각의 소원 / 宗慤平生破浪願
그 언제나 반 범의 바람을 빌릴 수 있을꼬 / 幾時容借半帆風
위는 ‘모래톱 나루의 먼 돛단배〔沙津遠帆〕’이다.
추운 허공에 번득번득 저녁 갈까마귀 날고 / 寒空閃閃暮鴉飜
붉은 해는 고운 빛으로 해문에 떨어지는구나 / 紅日亭亭下海門
그저 석양이 무한히 좋도록 할 뿐이요 / 但使夕陽無限好
일 많아서 황혼을 두려워할 것은 없어라 / 不須多事怕黃昏
위는 ‘위도의 낙조〔蝟島落照〕’이다.
강가에 시름겨운 빛 갈대꽃에 가득한데 / 江干愁色滿蘆花
멀리 시야에 긴 모래톱이 띠처럼 비꼈어라 / 望裏長洲一帶斜
어드메 푸른 하늘에 몇 줄의 글자가 / 何處靑天數行字
저물녘 바람에 불려 백구의 모래톱에 내려앉나 / 晩風吹落白鷗沙
위는 ‘갈대 우거진 물가의 기러기 행렬〔蘆洲雁陣〕’이다.
학정과 부저가 멀리 아련히 뵈나니 / 鶴汀鳧渚望依依
몇 곳 쇠잔한 마을은 대 사립이 닫혔어라 / 幾處殘村掩竹扉
강어귀에 깊은 밤 개 짖는 소리 들리니 / 江口夜深聞犬吠
밝은 달밤에 고기 잡아 돌아오는 줄 알겠네 / 月明知有打魚歸
위는 ‘죽서의 어촌〔竹嶼漁村〕’이다.
강가 외로운 성은 문이 닫히려는데 / 江上孤城欲閉門
수루의 찬 화각 소리 황혼을 알리누나 / 戍樓寒角報黃昏
몇 가닥 불어서 뜬구름이 사라지니 / 幾枝吹徹浮雲盡
그야말로 백사장에 달빛만 비치누나 / 正見沙汀月一痕
위는 ‘외로운 성 수루의 화각 소리〔孤城戍角〕’이다.
먼 숲에 막 뜬 해는 구리 징이 솟는 듯 / 遠林初日上銅鉦
아득한 극포는 눈 아래 평평히 펼쳐졌어라 / 極浦微茫眼底平
인가가 기슭에 있는 줄 멀리서 알겠노니 / 遙識人家在沙岸
강 너머에서도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인다 / 隔江猶見亂煙生
위는 ‘극포의 밥 짓는 연기〔極浦炊煙〕’이다.
[주-D001] 홀(笏)로 턱 괴고 :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는 성품이 소방(疎放)하고 구속을 싫어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업무를 보지 않았다. 이에 환충이 “그대가 부중(府中)에 있은 지 오래이니 이제 업무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하니, 왕휘지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수판(手板), 즉 홀로 턱을 괴고서, “서산에 아침이 오니, 상쾌한 기운이 이는구나.〔西山朝來 致有爽氣耳〕” 하였다. 《世說新語 簡傲》
[주-D002] 풍이(馮夷) :
수신인 하백(河伯)의 이칭이다. 《초사》〈원유(遠遊)〉에 “상령으로 하여금 비파를 타게 함이여, 해약으로 하여금 풍이를 춤추게 하도다.〔使湘靈鼓瑟兮 令海若舞馮夷〕”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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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집 제7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안락당 팔영(安樂堂八詠). 외구(外舅) 정 신창(鄭新昌) 사억(思億) 을 위해 제하다.
비 온 뒤 청산은 구름이 골짜기에 나오니 / 雨後靑山雲出谿
아침이 오자 삼각산은 동서의 방위 잃었다 / 朝來三角失東西
흰옷과 푸른 개가 잠깐 사이에 생기니 / 白衣蒼狗須臾事
새 시를 읊고자 하매 마음 절로 아득해라 / 欲賦新詩意自迷
위는 ‘삼각산의 아침 구름〔三角朝雲〕’이다.
천리 밖 옥관에서 불빛을 전해 오니 / 千里傅光自玉關
저물녘 구름 저편에서 작은 별이 깜박인다 / 小星明滅暮雲端
뉘라서 알랴 시골 노인 고개 돌리는 곳을 / 誰知野老回頭處
바로 봉래에서 말 세우고 바라보리란 것을 / 正想蓬萊立馬看
위는 ‘성산의 저녁 봉화〔城山夕烽〕’이다.
숲의 안개가 뿌옇더니 이어서 비가 되매 / 林靄霏微仍作雨
시야 속에서 있는 듯하다 다시 없는 듯해라 / 望中疑有更疑無
구태여 가서 원휘의 솜씨 빌릴 것도 없이 / 不須去借元暉手
이미 진신의 수묵도를 마주 대하고 있도다 / 已對眞身水墨圖
위는 ‘장림의 가랑비〔長林細雨〕’이다.
기슭에 무너진 모래가 작은 여울 감싸고 / 古岸崩沙擁小灘
끊어진 다리는 멀리 지는 석양빛 띠었어라 / 斷橋遙帶夕陽殘
여기에 다시금 나귀 탄 나그네가 있으니 / 此間更着騎驢客
그야말로 보는 사람 그림으로 그리면 좋겠네 / 政好傍人作畫看
위는 ‘끊어진 다리의 낙조〔斷橋殘照〕’이다.
안개 빛과 풀 색깔이 함께 어우러지니 / 煙光草色共氛氳
굽은 기슭 휘도는 물 가 멀리 흐릿하여라 / 曲岸回汀遠不分
알겠어라 초동이 소를 치는 곳에서 / 認得村童牧牛處
갈대피리 몇 소리 시내 저편에서 들리누나 / 數聲蘆管隔溪聞
위는 ‘안개 낀 교외 목동의 피리〔煙郊牧笛〕’이다.
들판 물가에서 허리춤에 낫을 찬 사람 / 帶索腰鎌野水濱
누렇게 마른 갈대와 억새 모두 땔감일세 / 黃蘆枯萩盡堪薪
땔감을 지고 가면서 노래하는 곳에 / 安知荷擔行歌地
오늘날의 주매신이 있을지 누가 알랴 / 不有當時朱買臣
위는 ‘갈대숲 언덕 나무꾼의 노래〔蘆岸樵歌〕’이다.
늦벼는 푸릇푸릇하고 올벼는 향긋한데 / 晩稻靑靑早稻香
논 사이 작은 길 비탈의 지당에 들어간다 / 田間小路入陂塘
어젯밤 서풍이 불어 서리가 흠뻑 내리니 / 西風昨夜淸霜重
만 이랑 짙은 구름 반은 누렇게 변했구나 / 萬頃濃雲一半黃
위는 ‘복평의 벼 베기 구경〔洑坪觀稼〕’이다.
바위 가에 작은 그물을 물속에 던지니 / 小網橫沈傍石磯
가을이 오매 자린이 살진 게 참으로 좋아라 / 秋來正愛紫鱗肥
돌아올 때는 언제나 석양이 다 질 무렵이라 / 歸時每趁斜陽盡
안개 낀 물가의 길에 옷은 비에 흠뻑 젖는다 / 一路煙汀雨滿衣
위는 ‘곡포의 투망질〔曲浦網魚〕’이다.
[주-D001] 흰옷과 푸른 개 :
변화무쌍한 구름의 형상을 형용한 것이다. 두보(杜甫)의 〈가탄(可歎)〉에 “하늘 위 뜬구름이 흰옷과 같더니만, 잠깐 사이 변하여 푸른 개가 되었구나.〔天上浮雲如白衣 斯須改變成蒼狗〕” 하였다.
[주-D002] 옥관(玉關) :
감숙성(甘肅省) 돈황(燉煌)에 있는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의 약칭으로, 외적을 방어하는 변방의 관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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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2권 / 시부 2 ○ 궁사(宮詞)
궁사(宮詞)
석주(石洲)는 말하기를 “왕맹(王孟)이나 왕조(王趙)를 논할 것 없이 스스로 기일(奇逸)하고 주려(遒麗)하고 우유(優游)하고 한창(閑暢)하며 또 궁중 고실(故實)을 차례로 가리키듯이 다 말했으니 족히 한 시대의 시사(詩史)에 대비할 만하다. 송원(宋元)의 사람들로는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작품으로서 스스로 일가(一家)의 언(言)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하였다.
당절은 어리어리 검패는 쟁글쟁글 / 幢節玲瓏劍佩高
안상가에 의조 관원 두 줄로 나눠 섰네 / 案邊分立兩儀曹
원조라 대궐 바라 세 번 숭을 부르니 / 元朝望闕嵩呼罷
전각의 봄구름이 채색 깃발 끼고 도네 / 殿角春雲擁彩旄
이는 망궐례(望闕禮)를 가리킨 것으로서 사대(事大)의 성실을 으뜸으로 했으니, 소견이 또한 높다 하겠다.
봄 제향 다다라라 이른 새벽 재를 하니 / 節臨春享値齋晨
궁빈들도 옥신당(玉宸堂)에 근접을 못하누나 / 未許宮嬪近玉宸
그날 되면 상의가 어복을 배정하니 / 當日尙衣排御服
망포랑 정대는 한때에 다 새로워지네 / 蟒袍鞓帶一時新
옥신당은 경복궁(景福宮)의 통명전(通明殿) 북쪽에 있다.
청필을 세 번 외쳐 합문이 열려지니 / 淸蹕三聲啓閤門
작은 수레 새벽에 서원을 나도누나 / 小輿晨出轉西垣
임금님이 연은전에 납신다고 말 전하니 / 傳言駕幸延恩殿
아마 정녕 침원에 앵도를 올리오리 / 想是櫻桃薦寢園
위곡(委曲)하고 완창(婉暢)하다.
밝기 전에 장신전 바깥 문이 열리어라 / 未明長信殿門開
궁녀들은 작선 온다 소리를 외치누나 / 宮女傳聲雀扇來
새벽이면 대가님이 문안 먼저 드리나니 / 拂曉大家先問寢
상서로운 오색 구름 봉래궁(蓬萊宮)을 옹위했네 / 五雲佳氣擁蓬萊
이하 여섯 수는 다 양궁(兩宮)을 받드는 지극한 효성을 말한 것이다.
금을 바른 합자에 은 술잔이 포개놓여 / 金泥盒子疊銀罍
동조로 떠메가라 걸음걸음 재촉하네 / 舁向東朝步步催
미란이라 표태라 어선을 차릴 적에 / 麛卵豹胎排御膳
성은이 친히 손수 조미(調味)하여 온 거로세 / 聖恩親自手調來
십분 친절을 그려냈다.
남은 추위 쌀쌀하여 겹보료를 뚫고 드니 / 餘寒料峭透重茵
호피 방장 초피 이불 봄인 줄을 모를레라 / 豹帳貂衾不覺春
장신전에 밤이 오자 포근히 잠 못 드니 / 長信夜來眠未穩
여의를 들라 하여 궁가는 친히 묻네 / 宮家親問女醫人
형용이 지극히 아름다워 정리(情理)가 도저하다.
건춘문 밖 의장(儀仗)은 우레 같은 외침인데 / 建春門外仗如雷
법부의 풍정이라 작은 잔치 열렸구려 / 法府豐呈小宴開
꽃 속에 줄을 지어 궁녀가 나타나니 / 花裏一班宮女出
양궁은 모처럼 서총대에 납시누나 / 兩宮初幸瑞葱臺
더욱 좋다.
늦은봄 장추궁(長秋宮)에 탄신이 다가오니 / 春晩長秋屆誕辰
조라로 함봉하여 기린 비단 진상하네 / 皁羅封進錦麒麟
법석이라 상준은 전 앞에 배치하고 / 上尊法席排前殿
소균 풍악 차례로 꽃 너머서 아뢰누나 / 花外韶鈞次第陳
명(明) 나라서 보낸 비단 구장이 찬란해라 / 勅賜羅紈燦九章
붉은 함의 싸고 싼 것 천향을 띠었구려 / 硃函包裹帶天香
황제 은택 바다 같아 모두 함께 즐기면서 / 共驩帝澤如深海
자궁께 먼저 청해 총광을 받으시게 / 先請慈宮賞寵光
토산물의 진상이 내일 아침 일인지라 / 土宜封進在明朝
비실이 엉겨엉겨 전묘에 열지었지 / 篚實離離列殿寮
하나하나 품제가 임금님 손 거쳤으니 / 一一品題經御手
검은 삼베 하얀 모시 교초보다 낫고말고 / 黑麻霜苧勝鮫綃
이하 세 편은 또 사대(事大)를 말한다.
문서를 감진하는 일이 은대에 있어 / 文書監進在銀臺
부새 가진 낭관이 새벽을 대어 왔네 / 符璽郞官趁曉來
보함을 메고 나와 침합에 당도하자 / 擡出寶函當寢閤
중관이 친히 받아 임금 앞에 열어 놓네 / 中官親向御前開
형용이 친절하다.
밝은 아침 배표하니 옥패(玉佩) 소리 쟁글쟁글 / 平明拜表佩聲喧
향안의 앞머리에 지존이 꿇어앉네 / 香案前頭跪至尊
광악이라 수당이 길을 먼저 인도하니 / 廣樂綉幢先引路
사신이 떠받들고 대궐 중문 나오누나 / 使臣擎出殿中門
음절(音節)이 갱굉(鏗鍧)하다.
선니에게 제 올리고노부가 돌아오니 / 親享宣尼鹵簿回
취화 먼저 인도해라 계화가 피었구려 / 翠華先導桂花開
나인들이 다투어 궁문을 끼고 보니 / 內人爭擁宮門見
문무의 신은 급제(新恩及第) 모두가 준재로세 / 文武新恩摠俊才
이는 석채(釋菜)를 마치고서 취사(取士)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첨황이 처음 붙고 전홍이 선명한데 / 籤黃初貼篆紅鮮
옥진이라 자개상은 어전에 놓여 있네 / 玉鎭螺床近御前
큰 촛불 반이 타고 궁루는 기나기니 / 椽燭半燒宮漏永
대가님 내일 아침 경연을 여신다오 / 大家明日早開筵
이는 근학(勤學)의 일을 말한 것이다.
놀빛 같은 궁중 술 수뢰에 넘실넘실 / 御醞如霞瀲獸罍
좌합에 선지(宣旨) 내려 수연이 열렸구려 / 傳宣左閤綉筵開
내정에선 대낮에 은촉을 배치하니 / 內庭當晝排銀燭
사신의 밤 등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네 / 留待詞臣夜來對
세 자루 붓 먹 발린 채 양전을 기다리는데 / 三筆淋漓待兩銓
한 자루 뽑아들어 으뜸으로 승천하네 / 一枝抽得首陞遷
겸양하신 성상(聖上) 마음 천명을 아시나니 / 聖心謙讓知天命
조화라 어찌 감히 권형(權衡)을 피하리까 / 造化安能敢避權
이는 명종(明宗)ㆍ중종(中宗)도 다 그러했다. 사(辭)가 곡절(曲折)이 있어 스스로 전아(典雅)함을 깨닫겠다.
동정에서 책시(策試)하여 완란이 모여드니 / 彤庭策士集鵷鸞
임금님께 아뢰어 관을 바로 쓰셨구려 / 已報君王起整冠
무장이라 새벽녘은 촛불 휘황한데 / 武帳曉開銀燭爛
사람 볼까 피하여 제목을 손수 여네 / 手開題目避人看
이는 책사(策士)의 일을 말한 것인데 사(詞) 역시 창량(暢亮)하다.
춘당이라 무사(武事) 사열 연이어 정 울리고 / 春塘閱武疊金鉦
극위는 삼엄할사 채장은 선명하이 / 戟衛森森彩仗明
궁녀들은 느지막에 발 틈새로 노려보며 / 宮女晩來簾隙覰
꽃 너머서 타구하는 그 소리를 멀리 듣네 / 隔花遙聽打毬聲
책상 앞에 가득 쌓인 재단된 문서들을 / 裁斷文書積案前
한꺼번에 메고 나와 합문에서 선포하네 / 一時舁出閤門宣
금오의 장주는 잘 처결해야 하겠기에 / 金吾章奏當詳決
붉은 실을 따로 가져 자세히 묶어 놓네 / 別把紅絲仔細纏
교기에 비 안 온 적 달이 벌써 지났으니 / 郊畿不雨已三旬
임금님 근심 겨워 자신을 옮기셨네 / 聖念憂勤避紫宸
대관에게 특별 분부 수라차림 제한하니 / 特敎大官裁御膳
적어랑 하장이랑 시물(時物) 신물(新物) 줄었구려 / 赤魚蝦醬減時新
빤 옷 가죽신이 겨울을 두 번 나니 / 澣衣革履再徑冬
상복이야 어찌 귀한 저 저호를 용납하리 / 常服寧容紵縞封
예전 일을 잘도 아는 머리 하얀 상궁들은 / 白髮尙宮知舊事
모두 말이 공검일랑 인종님과 같았다고 / 共言恭儉似仁宗
검은 비단 거죽 입혀 초피를 새로 호아 / 新縫貂帔掩烏紗
추위 맞춰 내려주어 은총 한결 더하누나 / 賜趁初寒寵渥加
직성하는 종반에겐 두루 응당 상주지만 / 直省從班當遍賚
그 중에도 제일 먼저 대신 집에 보내주네 / 就中先送大臣家
겹창 뚫는 모진 추위 성상(聖上)은 근심하사 / 寒透重簾軫聖憂
한림을 친히 보내 감옥살이 살피라 하네 / 翰林中使按牢囚
경범죄는 직결하여 얼어 죽는 일 없도록 / 罪輕當決無敎凍
금오와 상구에게 특칙이 내렸다오 / 特勅金吾與爽鳩
강연이라 선호라 어상이 널찍한데 / 江硯宣毫敝御床
비백을 휘두르니 천장이 찬란하이 / 閒揮飛白燦天章
촛불 앞에 스스로 구언 교서 초한 거지 / 燭前自草求言敎
구구하게 묵황을 본받자는 것 아니로세 / 非爲區區效墨皇
강포 차림 아침나절 대궐 중앙에 서서 / 絳袍朝立殿中央
어휘를 친히 쓰니 축지가 꽃답네 / 御諱親書祝紙芳
내일이 한식이라 능에 절을 드리겠기 / 明日拜陵寒食節
예방 승지 나와서 향폐(香弊)를 전하누나 / 禮房承旨出傳香
이어(俚語)를 썼으나 역시 아름답다.
제주에서 바쳐온 말 모두 다 용손이라 / 耽羅貢驥盡龍孫
옥을 뿜는 천 발굽 내구의 문이로세 / 噴玉千蹄內廏門
다만 삼십 필의 승황을 가리고서 / 只擇乘黃三十疋
환위랑 여러 둔에 골고루 나눠 주네 / 摠分環衛及諸屯
탄신 맞아 하례 올려 금란에서 끝이 나자 / 誕辰陳賀輟金鑾
합문(閤門) 밖의 여러 공들 문안만을 드리누나 / 閤外諸公只問安
마장을 마련하여 법종에서 반포하고 / 供御馬裝頒法從
곧 명개를 가져다 재관에게 공급하네 / 旋將明鎧給材官
원중이라 봄철에 종친들을 접대할 제 / 苑中春接內宗親
봉악을 높이 치고 법주를 마련했네 / 鳳幄高張法酒陳
투호놀이 활쏘기를 특별히 허락하니 / 特許投壺仍貫革
비낀 해에 모화의 금은빛이 눈부신걸 / 帽花斜日燦金銀
선계가 해명되자 종묘 뵙고 돌아오니 / 璿系昭誣謁廟廻
봉래궁에 시종하는 백관의 환패 소리 / 百官環佩侍蓬萊
높은 간대 해 오르자 금계는 춤을 추고 / 高竿日上金鷄舞
의장(儀仗)이 늘어서라 천세 소리 들려오네 / 千歲聲從仗裏來
의장이 풀리어라 대궐 뜰엔 하마 사양 / 彤墀放仗已斜陽
진수를 분부하여 옥당에 내려주네 / 敎輟珍羞下玉堂
문무루에 저장된 만 권의 서책들을 / 文武樓中書萬卷
어전에서 종일토록 운향에 쬐누나 / 御前終日爆芸香
봄날이라 꽃구경 옥화당에 거둥하사 / 看花春御玉華堂
동호에서 올린 삭계 글을 친히 보시누나 / 親閱東湖朔啓章
천안이 흐뭇하여 웃음 한 번 웃으시니 / 饒得天顔開一笑
북방에서 지금 막 수의랑이 돌아왔네 / 朔方初返繡衣郞
성 남쪽 정승님이 서연을 모시는데 / 城南丞相侍書筵
오래 입은 면포는 깃이 하마 뚫어졌네 / 猶着綿袍領已穿
종일토록 대가는 검덕을 감탄하여 / 終日大家嗟儉德
내려준 깁 빛나빛나 말 안장에 포개졌네 / 賜羅璀璨疊鞍韉
사직단(社稷壇) 제사 끝나 경첨을 아뢰는데 / 社壇祀畢報瓊籤
악장에 가을 추워 주렴 아니 걷었구려 / 幄帳秋寒未捲簾
느지막 궐문 앞에 전하는 말 당도하니 / 向曉闕門傳語至
육룡이 수레 메자 엄고 세 번 울리누나 / 六龍初駕鼓三嚴
전아(典雅)하다.
