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골든 벨을 울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죠? 고등학교를 순회하면서 녹화하는 프로그램인데 50개인가 되는 퀴즈를 전부 맞추는 학생이 골든 벨을 울립니다. 그러면 그 학교는 골든 벨을 울린 학교로 등록이 됩니다. 골든 벨을 울리는 데 필요한 사람은 딱 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울릴 수 없습니다. 단 한 명만 울리면 그 학교 전체가 골든 벨을 울린 학교가 되는 것이지요.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한 번 만족 되면 끝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만족 되면 그것이 요구하는 효력이 없어집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셨고 율법은 만족 되었으며(성취되었으며) 한번 만족 되고 성취된 율법은 이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마 5:17, 킹제임스 흠정역)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어제 말씀드렸듯이 우리 이방인은 율법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인 우리가 아이러니하게도, 습관적으로 "율법, 율법"하고, "율법적이다, 율법적이다" 노래를 하지만 사실, 율법에 어떤 조항이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율법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율법과 행위 타령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 '율법'이란 어떤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율법은 법이지 개념이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이방인에게 율법의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정죄감을 가져다주는 우리의 양심입니다(롬 2:14) . 양심은 성경에서 '죄를 의식하는 것'으로 번역되었는데(히 10:2, 킹제임스 흠정역), 사실, 양심이라는 것이 하는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잘했을 때는 양심이 어떤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잘 못했을 때, 양심은 분연히 일어나 나를 정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양심이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바로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양심의 모든 가책, 모든 죄책감을 해결해 놓으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죄를 짓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죄 가운데 살겠습니까? 아래 계속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한번도 유대인인적이 없는 우리 한국 성도들이 율법에 대해서 의식하는 만큼, 이 양심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율법에 대해서도 그냥 뜬구름 잡듯 아는 경우가 많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떻게 하셨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 '율법'이라는 단어를 '양심'으로 고쳐서 읽으면 좋습니다. 그 이유가 되는 구절을 어제에 이어서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우리 생각 안에서 일어나는 변명과 고발(정죄)은 머리속, 고장 난 기계처럼 계속 반복되는 대화로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잖아.", "누군 그렇게 안 하고 싶나? 할 수 없는 상황인 걸 어떻게 해?" 등등 정죄와 변명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예수님께서 해결 해 놓으셨습니다.
(롬 8:1/한글킹제임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헌금도 정죄감을 느껴서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정도로만 하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할 수 있고 그렇게 기쁨으로 하는 헌금만이 열매가 보장됩니다(고후 9:7). 아무튼, 그 외의 영역에서도 마음의 원함보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책임감이나, 정죄감,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모욕하는(만홀히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아주 쉬운 방법은 '로맨스'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로맨스는 바로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로맨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연애하는 상대가(또는 배우자가) 책임감에서, 정죄감에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나를 만나고, 나와 교제한다면 그것만큼 나에게 모욕적인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연애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가 자유의지로 나를 선택하고, 원해서 나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만큼 우리의 자유의지를 원하시는 분도 없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우리의 자유의지, 선택의 자유를 원하셨으면 인간들 중에 자신의 자 의지로 지옥을 선택할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도 구원의 선택을 우리에게 맡기셨겠습니까? 워맥 목사님도 가끔 이 주제를 얘기하시면서 자신도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당하신 이유는 우리가 자유의지로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는 너무나도 큰 기쁨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행위, 율법.. 사실 이런 것들은 우리 육신적 이방인들은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논하려면 최소한 600개가 넘는 율법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깨끗케 된 양심을 가지고 나의 자발적 의지로, 나의 자유 선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과 교제하길 원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요 3:16, 17:3).
율법, 즉 우리 양심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한 번 해결되어, 영원히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책임감, 정죄감, 양심의 가책, 이 모든 것이 없더라도 나는 자유의지로, 선택의 자유로 예수님과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직접 사귀어 알기를 원하느냐, 이 문제만 남았습니다. 이 영생을 위한 자유의지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너무 많은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값싼 책임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