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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르몽드] 선정 ‘20세기 책 100선’
독문학 전문가 선정 ‘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
개인은 해체되고 삶은 추상화된 현대, 그 몰락을 사유하는 한 인간의 서사시적 행보
일차대전 발발 1년 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카카니엔’)을 무대로 한 『특성 없는 남자』는 세기 전환기에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는 이들의 드라마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무질의 역작이다. 기계화된 합리적 이성이 개별 인간을 소외시키는 새 시대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나가는 사유의 모험이자, 자연과학자의 분석적인 눈으로 파편화된 인간의 실존을 문제 삼는 한 편의 문학적 사고 실험인 셈이다. 오늘날 『율리시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모더니즘 문학의 3대 정전으로 손꼽히며 쿤데라, 바흐만, 쿳시 등을 비롯한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무질이 20여 년 넘게 집필에 매달려 있던 이 미완의 작품은 무엇보다 그 방대한 분량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 유고의 내용을 제하고, 생전에 작가의 손을 거쳐 출간된 3부 38장까지를 완역했다. 맥락을 명쾌하게 짚어낸 세심하고 유려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로 작품 속 풍성한 사유에 다가갈 수 있게 도왔다.
목차
제1부 일종의 머리말
1. 여기서는 어떤 일도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11
2. 특성 없는 남자의 집 15
3. 특성 없는 남자에게도 특성 있는 아버지가 있다 18
4. 현실감각이 있다면 가능성감각도 있어야 한다 21
5. 울리히 25
6. 레오나, 혹은 관점의 이동 30
7. 약한 상태에서 울리히가 새 연인을 끌어들이다 36
8. 카카니엔 44
9. 위대한 남자가 되려는 세 가지 시도 가운데 첫번째 시도 51
10. 두번째 시도. 특성 없는 남자의 도덕적 단초들 53
11. 가장 중요한 시도 56
12. 스포츠와 신비주의에 관한 대화 뒤 울리히를 사랑하게 된 여인 61
13. 천재적인 경주마가 그에게 특성 없는 남자라는 인식을 무르익게 하다 64
14. 어릴 적 친구들 70
15. 정신 혁명 80
16. 비밀스러운 시대병 83
17. 특성 없는 남자가 특성 있는 남자에게 미친 영향 89
18. 모스브루거 102
19. 편지 훈계, 특성을 얻을 기회. 두 왕가의 즉위 기념식 경쟁 117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
20. 현실과의 접촉. 특성의 결핍에도 울리히는 과단성 있고 열정적으로 행동하다 125
21. 평행운동의 진정한 발명자 라인스도르프 백작 131
22. 평행운동이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우아함과 정치적 힘을 가진 한 부인의 모습을 하고 울리히를 집어삼킬 태세를 갖추다 139
23. 한 위대한 남자의 첫번째 개입 146
24. 자본과 문화. 디오티마와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우정, 그리고 유명한 손님들을 영혼과의 합일로 이끄는 직책 150
25. 어느 결혼한 영혼의 고통 158
26. 영혼과 경제의 결합. 그럴 능력이 있는 남자가 오스트리아 옛 문화의 매력적인 바로크를 즐기려 하고, 그것을 통해 평행운동에 하나의 아이디어가 생성되다 165
27. 위대한 이념의 본질과 내용 169
28. 생각에 관한 문제에 특별한 의견이 없는 사람은 얼마든지 건너뛰어도 되는 장章 171
29. 평범한 의식 상태의 설명과 중단 175
30. 울리히의 귀에 목소리가 들린다 181
31. 당신은 누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183
32. 잊고 있던, 어느 소령 부인과의 아주 중요한 이야기 186
33. 보나데아와의 결별 194
34. 뜨거운 빛줄기와 차가운 벽들 197
35. 레오 피셸 이사와 불충분한 이유의 원칙 205
36. 앞서 언급한 원칙 덕분에 평행운동은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지기도 전에 구체적 현실이 되다 208
37. 한 언론인이 ‘오스트리아의 해’라는 용어를 창안하자 라인스도르프 백작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져 급히 울리히를 찾다 212
38. 클라리세와 그녀의 데몬들 219
39. 특성 없는 남자는 남자 없는 특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229
40. 자기 속에 온갖 특성이 존재하지만 그 특성들에 무관심한 남자. 정신의 군주가 체포되고, 평행운동이 명예 사무총장을 얻다 233
41. 라헬과 디오티마 251
42. 창립총회 258
43. 위대한 남자와 울리히의 첫 만남. 세계사에서는 어떤 비이성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디오티마는 진정한 오스트리아가 전 세계라고 주장한다 268