원 밖에서 중관이 첩여에게 알리는 말 / 苑外中官報婕妤
현관이 가마 타고 농사 구경 납시다가 / 縣官觀稼駕肩輿
온종일 대궐 앞에 선소가 전혀 없어 / 殿前盡日無宣召
선조의 내훈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네 / 譯得先朝內訓書
오늘은 사기라서 청재에 앉으시니 / 今朝私忌坐淸齋
장주가 앞에 쌓여 취재를 못하여라 / 章奏盈前未取裁
백판에다 공사를 가득 써 올리면서 / 白板滿書公事進
연달아 사알 불러 은대가 들썩이네 / 連呼司謁鬧銀臺
조종의 공업이 산하에 있는지라 / 祖宗功業在山河
이백 년 이래에 지과를 기뻐하네 / 二百年來喜止戈
왕의 자취 터가 잡힌 유첩이 남았으니 / 王迹始基遺牒在
육궁에선 다투어 어천가를 부르누나 / 六宮爭唱御天歌
서교에서 조칙 맞아 북이 세 번 울리어라 / 郊西迎勅鼓三通
극위(戟衛)는 대열 짓고 구진의 붉은 깃발 / 森戟鉤陳大旆紅
전해 외쳐 시신들 일제히 말에 오르니 / 傳叫侍臣齊上馬
연 앞의 맑은 창은 깊은 궁에 들리누나 / 輦前淸唱徹深宮
당체시 노상 읊는 성상의 슬픈 정곡 / 每吟棠棣聖情哀
북전이라 때때로 작은 악장(幄帳) 열리누나 / 北殿時時小幄開
낮을 당해 태관이 곡연을 배설하니 / 向午太官排曲宴
원문에선 두 분 군이 듭신다고 전해 외쳐 / 苑門傳叫二君來
상서는 멀리서 변무장을 받들어라 / 尙書遠奉辨誣章
황제 칙지(勅旨) 정녕하여 총광을 빌리었네 / 帝勅丁寧借寵光
꽃비단 검은 초피 모후(母后)에게 은혜 미치고 / 花錦皁貂恩逮母
다시 또 소배방의 금배를 반사(頒賜)하네 / 更頒金帶小排房
기이한 빛 방에 가득 주태가 찬란하니 / 異光盈室絢珠胎
여러 경을 급히 불러 풀을 걷어 오게 하네 / 急召諸卿捲草來
밤중이자 여관이 짚새기를 꼬면서 / 夜半女官綯藁索
뉘가 아들 많고 또 재(災)가 없나 물어보네 / 問誰多子又無災
금린이라 살찐 잉어 사옹에서 올려오니 / 錦鱗赬鯉薦可饔
발랄한 은 소반에 꼬리 갈기 빛이 붉어 / 潑剌銀盤尾鬣紅
선부에게 분부 내려 회를 빨리 치게 하여 / 特敎膳夫催作膾
수라 때에 맨 먼저 덕빈궁에 올리라네 / 飯時先進德嬪宮
겨울철 전에 앉아 사륜을 열람할 제 / 冬時坐閱殿絲綸
공봉하는 향료는 기운이 봄과 같네 / 供奉香醪氣似春
술맛이 요새 와선 사뭇 독하고 매워 / 酒味近來頗酷烈
중관은 말 전하네 여자의 의인에게 / 中官傳語內醫人
운잔의 주홍 새서(璽書) 은사에 절 올리며 / 雲牋紅璽拜恩私
여관(女官)들은 다투어 숙의에게 하례하네 / 爭賀昭容進淑儀
십 년이라 내직은 전급이 없었는데 / 內職十年無轉級
금분에 이제 처음 사내 아일 씻깁니다 / 金盆今始洗男兒
여반들은 일제히 새 단장을 갓 끝내자 / 新粧初罷女伴齊
동틀 무렵 중궁은 전 서쪽에 앉아 있네 / 拂曙中宮坐殿西
삭참이라 재배하고 눌러 시립해 보니 / 再拜朔參仍侍立
어의의 겸제 사용 오늘에야 알았다오 / 御衣今識用縑綈
이하 7편은 후덕(后德)에 관계된 것이다.
이른 아침 식감이 삭선을 진설하니 / 食監朝陳朔膳筐
까만 배라 붉은 대추 가장 색다른 빛을 / 玄梨紅棗最輝光
합 안에서 여러분 왕자를 불러내어 / 閤中呼出諸王子
중궁 슬하로 나가 다투어 맛을 보네 / 爭就中宮膝下嘗
여러 빈방 액문을 마주 대해 열렸으니 / 諸嬪房對掖門開
매일 밤 살짝 재미 자주 갔다 돌아오네 / 每夜偸歡數往廻
어둠 속에 말 웃음 들리잖게 조심조심 / 暗裏不敎人笑語
중전 상궁 갑자기 나타날까 두려워서 / 怕他中殿尙宮來
의련의 진배일랑 자주 말라 분부하고 / 進排衣練莫敎頻
겸주를 죄다 흩어 궁인(宮人)에게 상을 주네 / 散盡縑紬賞內人
외가에만 혜택을 치우치게 아니하고 / 不向外家偏惠澤
서적만을 가져다 제친에게 주었다오 / 只將書籍賜諸親
평상시엔 전합을 열어놓지 말게 하여 / 殿閤常時不許開
제방은 문틈으로 문안하고 돌아가네 / 諸房門隙問安廻
첫새벽에 특별히 황금약을 열게 하니 / 凌晨特啓黃金鑰
왕자의 부인들이 선물(膳物)을 올려오네 / 王子夫人進膳來
기도 파한 뭇 망제(望祭)에 모든 무당 배척하며 / 罷祈群望斥諸巫
내주에 진수 올림 허용하질 아니했네 / 不許珍羞薦內廚
성스러운 덕이 본래 기호가 없지마는 / 聖德本來無嗜好
수중엔 오히려 대진주를 가졌어라 / 手中猶捻大秦珠
대군에게 바친 폐백 천 끝이 더 넘으니 / 大君貢幣過千端
내다 팔아 좋은 비단 구해 드리도록 하네 / 斥賣令求上服紈
기릉의 연례 진상 이해 들어 정지되니 / 今歲綺綾停例進
문틈으로 상의관을 친히 불러 분부하네 / 隙門招敎尙衣官
원조라 궁중 하례 새벽같이 시작되어 / 元朝內賀拂晨來
어합에 문안하는 첩자가 돌아오네 / 御閤親安帖子廻
후대에 다시 올라 햇빛을 바라보니 / 更上侯臺看日色
뭉게구름 서린 채색 봉래궁(蓬萊宮)을 둘렀어라 / 簇雲霏彩擁蓬萊
이 아래는 궁중 절서(節序)에 대한 고사를 기재하였다.
저녁이자 등롱이 전대에 비추니 / 當夕燈籠映殿臺
상서 맞이 다투어 자하배를 올리누나 / 延祥爭進紫霞杯
모든 방문 닫아라 사리를 감췄으니 / 諸房門閉藏絲履
한밤중에 여윈 귀신 들어올까 두려워서 / 恐有中宵瘠魅來
해일이 지나가고 자일이 어두워지니 / 亥日纔過子日曛
궁녀들은 대궐 앞에 구름처럼 늘어섰네 / 殿前宮女立如雲
밤새도록 짚불을 여러 원에 살라대니 / 連宵藁火燒諸苑
돼지 주둥이 지져대고 쥐 주둥이도 지져대네 / 猳喙熏來鼠喙熏
봄을 맞는 방자는 은화로 첩을 지어 / 延春榜子帖銀花
세 궁에 올리고서 좋은 날을 축하하네 / 持獻三宮其拜嘉
인승이랑 채번을 재단하여 이루어지자 / 人勝彩幡初剪出
자의를 시신 집에 나누어 보내누나 / 紫衣分送侍臣家
오색 구름 서린 끝에 아침 햇빛 찬란해라 / 朝暾晃朗矞雲端
인일이 맑고 밝아 양전이 즐겨하네 / 人日淸明兩殿歡
새벽부터 반궁에선 선비를 고교(考校)하니 / 拂曉泮宮方校士
중관을 친히 보내 황봉을 내리누나 / 黃封宣賜遣中官
초벽이 너울너울 이삭 줄기 얽혔는데 / 椒壁離離綴穗莖
요화로 엿 만들어 토우를 제사하네 / 土牛初祭蓼花餳
시녀들이 다투어 전 앞에 모여들어 / 殿前侍女爭來集
금년에는 곡일이 맑다고 축하하누나 / 共賀今年穀日晴
내주에선 모처럼 향반을 쪄내어 / 香飯初蒸出內廚
상원이라 대보름 뭇 까마귈 먹여주네 / 上元佳節飼群烏
전맹에 해 오르자 앞다투어 바라보니 / 殿甍日射人爭看
기왓골 여기저기 하얀 밥알 깔려 있네 / 鴛瓦離離白粒鋪
새벽종 갓 들려라 운려가 열리나니 / 曉鍾纔徹敞雲廬
오늘 아침 어느덧 이월이라 초하룰세 / 驚覺今晨二月初
취충을 없애자고 연례행사 시행하니 / 要除臭蟲行舊事
궁앞 뜰에 솔잎을 여기저기 깔았구려 / 亂鋪松葉殿前除
궁중이라 한식날 연기 아니 금하는데 / 寒食宮中不禁煙
상림원(上林苑)의 쑥잎은 새파랗게 우거졌네 / 上林艾葉欲芊綿
궁 사람 캐고 캐어 소매품에 가득 차니 / 宮人採摘盈懷袖
흰 가루로 전 만들어 어전에 올리누나 / 煎作霜糕薦御前
청명이라 개수는 병랑에 소속되니 / 淸明改燧屬兵郞
문당에게 전해주어 건장으로 들어가네 / 傳授門璫入建章
유화는 하 새롭고 괴화는 갓 고우니 / 楡火正新槐火嫩
세 전에 분산하고 여러 방에 미치누나 / 散分三殿及諸房
금중이라 삼월 삼질 좋은 철을 만나 하니 / 禁中佳節値三三
여러 전의 궁아들은 엷은 옷을 입어보네 / 諸殿宮娥試薄衫
상림원을 향해 가서 다투어 투초하니 / 爭向上林來鬪草
그 중에도 맨 먼저 의남초(宜男草)를 취하누나 / 就中先取翠宜男
상도화(緗桃花) 비끼어라 벽도화(碧桃花) 중얼중얼 / 緗桃斜映碧桃開
백엽의 해당(海棠)에다 옥매도 끼었구려 / 百葉玟瑰間玉梅
푸른 등자(凳子) 붉은 분이 전폐에 널렸으니 / 靑凳紫盆羅殿陛
오늘은 상림에서 꽃을 진상해 오네 / 上林今日進花來
한낮이자 회랑에선 죽렴을 걷었어라 / 日午回廊卷竹簾
푸른 뽕잎 따고 따서 광주리에 가득 찼네 / 靑靑桑葉摘盈籃
궁인들이 대궐 아래 앞을 다퉈 와 바치니 / 宮人殿下爭來獻
첫잠 잔 팔잠에게 밥을 주라 명하누나 / 命餧初眠八繭蠶
귀인이 처음으로 엷은 깁옷 떨쳐 입고 / 貴人初試薄羅衣
홍도화 꺾어든 채 전 문에 기대었네 / 手折紅挑倚殿扉
해가 늦은 두청에 공사가 끝이 나니 / 日晩頭廳公事畢
성상께선 술을 따라 가는 봄을 전송하네 / 聖君斟酒送春歸
방거랑 닫는 말은 양대에 걸렸어라 / 紡車走馬掛涼臺
사월 파일 관등하러 양전이 납시었네 / 八日觀燈兩殿來
명년에 하느님이 복 내릴까 점을 치며 / 暗卜明年天降嘏
나인들은 다투어 옥충의 재를 보네 / 內人爭看玉蟲灰
돌 분의 맑은 물을 여관들이 끌고 나와 / 女官提出石盆湯
새벽같이 어전에서 꽃잎을 적셔주네 / 趁曉澆花御座傍
옥색의 도미향은 하마 벌써 눈 같으니 / 玉色酴醾香已雪
전의 서쪽 해돋이에 요황을 감상하네 / 殿西初日賞姚黃
천중이라 합문 앞에 상첩이 붙었는데 / 天中祥帖閤門前
창포주(菖蒲酒) 잔에 가득 애호도 달려 있네 / 蒲酒盈觴艾虎懸
몰래 어원을 향해 여반을 불러내어 / 偸向御園招女伴
푸른 괴수(槐樹) 그늘 속에 추천을 시험하네 / 綠槐陰裏試秋千
단오날 대내에서 채선을 내리는데 / 綵扇端陽內賜時
은대와 경악에서 은혜 가장 많이 입네 / 銀臺經幄最恩私
바람 머금은 그 부채 봉안에다 백동(白銅) 고리 / 含風鳳眼銅環箑
관가가 아니고선 가질 수 없는 거지 / 不是官家不得持
삼복이라 궁중 단장 부환을 제거하고 / 三伏宮粧去副鬟
잠방이 차림 서합에 빙산을 첩지었네 / 衩衣西閤疊氷山
채운 수박 담근 오얏 더위 한창 식히는데 / 割苽沈李方蠲熱
궁감이 문득 와서 만반을 재촉하네 / 宮監俄來促晩班
촉만반(促晩班)은 보석반(報夕班)으로 된 데도 있다.
맑은 물결 굽어 쏟아 홍루를 안고 도니 / 晴瀾曲瀉抱紅樓
보름날 틈을 타서 잔치 놀이 벌였어라 / 望日偸閒作宴遊
얼음에다 채운 단병 한속(寒粟)이 일어난 듯 / 團餠侵氷寒起粟
유두건만 머리 감을 생각마저 포기되네 / 却抛雲髻洗流頭
갈잎 빻고 고기 다져 만두를 만들어라 / 糝蘆泥肉製饅頭
참외와 과일들을 걸교루에 벌여놓았네 / 瓜果爭陳乞巧樓
밤이 들자 나인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 入夜內人爭指點
은하수 서쪽 가라 견우에게 절 드리네 / 絳河西畔拜牽牛
중원이라 좋은 철 난분을 차려놓고 / 中元佳節設蘭盆
만과는 주렁주렁 백종이 번성쿠나 / 蔓果紛披百種繁
동서에 조회 파하자 궁감은 물러가서 / 東序罷朝宮監去
상림원 깊은 곳에 죽은 넋을 제사하네 / 上林處深祭亡魂
호서에서 처음으로 진상해온 이른벼는 / 湖西初進早稻來
은합에 소복소복 흰 쌀의 무더길레 / 銀盒離離白粒堆
침원에 걷어보내 오전을 지공하고 / 輟送寢園供午奠
내의는 아울러 자하배를 올리누나 / 內醫兼進紫霞杯
석 달 가을 달빛은 이 밤이 가장 좋아 / 三秋月色此宵多
지대라 뒷동산을 잠시나마 지나보네 / 苑後池臺得暫過
흠경각 앞에 오자 하늘은 물 같으니 / 欽敬閣前天似水
돌 난간 높은 데서 상아에게 절하누나 / 石欄高處拜嫦娥
날을 가려 원서당에 선비들을 고시(考試)하니 / 涓辰試士苑西堂
최고 소리 두둥둥 하마 벌써 석양일레 / 催鼓逢逢已夕陽
유삼이라 국영으로 남 모르게 짝을 맺어 / 萸糝菊英偸結伴
통명전을 벗어나 중양놀이 짓는구려 / 通明殿外作重陽
동지(冬至)라 관대에서 한 양을 기다리니 / 至日觀臺候一陽
황패는 양전(兩殿) 뜰에 완항처럼 늘어섰네 / 兩庭璜佩立鵷行
용포자락 일찌감치 전전에 다다르니 / 龍袍趁早臨前殿
선주에 재촉하여 팥죽을 올리게 하네 / 催進仙廚豆粥嘗
원내라 요림 속엔 들매화 모양 변코 / 苑內瑤林變野梅
대궐 뜰 궁기와는 한빛으로 하얗구나 / 殿墀宮瓦白皚皚
금천교 다리 위에 갖신 소리 모여드니 / 錦川橋上靴聲集
이는 다 오늘 아침 눈을 하례하자는 것 / 盡是今朝賀雪來
납일이라 재단에 눈이 한창 몰아치고 / 臘日齋壇雪驟來
육군은 들 밖으로 사냥갔다 돌아오네 / 六軍郊外獵初廻
멧돼지랑 다람쥐가 낭옥에 가득 차니 / 豪猪蒼鼠堆廊屋
오는 해를 기다려서 두재를 낫게 하네 / 留待來年療痘災
구나 소리는 침문에 들려오고 / 驅儺聲徹寢門深
학춤이랑 계구는 금림에 들썩이네 / 鶴舞鷄毬鬧禁林
오색 처용 일제히 소매를 떨치면서 / 五色處容齊拂袖
기행으로 다투어 봉황음을 부르누나 / 妓行爭唱鳳凰吟
‘妓行相對讚觀音’으로 된 데도 있다.
홍건의 가면으로 소 형상을 시늉하며 / 紅巾假面着牛形
징 북 들썩이고 도열(桃茢)로 뜰을 쓰네 / 鑼鼓喧闐茢掃庭
수만 집이 한때에 귀신을 몰아내라 / 萬戶一時驅鬼出
천왕이랑 선녀를 문병에 붙인다오 / 天王仙女帖門屛
맑은 새벽 소대에 홍금을 하사하니 / 淸曉昭臺賜錦紅
고화는 차곡차곡 자리는 선명하네 / 誥花晴壓紫泥瀜
내인과 방외들은 다투어 와 하례하고 / 內人方外爭來賀
상식도 오늘 아침 상궁에게 절을 했네 / 尙食今朝拜尙宮
이하는 궁중의 고사를 잡기(雜記)하였다.
품 좁은 깁저고리 꽃무늬도 자잘할사 / 衫羅窄窄小花文
새로 들어온 궁인 두 대로 갈라졌네 / 新入宮人兩隊分
어상을 한번 모실 차례임을 알겠으니 / 知是御床容一直
뭇사람 속에 먼저 붉은 치마를 입었구려 / 衆中先着石榴裙
세숫대야 받들어라 작은 주방 지키면서 / 匜槃直守小廚房
요지 향해 무릎 꿇고 주장을 올리누나 / 跪向瑤墀進酒漿
내가 만나뵈도 오히려 피할세라 / 逢着內家猶不避
일생 동안 한번도 군왕을 못뵙는걸 / 一生曾未識君王
허, 광녀(曠女)와 기재(棄才)가 얼마이랴.
초년에는 이불 안고 춘당에 직했는데 / 初年抱被直春堂
병으로 휴한하여 곡방에 있게 됐네 / 因病休閒在曲房
굳이 소아를 맞아 데려다 대식하며 / 强就小娥來對食
의장을 손수 열고 나상을 내주누나 / 手開箱篋乞羅裳
대식(對食)이란 두 글자는 반사(班史) 비연전(飛燕傳)에서 나왔는데 지금 궁중에도 있다.
합문 밖 첫새벽에 백관이 웅성웅성 / 閤外凌晨擁百官
뜰을 나눈 깃발들은 서린 용이 찬란하네 / 分庭旗尾燦龍蟠
궁인들은 가서봉 알지를 못하고서 / 宮人不識哥舒棒
횡문의 적장으로 인증하여 보는구려 / 認作橫門赤杖看
은선 두른 비단 보에 귀한 음식 고이 싸서 / 圈銀羅褓裹瓊饔
사묘의 재하는 날 상궁을 보내누나 / 私廟齋晨遣尙宮
유모를 바로 쓰고 연로에 다다르니 / 帷帽着來臨輦路
어인은 오화총을 끌고 나와 올리누나 / 圉人牽進五花驄
경루(瓊樓)에 홀로 앉아 붉은 나의 수놓으니 / 瓊軒坐繡紫羅衣
한 가닥 향 연기는 창 밖으로 흩날리네 / 一炷爐香散晝扉
종일토록 궐문에 갈도 소리 못 듣겠고 / 終日闕門無喝道
요즘와선 더욱더 간서가 드물다오 / 爾來尤覺諫書稀
봄비단 가는 띠는 서비로 질끈 묶고 / 春羅細帶束犀比
보월의 얽힌 구슬 자리를 맺었구려 / 寶月珠纏結紫褵
예관에게 분부 내려 별원을 치장하니 / 敎着禮官治別院
대방이라 옹주님 혼기가 닥쳤기에 / 大房翁主有婚期
서궁으로 밀려난 뒤 구관을 닫아건 채 / 譴在西宮閉九關
삼년이 지났어도 용안을 못뵈었네 / 三年猶未覲龍顔
오늘 아침 비로소 황감을 하사받고 / 今朝始賜黃柑子
보낸 사람 마주 대해 검은 머리 매만지네 / 却對來人理翠鬟
은대로 올렸어라 봉잔이 차곡차곡 / 銀臺投進疊封箋
관료들 성적고사 이해에 있음일세 / 知是官僚殿最年
성상께서 열어보는 그날을 기다려서 / 直待上前開坼日
글월 아는 궁녀들이 어상(御牀)에 접근하네 / 解書宮女近床邊
문무를 뜰에 나눠 계화가 향기롭자 / 分庭文武桂初香
문틈으로 궁녀들은 두어 줄을 둘러쌌네 / 門隙宮娥擁數行
장원을 외쳐오자 후배가 많아지니 / 唱到壯元多後拜
발 밀치고 다투어 녹의랑을 바라보네 / 排簾爭看綠衣郞
접고 펴길 폐했어라 아첨을 깊이 꽂아 / 深揷牙籤廢卷舒
노랑보에 겹겹 싸서 재려에 두었다오 / 重包黃袱置齋廬
사람이 훔쳐보질 못하도록 함봉하고 / 緘封不許人偸見
전조부터 내려온 석하서라 이르기만 / 道是前朝石下書
내일 새벽 산릉(山陵) 거둥 화류 말을 익히느라 / 明晨陵幸習驊騮
태복은 원 속에서 아침 내내 남아 있네 / 苑裏終朝太僕留
말 잘 타는 내승을 입닳도록 칭찬하며 / 爭賛內乘騎馬慣
채찍을 비껴 들고 작은 홍루 지나가네 / 嚲鞭橫過小紅樓
원화는 잎이 뜨고 물조차 해맑은데 / 圓花浮葉水漣漪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와 봄 적삼을 빨래하네 / 來浣春衫慶會池
날마다 발 밖에서 오고 소리 들려오니 / 每日隔簾聞午鼓
옥 섬돌 꽃 그림자 두어 전을 옮겼구려 / 碧堦花影數塼移
무고라 동녘 머리 별원이 깊숙하니 / 武庫東頭別院幽
대방에서 오히려 내중에 와 노니누나 / 大房猶到內中遊
궁아(宮娥)에게 허(許)할 건가 횡루에 오르도록 / 橫樓肯許宮娃上
굽이굽이 모두 다 상렴을 내렸구려 / 曲曲緗簾盡下鉤
유적이라 봄날 아침 자신을 둘렀는데 / 褕翟春朝拱紫宸
향기로운 어삼엔 수놓은 기린 주름졌네 / 御衫香蹙繡麒麟
은비녀 칠보(七寶) 머리 앞에 나와 절 올리니 / 銀釵寶䯻當前拜
궁중에 제일가는 사람이라 이르는걸 / 道是宮中第一人
궁중(宮中)을 승은(承恩)으로 한 데도 있다.
