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도 산천이 아름다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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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1:59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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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이 아름다운 공주
공주의 영역은 매우 넓어서 금강 남쪽과 북쪽에 걸쳐 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첫째가 유성(儒城)이고, 둘째가 경천(敬天)이며, 셋째가 이인이고, 넷째가 유구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주 일대의 살 만한 곳을 이르는 것이다.
『택리지』에 실린 공주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공주읍 북쪽에 작은 산 하나가 있는데 강가에 서리고 얽힌 그 모양이 공(公) 자와 같기 때문에 공주라는 이름은 여기서부터 유래하였다. 산세를 따라서 작은 성을 쌓고 강을 해자로 삼아, 지역은 좁으나 형세는 견고하다”라고 쓰여 있다. 조선의 문장가 서거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차령 이남에 산천의 맑은 기운이 쌓여서 큰 고을을 이룬 것에는 오직 공주가 제일이다. 대개 장백산의 한 갈래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 계림에 이르러서 원적산이 되고, 서쪽으로 꺾여서 웅진을 만나 움츠려 큰 산악을 이룬 것을 계룡산이라 한다. 물이 용담, 무주 두 고을에서 근원을 발하여 금산에서 합쳐져 영동, 옥천, 청주 세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또 꺾여 사비강이 되어서는 더욱 더 큰물을 이루어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간다. 이에 공주는 계룡산으로 진산을 삼고 웅진으로 금대를 두르고 있으니 그 산천의 아름다움을 알겠도다.
역사 속에서 여러 부침을 겪었던 공주는 위례성에 이은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이다. 백제의 개로왕은 궁궐을 새로 짓는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이 불안했는데, 그때 고구려의 장수왕이 위례성을 침범하였고 개로왕은 사로잡혀서 죽임을 당한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475년 지금의 공주인 웅천(熊川)으로 도읍을 옮긴다. 그 후 538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60여 년 동안 공주는 백제의 도읍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그들이 물러간 후 신라는 웅천주를 두었다. 고려 때에 와서야 다시 공주라는 이름이 되었고, 조선 세종 때에는 진을 두었다. 갑오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공주에는 충청감영이 있었으며 호남지방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1932년 충청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공주가 도청 소재지로서 충청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한적한 교육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공산성
축성 연대는 24대 동성왕 때로 추정된다. 당시 명칭이 웅진성이었으며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주시내에서 무령왕릉으로 좌회전하기 전 우측에 위치한 야산에 계곡을 둘러싼 산성이 공산성(公山城)이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된 공산성의 축성 연대는 24대 동성왕 때로 추정된다. 그러나 백제의 21대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고 왕자가 22대 문주왕이 되어 웅진으로 천도를 하면서 공산성에 궁궐을 축성하고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 당시 명칭이 웅진성이었으며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성은 석축이 약 1.8미터, 토축은 약 390미터로 전체 2.2킬로미터에 이르며, 성벽은 2중으로 쌓여 있다. 성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서문인 공북루(拱北樓)와 남문인 진남루(鎭南樓)가 있으며, 진남루 앞의 넓은 터를 백제 때의 궁궐터로 추정하고 있다. 공북루 못미처에 임류각(臨流閣) 터가 있는데, 『삼국사기』 「동성왕」 22년 조에 “왕궁의 동쪽에 높이 5척이나 되는 임류각이란 누각을 세웠고, 연못을 파서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라고 실려 있다.
공산성 공북루
공산성은 성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서문인 공북루(拱北樓)와 남문인 진남루(鎭南樓)가 있으며, 진남루 앞의 넓은 터를 백제 때의 궁궐터로 추정하고 있다.
명국삼장비
공산성 안에 있는 명나라 장수의 송덕비다. 정유재란 당시 공주 주민들을 왜군의 위협에서 보호해준 명나라의 세 장수를 기리기 위해 1598년에 세웠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의자왕이 공산성에 잠시 거처하기도 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 헌덕왕 14년(828)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고, 1623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는 인조가 피난처로 삼았다. 『택리지』의 기록을 보자.
성 북쪽에 있는 공북루는 대단히 웅장하고 강가에 임하여 경치가 좋은 곳이다. 선조 때 서경(西坰) 유근이 충청감사로 와서 이 누각에 올랐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소동파는 적벽강에 놀았으나 나는 지금 창벽(蒼碧)에 놀고,
유양은 남루에 올랐지만 나는 여기 북루에 올랐노라.
창벽은 금강 상류의 청벽산 아래에 있는 절벽이다.
공산성 아래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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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이 아름다운 공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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