44. 총회 속행과 종결. 울리히는 라헬에게 호감을 느끼고, 라헬은 졸리만에게 호감을 느끼다. 평행운동에 견고한 조직이 생기다 275
45. 두 산봉우리의 조용한 만남 283
46. 영혼이라 불리는 커다란 구멍을 채우는 최선의 수단은 이상과 도덕이다 288
47. 분리된 모든 것을 아른하임은 한몸에 갖고 있다 291
48. 아른하임이 유명한 세 가지 이유, 그리고 전체의 비밀 295
49. 구외교와 신외교 사이에 나타나기 시작한 갈등들 301
50. 계속되는 발전. 투치 국장은 아른하임이라는 인물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마음먹다 308
51. 피셸의 집 314
52. 투치 국장이 부처 업무에서 하나의 결함을 확인하다 323
53. 모스브루거가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다 327
54. 울리히는 발터, 클라리세와의 대화에서 반동적 태도를 취하다 330
55. 졸리만과 아른하임 340
56. 평행운동 위원회들의 활발한 활동. 클라리세가 백작에게 편지를 써 ‘니체의 해’를 제안하다 346
57. 비약적인 발전. 디오티마는 위대한 이념들의 본질에 대해 진기한 경험을 하다 351
58. 평행운동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자발적인 후퇴는 없다 358
59. 모스브루거가 깊은 생각에 빠지다 363
60. 논리적 도덕적 세계로의 탐사 375
61. 세 논문의 이상 혹은 정확한 삶의 유토피아 379
62. 지구는 물론이고 특히 울리히가 에세이즘의 유토피아에 깊이 허리를 숙이다 383
63. 보나데아가 환상을 보다 399
64. 슈툼 폰 보르트베어 장군이 디오티마를 방문하다 413
65. 아른하임과 디오티마의 대화 415
66. 울리히와 아른하임 사이에 약간 순탄치 않은 기류가 흐르다 419
67. 디오티마와 울리히 427
68. 여담: 인간은 자신의 몸과 일치해야 할까? 439
69. 디오티마와 울리히. 속편 442
70. 클라리세가 이야기를 하러 울리히를 방문하다 450
71. 황제 폐하 즉위 칠십 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 주요 결정을 내리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열리다 458
72. 수염 뒤에 가려진 과학의 은근한 웃음, 또는 악과의 장황한 첫 만남 466
73. 레오 피셸의 딸 게르다 476
74. 기원전 4세기 대 1797년. 울리히가 다시 아버지의 편지를 받다 489
75. 슈툼 폰 보르트베어 장군은 디오티마 방문을 직무상의 유쾌한 기분전환으로 생각하다 495
76.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다 498
77. 언론인들의 친구 아른하임 502
78. 디오티마의 변신 508
79. 졸리만이 사랑에 빠지다 519
저자 소개
저: 로베르트 무질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집안의 권유로 아이젠슈타트 초급 군사 학교, 빈 사관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기계 공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브륀 공과 대학교에 입학한다. 수학하면서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메테를링크, 에머슨 등의 작품을 읽었다. 이후 베를린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첫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Die Verwirrungen des Zoeglings Toerleß, 1906)을 발표하여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08년 같은 대학에서 에른스트 마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철학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작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1930년과 32년 평생의 역작 『특성 없는 남자』(Der Mann ohne Eigenschaften) 1, 2권을 출간했으나 1938년 나치 정권에 의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판매가 금지되었다. 이후 『특성 없는 남자』를 완성하기 위해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질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결국 미완성인 채로 제네바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평단 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특성 없는 남자』는 아돌프 프리제가 유고를 정리한 전집이 출간되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지금은 20세기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로 꼽히고 있다.
이들 작품 외에 단편집 『합일』(Vereinigungen) 『세 여인』(Drei F... rauen), 희곡 『몽상가들』(Die Schwaermer), 문집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 등이 있다.