자옥이라 구란의 비녀를 새로 꽂고 / 新簪紫玉九鸞釵
웃으며 옥계 내려 봉혜를 신는구려 / 笑下瑤階躡鳳鞋
귀가를 향하여 사물이라 자랑하며 / 說向貴家誇賜物
먼저 가슴 앞의 작은 금패를 내보이네 / 胸前先示小金牌
연꽃 버선 노랑치마 남다른 사랑 입어 / 蕖襪緗裙荷寵殊
겨울 아침 부름 받아 호담요에 꿇어앉네 / 冬朝承召坐氍毹
관가는 당 동쪽을 자수(自手)로 가리키며 / 官家自指堂東廡
양귀비(楊貴妃)의 출욕도를 감상하라 이르시네 / 令賞楊妃出浴圖
가을이라 비단 요로 난방을 지키자니 / 羅裀秋直小蘭房
고요한 밤 바람 슬슬 전각이 서늘쿠나 / 靜夜西風殿角涼
잠결에 부르시는 말씀 소리 들리는 양 / 睡裏訝聞天語喚
발을 누른 은방울이 땡그랑 울리누나 / 壓簾銀蒜響琅璫
꽃 서린 둥근 베개 검은 머리 기름지고 / 蟠花圓枕膩雲鬟
용뢰(龍腦) 사향(麝香) 타는 연기 박산이 어둑하이 / 龍麝霏熏暗博山
오경이라 장막 속에 놀라 꿈을 깨니 / 帳裏五更驚夢罷
쇳소리 징글징글 당기어라 구문 고리 / 鏁聲金掣九門環
[주-D001] 왕맹(王孟) :
당(唐) 나라 때 시인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의 별칭.
[주-D002] 의조(儀曹) :
예조(禮曹)의 별칭이다.
[주-D003] 세 번 숭(嵩)을 부르니 :
신민(臣民)이 천자의 만세(萬歲)를 부르는 일. 한 무제(漢武帝)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서 호숭(呼嵩)ㆍ산호(山呼)라고도 한다.
…………………………………………………………
성호사설 제30권 / 시문문(詩文門)
심약 팔영(沈約八詠)
심약(沈約)의 팔영(八詠) 중 그 수산동(守山東)이란 제목으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동을 지킴이여 / 守山東
산동의 만 봉우리 푸른빛이 무럭무럭 / 山東萬嶺欝靑葱
두 시내 한데로 뭉쳐 흐르는데 / 兩溪共一瀉
그 물이 하도 맑아 텅 빈 것 같네 / 水潔望如空
봉우리 곁에는 청사가 덮이었고 / 峯側靑莎被
바위 사이엔 단계가 엉겨 있구려 / 巖間丹桂叢
위로 쳐다보니 울울창창 무성하고 / 上瞻旣隱軫
아래로 굽어봐도 역시 아득아득 / 下睇亦冥濛
아슬한 저 숲에는 짐승 소리 메아리치고 / 遠林響咆獸
가직한 이 나무엔 벌레 울음 시끄러워라 / 近樹聒鳴虫
야계의 바른 편으로 길은 나고 / 路出耶溪右
금화의 동쪽으로 물은 지고 / 澗吐金華東
만 길의 돌은 아슬아슬 기울어 있고 / 萬仞側危石
일백 길 매달려 폭포는 쏟네 / 百丈注懸潨
끌고가니 흐르는 번개와도 같고 / 掣曳瀉流電
달아나니 하얀 무지개와도 같구만 / 奔飛似白虹
뚫린 우물은 맑은 기운 머금었고 / 洞井含淸氣
터진 구멍은 빠른 바람 토해내고 / 漏穴吐飛風
옥두에는 진액이 뚝뚝 떨어지고 / 玉竇膏滴瀝
석실에는 종유가 영롱하구려 / 石室乳空籠
나는 평소에 몹시도 사랑했는데 / 余平生之素愛
늙어서 갑자기 이를 만나다니 / 颷暮年而此逢
한번 떠나 돌아오지 않고 싶지만 / 欲一去而不還
임금이 아니 들어 한스러워라 / 恨邦君之未褫
임기가 찼건마는 흰 구름 어루만지며 / 秩滿撫白雲
머물러 있어지수를 일삼는다오 / 淹留事芝髓
이 한 편의 시는 어의(語意)가 초월하고 모사가 핍진하여 글귀마다 욈직하다. 이백(李白)의 망여산폭포(望盧山瀑布)라는 한 편은 바로 이 시를 환골(換骨)하고 전신(傳神)한 것이니, 그의,
공중에서 물줄기 어지러이 쏘아대어 / 空中亂潨射
푸른 벽을 좌우로 씻어 내리네 / 左右洗靑壁
라는 것은, 위석(危石)ㆍ현종(懸潨)의 글귀에 비하면 이백이 심약보다 낫다 하겠고, 그,
빠르기는 나는 번개가 오는 듯하고 / 颷如飛電來
은은히 흰 무지개가 이는 것 같네 / 隱若白虹起
라는 것은, 철예(掣曳)ㆍ분비(奔飛)의 글귀에 비하면 심약이 이백보다 낫다 하겠으며, 또 그,
나는 물방울은 가벼운 놀에 흩어지고 / 飛珠散輕霞
흐르는 거품은 우뚝한 돌에 엉기네 / 流沬渫穹石
라는 것은 이백의 기교가 또 생각 밖에 나왔다 하겠다.
요컨대, 심약은 숨은 종적을 현상(玄賞)하는 느낌을 주고 이백은 금골(金骨)을 헛되게 거니는 것과 같다.
[주-D001] 심약 팔영(沈約八詠) :
양(梁) 나라 때 시인 심약(沈約 : 441~513)이 원창루(元暢樓)에 대하여 읊은 8편의 시를 가리킴.
[주-D002] 지수(芝髓) :
지초(芝草)의 골수를 이름.
[주-D003] 전신(傳神) :
붓과 먹으로 사람의 상모(狀貌)를 그려서 능히 그 정신을 얻는다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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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1권 / 시(詩)
〈희선재(希善齋) 팔영(八詠)〉에 차운하다
언덕 위 우뚝한 몇 그루 나무 찾아가니 / 隴上亭亭幾樹尋
언덕 앞에는 쉽사리 가을 그늘이 머문다 / 隴前容易逗秋陰
어느 누가 괴로운 바람 소리 참고 듣는고 / 何人正耐聽風苦
도는 정이 없으면서 또한 마음이 있어라 / 道是無情亦有心
이는 ‘언덕 위 나무에 가을바람〔隴樹秋風〕’에 차운한 것이다.
베개 베고 누워서 꿈도 다하려 할 제 / 欹枕軒堂夢欲殘
지당(池塘)에 가랑비 내려 서늘한 기운 보탠다 / 方池小雨助輕寒
푸른 옥쟁반 중에 울리는 소리는 / 惟應綠玉槃中響
만 알의 명주가 어지러이 떨어지는 것이리 / 亂落明珠萬顆團
이는 ‘지당 연잎에 가을비〔池荷夜雨〕’에 차운한 것이다.
땅 뒤덮은 구름인 양 위세가 대단하더니 / 羃地雲屯勢壓瀾
천 마리 말 떼가 갑자기 강가에 은은히 보인다 / 千羣倏忽隱江干
당시에 채찍 들고서 좋은 말 없다 탄식하여 / 當時執策嗟無馬
공연히 용마 후손이 팔란을 꿈꾸게 했구나 / 空使龍孫夢八鑾
이는 ‘홍원의 말 목장〔紅原牧馬〕’에 차운한 것이다.
포구 물가 희미해지며 소낙비 지나가니 / 浦渚依微白雨過
푸른 물결에 많은 갈매기가 사람에게 다가온다 / 蒼波鷗鷺近人多
조대에서 북소리 듣고 궤안을 치지 말라 / 釣臺聞鼓休撞几
돌개바람이 저물녘 물결을 휩쓰는 줄 아노니 / 知有回風晩撇波
이는 ‘옥경의 돌아오는 돛단배〔玉徑歸颿〕’에 차운한 것이다.
일말의 붉은 기운 반쪽 하늘에 걸쳤나니 / 蒸紅一抹半天橫
새벽 햇살에 어리비치어 온갖 변태 생긴다 / 曉旭含輝變態生
또한 스스로 바람 따라 흩어져 비단 이루니 / 也自因風散成綺
천태산 어느 곳에서 표지를 세우는 것인가 / 天台何處建標城
이는 ‘비슬산의 새벽노을〔琵琶曉霞〕’에 차운한 것이다.
아득히 저 바다 너머로 먼 산이 보이는데 / 蒼茫隔海望遙山
산은 흰 구름에서 나오고 구름은 산을 닮았네 / 山出白雲雲似巒
산 아래 틀림없이 그윽한 곳이 있음을 아노니 / 山下定知幽境在
몇 사람이나 거쳐 갔던가 산이 비어 한가해라 / 幾人蹤跡爾空閒
이는 ‘가야산의 저녁 구름〔伽倻暮雲〕’에 차운한 것이다.
한 점 봉화 불빛이 밤새 밝으니 / 一點星峰鎭夜明
서쪽 바다 소식은 이경이 막았어라 / 西溟消息阨夷庚
성조에서 변방을 안정시킨 지 오래이니 / 聖朝久已安邊警
경파가 철저히 맑아지게 할 줄 알리라 / 解識鯨波徹底淸
이는 ‘유수의 봉화〔楡峀烽火〕’에 차운한 것이다.
허공에 어리고 물에 비쳐 성긴 별과 섞였나니 / 暎空涵水混疎星
차츰 숲 끝에서 나와서 반딧불이 모인 듯해라 / 稍出林端集暗螢
화보에서 그 누가 이 그림을 품평해 놓았는가 / 畫譜誰家題品在
장차 이 좋은 경치 거두어 그림 속에 넣으리라 / 行收佳境入丹靑
이는 ‘탄포의 고기잡이 등불〔炭浦漁燈〕’에 차운한 것이다.
[주-D001] 희선재(希善齋) :
성호의 재종질 이귀휴(李龜休)의 당명(堂名)이다.
[주-D002] 당시에……했구나 :
팔란(八鑾)은 네 필의 말에 달린 여덟 개의 방울로 천자의 수레를 가리킨다. 즉 이렇게 좋은 말이 많은데 좋은 말이 없다고 탄식하여 여기 용마의 후손들로 하여금 천자의 수레를 끄는 꿈을 꾸게 했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잡설(雜說)〉에 “채찍을 잡고서 말하기를 ‘천하에 말이 없다.’ 하니, 오호라! 참으로 말이 없는 것인가, 참으로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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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1권 / 시(詩)
화포잡영(華浦雜詠) 9수
노옹은 도리깨질을 하고 노파는 양식을 찧고 / 老翁打穀嫗舂糧
닭은 남은 벼를 쪼고 개는 쌀겨를 핥아 먹는다 / 鷄啄遺秔狗舐糠
때때로 마을 사람이 안부를 물으러 와서는 / 時有邨人來問訊
논농사 밭농사 얘기로 석양이 질 때에 이른다 / 談農說圃到斜陽
울타리는 쓸쓸하고 흰 해는 밝은데 / 籬落蕭條白日明
대낮에 나무 위에서 꼬끼오 닭 울음소리 / 午鷄咿喔樹顚鳴
주인이 헛기침을 하며 창 앞에 와서는 / 主人警欬囱前到
술과 안주 갖춘 소반을 올리는구나 / 看進肴盤與酒觥
세상 사람들은 모두 백구가 한가롭다지만 / 世人總說白鷗閒
백구의 한가함은 고요히 보는 데 있어라 / 惟白鷗閒在靜觀
누가 백구를 울고 날며 물 못 떠나게 했는가 / 誰遣鳴飛不離水
멍하니 종일 앉아 만사 잊고 돌아갈 줄 모른다 / 㗳焉終日坐忘還
포구 저 멀리 흰 깃발이 펄럭이는가 했더니 / 浦口遙看雪旆翻
한 무리 기러기가 모두 놀라 나는구나 / 一羣鳧鴈盡驚喧
주민들이 가리키며 조수가 온다고 말하니 / 居民指道潮頭至
한없는 천군만마가 휘몰아 달려오는 듯해라 / 無限千兵萬馬奔
썰물 가면서 흔적 남겼다가 또 돌아오나니 / 潮去留痕汐又回
건곤은 한 수레바퀴라 함께 재촉해 움직인다 / 乾坤一轂與同催
가득 차면 도로 기우는 것을 보고자 하여 / 要看盈極還虧際
앉아서 동쪽 하늘에 달 뜨는 것 기다리노라 / 坐待東天月上來
시골집은 겨우 무릎 하나 들어갈 정도 / 邨屋纔容一膝寬
처음 와서는 기거가 불편함만 느꼈었지 / 初來惟覺起居難
문 닫고 칩거하매 절로 마음 한가로우니 / 閉門自有閒心境
어느 곳에 몸을 둔들 편안하지 않으랴 / 何處投軀不易安
근원 없는 도랑물 이름이 용화인데 / 無源潢潦號龍華
새로 물을 길은 항아리에 토사가 섞였어라 / 新汲盆中雜土沙
오래 지나니 습성이 들어서 절로 편안해 / 久久自能安習性
이 물로 국 끓이고 밥 지으니 맛 외려 좋구나 / 作羹炊飯味還奢
재앙은 폭풍만 한 게 없어 흉년이 드니 / 災莫如風歲色荒
하룻밤에 들판이 해충으로 온통 뒤덮였어라 / 郊原一夜徧蟲蝗
보시라 버려진 이삭과 버려진 볏단을 / 請看滯穗兼遺秉
겉모습만 좋고 결실 없으니 버려도 무방하리 / 無實容長棄不妨
신량이 방에 드니 등잔을 가까이할 만해 / 新凉入室稍親燈
객지에서 열흘 넘게 지내며 서책을 더 읽는데 / 旅宿經旬課讀增
기쁘구나 외진 마을이라 찾아오는 사람 없고 / 可喜窮邨無客問
문전에 때로 동냥하러 온 중만 보이는 것이 / 門前時見乞糧僧
[주-D001] 세상……있어라 :
백구가 한가한 것은 백구를 고요히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실은 백구가 한가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주-D002] 멍하니 종일 앉아 :
무아경(無我境)에 빠진 것이다. 남곽자기(南郭子綦)가 궤안에 기댄 채 앉아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며 멍하게 물아(物我)를 잊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성자유(顔成子游)가 그 앞에 시립(侍立)해 있다가 “몸을 고목처럼 만들고 마음을 식은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남곽자기가 “지금 나는 나를 잊었는데, 네가 알았구나.” 하였다. 《莊子 齊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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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2권 / 시(詩)
〈도곡(桃谷) 팔경(八景)〉에 차운하다
가랑비가 꽃 재촉해 붉은 꽃잎에 떨어지더니 / 小雨催花點注紅
이윽고 골짜기에 꽃이 떨기로 핀 것을 보겠어라 / 俄看洞壑簇成䕺
신선의 도원(桃源)을 굳이 고깃배로 찾을 것 없나니 / 仙源未必漁舟覓
봄 마음을 이끌어서 일맥이 통하는 것을 / 句引春心一脈通
이는 ‘도저의 맑은 봄〔桃渚晴春〕’에 차운한 것이다.
그 무엇이 가을 들어 얼굴을 펴게 하느뇨 / 何物秋來爲解顔
붉게 취한 단풍 빛이 좌중에 비치어 든다 / 酣楓色暎座中間
바위 머리 바위 배에 솜씨 좋게 단장해 / 巖頭巖腹工糚點
하룻밤 맑은 서리에 잎새들이 아롱졌어라 / 一夜淸霜衆葉斑
이는 ‘풍암의 만추〔楓巖晩秋〕’에 차운한 것이다.
다시금 달 재촉해 화살처럼 떨어지게 하니 / 更催月墜箭離絃
새벽빛이 푸른 나무 앞에 곱게 비치었어라 / 曙色葱朧碧樹前
종소리를 흔들어 속속 보내와서 / 搖蕩鍾聲來續續
은낭 가에 남은 꿈을 거두어 돌아가누나 / 收回殘夢隱囊邊
이는 ‘금성의 새벽 종소리〔禁城曉鍾〕’에 차운한 것이다.
아름답고 휘황한 고을이 절로 있거니 / 佳麗煇煌自有州
누가 석양의 누각에 속절없이 기대었나 / 誰家徒倚夕陽樓
비늘처럼 즐비한 만호(萬戶)의 집을 연기가 감싸니 / 煙籠萬井魚鱗錯
푸르스름한 기운 바람 머금어 기와가 날아갈 듯해라 / 淺碧含風瓦欲飛
이는 ‘여정의 저녁 연기〔閭井暮煙〕’에 차운한 것이다.
해가 높이 비치도록 서창 가에 누웠노니 / 欹枕西囱日照尊
근래에 참된 뜻 얻어 말을 잊었도다 / 邇來眞意亦忘言
외로이 시 읊으매 맑은 햇살 짧아 아쉽고 / 孤吟正惜淸暉短
사리를 아는 양 가벼운 구름이 해를 삼키지 않누나 / 會事輕雲闖不呑
이는 ‘약현의 낙조〔藥峴落照〕’에 차운한 것이다.
가득한 푸른 봄 물결이 호수에 일렁이는데 / 漾漾春波綠漲湖
비낀 석양 돛 그림자가 나무 끝에 외로워라 / 斜陽帆影樹梢孤
아련한 담묵빛이 병풍 중에 어려 비치나니 / 依然淡墨屛中見
노니는 사람인지 술꾼인지 묻지를 말라 / 莫問遊人與酒徒
이는 ‘노호의 먼 돛단배〔露湖遠帆〕’에 차운한 것이다.
햇살 어린 맑은 남기가 산봉우리 덮었으니 / 晴曛嵐氣羃巑岏
해 질 무렵 발을 걷고 첩첩 산을 마주 본다 / 晩日鉤簾對疊巒
때때로 산새가 날아와 지저귀며 / 時見山禽來故故
푸른 산 기운 띠고서 그윽한 난간에 드누나 / 帶將蒼翠入幽欄
이는 ‘남산의 푸른 남기〔南山翠嵐〕’에 차운한 것이다.
북체에서 장수하여 폐퇴함을 면했고 / 北砌藏修免廢頹
동리에 사람은 떠나고 식물을 옮겨 심었네 / 東籬人去物移栽
남산을 그야말로 유연히 바라보노니 / 南山正是悠然見
심양에서 술을 보내오기를 기다리네 / 會待潯陽送酒桮
[주-D001] 도곡(桃谷) 팔경(八景)에 차운하다 :
각 수마다 차운한 원래의 시 제목을 제시하였는데 마지막 수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주-D002] 은낭(隱囊) :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부드러운 침낭(寢囊)이다. 침석(寢席)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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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2권 / 시(詩)
양요당(兩樂堂) 팔경(八景)
고요한 밤에 울적하여 높은 난간에 기대 / 靜夜無悰倚檻危
날씨 맑기에 달 떠오르길 함께 기다리노라 / 乘晴共候月昇時
잠깐 사이에 청명한 세계를 만들어내니 / 須臾幻作淸明界
둥근 빛을 보매 그야말로 꽉 찬 보름달일세 / 看取圓光恰滿規
이는 ‘오두의 맑은 하늘에 달〔鰲頭霽月〕’을 읊은 것이다.
호수 빛 찰랑찰랑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 湖光㶑㶑掌如平
한 점 외로운 배가 백구 저편에 한가해라 / 鷗外孤篷一點輕
물결을 보매 바람이 붊을 또한 알겠노니 / 也識波心風有信
돌아가는 배의 돛이 환한 석양을 등지고 있어라 / 回帆影背夕陽明
이는 ‘봉상의 바람 받은 돛단배〔鳳翔風帆〕’를 읊은 것이다.
황량한 변방 외로운 봉화가 바다를 지키나니 / 荒戍孤烽鎭海關
황혼녘에 한 점 불꽃이 앞산 봉우리에서 비친다 / 黃昏一火對前巒
하늘 빛과 물 기운이 몽롱하게 어우러진 곳에 / 天光水氣矇矓際
반딧불이 반쯤 섞여서 물 위에 날아 나오는구나 / 半雜飛螢出水端
이는 ‘송리의 저녁 봉화〔松裏夕烽〕’를 읊은 것이다.
서쪽 숲 그림자 검고 달은 배회할 제 / 西林影黑月徘徊
때때로 종소리가 물 위에 떠서 오는구나 / 時有鍾聲泛水來
그야말로 산인이 귀가 깨어서 듣나니 / 正是山人醒耳聽
몸과 마음 이외에는 생각이 식은 재 같아라 / 身心以外念都灰
이는 ‘검단의 새벽 종소리〔黔丹曉鍾〕’를 읊은 것이다.
시야 끝까지 평평한 들판이 펼쳐졌으니 / 極目平蕪隴陌同
농가 소리 밤낮으로 동서에 울려 퍼진다 / 農謳日夕徧西東
쟁기 호미를 우리 집이 굳이 잡고 나설 것 없으니 / 犂鉏不必吾家出
공로를 백성들 풍년 송축하는 노래에 다 실어보내노라 / 輸與齊民頌歲功
이는 ‘푸른 들판의 벼 구경〔靑郊玩稼〕’을 읊은 것이다.
물가에 봄이 와 물고기가 한창 살찌니 / 下渚春生魚正肥
어가 소리 차츰 갈대숲에서 나온다 / 漁歌稍稍出蘆磯
가없는 애내 소리 중에 물결이 푸른데 / 無邊欸乃聲中綠
두 척씩 가벼운 배들이 한가로이 돌아온다 / 兩兩輕舠取適歸
이는 ‘해포의 고기잡이 구경〔蠏浦觀漁〕’을 읊은 것이다.
비 온 뒤 먼 산은 몇 층이나 드러났는고 / 雨後遙岑露幾層
짙푸른 산기운이 모여 부처 머리 같아라 / 靑葱山氣佛頭凝
희미한 것이 안개도 아니요 연기도 아닌데 / 依微非霧非煙裏
흰 새가 가로질러 나니 유달리 희게 보인다 / 白鳥橫飛別色增
이는 ‘심악의 맑은 날 남기〔深岳晴嵐〕’를 읊은 것이다.
망망한 넓은 바다가 먼 허공과 잇닿았는데 / 洋海茫茫接遠空
이윽고 보니 지는 해가 물결에 잠겨서 붉어라 / 俄看頹日蘸波紅
일렁이는 물속에 천만 가지 기이한 변화 일어나니 / 千奇百變冲瀜裏
수궁에서 신룡이 해를 마중 나왔음을 알겠노라 / 知有神龍迓水宮
이는 ‘해천의 낙조〔海天落照〕’를 읊은 것이다.
[주-D001] 숲 그림자 검고 :
달은 기울고 동은 아직 트지 않아서 숲이 어둑하게 보이는 것이다. 당나라 원진(元稹)의 〈연창궁사(連昌宮辭)〉에 “새벽빛 나오지 않아 발 그림자 검으니, 지금까지 산호 갈고리 뒤집혀 걸려 있네.〔晨光未出簾影黑 至今反掛珊瑚鉤〕” 하였다.
[주-D002] 몸과……같아라 :
세상사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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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3권 / 시(詩)
족손 문보 창환의 매화 십절에 차운하다〔次族孫文甫昌煥 梅花十絶〕
은근한 봄의 마음 늦지 않게 자라나서 / 暗暗春心長不遲
그 따뜻한 기운으로 싹이 틀 때 되었네 / 陽和應逼草萌時
산엔 달력 없으니 무엇으로 증험하나 / 山中無曆憑誰驗
구슬처럼 벙그는 매화 보면 알리라 / 點檢梅花玉綴枝
해 바뀌고 별 돌아와 삼라만상 새로운 건 / 歲改星回萬象新
하늘의 어진 은택이 골고루 미쳐서라네 / 天心仁覆物霑匀
그래도 아직 풍경이 쓸쓸하다 느꼈는데 / 眼看光景猶蕭索
우연히 매화 대하고 봄이 온 걸 실감했네 / 偶對寒花始識春
뺨에 분을 칠한 듯 흰 꽃들이 피었는데 / 箇箇輕盈粉白腮
작은 먼지 앉을세라 미풍이 살랑대네 / 微風不許住纖埃
이 구슬을 한 움큼 누가 가져다 주었나 / 明珠滿掬知誰贈
옥을 캔 신녀들이 낙수에서 보낸 거지 / 弄佩人從洛水來
고운 빛을 머금은 그 맵시 참 어여뻐라 / 含嬌弄色可憐身
하늘이 준 미색에는 속태가 전혀 없네 / 天賦嬋娟迥脫塵
그 누가 절창으로 참모습을 그리었나 / 麗句誰家眞貌得
오히려 철석같은 심장 지닌 분이었지 / 當時還有石腸人
막고야산의 선녀가 아름답게 변신하여 / 姑射仙姿巧奪胎
고운 풍채 감추었다 때가 되면 피누나 / 風神藏護候時開
창가에 친 휘장에 바람 불지 않게 하여 / 囱帷莫遣輕颸入
호적 소리에 꽃이 지는 변고 제발 없기를 / 剛免羌兒笛裏灾
먼저 핀 꽃, 나중 꽃이 더디다 하지 마라 / 先開休詫後開遲
봄기운에 연이어 벙글 때가 가장 좋다 / 最好陽舒續續時
마침내 방긋방긋 꽃망울이 터져서는 / 畢竟芳心能索性
서쪽과는 다르게 동쪽 가지 눈부셔라 / 東枝十分較西枝
산속의 창가에는 여명이 더디 와서 / 曙色山囱故故遲
희미한 매화 자태 방 안에 은근하다 / 依微冰雪隱房帷
그 향기 어찌 꼭 황혼 녘만 은은하랴 / 暗香奚獨黃昏擅
운치 있는 시인은 새벽을 더 쳐주네 / 標格詩家又見奇
낡은 집 등불 아래 꽃 그림자 비꼈으니 / 老屋疏燈影自橫
옥 같은 이와 짝해 한밤을 보내누나 / 玉人相伴度殘更
방년의 고운 자태 아껴 줌이 합당하니 / 芳年只合娉婷惜
다정한 눈길로 다시 봐 주어야겠네 / 更請夫君著眼明
추운 겨울 눈 덮인 집에서 견뎠더니 / 寒事猶支繪雪堂
침상 곁의 매화 분에 유독 정이 쏠리네 / 幽懷偏賸葆春牀
다만 걱정은 사람들이 쉬 문을 열어서 / 只愁容易人開閤
그로 인해 맑은 향이 나지 않는 거라네 / 婉孌相隨不放香
그림으로는 고운 자태 묘사하기 어려워 / 繪事難描媚嫵姿
매화에 대한 감상은 영탄시로 다 한다네 / 題評都付詠歎詩
봄 왔으니 힘쓰는 일 모두 줄이고 / 春來欲省經營力
한결같이 매화 위한 시 계속 쓰고파라 / 重爲梅兄一賦之
[주-D001] 문보(文甫) 창환(昌煥) :
이창환(李昌煥)을 가리킨다. 이창환의 자가 문보이다. 신광수(申光洙)의 문집인 《석북집(石北集)》 권8에 “내가 갑술년(1754, 영조30)에 안산(安山)의 진사 경환 행보(景煥行甫), 창환 문보씨 형제와 양수(洋水)에서 종유하며 시벗과 술벗으로 망년지교를 맺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이창환은 성호와 같은 안산 지역에 살면서 서로 교류했던 듯하다.
[주-D002] 次族孫文甫 :
교정고본 권3에는 ‘次文甫’로 되어 있다.
[주-D003] 구슬처럼 벙그는 매화 :
원문의 ‘옥철지(玉綴枝)’는 매화가 가지에 구슬처럼 매달려 있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의 〈매화부(梅花賦)〉에 “옥을 꿰고 구슬을 매단 듯하며, 얼음을 달아 놓고 우박을 펼쳐 놓은 듯하구나.〔旣玉綴而珠離 且冰懸而雹布〕”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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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4권 / 시(詩)
화포잡영 17수 〔花浦雜詠 十七首〕
밤에 비가 퍼붓듯이 사방 숲에 내리더니 / 夜雨翻盆沃四林
아침에는 활짝 개어 기쁨 금치 못하겠네 / 朝來霽色喜難禁
교룡이 노한 듯한 우렛소리 그치었고 / 雲䨓已戢蛟龍怒
학과 황새 훨훨 나니 그 마음 알겠구나 / 翅翮遙知鸛鶴心
너른 들은 아득하여 바람조차 아니 일고 / 曠野茫茫風不起
넓은 호수 찰랑찰랑 물이 더욱 깊어지네 / 平湖㶑㶑水增深
아침에 말 머리를 어드메로 돌릴 것가 / 佗晨馬首歸何處
작은 길 먼 하늘가 눈이 뫼에 가득해라 / 微路天邊雪滿岑
들판이 평평하여 끝이 아니 보이는데 / 野色平平不見垠
만물 실은 대지 밟고 표연히 홀로 섰다 / 飄然獨立履坤元
멀리 산세 바라보니 상투 벌여 논 듯하고 / 遙瞻山勢疑羅髻
천체는 동이 엎은 모양임을 알게 됐네 / 始信天形似覆盆
해와 달은 황도의 경계 위에서 빛나고 / 日月交輝黃道界
많은 별들 자미원 자리에서 드러나네 / 星辰全露紫微垣
뉘 알랴 산봉들을 다 깎아 버린 뒤에 / 誰知鏟卻羣巒盡
탁 트인 회포로 하늘 대하는 이 기분을 / 窙豁胷懷對帝尊
두건에 신을 신고 한가로이 뜰 거닐자니 / 巾屨偸閒少步庭
구름 걷힌 푸른 하늘 탁 트여 광활하다 / 雲消天濶莽靑冥
닭이 우는 마을로 석양빛은 비껴들고 / 夕陽斜入雞鳴巷
해오라기 묵는 물가 맑은 안개 걸쳐 있다 / 晴靄橫鋪鷺宿汀
양 살쩍의 흰머리 언덕 위의 학과 같고 / 兩鬢爭如皋鶴白
두 눈 이제 푸른색 갈매기가 되어 있네 / 雙眸今爲海鷗靑
유유자적 생명들과 함께하며 즐기나니 / 優優觀物聊同戲
요의 섬돌 명초 한 잎 지는 게 싫어라 / 厭盡堯階一葉蓂
늙은 나 흰머리로 시골길을 달리나니 / 翁今首白走邨途
내 일은 내가 알아 그냥 지켜 갈 뿐이다 / 翁事翁知但守株
다른 세계 꿈꾼다 꾸짖는 이 혹 있지만 / 世或有譏佗界想
그 누군들 자기 계획 좋아하지 않으랴 / 人誰無好自家圖
세상은 끝이 없어 갈 길 쭉 펼쳐졌고 / 乾坤莽蕩行程坦
바람과 달 청명하여 외로이 앉아 있다 / 風月淸明坐起孤
눈길 다한 구름 끝에 새가 날아가는데 / 極目雲端飛鳥去
푸른 산 어느 곳이 신선 사는 동네일까 / 靑山何地秘仙區
나그네로 떠돌면서 연해에 머문 동안 / 旅泊棲棲滯海堧
잎이 진 물가 언덕 세모가 가까웠네 / 亭皋葉下逼殘年
삼경의 달빛 아래 기러기는 끼룩대고 / 賓鴻響戛三更月
하늘과 가을 물결 동색으로 접해 있다 / 秋水波連一色天
여기저기 밭에선 다투어 추수 마쳐 가고 / 著處園田收已競
어느 집 다듬이질 쉬 잠들지 못하겠네 / 誰家砧杵耿無眠
예전처럼 물상들은 그대로 돌아가는데 / 依然物態如前度
이 사람 머리털은 점점 세니 가소롭다 / 可笑斯人鬢髮鮮
도랑 내고 밭 옮겨서 방조제를 쌓으면 / 穿渠移圃築防潮
소금기 줄어들어 벼가 자라 풍성하리 / 鹹減禾生盡沃饒
새로 취락 조성하여 주거를 정돈하고 / 聚落仍成居井井
농기구를 활용하면 잡초 걱정 없으리 / 鋤耰何患莠驕驕
그 누가 이 산천에 남김없이 이익 주어 / 誰敎山澤無遺利
풀 무성한 저 평원 버리지 않게 할까 / 可見平蕪免浪拋
푸른 바다 뽕밭으로 쉬 바꿀 수 있나니 / 碧海桑田容易變
백성에게 좋은 계책 말해 주려 하노라 / 良謀輸與訪芻蕘
가을바람 헤치면서 청산을 유람하고 / 秋風擺袖閱靑山
깔린 구름 질펀한 강 사이로 말을 몬다 / 驅入雲鋪水漫間
밀물에 까마귀는 배를 맞아 춤을 추고 / 潮返神鴉迎棹舞
석양에 나는 학은 섬을 알고 돌아오네 / 日斜翔鶴認洲還
강변 아름다워서 머물러 쉴 만하거니 / 川原明媚聊仍憇
시물은 변화해도 한가롭긴 일반이다 / 時物推遷等是閒
손바닥 같은 평야를 내 마음대로 가니 / 掌㨾平郊隨意去
예부터 험난한 길 어렵지가 않네그려 / 古來行路不成艱
열흘 동안 객지 생활 실컷 고생하다 보니 / 宿宿經旬厭苦辛
내 곁에는 오로지 한 병 술이 함께했지 / 隨身惟有一壺親
잠결에 가을 소리 머리 절로 희어지고 / 秋聲入夢頭生雪
등 그림자 꽃 피어 밤에 봄이 한창이네 / 燈影成花夜發春
강마을 날씨 추워 용이 굴에 칩거하고 / 澤國天寒龍蟄窟
산 동쪽 오동 늙어 봉황이 이웃 없네 / 朝陽樹老鳳無鄰
이 생애 나그넷길 언제쯤에 끝나려나 / 此生征路何時盡
삼십 년간 고달프게 나루터 물었어라 / 三十年來倦問津
까마귀 같은 검은빛 먹구름 밀려오고 / 隊隊頑雲黑似鴉
바람은 비를 몰고 강기슭을 범하네 / 輕風領雨掠江涯
수레바퀴 자국에 물 고일 정도겠지 / 應添轍涸波臣急
해신이 뻐길 만큼 시내야 넘치겠나 / 肯許川騰海若誇
몸과 각건 젖는 건 상관이야 없지만 / 不害身霑巾角墊
진 땅에 말 넘어질까 그게 걱정이어라 / 惟愁泥滑馬蹄蹉
다리에서 흥취 젖어 비 뚫고 지나니 / 小橋歸興穿霏過
수풀에 연기 나는 몇 채 집이 보이네 / 煙火平林著數家
갈대꽃 흩날리고 새들이 우짖는 때 / 蘆花飄散韻禽啼
눈 오는 시내에 배 한 척 멈추었네 / 一棹居然阻雪溪
창밖 구유 여물 먹는 말 한참 구경하고 / 囱外對槽看馬吃
손 안의 시 퇴고하다 저녁에 이르렀네 / 手中推句到雞棲
구름이 북쪽 가린 것 마음에 걸리는데 / 惟嫌有眺雲遮北
비가 서쪽에 있다고만 무심히 말하네 / 但道無情雨在西
세상맛이 사라져서 이젠 다하였으니 / 世味消磨今已矣
두루 유람하는 데 청려장 없다 탓하랴 / 周遊不必欠靑藜
찬 바람 이슬이 맑은 새벽에 스칠 제 / 風露凄凄拂曙淸
먼 하늘 기러기 하늘이 갠 걸 알리네 / 遙空鴈度報新晴
민가에서 지내니 백성들 풍속 알겠고 / 廛居雜處知氓俗
농부가 때로 와서 객의 마음 위로하네 / 農圃時來慰客情
밀려드는 조수는 정해진 때 찾아오고 / 滾滾江潮來有信
어둑해진 들녘 해는 또다시 밝아 오리 / 荒荒野日照還明
백 묘의 땅 경작에 온 힘을 다 들이며 / 行輸百畝耕犁力
어리석게 이생을 보냈으면 좋겠어라 / 準擬蚩蚩過此生
달팽이 집이라도 앉을 자리 넉넉하니 / 蝸似廬中坐更寬
사람이 찾아오면 마음 편타 말을 하네 / 人來但道一心安
외진 데 군자 산들 누추할 게 무엇이랴 / 地偏君子居何陋
태평 시절 백성들은 늙을수록 즐겁다네 / 世治愚民老益歡
음식은 잠시 동안 시골 솜씨에 맡기고 / 廚饌暫憑邨手在
수시로 고향 편지 등잔불에 비춰 본다 / 鄕書時倩瓦燈看
한평생 근심 없이 자족하면 그만인데 / 平生不過無憂足
지난 세월 돌아보면 그게 가장 어려웠네 / 支度年華此最難
시골 풍속 순박해 담 쌓는 걸 싫어하니 / 野俗龐淳耻設垣
임금 교화 백성에게 미친 걸 누가 알랴 / 誰知帝力到黎元
이곳은 갈매기와 함께 노는 땅인 데다 / 鷗遊况是忘機地
여전히 학이 날며 객이 왔다 알리는 곳 / 鶴下依然報客門
흥겨우니 세모라고 상심할 게 무엇이랴 / 漫興何須傷歲暮
거친 베옷 아침 볕에 등을 쬐기 더 좋네 / 麤衣猶足負朝暄
팔을 괴고 편히 앉아 지팡이 놓아두고 / 支頤燕坐拋筇屐
말없이 참마음이 가는 대로 둔다네 / 一任眞心在不言
궁한 마을 체류 중에 또 새해 돌아오니 / 淹滯竆閭又一回
절서는 늘 고요 속에 빨리도 흐르누나 / 天時多在靜中催
빈 창에 새벽바람 처마 통해 들어오고 / 囱虛曉吹偸簷入
산 저물녘 가랑비는 언덕을 덮어 오네 / 山暝輕霏罨岸來
다리 뻗고 앉을 만한 작은 방 없겠는가 / 盤礴寧無容膝地
배회해도 망향대엔 오르지 않는다네 / 徘徊不上望鄕臺
아름다운 절경을 전부 몰아주었으나 / 牢籠物色全相付
〈서경부〉 지을 재주 못 지녀 안타깝네 / 負殺西京作賦才
십 년간의 발자취 경황이 없었거니 / 十年蹤迹重棲棲
해변에 머물 인연 말에게 맡겨 둔다 / 濱海留緣信馬蹄
구름 속에 기러기 촘촘히 줄을 짓고 / 是處雲鴻成密計
어느 집엔 하목으로 새로 시제 바꾼다 / 誰家霞鶩換新題
사람들은 포구에서 나루를 횡단하고 / 人從極浦橫成渡
바람은 배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네 / 風引孤帆逆上溪
우연히 숲 지나며 풀 헤치고 가는데 / 偶過林間披草返
깔리는 땅거미에 이슬이 처량하다 / 夕陰垂地露華凄
유람하는 날짜는 순식간에 지나거니 / 客日駸駸閉眼過
고촌에 일이 없어 이불 쓰고 시 읊네 / 邨孤無事擁衾哦
기나긴 밤 이미 깨어 잠 오지 않는데 / 夜長已自無眠覺
한기는 새벽 무렵 유독 더 심하여라 / 寒意偏於欲曙多
창에 비친 흐린 달 홀연 구름에 들고 / 微月暎囱雲忽掩
된서리 땅에 내려 눈과 같이 희구나 / 繁霜在地雪如皤
걱정인 건 얼음이 얼 때가 닥치거니 / 只愁冰凍時將逼
늙어 꼭 필요한 깊은 방 따순 화로 / 深屋薰爐柰老何
고을 백성 노랫소리 제각각 흥겹나니 / 風謠百里各驩然
촌술 들고 왁자지껄 풍년임을 알괘라 / 邨酒喧譁識稔年
잠 깨어 누워서는 창에 드는 해를 보고 / 睡覺卧看穿戶日
한가하면 뜰을 덮는 안개 밟고 걷는다 / 間來踏破羃庭煙
재채기 자주 나니 누가 날 생각는가 / 有時頻嚔知誰念
도처에 머물면서 편안하길 원할 테지 / 到處仍留要自便
낡은 공책 몽당붓 이웃에서 빌려다가 / 敗帖禿毫鄰借得
주머니 속 기행시 하나하나 정리하네 / 囊中收拾記行篇
[주-D001] 路 :
대본에는 ‘露’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 바로 뒤의 ‘雪’과 상충된다. 따라서 《성호속집(星湖續集)》 권2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02] 해와 …… 드러나네 :
황도(黃道)는 천구에서 태양의 궤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해와 달을 아울러 말하였고 달의 궤도인 백도(白道)는 말하지 않았다. 자미원(紫微垣)은 큰곰자리를 중심으로 170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를 말하는데, 태미원(太微垣)ㆍ천시원(天市垣)과 더불어 삼원(三垣)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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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5권 / 시(詩)
한거잡영 20수〔閒居雜詠 二十首〕
띠풀과 갈대가 섬돌 앞까지 자라나서 / 茅葦侵尋逼砌前
새싹이 옛 뿌리에 연이어 돋아났네 / 新芽逬出舊根連
아침에 삽을 들고 직접 일궈 정리하니 / 朝來提鍤親疏滌
올해 가꿀 채마밭을 더하여 얻었도다 / 添得今年種菜田
주렁주렁 동릉과(東陵瓜)에 별종이 많지마는 / 綿瓞東陵別派多
수박이 오히려 호박보다 못하다네 / 西瓜猶未及南瓜
가을에 맛난 것 먹으려면 먼저 힘써 가꿔야지 / 秋來滋味宜先力
두에 담고 형에 담으면 가지가지 맛 좋으리 / 豆實型盛種種嘉
고려 풍속 질박하다 내 일찍이 들었거니 / 曾聞麗俗近陶匏
바로 생채 가지고서 밥을 싸서 먹었다네 / 生菜旋將熟飯包
상추는 잎 둥글고 된장은 자줏빛이라 / 萵苣葉圓鹽豉紫
반찬거리가 시골 주방에서 쉽게 나오누나 / 盤需容易出邨庖
부드러운 뽕잎 푸르러 누에 자람 보았는데 / 柔桑葉綠見蠶肥
어린 여종 광주리에 가득 뽕잎 따서 오네 / 小婢攜筐滿採歸
어찌 시골 노인에게 따뜻한 비단옷이 필요해서이랴 / 野老何須衣帛煖
여자의 일에는 베 짜기가 꼭 알맞은 게지 / 女功端合事鳴機
깊은 숲은 곳곳에다 뻐꾸기를 숨겨 두니 / 穹林處處可藏鳩
머지않아 농사가 쉴 새 없이 바쁘리라 / 次第農功事未休
보리가 익어 갈 제 모도 이미 푸르렀으니 / 麥欲黃時秧已綠
누군들 제때에 모내기할 걱정이 없을쏘냐 / 何人不帶及時憂
하늘이 세상을 적셔 줌도 어렵다고 하겠구나 / 皇天濡澤亦云難
맑은 날씨 닷새 만에 건조해져 아쉽도다 / 五日晴明已惜乾
기다란 교외 도랑에 가득한 물을 바라보며 / 看取長郊溝澮滿
노동요 먼저 불러 가을걷이 기쁨 노래하네 / 勞歌先唱九秋歡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도롱이 젖게 놓아두고 / 細細林霏任濕蓑
교외의 농사 형편이 어떠한지를 묻노라 / 郊田消息問何如
근래에 새로이 금강장을 얻었나니 / 近時新得金剛杖
푸른 밭두둑에 짚고 서서 벼 기르는 것 보리라 / 拄傍靑畦看養禾
책에 머리를 파묻으니 뜻이 때로 고달픈데 / 埋頭書卷意時闌
사방 들판의 농부 노래도 들으니 장관이라 / 四野農謳亦壯觀
분수 따라 살아가면 나의 계책 족하거니 / 隨分謀生吾計足
털끝만 한 산 밖의 일이라도 간여치 않으리라 / 一毫山外事休干
몇 줌 곡식 경작하여 배고픔 벗어나고 / 甁粟經營免苦饑
채마밭에 채소 많아 내 몸을 살찌우네 / 田蔬多味助身肥
듣자니 포구에 고깃배가 왔다 하니 / 傳聞浦口漁舠入
밴댕이나 한 소쿠리 다시 얻어 돌아오세 / 又貰蘓魚一箵歸
봉국은 넉넉한 양식을 밀비에다 비축하고 / 蜂國饒糧養蜜脾
꽃잎은 시드는 붉은 가지에 서둘러 열매 맺네 / 花房催實褪紅枝
사물마다 모두가 성취함을 가만히 보노라니 / 靜看物物皆成就
부끄럽구나 사람은 한 일이 별로 없네 / 愧殺於人欠作爲
주량은 도령과 같더니 술을 먼저 끊어 버렸고 / 酒如陶令先休飮
기예는 파옹과 방불한데 바둑 두기 끊었노라 / 技倣坡翁斷著棊
산옹이 할 일 없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 莫恠山翁無一事
서민들의 농사도 충분히 할 만하니라 / 小人農圃亦堪爲
꽃과 잎을 통해 시절 아니 달력은 덮어 두고 / 驗時花葉廢蓂書
날을 세는 것은 도리어 해시의 장터에 의거하네 / 計日還憑亥市墟
벼의 싹이 보고파서 소나무 아래 섰더니만 / 貪見禾苗松下立
노란 꽃가루 날려 와서 나도 몰래 옷에 붙네 / 霏黃花屑暗黏裾
계집종은 잎을 베러 산속으로 들어가고 / 樵靑刈葉入山岡
참새는 새끼 이끌고 낮은 담장에 모였도다 / 乳雀將雛集短墻
검은 모시옷에 네모난 갓을 쓰고 괭이를 들었나니 / 漆苧方冠長柄钁
선비와 농부란 예부터 본디 지향이 같으니라 / 士農從古本同方
농사를 짓는 것은 나라 다스리는 것과 같나니 / 治農事如國相同
좋은 곡식에 나쁜 풀이 뒤덮지 않게 하라 / 美穀休敎惡草蒙
봉수는 번성 않고 제거할 잡목은 더욱 무성하니 / 封樹不繁除益茂
심오한 하늘의 뜻을 알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 深冥天意劇難窮
쟁기 지고 경작함이 소 몰아 밭 가는 것만 하랴 / 耒耕爭似叱牛功
성인의 지혜도 후대의 기교보다 낫지 못하네 / 聖智無如後出工
오척 동자조차 소코뚜레 잡기에 익숙하니 / 五尺童兒操桊熟
하늘이 내린 제각이 풍년을 빚어내리 / 天生蹄角釀登豐
해가 쨍쨍하다 단비 내리니 얼굴이 펴지누나 / 日暘得雨一開顔
전년에 흉년 들었으니 서로 바뀜이 있는 게지 / 前歲無秋有互還
이러한 이치로 뒤바뀜을 하늘 또한 어찌하랴 / 此理乘除天亦那
이전부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함부로 비방하네 / 向來愚俗妄興訕
가시나무로 울타리 세워 약초 싹을 보호하고 / 揷棘爲闌護藥苗
꽃이 피면 아침저녁으로 넉넉히 즐기는데 / 花開亦足享曛朝
온갖 기쁘고 즐거운 일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니 / 千懽萬喜看低了
천한 자가 교만하다고 기롱할까 두렵구나 / 却恐人譏賤者驕
교거에다 나무 심는 계책이 오활하지 아니하니 / 郊居樹木計非迂
감나무랑 밤나무가 모두 능히 목노를 대신한다 / 柹栗咸能替木奴
서생이 생계를 꾸려 감이 서툴다 말하지 말라 / 不道書生生活拙
도박하고 술을 파는 무리보다는 그래도 나으니라 / 猶勝賭博賣漿徒
비록 세상에는 별의별 온갖 일들이 다 있지만 / 物態千般摠有諸
물가에서 한바탕 웃어넘기면 물에 흘러 사라지리라 / 臨溪一笑水流虛
천리를 믿을 뿐 함부로 한계를 그어 분별하지 말라 / 信天漫畫休分別
결국은 모두 놓이지 못한 물고기 신세로 돌아가리니 / 畢竟同歸不捨魚
내 시를 지어 내 뜻을 말하기 딱 좋아라 / 吾詩適足言吾志
세상사는 들쭉날쭉해서 도무지 모르겠다 / 世故參差了不知
흥취 나면 맘대로 휘갈겨도 상관없나니 / 興到不妨狂寫得
남들이 나를 두고 어리석다 말하든 말든 / 任敎人喚作頑癡
[주-D001] 동릉과(東陵瓜) :
외[瓜]를 가리킨다. 진(秦)나라의 동릉후(東陵侯) 소평(召平)이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성(長安城) 동쪽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외를 가꾸었는데 그 맛이 달아 ‘동릉과’라 하였다. 《史記 卷53 蕭相國世家》
[주-D002] 두(豆)에 …… 담으면 :
호박을 가꾸어 가을에 익으면 나물로 만들어 두에 담고 국을 끓여 형(鉶)에 담는 등, 다양한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두는 물기가 있는 음식을 담는 도마처럼 생긴 그릇이고, 형은 국그릇이다. 원문에는 형이 ‘型’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鉶’이 되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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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5권 / 시(詩)
〈삼각팔경〉 시에 차운하다〔次三角八景韻〕
산이 높아 광야를 굽어보는데 / 山高臨廣土
허공에선 기운이 뿜어 나오네 / 噓氣出無中
뭉게뭉게 구름이 비를 뿌리고서 / 膚寸能行雨
거두고 돌아와 조용히 단장하네 / 收回靜餙容
이는 ‘백운대의 흰 구름〔白雲臺白雲〕’에 차운한 것이다.