역: 박종대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환경을 위해 어디까지 현실적인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세상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사냥꾼, 목동, 비평가』를 포함하여 『콘트라바스』, 『승부』, 『어느 독일인의 삶』, 『9990개의 치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1백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 리뷰
‘세계의 정신적 극복’을 꿈꾼 미완의 기획
한 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독일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어 소설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여기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을 제치고 첫자리를 차지한 것이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무질은 오늘날 더욱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전집이 새로 발간되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접근성도 한결 높아졌다. 작가로서 생전에 충분히 받지 못한 평가와 인정을 이제는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특성 없는 남자』의 배경은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하고 새로이 ‘현대’가 도래한 20세기 초 유럽(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일명 ‘카카니엔’)이다. 실증주의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개인은 분해 가능한 요소들의 합으로 해체되어 통계상의 수치로 환원되고, 중요한 일도 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에 관해 종합적인 인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각자 자신의 관점대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이러한 실존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의 정신적 여정이 담긴 작품이다. 무질은 20여 년을 매달려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했으나 끝내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1919년부터 ‘스파이’ ‘구원자’ ‘쌍둥이 남매’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 집필을 시도한 끝에 1930년 『특성 없는 남자』 1·2부, 이어서 1932년 집필중이던 3부의 앞부분을 출간했고 이때만 해도 머지않아 작품을 끝맺으리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집권과 잇따른 이차대전이 작가의 삶과 작품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았다. 시대의 소요 속에 소설의 방향성은 여러 번 수정될 수밖에 없었고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정치적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1938년 3부의 속권을 출간하기로 어렵게 결정하지만 미처 교정쇄를 다 확인하기도 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고 출판사도 망명길에 오르며 계획도 무산된다. 무질 역시 기존에 작성했던 스케치와 초고를 챙겨 스위스로 망명해 작업을 이어갔으나 출판 금지와 금서 지정으로 작가로서의 입지가 좁아진 탓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1942년 무질이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특성 없는 남자』는 1만 1천여 장에 달하는 유고를 남긴 미완의 소설로 남게 되었다.
“이 책은 풍자가 아니라 확실한 공식이다. 고백이 아니라 풍자다. 심리학자를 위한 책이 아니다. 사상가를 위한 책이 아니다. 쉬운 책도 어려운 책도 아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열할 필요 없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다면 직접 읽는 것이 최선이다. 작가인 나를 비롯해 타인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직접 읽기를 권한다.” _로베르트 무질
무질은 작품을 구상하던 단계에서부터 갖고 있던 아이디어 중 많은 부분을 폐기하지 않고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간직했다. 비록 완성된 형태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작품에 관해 남긴 방대한 기록을 통해 그 방향성과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1926년 로베르트 무질은 “내가 표현하는 대항적 흐름, 세력 그리고 운동의 모든 총합이 바로 전쟁이었고, 전쟁일 수밖에 없었으며 여전히 그렇다”고 언급했다. 끝내 실현되지 못한 소설의 결말에 관해서는 “모든 노선은 전쟁으로 치닫는다”고도 썼다. 『특성 없는 남자』는 기계 이성의 힘이 최고조로 발현된 시대에 일차대전에 이어 이차대전의 전쟁을 불러온, 유럽 정신의 몰락과 문명의 야만을 예고하는 역사적 궤적이 담긴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전형적이고 도식적인 개념으로 추상화된 현대의 삶을, 파편화된 이 세계의 무질서를 정신적으로 극복해내기 위한 대담하고 야심찬 기획으로 이 소설을 썼다.