어스름 밤빛은 숲 속으로 잦아들고 / 夜色收林樾
불그스름 놀이 바위틈에 머무는데 / 餘霞逗石縫
누가 구리 징을 불러서 내어 왔나 / 銅鉦誰喚出
바람결에 새벽 종소리 울려 퍼지네 / 風便動晨鍾
이는 ‘노적봉의 아침 해〔露積峯朝日〕’에 차운한 것이다.
하늘 띠는 암굴 옆에 기대어 있고 / 天紳倚嵌竇
비늘 갑옷은 못의 용이 솟아오른 듯 / 鱗甲起潭龍
콸콸 갠 하늘에다 비를 쏟아붓더니 / 濺濺晴飛雨
한 가닥 무지개를 끌어다 두었어라 / 拖成一道虹
이는 ‘상운동의 폭포〔祥雲洞瀑流〕’에 차운한 것이다.
일천 봉우리가 바위 하나를 에워싸고 / 千岑圍一石
좌우로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가네 / 左右水流淙
때마침 도복을 입은 사람이 있어 / 時有道衣者
지팡이 짚고 한가운데 서 있구나 / 扶筇立正中
이는 ‘서암사의 반석〔西巖寺盤石〕’에 차운한 것이다.
둥근 달은 구름을 헤치고 나오고 / 團月披雲出
누대는 높아 반쯤 허공에 들었네 / 樓高半入空
위에서 어느 누가 휘파람 불 제 / 上有人舒嘯
아래에는 물소리가 영롱하여라 / 下有水玲瓏
이는 ‘산영루의 갠 달〔山映樓霽月〕’에 차운한 것이다.
철쭉꽃이 무수히 피었는데 / 躑躅開無筭
산의 안개비가 붉은 꽃잎을 적시네 / 山霏洗渥紅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야 하리라 / 須登最高看
안팎의 꽃 풍경을 다 보려거든 / 領畧盡邊中
이는 ‘용암사의 안개 속에 핀 꽃〔龍巖寺烟花〕’에 차운한 것이다.
골짝 깊어 처음 길을 헤매다가 / 洞邃初迷路
조금 가다 보니 석문으로 통하네 / 微從石扇通
다만 삼국이 다투던 시대에는 / 秪應三國際
왕업이 응당 이 산중에 달렸으리라 / 王業屬山中
이는 ‘국령사의 석문〔國領寺石門〕’에 차운한 것이다.
서쪽 봉우리로 지는 해를 보다 / 西嶺瞻殘日
찬란한 광채 붉기가 핏빛일레 / 光輝血色紅
남은 구름은 다투어 뒤섞이고 / 餘雲爭盪射
숲 속은 연무로 온통 자욱하네 / 林靄共濛濛
이는 ‘원효암의 낙조〔元曉菴落照〕’에 차운한 것이다.
[주-D001] 백운대(白雲臺) :
북한산의 최고봉이다. 인수봉(仁壽峯), 만경대(萬景臺)와 함께 세 봉우리가 솥발처럼 나란히 서 있어 북한산을 삼각산이라고 불렀다.
[주-D002] 구리 …… 왔나 :
붉은 태양이 막 떠오른 광경을 형용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신성으로 가는 도중에[新城道中]〉 시에 “봉우리 위 갠 구름은 솜 모자를 쓴 듯하고, 나무 끝 막 뜬 해는 구리 징이 걸린 듯하네.[嶺上晴雲披絮帽 樹頭初日挂銅鉦]”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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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6권 / 시(詩)
용연정 팔경〔龍淵亭八景〕
산옹이 때로 다시 한가로움이 싫증 나면 / 山翁時復厭閒情
마음 내키는 대로 섬돌 따라 거니는데 / 隨意循階杖屨行
일종의 경륜을 삼경 속에다 펼쳐 두어 / 一種經綸三逕裏
봄이 오면 온갖 꽃을 듬뿍이 얻는다오 / 春來贏得百般英
이는 ‘꽃을 심다〔栽花〕’를 읊은 것이다.
선비가 속된 것을 고칠 수 없다 말하지 말라 / 士俗休言不可醫
기원의 대 옮겨 심으니 푸르고 무성하다 / 淇園移得綠猗猗
주인도 본래부터 때 묻지 않은 분이시니 / 主人也自無疵垢
평범한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하려 함이로다 / 要與尋常世路知
이는 ‘대를 심다〔蒔竹〕’를 읊은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마다 마음 다 똑같으니 / 犂耙人人意思同
삿갓 쓰고 농부들과 어울려 산들 어떠하랴 / 茅蒲何害混田翁
무단히 연못의 물을 재촉하여 퍼 올려서 / 無端催起淵中物
가서 삼농 위로하고 공덕으로 아니 삼네 / 去慰三農不自功
이는 ‘밭에 물을 대다〔灌畝〕’를 읊은 것이다.
잘 자란 맛난 채소 정말 자랑할 만하니 / 嘉茹美菜儘堪誇
남들이 농사꾼이라 부르게 만들 줄 아는구려 / 解使人稱食力家
내 손으로 먹고사는 것이 참으로 수고로워라 / 余手拮据眞自苦
하나하나 채소마다 입에 사치인 걸 누가 알리오 / 誰知一一齒牙奢
이는 ‘채마밭을 가꾸다〔鋤圃〕’를 읊은 것이다.
멀리서 풍겨 오는 맑은 향기를 본디 유독 즐겨서 / 生來偏賞遠香淸
섬의 연잎과 못의 연꽃을 구경 익히 다녔노라 / 嶼葉潭花慣踏行
신선 사는 곳에 난만히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니 / 聽說仙鄕開爛漫
흰 구름이 부질없이 병든 내 마음을 일으키누나 / 白雲空惹病儂情
이는 ‘연지(蓮池)’를 읊은 것이다.
물가에 해가 지고 바위는 울퉁불퉁한데 / 汀洲日暮石盤陀
푸르른 나무 짙은 그늘이 비단 물결을 덮었네 / 綠樹陰濃羃錦波
물고기만 튀어 오를 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 只有魚跳人不見
낚싯대 하나 때로 드러나 물 보조개 일으키네 / 一竿時露水生渦
이는 ‘버드나무 낚시터〔柳磯〕’를 읊은 것이다.
청산을 마주한 문 옆 고무래 후미진 곳에 / 門對靑山碌碡陬
들쭉날쭉 어지러이 구멍 있어 몸을 숨기네 / 杈枒亂穴互藏幽
검은 홀 같은 푸른 절벽 아래 이끼 낀 길에 / 玄圭蒼壁莓苔路
공서가 쌍쌍이 노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네 / 鎭見雙雙拱鼠遊
이는 ‘바위 다람쥐〔巖鼯〕’를 읊은 것이다.
이슬 맺힌 긴 가지에 달이 막 걸렸는데 / 露滴脩柯月正懸
맑은 새벽에 갓 차양 한쪽을 응시하노라 / 淸宵凝望帽簷偏
구름 끝에서 신선의 새를 불러서 내리니 / 雲端引得仙禽下
끼룩끼룩 긴 울음소리가 울려서 퍼지누나 / 恰恰長鳴響戛然
이는 ‘숲 속의 학〔林鶴〕’을 읊은 것이다.
[주-D001] 용연정(龍淵亭) :
신사석(申思奭, 1704~1780)이 용연(龍淵)이라는 연못가에 지은 집의 이름이다. 충주(忠州) 오갑산(烏岬山)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호가 쓴 〈용연당 서문[龍淵堂序]〉이 본집 권52에 수록되어 있다. 신사석은 자가 자상(子相), 호가 용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신개(申槩)의 후손으로, 진사 신필해(申弼諧)의 아들이자 판윤 신후재(申厚載)의 손자이다. 충주에 살았다. 《平山申氏系譜, 1873》
[주-D002] 삼경(三逕) :
은자(隱者)의 정원을 뜻한다. 전한(前漢) 때 장후(蔣詡)가 두릉(杜陵)에 은거하였는데, 집 안의 대숲에 세 가닥 길을 만들어 놓고 당시 고사(高士)였던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하고만 어울렸다 한다. 《文選 卷15 田南樹園激流植援 李善注》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고향 집의 풍경을 읊으며 “삼경은 황폐해 가지만, 솔과 국화는 여전히 남았어라.[三逕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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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6권 / 시(詩)
용연정 팔경〔龍淵亭八景〕
산옹이 때로 다시 한가로움이 싫증 나면 / 山翁時復厭閒情
마음 내키는 대로 섬돌 따라 거니는데 / 隨意循階杖屨行
일종의 경륜을 삼경 속에다 펼쳐 두어 / 一種經綸三逕裏
봄이 오면 온갖 꽃을 듬뿍이 얻는다오 / 春來贏得百般英
이는 ‘꽃을 심다〔栽花〕’를 읊은 것이다.
선비가 속된 것을 고칠 수 없다 말하지 말라 / 士俗休言不可醫
기원의 대 옮겨 심으니 푸르고 무성하다 / 淇園移得綠猗猗
주인도 본래부터 때 묻지 않은 분이시니 / 主人也自無疵垢
평범한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하려 함이로다 / 要與尋常世路知
이는 ‘대를 심다〔蒔竹〕’를 읊은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마다 마음 다 똑같으니 / 犂耙人人意思同
삿갓 쓰고 농부들과 어울려 산들 어떠하랴 / 茅蒲何害混田翁
무단히 연못의 물을 재촉하여 퍼 올려서 / 無端催起淵中物
가서 삼농 위로하고 공덕으로 아니 삼네 / 去慰三農不自功
이는 ‘밭에 물을 대다〔灌畝〕’를 읊은 것이다.
잘 자란 맛난 채소 정말 자랑할 만하니 / 嘉茹美菜儘堪誇
남들이 농사꾼이라 부르게 만들 줄 아는구려 / 解使人稱食力家
내 손으로 먹고사는 것이 참으로 수고로워라 / 余手拮据眞自苦
하나하나 채소마다 입에 사치인 걸 누가 알리오 / 誰知一一齒牙奢
이는 ‘채마밭을 가꾸다〔鋤圃〕’를 읊은 것이다.
멀리서 풍겨 오는 맑은 향기를 본디 유독 즐겨서 / 生來偏賞遠香淸
섬의 연잎과 못의 연꽃을 구경 익히 다녔노라 / 嶼葉潭花慣踏行
신선 사는 곳에 난만히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니 / 聽說仙鄕開爛漫
흰 구름이 부질없이 병든 내 마음을 일으키누나 / 白雲空惹病儂情
이는 ‘연지(蓮池)’를 읊은 것이다.
물가에 해가 지고 바위는 울퉁불퉁한데 / 汀洲日暮石盤陀
푸르른 나무 짙은 그늘이 비단 물결을 덮었네 / 綠樹陰濃羃錦波
물고기만 튀어 오를 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 只有魚跳人不見
낚싯대 하나 때로 드러나 물 보조개 일으키네 / 一竿時露水生渦
이는 ‘버드나무 낚시터〔柳磯〕’를 읊은 것이다.
청산을 마주한 문 옆 고무래 후미진 곳에 / 門對靑山碌碡陬
들쭉날쭉 어지러이 구멍 있어 몸을 숨기네 / 杈枒亂穴互藏幽
검은 홀 같은 푸른 절벽 아래 이끼 낀 길에 / 玄圭蒼壁莓苔路
공서가 쌍쌍이 노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네 / 鎭見雙雙拱鼠遊
이는 ‘바위 다람쥐〔巖鼯〕’를 읊은 것이다.
이슬 맺힌 긴 가지에 달이 막 걸렸는데 / 露滴脩柯月正懸
맑은 새벽에 갓 차양 한쪽을 응시하노라 / 淸宵凝望帽簷偏
구름 끝에서 신선의 새를 불러서 내리니 / 雲端引得仙禽下
끼룩끼룩 긴 울음소리가 울려서 퍼지누나 / 恰恰長鳴響戛然
이는 ‘숲 속의 학〔林鶴〕’을 읊은 것이다.
[주-D001] 용연정(龍淵亭) :
신사석(申思奭, 1704~1780)이 용연(龍淵)이라는 연못가에 지은 집의 이름이다. 충주(忠州) 오갑산(烏岬山)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호가 쓴 〈용연당 서문[龍淵堂序]〉이 본집 권52에 수록되어 있다. 신사석은 자가 자상(子相), 호가 용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신개(申槩)의 후손으로, 진사 신필해(申弼諧)의 아들이자 판윤 신후재(申厚載)의 손자이다. 충주에 살았다. 《平山申氏系譜, 1873》
[주-D002] 삼경(三逕) :
은자(隱者)의 정원을 뜻한다. 전한(前漢) 때 장후(蔣詡)가 두릉(杜陵)에 은거하였는데, 집 안의 대숲에 세 가닥 길을 만들어 놓고 당시 고사(高士)였던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하고만 어울렸다 한다. 《文選 卷15 田南樹園激流植援 李善注》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고향 집의 풍경을 읊으며 “삼경은 황폐해 가지만, 솔과 국화는 여전히 남았어라.[三逕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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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6권 / 시(詩)
칠탄정 십육경 병소서〔七灘亭十六景 幷小序〕
우리나라의 유현이 영남(嶺南)에서 많이 배출되었는데, 옛날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 명망과 덕행이 높은 분이 사시던 곳은 왕왕 산수가 수려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배회하면서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이다. 아마도 흐르는 물과 우뚝한 산이 빼어난 기운을 온축(蘊蓄)하여 훌륭한 인물들을 키워 냈고, 그분들이 곳곳마다 경승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그 지방을 두루 유람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쉽다. 지금 상사(上舍) 손백경(孫伯敬)이 밀양(密陽)에서 나를 찾아와 칠탄정 16경을 그린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곳은 바로 그의 5세조 오한(聱漢) 선생의 유허(遺墟)로, 자손이 학문을 닦으며 퇴락하지 않도록 지켜 온 곳이다. 여러 가지 기이한 경관들이 있어 영혼을 맑게 하고 고무한다. 내가 이미 노쇠하여 맑은 자취를 직접 찾아가서 고풍(古風)을 살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나도 몰래 선생의 “칠리탄 머리에서 낚싯대 드리우니, 푸른 강물 맑고 얕은데 찬 물결 이네. 우습구나 당시에 갖옷 입은 엄광(嚴光)이, 끝내 인간의 간의(諫議) 벼슬 띠었음이여.〔七里灘頭一釣竿 碧江淸淺浪花寒 當年却笑羊裘子 終帶人間諫議官〕”라는 시 한 구절을 엄숙하게 읊었다. 다 읊은 뒤에 붓을 들고 삼가 기록한다.
새벽 물가에 갈매기 잠들고 구름 낮게 깔렸는데 / 曉渚鷗眠雲貼地
어부의 뱃노래만이 들려올 뿐이로다 / 漁翁欸乃但聞聲
한바탕 가벼운 바람이 백사장에 일더니만 / 輕颸一道平沙出
끝없이 펼쳐진 흰 모래 위로 해가 비춰 오네 / 極目皚皚日照明
이는 ‘칠리탄의 밝은 모래〔七里明沙〕’를 읊은 것이다.
짙푸른 산 빛이 하늘 찔러 그늘을 빚어내고 / 黛色參天釀日陰
매미소리 새소리가 기다란 숲에서 들려오네 / 蟬吟鳥哢出長林
이글대는 태양 아래 몇 곳에서 땀을 닦는고 / 炎曦幾處方揮汗
어진 사람의 자비로운 마음을 알 만하여라 / 可識仁人大庇心
이는 ‘한 구역 푸른 숲〔一帶靑林〕’을 읊은 것이다.
청천의 옥 같은 물이 차다고 들었는데 / 聽說淸川玉液寒
맑은 창공에 뿜어져서 폭포를 이루었네 / 晴空噴灑作飛湍
어떻게 하면 남쪽 구름에 걸터앉아 떠나갈꼬 / 何能好跨南雲去
풍진에 찌든 갓끈 씻어 내면 속이 다 시원하리 / 濯盡塵纓透肺肝
이는 ‘세폭의 맑은 물결〔洗瀑淸流〕’을 읊은 것이다.
아득한 산봉우리로 새가 돌아올 줄 아니 / 蒼茫林岫鳥知歸
필시 푸른 산 너머로 임궁이 있는 게지 / 定有琳宮隔翠微
맑은 새벽 종소리가 세상으로 울려 퍼져서 / 淸曉鍾聲來世界
사람들이 일어나 옷을 입어야 함을 알게 하네 / 解敎人識起穿衣
이는 ‘산사의 새벽 종소리〔禪龕曉鍾〕’를 읊은 것이다.
산골짝이 들이 삼킨 물이 굽이쳐 맑게 흐르니 / 山谿呑納匯而淸
게 줍고 물고기 잡으러 함께 가자 약속했네 / 擒蟹罾魚約伴行
한 줄 긴 제방에 달이 없어 칠흑 같은데 / 一帶長隄無月黑
멀리서 등불 점점이 숲을 뚫고 밝게 비치네 / 遙燈點點透林明
이는 ‘등연에 물고기 잡는 등불〔燈淵漁火〕’을 읊은 것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촌락이 푸른 대숲에 가렸는데 / 依微籬落綠筠遮
개 짖고 닭 우는 걸로 봐선 몇 집이나 될까 / 吠犬鳴雞問幾家
단지 푸른 연기만으로는 감출 수 없기에 / 只有靑煙藏不得
아침저녁으로 밥 짓는 연기 덮어 노을이 된다네 / 朝朝暮暮羃成霞
이는 ‘대나무 마을의 밥 짓는 연기〔竹村炊烟〕’를 읊은 것이다.
도롱이와 삿갓을 모두 스스로 마련했더니 / 襏襫茅蒲摠自修
서쪽 밭과 동쪽 밭에 새로 비가 개었어라 / 西阡東陌雨新收
천시와 인력이 갖추어져 모자람이 없나니 / 天時人力渾無缺
즐거운 마음 서로 통해 곳곳마다 농가로다 / 樂意相關處處謳
이는 ‘금야의 농가〔琴野農歌〕’를 읊은 것이다.
굽이굽이 맑은 개울에는 외나무다리 걸쳐 있고 / 曲曲淸溪略彴橫
산중이라 인적 고요한데 달이 처음 밝아 오네 / 山中人定月初明
마을마다 탁발하고 돌아가는 마음이 다급한데 / 千村乞米歸心急
석장(錫杖) 날려 바람 타니 걸음걸음 사뿐하네 / 飛錫凌風步步輕
이는 ‘월교의 돌아가는 스님〔月橋歸僧〕’을 읊은 것이다.
물가에 버들 녹음이 하늘하늘한데 / 水邊楊柳綠依依
숨겨진 물가 위에 바위 낚시터 한 자리 있네 / 藏護臨流石一磯
대를 잘라 만든 푸른 낚싯대 간들간들하니 / 揀竹得竿靑裊裊
한쪽 어깨에 높이 메고서 돌아감을 잊네 / 一肩高荷去忘歸
이는 ‘낚시터에서 낚시하기〔釣磯垂竿〕’를 읊은 것이다.
상안산과 귤 속의 즐거움이 견주어 어떠한가 / 商顔爭似橘中歡
바둑알 소리 더디 나니 승부 내기 어려워라 / 落子聲遲决勝難
나의 내기와 나의 한가로움을 그대도 함께하니 / 余賭余閒君亦共
나무꾼이 도끼 자루 괴고 구경하든 말든 내버려 두네 / 任敎樵客拄柯觀
이는 ‘선암에서의 내기 바둑〔仙巖賭棊〕’을 읊은 것이다.
반 묘 크기 연못을 만들어 솟는 샘물을 담고 / 半畝池成養活泉
태화산 연을 뿌리째 옮겨 몇 년이 지났던고 / 根移太華幾多年
우뚝이 물 위로 솟아 향기 더욱 멀리 퍼지니 / 亭亭出水香尤遠
염계가 유독 연을 사랑했다는 말을 처음 믿게 되네 / 始信濂溪獨愛蓮
이는 ‘작은 연못의 한 줄기 연〔小塘孤荷〕’을 읊은 것이다.
어느 해에 큰 칼날이 바위를 쪼개 열었던고 / 何年鉅刃劈巖開
태곳적 곧은 소나무 종자가 뿌리 내려 자랐도다 / 太古貞松種子來
거꾸로 매달린 규룡이 일산(日傘)을 머금은 듯 / 倒挂虬龍含偃蓋
흰 구름 속의 신선 수레는 언제나 돌아올꼬 / 白雲仙駕幾時回
이는 ‘석벽에 걸린 높다란 소나무〔石壁危松〕’를 읊은 것이다.
우는 소가 코 쳐들고 앞 들판을 지날 적에 / 鳴牛浮鼻度前坪
목동이 서로 따라가며 피리 한 곡조 부네 / 牧竪相隨笛一聲
무성한 풀이 우거지니 보였다 안 보였다 / 豐草芊綿時出沒
집 돌아가는 채찍은 해 기울기만 기다리네 / 歸鞭直待日西傾
이는 ‘연무 낀 교외의 소몰이〔煙郊牧牛〕’를 읊은 것이다.
시인이 절경을 그려 내기 정말 어려워라 / 騷家絶景畫應難
유수 시엔 만 점 찬 겨울 갈까마귀라는 말이 있네 / 流水詩中萬點寒
눈에 가득한 단풍마다 독특한 빛깔 다투니 / 滿目楓丹爭別色
석양 속에서 술이 깨기를 기다렸다 보리라 / 斜陽留待酒醒看
이는 ‘앵수의 저녁 갈까마귀〔鶯岫暮鴉〕’를 읊은 것이다.
비탈길과 굽은 시내에 초목이 펼쳐져서 / 仄徑回磎草樹平
이름 모를 꽃들이 무수히 피어났네 / 山花無數不知名
주인이 고적함에 지쳐 지팡이 짚고 노니는데 / 主人厭寂隨筇舃
이르는 곳마다 그윽한 향기가 각양각색 맑구나 / 到底幽香別種淸
이는 ‘언덕 위에서의 꽃 감상〔臨厓賞花〕’을 읊은 것이다.
강가 가까운 정자의 처마 기둥을 단장함에 / 糚點簷楹狎水干
난간을 새로 덧붙인 건 물결 보기 위함이라 / 新添欄檻爲觀瀾
당당과 책책 같은 물고기가 와서 모이리니 / 堂堂策策魚來集
호량에서 낚싯대 손질하지 말도록 하여라 / 莫遣濠梁理釣竿
이는 ‘난간에 기대어 물고기 보기〔頫檻觀魚〕’를 읊은 것이다.
[주-D001] 손백경(孫伯敬) :
손사익(孫思翼, 1711~?)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백경ㆍ성모(聖謨), 호는 죽포(竹圃)이다. 손수민(孫壽民)의 아들이고,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의 5세손이다. 1740년(영조1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밀양에 살았다. 《司馬榜目》
[주-D002] 오한(聱漢) :
손기양(孫起陽, 1559~1617)으로, 본관은 밀양,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 정(軍資監正) 손응(孫凝)이고, 아버지는 생원 손겸제(孫兼濟)이다. 어머니는 신취(辛鷲)의 딸이다. 1588년(선조21) 문과에 합격하였다. 1612년(광해군4)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정구(鄭逑)와 도의(道義)의 계(契)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학자이다. 성호가 지은 손기양의 행장(行狀)이 본집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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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7권
해동악부(海東樂府)
1도솔가신라 〔兜率歌 新羅〕등 63곡 과
성호전집 제8권
해동악부(海東樂府)
1정과정곡〔瓜亭曲〕등 56곡 은
사정상 등록을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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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 제1권 / 시(詩)
풍악에 대한 30운〔楓嶽三十韻〕
백두산(白頭山), 동해(東海), 철령(鐵嶺), 비로봉(毗盧峯), 배점(拜岾), 석응봉(石鷹峯), 석마봉(石馬峯), 일출봉(日出峯), 월출봉(月出峯), 천등봉(天燈峯), 향로봉(香爐峯), 중향성(衆香城) 등의 명칭이 있다.
백두산 줄기가 남으로 갈라져 뻗어 와 / 白也南分迆
동쪽으로 아름다운 옥덩이를 이루어 / 瓌然左聚圜
동녘의 바다를 굽어 내려다보고 / 俯臨暘谷海
철문관을 평면으로 바라다보네 / 平睨鐵門關
북쪽의 진산 비로봉은 우뚝이 높고 / 鎭武尊盧頂
서쪽에서 굽어든 배점은 낯을 쳐든 듯 / 紆庚抗拜顔
석마봉 석응봉은 원근에서 날고 뛰는 듯 / 馬鷹騰遠近
일출봉 월출봉은 중간에 우뚝 솟았네 / 日月出中間
천등봉 환한 불빛은 끄기 어려울 듯 / 燈影垂難滅
향로봉 향 연기는 부여잡지 못할레라 / 香煙裊莫攀
신기함은 영 땅 장석의 손을 빌린 듯 / 創奇疑假郢
공교로움은 공수반이 애써 조각한 듯 / 輸巧恐勞般
광석을 깼지만 찌꺼기 하나 안 남긴 듯 / 礦破無留滓
봉우리는 불태워 몹쓸 것만 제거한 듯 / 岡焚只去頑
죽 벌여 세운 창칼이 움직이는 듯 / 森森動劍戟
구슬을 흩어놓은 듯 찬란도 하여라 / 瑩瑩散珩環
가파름은 은번승을 머리에 꽂은 듯 / 峭戴銀幡勝
삐죽삐죽함은 옥순반을 방불케 하네 / 巉齊玉筍班
구원을 비단으로 꾸며 놓은 듯 / 丘園賁了帛
텅 빈 골짝에 돈을 던져 놓은 듯 / 虛牝擲來鍰
좋은 경관 드러내 인간의 사랑받고 / 吐露逢心愛
깊이 숨어서 바깥 비방도 피하누나 / 深潛避外訕
형체는 조금도 나태함이 없거니와 / 形無少懦慢
기색은 늘 한가로운 모습을 지녔네 / 氣有每安閑
온화하여 차라리 업신여김 부를망정 / 和煦寧招侮
뜨거운 때에도 병 됨을 받지 않누나 / 炎敲不受癏
청수한 모습은 되레 궂은 모습 숨기고 / 淸癯還隱惡
엄격한 자태는 또 잔약함도 용납하네 / 嚴厲更容孱
다만 천둥 벼락을 많이도 간직하여 / 但蓄雷霆鬪
간악한 도깨비들을 다 쫓아 버렸지 / 全移魍魎姦
은하수는 깨끗함을 양보하고 / 長河辭皎潔
수많은 별들도 찬란함을 양보하네 / 列宿謝斒斕
안개 사라지면 때로 표범을 보지만 / 霧盡時窺豹
구름 걷히면 백한이 흰빛을 잃기도 / 雲開屢失鷴
햇빛을 보아도 빙설이 안 녹는구려 / 不消從見晛
녹아야만 잔잔한 물줄기를 이룰 텐데 / 須泮始成潺
우주가 강경한 힘을 독차지하여 / 宇宙專剛耿
풍상 속에 늙어 민머리가 되었네 / 風霜老禿鬜
일찍이 검게 더럽혀진 적이 없거니 / 未嘗緇涅汚
다시 쪼고 갈고 깎을 수는 있으랴 / 能復琢磨刪
영수한 기운 모였으니 신이 보호하려니와 / 鍾秀神應護
정령한 기운 쌓였으니 상제가 아끼다마다 / 儲精帝固慳
예로부터 완상할 만한 산수는 / 由來賞林壑
흔히 성시와 멀리 떨어져 있으되 / 多是隔城闤
기이한 잎은 향기가 옷에 스미고 / 異葉熏衣馥
특이한 꽃은 무늬가 찬란도 해라 / 殊葩照纈斑
물은 출출 흘러 거문고 소리 전해 오고 / 帶琴傳濞㶁
새들은 지저귀어 바람 소리에 화답하네 / 和籟送喉
맑은 이슬은 줄기마다 떨어지고 / 紫露莖莖墜
붉은 놀은 골짝마다 펼쳐졌구나 / 丹霞洞洞頒
바위틈의 벌꿀은 구하기도 쉽거니와 / 蜜崖求亦易
굴속의 복령은 캐기도 어렵지 않네 / 苓窟斸非艱
세상에 만일 신선 되는 도가 없다면 / 世苟無仙道
나는 이미 죽어 귀신 세계에 있으리 / 吾其死鬼寰
한공은 어찌 그리 적막하단 말인가 / 韓工那寥闃
붓은 있지만 누가 그 문장 배워 올꼬 / 筆在孰追還
눈에 닿는 것마다 놀라운 경관이라 / 觸目渾相警
읊조릴수록 저절로 즐거워지네 / 供吟轉自憪
흉금이 이제부터 원대해지거든 / 靈襟從此大
어느 날인들 동산이 아닐쏜가 / 何日不東山
[주-D001] 철문관(鐵門關) :
함경도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에 있는 철령(鐵嶺)을 가리킨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철령은 안변부 남쪽 83리쯤에 있는데, 고려 때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호칭했다고 한다.
[주-D002] 신기함은 …… 듯 :
옛날 초(楚)나라 영(郢) 땅 사람이 자기 코끝에다 흰 흙을 마치 파리 날개만큼 얇게 발라 놓고, 역시 영 땅의 명장(名匠)인 석(石)을 불러 그 흙을 닦아 내게 했더니, 명장 석이 바람이 휙휙 나도록 도끼를 휘둘러 그 흙을 완전히 닦아 냈으나, 그 사람의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徐无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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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 제5권 / 시(詩)
옥산 14영〔玉山十四詠〕
남쪽 지방에 명산이 있었는데 / 南國有名山
공이 왔다가 간 뒤로 더욱 중해졌네 / 公來去愈重
연기며 구름이며 물이며 기암괴석이 / 煙雲水石奇
모두 유가의 용도로 다 들어왔구려 / 盡入儒家用
이상은 자옥산(紫玉山)을 읊은 것이다.
옛 성인들이 무슨 일을 좋아했던가 / 古聖樂何事
선생이 능히 홀로 그것을 찾았었네 / 先生能獨尋
모를레라 선생이 오고 가고 하면서 / 不知來與往
그 몇 번이나 이 산을 등림하였는지 / 幾箇此登臨
이상은 독락당(獨樂堂)을 읊은 것이다.
일생 백 년 동안 정자 아래의 물이 / 百年亭下水
일찍이 암자의 주인을 비추었으리 / 曾照菴中人
놓아 버린 마음을 스스로 안 구하면 / 不自求其放
무슨 방도로 진을 기를 수 있으랴 / 何由養得眞
이상은 계정(溪亭)을 읊은 것이다. 이 정자의 첫째 칸을 양진암(養眞菴)이라 한다.
만물이 각각 제자리를 얻어서 / 萬物各得所
자연스레 떼를 이루어 다니는구나 / 自然成隊行
그 즐거워함을 즐길 줄만 알 뿐이요 / 惟知樂其樂
나를 잊는 걸 잊음은 필요치 않고말고 / 不要忘我忘
이상은 관어대(觀魚臺)를 읊은 것이다.
번뇌가 이미 다 사라진 때엔 / 煩惱旣盡時
천연스러운 좋은 기상이로다 / 天然好氣像
애오라지 회포를 읊는 데 흥을 부쳤을 뿐 / 聊興寓詠懷
반드시 돌아가리라는 생각은 안 했으리 / 不作必歸想
이상은 영귀대(詠歸臺)를 읊은 것이다.
이 물은 원래 스스로 맑은 것이요 / 此水元自淸
이 마음은 원래 스스로 밝은 것이라 / 此心元自明
물과 마음은 날로 서로 환히 비치건만 / 淸明日相映
외물이란 게 바로 때 묻은 갓끈이로다 / 外物是塵纓
이상은 탁영대(濯纓臺)를 읊은 것이다.
맘속의 찌꺼기를 소멸키 어려운 곳에 / 沈滓難消處
외물이 밝음을 깨뜨리려는 처음이로다 / 飛陰欲破初
언뜻 보니 맑고 차가운 달이 떠오르자 / 乍看寒月上
깊은 못 수면이 십분 허명해지는구나 / 潭面十分虛
이상은 징심대(澄心臺)를 읊은 것이다.
마음이란 물건은 본디 형체가 없기에 / 有物本無形
때와 먼지를 털고 씻을 물체가 없거니 / 垢埃靡所撲
장차 그 어떻게 씻어야만 / 將何以洗之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거나 / 得見眞面目
이상은 세심대(洗心臺)를 읊은 것이다.
은은한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 冉冉淸宜遠
우뚝 선 줄기는 가까울수록 존경스럽네 / 亭亭近益尊
천년 전 염계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 濂溪千載事
하도 분명해 절로 할 말이 없어지누나 / 了了到無言
이상은 연당(蓮塘)을 읊은 것이다.
푸른 돌이 맑은 시내에 우뚝 튀어나와 / 蒼石凸淸溪
겨우 한 사람이나 앉을 만한 정도인데 / 劣容人獨坐
뭇 고기들이 미끼를 실컷 먹고 와서는 / 群魚飫餌來
입을 벌름거리며 이끼 가를 지나가누나 / 噞噞苔邊過
이상은 조기(釣磯)를 읊은 것이다.
비바람 몰아쳐 사계절 가을 기후요 / 風雨四時秋
벼랑과 못은 한가할 때가 없구려 / 崖潭不得閑
여기에 더하지 말라 늙은 이무기 울어 / 休添老蛟泣
숲 사이에 슬픈 바람까지 일어나는 걸 / 瑟瑟惹林間
이상은 폭포(瀑布)를 읊은 것이다.
찬 물굽이가 깊은 웅덩이를 이뤘는데 / 寒灣泓以渟
그 밑에는 무후의 영혼이 담겨 있네 / 下有武侯靈
그 누가 알리오 우리 주자께서 / 誰識吾朱子
깊은 뜻이 정자를 세우는 데 있었음을 / 深情在起亭
이상은 용추(龍湫)를 읊은 것이다.
서원은 천은으로 내린 편액이요 / 院以天恩扁
당은 손수 기록한 이름이로다 / 堂因手錄名
학문 좋아하는 이들에게 간절히 당부하노니 / 丁寧媚學子
자기를 위하는 공부가 바로 처음 길이라네 / 爲己是初程
이상은 서원(書院)을 읊은 것이다. 옥산(玉山)이란 편액(扁額)을 내렸고, 당(堂)은 구인(求仁)이라 명명하였다.
한가득 이천의 물이요 / 一派伊川水
겹겹이 얽힌 무학산이로다 / 重紆舞鶴山
복사꽃이야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도 / 桃花任流出
어부가 절로 돌아가는 길을 잊겠네 / 漁子自迷還
이상은 자계곡구(紫溪谷口)를 읊은 것이다. 무학(舞鶴)은 산 이름이고, 이천(伊川)은 물 이름인데, 곡구에 있다.
[주-D001] 옥산(玉山) :
경주(慶州) 자옥산(紫玉山)의 약칭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1530년(중종25) 사간(司諫)으로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했다가 그 일당의 배척을 받고 물러난 뒤 이 산에 들어가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고 한다.
[주-D002] 독락당(獨樂堂) :
이언적의 서재(書齋)였던 지금의 옥산서원(玉山書院) 경내에 있는 당명(堂名)이다.
[주-D003] 만물(萬物)이 …… 다니는구나 :
춘추 시대 정(鄭)나라 대부(大夫) 자산(子産)이 교인(校人)에게 물고기를 못에 놓아주라고 했는데, 교인이 삶아 먹고는 복명하기를 “처음에 고기를 놓아주자 지친 모습을 보이더니, 조금 뒤에는 지친 기운이 조금 풀려서 멀리 쑥 들어가더이다.”라고 하자, 자산이 말하기를 “제 살 곳을 얻었구나, 제 살 곳을 얻었구나.”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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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당시집 제1권 / 시(詩)○계유고(癸酉稿)
홍산의 이씨 분암에서 십이경 시에 화답하다〔鴻山李氏墳菴和十二景詩〕
홍산의 아침 햇살〔鴻山朝霞〕
아침 해 홍산에 떠오르니 / 初日鴻山上
붉은 빛에 초목이 물들었네 / 霞光草木涵
햇살이 다 퍼지기 전이라 / 繽紛方未已
반쯤 푸른 이내 끼었네 / 一半是靑嵐
달령의 저녁 노을〔獺嶺夕照〕
높고 높은 옛 달령이여 / 峨峨古獺嶺
다원이 있던 곳에 벽돌이 깨져 있네 / 破甎茶院處
기둥에 기댔던 사람 보이지 않고 / 不見倚柱人
다원에서 기둥에 기댔던 것은 고려 의종(毅宗)의 일이다.
석양만 절로 서쪽으로 기우네 / 夕陽自西去
삼수의 어부〔三水漁客〕
안개 물결에 무슨 좋은 일인지 / 烟波誰好事
그물 쳐 차가운 물빛 가르네 / 橫網截寒光
은어가 올라오는 줄 알겠나니 / 知有銀魚上
가을 수박 향기 강물에 가득하네 / 秋瓜滿水香
은어는 몸에 수박향이 난다.
만봉으로 돌아가는 스님〔萬峯歸僧〕
꽃이 지는 길로 한 스님 가는데 / 花落一僧去
봄 산은 게다가 첩첩일세 / 春山更萬重
아직 절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 寺門行未到
벌써 구름 사이로 종소리 들려오네 / 早有出雲鐘
용담의 가을 달〔龍潭秋月〕
가을 산에 서늘한 밤 긴데 / 秋山夜涼遠
밝은 달은 못의 바위에 떠오르네 / 明月生潭石
푸른 시냇물 이미 다투며 흐르니 / 碧澗已爭流
가을 물고기 응당 입질하지 않으리 / 寒魚應未食
귀암의 밤비〔龜巖夜雨〕
삼수가 북에서 흘러오니 / 三水從北來
우레와 천둥 다투어 요란하네 / 雷霆鬪轟輵
귀암은 다행히 무너지지 않았구나 / 龜巖幸未摧
밤비가 갑자기 쏟아 내렸어도 / 夜雨太倉猝
거룻배로 시내를 거슬러 오름〔溪艇泝流〕
작고 작은 과피정 / 小小瓜皮艇
석양에 푸른 시내 거슬러 오르네 / 斜陽泝碧流
무릉도원 그대에게 절로 있거늘 / 仙源君自有
다시 다른 데서 구할 필요 있으랴 / 何必更他求
서루에서의 납량〔書樓納涼〕
태양 이글거리는 삼복철이라 / 赤日三庚節
청산에서 몇 권 책으로 더위 피하네 / 靑山數束書
날듯한 처마 나뭇잎과 잇닿았으니 / 飛簷連樹葉
한낮에 한 줄기 매미소리 들리기 시작하네 / 亭午一蟬初
석대에서 듣는 폭포소리〔石臺聽瀑〕
물을 끌어 맑은 못에 떨어뜨리니 / 引水墜空潭
오래도록 동천이 축축하네 / 長時洞天濕
아침엔 흰 돌 따라 떨어지더니 / 朝擔白石還
저녁엔 서늘한 구름 쫒아 들어가네 / 暮逐涼雲入
빙교에서 추수 구경〔氷郊觀稼〕
골짝의 밭 넓힐 수 없으니 / 峽田不可廣
천석이 그 절반을 차지했네 / 泉石居其半
제법 풍년 든 때인지라 / 頗亦作年時
황금물결 끊임없이 일렁이네 / 黃雲吹不斷
화곡에서의 봄나들이〔花谷尋春〕 화곡은 바로 고 문강공 서화담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다.
못 그림자 도심을 밝혀주고 / 潭影明道心
새 소리는 《주역》 읽는 것 같네 / 鳥聲似周易
길게 노래 불러도 고인은 보이지 않고 / 長歌不見人
낚시터엔 꽃잎만 떨어지네 / 花落釣臺石
탑평에서 눈 구경〔塔坪賞雪〕
맑은 기상 화담과 근사한데 / 灑落近花潭
북풍 불어 밤사이 눈 내렸네 / 北風夜來雪
시내와 산이 이렇듯 춥다고 / 溪山如此寒
어부와 초동에게 일러주네 / 爲向漁樵說
[주-C001] 계유고(癸酉稿) :
1873년(고종10), 김택영이 24세 되던 해에 지은 작품들이다.
[주-D001] 다원(茶院)에서 …… 일이다 :
이 사실은 《동사강목》 제9상 정해년 의종 21년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귀법사(歸法寺)에서 현화사(玄花寺)로 행차함에 말을 달려 달령(獺嶺)의 다원에 이르렀는데, 따르는 신하들이 다 따라가지 못했다. 왕이 홀로 기둥에 기대어 시자(侍者)에게 말하기를, ‘정습명(鄭襲明)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여기에 올 수 있었겠느냐?’라고 하였다.”
[주-D002] 과피정(瓜皮艇) :
작은 배의 한 종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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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당시집 제1권 / 시(詩)○정축고(丁丑稿)
부산 도서정 잡영 16수〔扶山圖書亭雜咏 十六首〕
부산(扶山)에 별장이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가 마침내 백씨(白氏) 소유가 되었다. 지금 임금 갑자년(1864, 고종1)에 화재로 중건하여 도서정(圖書亭)을 지었는데, 이윽고 정자의 문서가 개성 유수(開城留守)였던 이공(李公)에게 넘어갔다. 이공이 돌아가게 되자 정자가 관리되지 않아 비바람에 시달리고 잡초가 가득하였다. 이해 봄(1877, 고종14)에 고을의 여러 군자 25명이 서로 돈을 모아 정자를 구입하여 수리하고 나에게 그 일을 읊어 주기를 청하였다.
부산동에 연하의 경치 넉넉하니 / 扶山洞裏足烟霞
시냇물 맑게 울리며 흐르고 꽃은 절로 지네 / 澗水泠泠自落花
구름 가운데 스물 다섯 봉우리 골라 보게 / 請選雲中峯廿五
한 봉우리마다 한 채의 집이 있다네 / 一峯峯着一人家
당시 황량한 정원을 누가 읊을까 / 誰賦當年葵麥園
새 지저귀고 꽃 지는 것 모두 상심거리일세 / 鳥啼花落總傷魂
천금으로 구입하였으니 산신령 웃겠지만 / 千金博得山靈笑
날마다 봄바람이 문을 쓸겠지 / 日有春風爲掃門
정자 위 청산은 철을 쌓은 듯 / 亭上靑山如積鐵
사시로 향기로운 운무 끼고 북두성 임하네 / 香霧四時臨帝車
정자 앞 냇물 백 번이나 굽이쳐 흐르니 / 亭前流水百折去
자세히 보면 떠내려 온 꽃잎을 아까워하는 듯 / 細看似惜浮來花
노석은 어지럽게 나그네 길 다투고 / 老石縱橫爭客路
긴 덩굴 이어져 사람의 옷 당기네 / 修藤羅絡牽人衣
맑은 시내 한 번 건너고 다시 건너야 하니 / 淸溪一涉還再涉
석양에 돌아가려 해도 돌아가지 못하겠네 / 斜日欲歸猶未歸
천 자의 붉은 사다리 속진을 끊었고 / 丹梯千尺絶浮埃
아름다운 동천의 풍광 숨었다 다시 열리네 / 玉洞風光隱復開
한결같이 서호처럼 모습이 빼어나지만 / 一樣西湖眉目勝
그중에 잘 만든 것은 귀대일세 / 就中工綴是龜臺
아득한 허공엔 새가 날아 돌아오고 / 長空澹澹鳥飛迴
용봉산 빛은 비단을 쌓아 놓은 듯 / 龍鳳山光錦繡堆
천 년의 송도 그림 좋으니 / 千載松京圖畫好
이령의 솜씨 다시 생각나게 하네 / 令人復憶李寧才
이령(李寧)은 고려 사람인데,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명으로 〈송경도(松京圖)〉를 그렸다.
푸른 나무 소하만보다 빽빽하고 / 綠樹密于消夏灣
벽사롱은 독서하던 산과 비슷하네 / 碧紗籠似讀書山
세상에 원앙 기와 자랑마라 / 人間莫詫鴛鴦瓦
조그마한 초가집도 참으로 즐겁다네 / 一笠茅茨儘好顔
갖가지 구름 놀 붉은 빛 드러낸 곳 / 種種雲霞現色紅
유람객들 서로 옛 절을 가리키네 / 遊人相指古禪宮
고려 때에 이곳에 절을 지었다.
종과 경쇠 소리 사라져 한이 무궁한데 / 鐘沈磬沒無窮恨
석양의 소나무 온 골짝 바람결에 우네 / 落日松吟萬壑風
잡초 속 황폐한 비석에 구재를 알겠으니 / 草裏荒碑認九齋
최옹의 옛 뜻 술잔에 가득 채우네 / 崔翁古意酒盈杯
해동공자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 海東孔子今何在
고려 때 최충(崔冲)이 구재(九齋)를 이곳에 지어 경학(經學)을 창도하였는데, 당시에 ‘해동공자’라고 일컬었다.
이 강산 관리는 나의 재주 아니네 / 管領江山非我才
예쁘게 단장한 기생 나아와 옥피리 불고 / 紅粉粧前紫玉笙
높은 누대 몇 곳에 술통에 술 가득한가 / 高臺幾處酒盈甁
사시 중 두 철 넘게 유람객 머무니 / 四時强半游人住
줄곧 이 탓에 산문을 닫지 않네 / 總爲山門不設扃
봄바람 따라 계모임 하러 숲에 들어오니 / 春風修稧入林來
난정의 좋은 일 또 한 번 돌아오네 / 好事蘭亭又一回
바위 위에 함께 이름 새기고 가니 / 石上共題名字去
비바람에 이끼 자라지 않도록 하라 / 莫敎風雨長莓苔
숲 속에 며칠이나 도끼질 소리 들렸건만 / 林中幾日斧斤聲
꽃과 새들 기뻐하며 모두 놀라지 않네 / 花鳥欣欣都不驚
제비들 지저귀며 축하 올리고 / 燕子呢喃供賀語
용왕은 꾸짖으며 불기운 몰아내네 / 龍王呵叱走炎精
오늘 산에 들어오니 날씨 맑은데 / 今日入山天氣淸
샘물 떠 마시고 돌 베고 누우니 오래도록 기쁘네 / 㪺泉枕石久怡情
귀대 곁에 졸졸 흐르는 시냇물 / 龜臺側畔潺湲水
모두가 피리 소리 다한 뒤의 곡조일세 / 盡是笙歌散後聲
꽃 핀 뒤에 산 기운 구름으로 변하고 / 山氣化雲花發後
서늘한 밤중에 솔바람 소리 비오는 듯 / 松聲如雨夜涼中
그밖에 그윽한 일 그대 아는가 / 更餘幽事君知否
길은 푸른 이끼 때문에 오래 막혔네 / 路爲蒼苔久未通
돌 냄비와 술 단지 이리저리 널려 있고 / 橫陳石銚與匏樽
게다가 신선 글씨 높은 곳에 걸려 있네 / 更有仙書位置尊
열흘 동안 바쁘다가 오늘에야 도착하니 / 十日奔忙今日到
빈 창가엔 어지러운 산 모습 넉넉하네 / 虛窓堆積亂山痕
서장 왕 급사도 부럽지 않고 / 不羨西莊王給事
평천 이 찬황도 부럽지 않네 / 不羨平泉李贊皇
앞에는 길든 학 날고 뒤에는 길든 사슴 따르니 / 前飛馴鶴後馴鹿
내 너희와 함께 끝없이 지내리라 / 吾與汝曹俱未央
[주-C001] 정축고(丁丑稿) :
1877년(고종14), 김택영이 28세 되던 해에 지은 작품들이다.
[주-D001] 부산(扶山) :
송악산(松岳山)의 네 개 동천(洞天) 가운데 셋째 동천이다.
[주-D002] 황량한 정원 :
규맥원(葵麥園)을 풀이한 것인데, 규맥은 토규(兎葵)와 연맥(燕麥)을 말한다. 여기서는 개성 유수였던 이공이 떠난 뒤 퇴락해진 도서정을 말한다. 토규와 연맥은 야초(野草)와 야맥(野麥)으로, 황량한 정경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유우석(劉禹錫)의 〈거듭 현도관을 거닐며[再遊玄都觀]〉란 작품의 해설에 “지금 14년 만에 다시 주객낭중(主客郎中)이 되어 거듭 현도관을 거닐어 보니, 옛날 도사가 심었다는 선도(仙桃)는 한 그루도 없고, 오직 토규와 연맥만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라고 한 데서 온 것이다.
[주-D003] 붉은 사다리 :
선경(仙境)에 들어가는 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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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 제1권 / 시(詩)
송암 팔경〔松巖八景〕
솔 그늘 깊은 곳에 선들바람 불어와 / 翠陰深處動微凉
대자리에 티끌 없어 낮잠이 길어지네 / 枕簟無塵睡味長
산새가 울지 않고 찾는 이도 없어서 / 山鳥不鳴人更寂
작은 집에서 달콤하게 깊은 잠을 잔다네 / 小軒猶作黑甛鄕
위는 소나무 그늘에서 낮잠 자는 것을 읊었다.
봄 지난 시냇가에 푸른 버들 드리워져 / 春盡溪頭綠柳垂
십리의 긴 둑에 버들가지 어지럽네 / 長堤十里亂交枝
까닭 없이 날아와서 고운소리 지저귀니 / 無端巧舌來相囀
진종일 꾀꼴꾀꼴 하소연하는 듯하네 / 終日綿蠻似訴思
위는 버드나무가 선 둑에서 들리는 꾀꼬리 소리를 읊었다.
석양이 은은하게 시내 언덕에 가득하고 / 斜暉曖曖滿溪皐
숲 너머 멀리서 피리소리 높게 들려오네 / 林外遙聞一笛高
알겠네, 나무하는 아이가 소 등에 올라타서 / 知却樵童臥牛背
먼 마을 홀로 가도 힘든 적이 없는 것을 / 遠村孤往不曾勞
위는 먼 마을에서 들려오는 목동의 피리소리를 읊었다.
우뚝 선 동쪽 벼랑에 병풍바위 늘어서서 / 鑿立東崖屛列石
올라볼 순 있어도 옆에 갈 순 없다네 / 可堪登眺不堪臨
꽃피는 아침 달 밝은 밤에 자주 술에 취하여 / 花朝月夕頻乘醉
바람 앞에 머리 드러내고 두건 젖히고 시를 읊네 / 露髮風前岸幘吟
위는 두건을 젖히고 바라보는 바위를 읊었다.
아스라이 넓은 들에 봄보리가 일렁이니 / 靄靄平原春麥動
시내에 뿌리던 비 저녁 무렵 갤 때로다 / 正當溪雨晩晴天
바람 불어 급히 앞마을 밖을 바라보니 / 風來忽望前村外
십리 펼쳐진 밭에 푸른 물결 일렁이네 / 碧浪粼粼十里田
위는 보리가 일렁이는 언덕을 읊었다.
희고 붉은 꽃들이 봄 산에 가득하여 / 白白紅紅滿山春
술병 차고 날마다 가도 흥이 더욱 새롭네 / 携壺日到興添新
작은 대를 손수 쌓고 경치를 구경하니 / 手築小臺探物色
옆 사람은 나를 두고 꽃구경하는 사람이라 하네 / 傍人喚作看花人
위는 꽃을 구경하는 대를 읊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진을 쳐서 날마다 두는 장기 / 陣成秦楚日圍棊
대면하고 꾀를 내어 각자 싸움을 벌이네 / 對面生謀各鬪奇
손 멈춘 채 이기려고 세밀히 계산하니 / 停手細推相賭意
세간에서 이익 다투는 일이 다 이와 같네 / 世間爭利儘如斯
위는 소일하며 장기 두는 것을 읊었다.
시내에 달빛 쏟아져 초가 정자 좋은데 / 溪月紛紛可草亭
밤마다 맑은 빛이 발에 가득 들어오네 / 淸光夜夜滿簾旌
거문고 무릎에 놓으니 많은 생각 일어나 / 尺桐橫膝多情思
고산유수 노래 소리 끝없이 타노라 / 彈盡高山流水聲
위는 달빛 아래에서 거문고 타는 것을 읊었다.
[주-D001] 진종일 …… 듯하네 :
원문의 면만(綿蠻)은 꾀꼬리가 꾀꼴꾀꼴 우는 소리이다. 《시경》 소아(小雅) 면만(綿蠻)에, “꾀꼴꾀꼴 꾀꼬리가, 무성한 산 숲에 그쳤다.〔綿蠻黃鳥, 止于丘隅.〕”라고 한 것을 두고 이르기를, “그침에 있어 그 그칠 곳을 아나니, 사람으로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할 도리(道理)를 최선을 다하여 어긋남이 없게 함을 말한 것이다. 《大學章句 傳3章》
[주-D002] 한나라와 초나라 :
원문의 진초(秦楚)는 초한(楚漢)으로 써야 하나 평측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진성초한(陣成楚漢)이라 쓰면 ‘측평평측’으로 고평(孤平)이 되기 때문에 ‘측평평측’인 진성진초(陣成秦楚)로 쓴 것이다. 그래서 장기와 관련지어 한나라와 초나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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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 제1권 / 시(詩)
삼가 농암의 장편 시에 차운하다〔恭次聾巖長篇〕 퇴계 선생과 주신재, 황금계가 모두 화답하였다.
천상의 신선이 말세에 태어나 / 上界眞人生世末
바위 모퉁이 푸른 물가에 집을 지었네 / 卜築巖阿煙水碧
벼슬길 영화는 얇은 비단처럼 보았고 / 任看宦榮薄似紗
고고하게 누워 시원한 흉금을 보존했네 / 高臥剩得胸襟豁
낚시하며 위수 물가 노인으로 자처하고 / 垂綸自許渭濱老
문 닫고서 수레 자주 찾는 것도 반기지 않았네 / 閉門不喜車騎密
전에는 벼슬에 올라 임금을 모시면서 / 昔者飛騰接龍光
정사를 경영함에 착오 하나 없었네 / 經綸庶事元非錯
당시에 품은 포부가 동해보다 깊었으니 / 當時抱負東海深
작은 잔으로 누가 그 끝을 헤아리랴 / 窺涯誰得容杯勺
나라 위한 충정으로 늘 노심초사하였고 / 爲國款丹長耿耿
부절 나누어 몇 번 서쪽 남쪽으로 갔었네 / 分符幾作西南客
만년에 분강 구비로 물러나니 / 晩來自退汾一曲
바람 불고 구름 낀 정자는 도솔천과 같았네 / 風榭雲亭宛兜率
한가히 고기 잡고 나무하는 이들과 벗삼으니 / 閑伴漁翁與樵父
그 속의 삶은 넓은 신선세상일 뿐만이 아니었네 / 棲息不啻壺天闊
흥이 나면 붓을 들어 주옥같은 시를 짓고 / 興來揮毫碎瓊思
두건 젖혀 쓰고 달 밝은 강 언덕을 거닐었네 / 岸幘江皐月正白
깊은 정과 참된 취미 얼마나 많았던가 / 幽情眞趣知幾許
지팡이 짚고 높은 곳 오르고 배로 강을 건넜네 / 杖可登高船可涉
여러 해 선경에서 유유자적 즐겼고 / 多年仙境足優游
홀로 즐긴 생애는 담박함을 달게 여겼네 / 獨樂生涯甘淡泊
때때로 원로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 有時招邀盡耆舊
꽃 앞의 술자리에서 맑은 술을 기울였네 / 淸罇相倒花前席
산수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학 같은 몸 보존하니 / 自適雲泉保鶴骨
와각지쟁 같은 세상사를 어찌 생각하랴 / 何慮塵途戰蝸角
풍류 좋은 태수는 어디에서 왔다가 / 風流太守自何處
하룻밤에 산을 찾아 급하게 돌아갔나 / 一夕尋山歸思急
문화산 구름 밖으로 날 듯이 가서 / 文華雲表獨飄然
열두 봉우리 앞에서 급히 바람수레 몰았네 / 十二峯前風馭促
난새를 탈 길 없어 돌아오지 않으니 / 驂鸞無術去不返
암선에게 머리 돌려 보기를 어찌 잊으랴 / 回首巖仙肯忘却
서로 기약하여 용문사에서 하룻밤 자면서 / 相期一宿龍門寺
맑은 밤 신선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네 / 霞醴淸宵酌言酢
다투어 시 읊으니 그 소리가 쩌렁쩌렁하고 / 爭吟雅韻聲散落
봄 두견이 달밤에 울고 산대나무 찢어졌네 / 春鵑哭月山竹裂
삼모의 멋진 모임 세상에 비할 것 없으니 / 三茅勝會世無竝
지금 누군들 그 풍절을 흠모하지 않으랴 / 至今孰不歆風節
내 기이한 것 좋아하고 그 기풍 높이 우러러 / 吾能好奇仰高芬
남긴 자취 찾아보려니 시냇물만 오열하네 / 欲尋遺躅溪嗚咽
무릉은 그 모습이 천리에 멀어졌고 / 武陵千里隔音容
암선은 또 어찌하여 유명을 달리했나 / 巖仙又奈幽明別
명편을 내가 졸작으로 이은 것이 부끄럽지만 / 繪章空慙續狗尾
길이 시인들의 추모의 정을 일으키리라 / 永世可起騷人憶
[주-D001] 농암(聾巖)의 장편 시 :
농암은 이현보(李賢輔)이고, 시는 제목이 〈취시가를 써서 좌상의 제공들에게 보이다.〔醉時歌 書示座上諸公〕〉이다. 《聾巖先生文集 卷1》
[주-D002] 위수(渭水) 물가 노인 :
주나라 때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한 강태공(姜太公)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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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 제3권 / 시(詩)
청성잡제 절구 16수〔靑城雜題 十六絶〕
1
산 아래 깊은 연못 거울처럼 맑아서 / 山下深潭鏡樣淸
밤 되자 별빛이 더욱 선명하게 비치네 / 夜來星彩轉分明
거룻배 타고 물에 비친 하늘 위를 떠가니 / 輕舠泛却空明上
어렴풋이 이 몸이 하늘 위를 가는 듯하네 / 怳是此身天上行
위는 성산연(星散淵)을 읊은 것이다.
2
거울처럼 맑고 맑은 물 십 리에 잔잔한데 / 鏡面澄澄十里平
길 따라 흐르는 물이 산을 굽이도네 / 臨流一路繞山橫
한가함 속에 오가며 찾는 이가 없지만 / 閑中不問人來往
나무꾼의 노랫소리 저물녘에 들려오네 / 聽取樵歌帶暮聲
위는 경중로(鏡中路)를 읊은 것이다.
3
산 남쪽 한 마을 다 어부들의 집이니 / 山南一里盡漁家
백사장 가에 오래도록 낚싯대 드리우고 있네 / 長把漁竿傍白沙
때로 봄 적삼 빨아 여울 가에서 말리니 / 時澣春衫灘上曬
여울 보다가 배꽃이 떨어진 줄 착각하네 / 看來錯認落梨花
위는 이화탄(梨花灘)을 읊은 것이다.
4
흐르는 물 앙앙곡을 감싸 도니 / 流水泱泱抱谷回
몇 집의 울타리가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네 / 數家籬落若浮來
멀리서 닭 울음 개 짖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보니 / 遙聞雞犬驚塵夢
이곳에 영주의 별천지가 펼쳐져 있네 / 別有瀛洲此地開
위는 앙앙곡(泱泱谷)을 읊은 것이다.
5
가을 되어 호수에 물 줄어드니 / 有時秋水落平湖
손바닥 모양 찬 백사장이 눈처럼 펼쳐있네 / 掌樣寒沙白雪鋪
기러기 울음소리가 구름 밖에서 들리더니 / 旅雁一聲雲外墜
달빛에 진을 이뤄 시끄럽게 서로를 부르네 / 月中成陣亂相呼
위는 백사장(白沙場)을 읊은 것이다.
6
구불구불 맑은 여울 몇 리에 빗겨 있어 / 迤邐淸灘數里斜
예부터 수사화가 촘촘이 자생하네 / 古來多簇水梭花
다투어 말하네, 관에서 고기잡이 금하는 곳이니 / 爭言官禁銀鱗處
많은 작은 물고기에게 작살 쓰지 말라고 / 無數魚兒不用叉
위는 사탄(斜灘)을 읊은 것이다.
7
산은 마을 뒤를 감싸고 물은 앞에 흘러 / 山圍村後水前臨
여름이면 물 불어 해마다 들판 반이 잠기네 / 夏漲年年半野沈
가장 좋은 건 아침저녁에 연기가 피어올라 / 最勝朝晡煙一縷
멀리 관도에 이어져 호수에 비치는 것이네 / 遙連官渡映湖林
위는 수침촌(水沈村)을 읊은 것이다.
8
전하는 말에 강굽이가 예전에 전원이었다하는데 / 傳言江曲舊田園
절반은 강물 되었으나 땅은 그대로 있네 / 半作流波地不遷
어부와 농부들 이따금 섞이는 곳엔 / 漁子農夫時雜處
고기 삶고 보리밥 지으며 돈을 논하지 않네 / 烹魚炊麥不論錢
위는 원포(園浦)를 읊은 것이다.
9
요동치는 강물과 고요한 산이 있어 / 動有江流靜有山
집에서 감상하니 저절로 한가하네 / 一堂幽賞自閑閑
이 속에 즐거운 것은 인과 지 때문이지 / 箇中所樂由仁智
산수의 동정에 달려있지 않다네 / 不在溪山動靜間
위는 인지암(仁智庵)을 읊은 것이다.
10
깨끗한 작은 난간 구름과 접해 있어 / 小軒淸逈接飛雲
높이 누워 신선 풍치 충분히 누리네 / 高臥仙風領十分
옷 속에 찬 기운 스며드는 줄 모르고 / 不覺衣裳如許冷
밤늦도록 도리어 달빛을 즐기네 / 晴宵還可月紛紛
위는 운와헌(雲臥軒)을 읊은 것이다.
11
요공의 풍치가 참말로 좋은데 / 寥公風致正堪憐
기쁘게 산인에게 시 몇 편을 보내왔네 / 喜贈山人費幾篇
남북에서 시 지음도 참으로 좋지만 / 南北帶詩眞好事
방안에서 함께 술 취해도 뭐 나쁘랴 / 不妨留室共陶然
위는 시노실(詩奴室)을 읊은 것이다.
12
바닷가 노인처럼 기심을 버리니 / 除了機心似海翁
한 쌍의 갈매기 물결 가운데 날아 내리네 / 雙鷗飛下泛波中
날마다 작은 대에서 한가롭게 서로 벗하니 / 小臺日日閑相伴
물아일체 참된 즐거움을 누가 알랴 / 眞樂誰知物我同
위는 구하대(鷗下臺)를 읊은 것이다.
13
작은 계곡에 여름 장마 더해지면 / 細澗時添趁夏霖
기운 바위에 맑은 옥구슬이 쏟아지네 / 斜巖淸瀉碎球琳
착각했네, 산 위에 여러 신선 모여 / 錯擬山上群仙會
쟁그랑 패옥을 만 장 아래로 흩어버린 줄로 / 鳴佩珊珊散萬尋
위는 명옥폭(鳴玉瀑)을 읊은 것이다.
14
속세 밖 맑게 노니는 상진이 있다기에 / 物表淸遊有上眞
단결을 구하여 여한을 없애려 했네 / 欲求丹訣恨無因
이제 발길 옮겨 층층 바위에 오른다면 / 如今聳脚層巖上
나 또한 선경에서 제일가는 사람이라네 / 我亦仙區第一人
위는 상진암(上眞巖)을 읊은 것이다.
15
초연히 절벽 따라 오솔길을 가노라니 / 緣壁翛然一逕微
무성한 대나무가 안개비를 머금었네 / 叢叢綠竹帶煙霏
귀찮게 찾는 속인의 발자취 용납하지 않고 / 不容俗迹煩相訪
한가로운 승려만이 오고감을 허락하네 / 秪許閑僧去復歸
위는 죽경(竹逕)을 읊은 것이다.
16
돌을 쌓아 단을 만드니 만 장 우뚝한데 / 築石爲壇逈萬尋
소나무 맑은 그늘이 짙게 드리워 좋구나 / 爲憐松樹滿淸陰
더위에도 뼛속까지 한기가 느껴지니 / 炎天便覺寒生骨
분명 천 년 늙은 학의 마음을 얻었네 / 分得千年老鶴心
위는 한송단(寒松壇)을 읊은 것이다.
[주-D001] 영주(瀛洲) :
신선이 산다는 산 이름으로, 여기에 봉래(蓬萊)와 방장(方丈)을 합하여 삼신산(三神山)이라 말한다.
[주-D002] 수사화(水梭花) :
물고기의 별칭이다. 스님들은 주육(酒肉)을 금하기 때문에 은어(隱語)를 사용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주-D003] 관도(官渡) :
관청에서 설치한 나루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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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 제4권 / 시(詩)
흥 자 이십 운을 써서 김숙야에게 주다〔用興字律二十韻贈金叔野〕
우리 고을에 시인이 구름처럼 흥기함은 / 吾鄕韻士藹雲興
맑은 산수의 정기를 받은 것이네 / 山水淸靈有是徵
문필로 서로 좇아 명성이 빛났고 / 鉛槧相從名粲粲
의관은 즐비하여 학문이 흥성했네 / 冠襟自整學烝烝
공이 오묘하게 깨달아 시인 중에 뛰어나니 / 公嘗妙覺騷家秀
누가 현묘한 공 쌓아 성인의 도를 접할까 / 誰着玄功聖處能
유분처럼 과거에 유감이 컸지만 / 舊業劉蕡雖大憾
최열처럼 이른 나이에 명성을 날렸네 / 早年崔烈擅英稱
글 지을 때에 어찌 무적의 시를 본받았으랴 / 綴文豈效文無敵
덕을 닦음은 변하지 않는 덕을 기약했네 / 修德端期德有恒
빼어난 기상은 천리마를 따를 만하였고 / 峻氣可追千里驥
웅대한 계획은 구만 리 창공의 붕새를 압도했네 / 雄圖且壓九天鵬
세월이 흘러서 화살처럼 빠른 것을 근심했고 / 垂垂歲月愁飛箭
시서에 힘써서 묶인 끈을 풀 듯 고심했네 / 汲汲詩書苦約繩
눈 가득 번화함은 추구해도 얻지 못하고 / 滿眼繁華求莫得
배 속 가득한 의리는 이욕과 싸워 이기겠네 / 撑腸義理戰宜勝
티끌 없는 빈 방은 맑고도 고요했고 / 消塵虛室淸而寂
달빛 어린 찬 강은 넓고도 맑았네 / 銜月寒江浩矣澄
관디 차고 조정에 선 공서적을 천하게 여겼고 / 束帶立朝猶鄙赤
당에 올라 도를 들은 증삼을 추구했네 / 升堂聞道慣追曾
초미금은 채옹을 만나서 기이한 소리를 냈고 / 琴逢蔡子奇音發
칼은 풍호자를 만나야 높은 값을 더했네 / 劍待風胡美價增
길흉이 운명에 달린 것은 새옹지마에서 보고 / 隨命吉凶看塞馬
출처가 남에게 매인 것은 토시 위의 매에 견주네 / 由人行止擬鞲鷹
어긋난 심사는 박옥을 감춘 것을 한탄하고 / 謬悠心事嗟藏璞
공명이 늦으니 얼음을 다듬은 것 한스럽네 / 遲暮功名恨琢氷
청삼 신세 전락해도 곤궁함을 달게 여기고 / 身落靑衫甘蹭蹬
황각 꿈이 다하여서 높이 오를까 겁내네 / 夢闌黃閣怯軒騰
장한 회포는 부질없이 중랑장과 비슷하고 / 壯懷空似中郞將
주량은 태악승 왕적처럼 대단했네 / 酒量頗寬太樂丞
붉은 진흙 흙탕길에서 고관들을 사양하고 / 紅漲塵途辭貴侶
흰 연기 떠있는 집에서 은자만 허여했네 / 白浮煙屋許幽朋
준재와 교유하니 배도의 별장처럼 기쁘고 / 締交髦俊欣裴墅
못난 나와 교제하니 두릉처럼 감사하네 / 托契疏頑感杜陵
굴욕에 더 견고하니 옥 같은 의표 알겠고 / 抱屈益堅知玉表
곤경에서 더 독실한 늠름한 기풍을 아끼네 / 處窮彌篤愛風稜
동산 숲을 차지하여 편안히 누웠어도 / 林園縱得居居臥
조정에 높이 오르길 도모해야 하는데 / 雲陛須謀翼翼登
나는 부끄럽게도 십 년간 은거하면서 / 愧我十年爲野逸
산속의 층층 바위 초가에서 지내고 있네 / 結茅棲息翠巖層
‘독(篤)’ 자가 어떤 데는 ‘려(礪)’로 되어 있다.
[주-D001] 김숙야(金叔野) :
미상이다.
[주-D002] 문필(文筆) :
원문의 ‘연참(鈆槧)’은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도구인 연분(鉛粉)과 서판(書板)을 말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양자운(揚子雲)이 항상 연분을 품고 서판을 가지고 다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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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 속집 제3권 / 시(詩)
청성잡제〔靑城雜題〕 16수는 원집에 보인다.
우뚝 선 바위 모습 호골처럼 기이한데 / 陡立巖形虎骨奇
바위 위 높은 누각 맑은 물에 비치네 / 巖阿高閣浸淸漪
풍류 즐기던 옛 주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風流古主今安在
의구한 연파만 나를 슬프게 하네 / 依舊烟波使我悲
위는 호골암(虎骨巖)을 읊은 것이다.
덕을 지닌 모습처럼 큰 연못이 드넓어 / 長潭闊若德容弘
관동들과 맑은 물에 새로이 목욕하네 / 新浴淸波共冠童
발 씻고 갓끈 씻은 것도 취할 만하지만 / 濯足濯纓皆自取
무우에서 바람 쐬고 영귀한 것이 제일 좋네 / 詠歸便勝舞雩風
위는 덕담(德潭)을 읊은 것이다.
아득한 옥토를 두루 밭 갈고 김매니 / 微茫沃野遍犂鋤
해마다 오야에서 수확한 곡식 수레에 가득하네 / 歲歲汚邪自滿車
바뀌는 사계절 중 어느 때가 제일 좋은가 / 四序迭侵何最好
누런 가을보리가 대지를 덮을 때이네 / 黃雲蓋地麥秋初
위는 망곡평(網谷坪)을 읊은 것이다.
백 척의 높은 누각 태청에 기댔으니 / 百尺高樓倚太淸
몇 번이나 달빛이 수명루를 비췄던가 / 幾回殘夜水光明
수없이 갈고 닦은 좋은 거울 마주한 듯하니 / 千磨寶鑑如相對
어찌 비루한 망상이 싹틀 수 있으랴 / 一芥何由鄙吝萌
위는 수명루(水明樓)를 읊은 것이다.
무릉의 신선이 불던 퉁소소리 끊어져 / 玉簫吹斷武陵仙
옛 자취를 추억한 지 몇 년이나 되었던가 / 追憶遺蹤幾許年
그 소리를 지금은 다시 듣기 어려우나 / 餘響只今難更聽
진녀를 맞이하여 난새 타고 돌아오겠지 / 定邀秦女駕鸞旋
위는 취소대(吹簫臺)를 읊은 것이다.
물고기들 무리 지어 자유로이 헤엄치고 / 游鱗作隊自洋洋
이따금씩 월척도 뛰어올랐다 잠기네 / 潛躍隨時玉尺長
지팡이에 기댄 채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랴마는 / 倚杖豈能知所樂
자세히 살펴보며 옛 호량의 노닒에 견주네 / 耽觀猶擬古濠梁
위는 수어대(數魚臺)를 읊은 것이다.
봄이 온 채마밭에 약초를 심고서 / 山圃春回種藥苗
달뜬 저녁 안개 낀 아침에 한가로이 김매네 / 閒鋤月夕又烟朝
약초 재배하여 장생술을 얻을 수 있으니 / 養成倘得長生術
신선되어 등천함이 어찌 어려우랴 / 羽化何難上廓寥
위는 약포(藥圃)를 읊은 것이다.
이따금 절구소리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 時舂小碓響雲中
저녁 바람 불어오자 강 하늘에 흩어지네 / 散落江天動晩風
도리어 푸른 하늘로 옥토끼가 날아가서 / 却訝靑空飛玉兔
밤마다 광한궁에서 약초 찧는 줄 알았네 / 宵宵搗藥廣寒宮
위는 운대(雲碓)를 읊은 것이다.
등나무처럼 줄기 뻗어 절벽에 얽혀 있고 / 引蔓如藤纏峭壁
작약처럼 꽃이 피어 한여름에 만발했네 / 開花如芍爛朱夏
꽃 중의 부귀한 자로 매우 번화하여 / 花中富貴極繁華
유람객들은 봄꽃이 시든 줄도 모르네 / 遊客不知春色謝
위는 모란암(牡丹巖)을 읊은 것이다.
바위 모퉁이에 마른 소나무가 적송이 되어 / 石角枯松作赤松
옛 신선이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듯하네 / 古仙疑是竚高峯
만약 장량이 벽곡을 하였다면 / 若敎辟穀張公見
유방을 사양하고 적송자를 따랐으리라 / 應謝劉家願一從
위는 적송봉(赤松峯)을 읊은 것이다.
지봉이 옥소반처럼 깨끗하고 평평하여 / 支峯潔若玉盤平
올라서 먼 산을 보니 학을 탄 모습이네 / 登對遙山駕鶴形
사방에서 서늘한 바람이 겨드랑이에 불어오니 / 四望泠然風滿腋
몸이 가벼워 구름을 빌려 탈 필요 없네 / 輕身不必借雲翎
위는 대학봉(對鶴峯)을 읊은 것이다.
바위 옆 대나무가 벽옥처럼 차갑고 / 巖畔竹光寒玉碧
바위 아래 샘물이 구슬처럼 떨어지네 / 巖阿泉脈明珠滴
대나무에 기대 샘물 즐기며 온종일 앉았으니 / 弄泉倚竹坐終日
상쾌한 바람 불어 모자를 날리네 / 爽籟成風吹脫幘
위는 죽천대(竹泉臺)를 읊은 것이다.
[주-D001] 발 …… 것 :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 무우(舞雩)에서 …… 것 :
공자가 제자들에게 뜻을 묻자, 증점이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D003] 오야(汚邪) :
낮은 지대의 땅을 말한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한 농부가 돼지 발굽 하나, 술 한 사발을 차려 놓고 농신(農神)에게 풍년을 빌어 말하기를 “높은 지대 협소한 땅에서는 곡식을 상자에 가득 수확하게 하고, 낮은 땅에서는 곡식을 수레 가득 수확하게 해주소서.〔甌窶滿篝, 汙邪滿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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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 속집 제4권 / 시(詩)
연어헌 팔영〔鳶魚軒八詠〕 동파(東坡)의 〈적벽부〉 문자를 뽑아서 시구를 엮었다.
어부들은 강가에서 물고기와 짝하고 / 漁樵江渚侶魚鰕
달 밝고 바람 시원한 좋은 밤을 어이할까 / 月白風淸良夜何
일엽편주로 아득한 만경창파를 헤쳐 가며 / 一葉茫然凌萬頃
맑은 호수에서 뱃전 두드리고 노래하네 / 空明渺渺扣舷歌
위는 ‘달밤에 호수에 배를 띄움〔夜月泛湖〕’이다.
아득한 하늘 저 끝에 홀로 서서 / 獨立蒼茫天一方
계수나무 노 저으며 물결을 거슬러 오르네 / 飄飄桂棹泝流光
서글프게 탄식하며 옷깃 여미고 곧게 앉아서 / 正襟危坐愀然歎
또 맑은 바람에 〈요조〉장을 읊조리네 / 更誦淸風窈窕章
위는 ‘배안에서 질탕하게 읊음〔舟中浪詠〕’이다.
추풍에 소식의 〈적벽부〉를 호탕하게 노래하니 / 浩浩秋風赤壁蘇
슬픈 듯한 퉁소소리 다시금 구슬프네 / 洞簫如怨更嗚嗚
술만 있고 안주 없으니 어디에서 구할까 / 有酒無肴安所得
강물에 그물 던져 비늘 가는 농어를 잡네 / 臨流網取細鱗鱸
위는 ‘가을날 강물 위에서 농어회를 먹음〔秋江膾鱸〕’이다.
가면서 노래하고 화답하며임고정을 지나니 / 行歌相答過林皐
남은 노래가 조맹덕을 생각나게 하는 듯하네 / 遺響如懷孟德曹
술잔 들고 뽐내며 노니니 몹시 즐거워 / 擧酒遨遊行樂甚
강가에서 우러러보니 돌산이 높구나 / 仰觀江上石山高
위는 ‘산을 마주하고 술에 취해서 노래함〔對山醉歌〕’이다.
흰 이슬이 강에 가득하고 물빛이 하늘에 닿았는데 / 白露橫江水接天
도사의 깃옷이 함께 펄럭이네 / 羽衣道士共翩躚
한밤중에 이름을 물어도 대답이 없는데 / 問名不答夜將半
이때 갑자기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네 / 長嘯一聲時劃然
위는 ‘강 위에서 학을 만남〔江上遇鶴〕’이다.
천척의 산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 木葉盡飛千尺山
밝은 달은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하네 / 徘徊明月斗牛間
사방을 돌아보며 옷을 걷고 가파른 바위 올랐으나 / 攝衣四顧巉巖上
새매 사는 높은 둥지까진 오르지 못했네 / 棲鶻危巢不可攀
위는 ‘산에 올라 가을풍경 바라봄〔登山秋望〕’이다.
좁쌀 같은 나의 삶 세상에 영웅 되어 / 一粟吾生一世雄
깃을 단 신선과 장풍을 타고 가네 / 羽仙相與御長風
세상사 하루살이마냥 잠깐 사이에 변하니 / 蜉蝣天地須臾變
끝없이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며 탄식하네 / 俯歎江流意不窮
위는 ‘호수에서 신선과 함께 노닒〔湖仙同遊〕’이다.
끝없는 긴 강을 작은 거룻배 타고 / 無盡長江一葉舟
어부가를 부르면서 중류에 이르렀네 / 漁歌相屬放中流
여운이 가냘파서 잠긴 교룡 춤추니 / 餘音嫋嫋潛鮫舞
바로 가을바람 부는 칠월이라네 / 正是西風七月秋
위는 ‘저물녘 물가 어부의 노래〔晩汀漁歌〕’이다.
주-D001] 어부들은 …… 짝하고 :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물고기 새우와 짝하고, 고라니 사슴과 벗 삼는다.〔侶魚鰕而友麋鹿〕”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2] 달 …… 어이할까 :
소식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달 밝고 바람 시원한데, 이같이 좋은 밤을 어찌할까?〔月白風淸, 如此良夜何?〕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3] 일엽편주로 …… 가며 :
소식의 〈전적벽부〉에 “일엽편주가 가는 대로 따라서 아득한 만경창파를 헤쳐 가네〔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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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2권 / 시(詩)○오언 절구(五言絶句)
영지동의 여덟 경치를 읊다〔靈芝洞八詠〕
한 해에 어찌 세 번이나 피어나는가 / 一歲何三秀
운당의 괴로운 읊음도 있다네 / 篔簹有苦吟
주자의 진중한 뜻에서 / 晦翁珍重意
늘그막의 마음 깊이 느끼노라 / 深感暮年心
이상은 영지동(靈芝洞)을 읊은 것이다.
황과 왕, 제와 패의 사업과 / 皇王帝霸事
천지와 귀신의 실상을 / 天地鬼神情
마음의 근원 조용해진 후 / 心源專靜後
모두 관찰하고 나면 남은 광명 있으리 / 觀盡有餘明
이상은 정관재(靜觀齋)를 읊은 것이다.
본체는 원래 허명한 것이지만 / 本體自虛明
사물에 응할 때 도리어 잃기 쉽네 / 應時還易失
오직 한 치의 아교를 가지고 / 惟將寸膠而
동정에 모두 한결같이 해야 하리 / 動靜皆於一
이상은 함일당(涵一堂)을 읊은 것이다.
태극은 음양보다 우선하지만 / 有物先陰陽
문득 음양 속에 있는 것이네 / 却在陰陽裏
다시 염옹의 무극을 가지고 / 更把濂翁無
검은 허리를 일깨워야 하네 / 要提黑腰耳
이상은 태극정(太極亭)을 읊은 것이다.
증점은 바로 광자이니 / 點也是狂者
어찌 요순과 같으리오 / 如何堯舜同
마음속에 누가 있으면 / 心中如有累
무우의 바람에 부끄러우리라 / 慙愧舞雩風
이상은 욕기단(浴沂壇)을 읊은 것이다.
건괘 곤괘가 구괘 복괘에서 시작되니 / 乾坤起姤復
그 본체 절로 둥글게 이뤄지네 / 其體自圓成
모남을 함축한 그 이치 미묘하니 / 含方理更妙
이를 희롱하며 평생을 보내려네 / 弄此了平生
이상은 농환와(弄丸窩)를 읊은 것이다.
반묘의 반듯한 못가에 / 半畝方塘上
누가 조그마한 누대 지었나 / 何人小作臺
하늘과 구름 물속에 담겼으니 / 天雲涵活水
무이산에서부터 돌아왔는가 / 還自武夷來
이상은 천운대(天雲臺)를 읊은 것이다.
못가에 오래된 바위 있으니 / 潭邊有老石
맑은 물에 그림자 거꾸로 비치네 / 倒影碧波淸
한가로이 읊으면서 오래 앉아 있으니 / 閑吟宴坐久
이 마음도 함께 맑으리라 / 還與此心明
이상은 징심석(澄心石)을 읊은 것이다.
[주-D001] 영지동(靈芝洞) :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별장인데 동대문 밖에 있었다고 한다. 《宋子大全 隨箚 卷1》
[주-D002] 운당(篔簹)의 괴로운 읊음 :
주희가 젊어서 운당포(篔簹鋪)를 지나다가 벽에 쓰인 “빛나는 영지(靈芝)는 한 해에도 세 번이나 피는데 나는 어이 뜻을 이루지 못하는가.”라는 글을 읽고 슬퍼했다는 말이 있다. 《宋子大全 隨箚 卷1》
[주-D003] 한 치의 아교 :
작은 재주와 역량을 말한다. 《포박자(抱朴子)》 〈가둔(嘉遯)〉에 “한 치의 아교가 황하수의 흐림을 맑힐 수는 없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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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1권 / 시(詩)
영물십절(詠物十絶) 병서
내가 한가한 생활 중 무료하여 언제나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계절을 만나면 벌레들을 관찰하곤 하는데, 비록 지각없이 꿈틀대는 미물이긴 하지만 취하여 경계삼을 만한 점이 있기에 드디어 절구 열 수를 읊어 좌우명을 대신한다.
붉은 해가 불덩이 같건만 / 赫日方如火
매미는 계속 울고만 있네 / 蟬鳴猶不已
누가 알랴 저 푸른잎 사이에 / 誰知綠葉間
그렇게 시원한 곳 있는 줄을 / 有此淸涼地
이상은 매미
장마지면 피할 줄도 알고 / 居能避雨潦
나와서는 임금 위해 죽기도 하지 / 出而死長上
그 이름 틀리지 않고 / 命名固不爽
의(蟻)는 의(義)의 뜻을 취한 것이니, 군신(君臣)의 의리를 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슬기 또한 가상도 하지 / 其智亦可尙
이상은 개미
어두운 방에선 마음 속이기 쉽고 / 暗室易欺心
어두운 길은 더듬어 가기 마련 / 冥途又墑埴
너는 천성이 어둡지 않아 / 爾性能不昧
밤이면 꼭 등불을 밝혀 다니누나 / 夜行必以燭
이상은 반딧불
파리 색이 흑백으로 변하는 것은 / 靑蝿變白黑
먹이가 그렇게 만드느니라 / 由食使之然
파리 자체가 흰 놈이 검은 놈이 되고 검은 놈이 흰 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놈이 흰 것을 먹으면 똥이 희고 검은 것을 먹으면 똥도 검게 나온다.
참소 좋아하는 소인배들은 / 小人好讒慝
마음이 원래 비뚤어져 있지 / 一心元自偏
이상은 파리
동쪽 정원에 봄기운이 오면 / 東園春氣至
복사꽃 오얏꽃이 활짝 피는데 / 桃李正芳菲
꽃 위를 날아다니는 저 나비들 / 紛紛花上蝶
꽃이 지고 나면 어디로 가려나 / 花落更何歸
이상은 나비
그물을 치고 또 치니 / 結網密復密
마음 씀이 어찌 그리 깊은가 / 用意一何深
경륜이 비록 뱃 속에 가득하나 / 經綸雖滿腹
그 모두가 교활한 마음이지 / 都是機巧心
이상은 거미
하룻밤에 갈바람이 불면 / 秋風一夕吹
들창 가에 귀뚜라미가 울지 / 蟋蟀鳴窓壁
미물도 저렇게 때를 아는데 / 微物亦知時
흐르는 광음 아낄 줄 알아야지 / 流光當自惜
이상은 귀뚜라미
천지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니 / 飛翔天地間
걱정이 따르지 않아야 하련만 / 患害宜無及
어디서 오척의 어린애가 나타나 / 何來五尺童
끈끈이를 가지고서 덮치고 마네 / 膠絲奄相襲
이상은 잠자리
오래 썩은 두엄 속에 있을 때엔 / 久在腐草裏
볼썽사납게 더럽기만 하더니 / 醜穢不可見
때가 되어 매미로 변하자 / 時至化爲蜩
도리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네그려 / 翻爲人所羡
이상은 굼벵이
온종일 똥덩어리 속에서 / 終日糞壤中
배 채우려고 분주히 골몰하며 / 營營爲口腹
그칠 줄 모르고 왔다갔다 하다가 / 轉轉不知止
마소에 짓밟혀 죽고 말지 / 殞身牛馬迹
이상은 말똥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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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詠,八景 – 제8권 끝.
첫댓글 앞 부분 몇수 감상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자료들 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