사유하는 주인공, 에세이즘의 탄생
성(姓)도 없이 시종일관 이름으로만 불리는 주인공 울리히에겐 ‘특성 없는 남자’라는 별명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개성이 없다는 말과 같아 보이지만 실제 맥락상의 의미는 정반대에 가까워서, 식별 가능한 특성이 없어 유형화시킬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개별 인간이 여러 속성과 기능의 총합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분해되고 조립되기를 거부하는 그의 존재는 유별나다고 여겨진다. 사실 울리히는 현대적인 삶에 요구되는 모든 능력을 전부 갖춘 탓에 어떠한 가능성이든 내포하고 있는, 확정되지 않은 존재다. 그 의미도 애매한 ‘위대한 남자’가 되고 싶어 군인, 공학자의 길을 거쳤고 지금은 수학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수학적 사고에 매혹을 느꼈기 때문인데, 수학의 정밀한 눈으로 삶을 꿰뚫어보고 새롭게 사고할 수 있다면 인간은 지금과 다른 식으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자기 삶에서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이른바 ‘삶으로부터 일 년 동안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듯 보이는 아들을 염려하는 현실적인 아버지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살필 겨를도 없이 여러 유력 인사가 조직한 애국대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이 운동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줄거리를 구성하는 사건으로 작용한다. 이웃나라 독일에서 빌헬름 2세의 즉위 삼십 주년 행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항적인 의미에서 더욱 성대하게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칠십 주년을 기념하려는 의도를 담은 까닭에 ‘평행운동’으로 불리는 운동이다. 『특성 없는 남자』가 1920년대 들어 집필되기 시작한 작품이고 전쟁의 경험을 계기로 쓰인 작품임을 감안하면, 일차대전으로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해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시점에서 제국과 황제의 평화와 영광을 기리는 ‘평행운동’을 서사의 주축으로 삼은 것은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이 운동이 추진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작품 속에 담긴 풍자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온갖 분야의 지식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장은 실상 비슷비슷한 내용 일색이고, 사람들은 회의를 보람 있게 마무리하기 위해 무엇이 됐든 상관없이 결론 내린다. 어마어마하게 밀려드는 민중의 소망을 정리한 두 개의 서류철에도 지표나 방향이 없이 각각 ‘○○로 돌아가자’와 ‘○○로 나아가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시대는 나아가야 할 곳을 잃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옛것으로 회귀하거나 진보로 나아가기를 부르짖는다. 누구도 제대로 된 상이 없는 채로 각자 현상의 일면만 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울리히는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한다.
“진리를 원하는 사람은 학자가 되고, 주관성의 놀이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아마 작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_1권, 제2부 393쪽
그러다 어느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을 때 울리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 아니면 ‘불가능성’을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한다. 그리고 3부에서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 잊고 있던 ‘샴쌍둥이’ 여동생 아가테를 만나고 나서는 둘만의 독자적인 목표점인 ‘다른 상태’의 도덕적 삶, ‘천년제국’을 향해 나아가자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특성 없는 남자』은 서사나 사건 위주의 전통적인 소설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주인공 울리히와 그 주변 인물들의 내적 사유가 이 책의 핵심이 된다. 현실 속에서 사건은 추상적, 간접적, 파편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인데 작가가 여전히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전개나 하나의 단일한 서사에 의존한다면 시대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무질은 새로운 글쓰기 전략을 취한다. 차례에서 보다시피, 장면 단위로 소제목을 상세하게 달아 어떤 내용이 이어질지를 미리 알려주는가 하면, 2부 28장 ‘건너뛰어도 되는 장’이나 68장 ‘여담’에서처럼 뛰어넘고 읽어도 되는 장을 구분해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서사의 진행에 상관없이 주인공 울리히가 어떻게 행위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주변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이 소설을 진행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이 인물들의 내적 독백이 담긴 문장들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세계의 무질서, 유폐당하고 분열된 개인의 실존이 비로소 드러난다.
이런 에세이적 성격은 사건보다 사유의 흐름이 중요한 이른바 ‘사유 소설’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발한다. 작품에서 에세이를 “하나의 대상을 여러 절(節)로 나누어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삶과 세계의 모습도 에세이를 닮아야 한다고 한 대목이 있다. 대상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에세이야말로 개별적인 것의 가치를 담보하면서도 총체성에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기 위한 작가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민족 이중 국가체제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카카니엔’)을 배경으로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계의 합일을 꿈꾸던 인물들의 여정을 다룬 내용 면에서도, 기존 소설 형식의 한계를 극복한 독창적인 에세이즘적 글쓰기를 택한 구조 면에서도, 내용과 형식 사이의 합일을 도모해나가는 이 과정에서 무질은 오늘날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남겼다. 같은 장을 스무 번씩 고쳐 쓸 정도로 자신의 현실과 일치하는 소설을 쓰고자 집요하게 노력한 무질과 여러 갈래의 가능성으로 남게 된 울리히의 지치지 않는 탐구가 겹쳐 보이는 지점이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안타깝게도 사유하는 인간만큼 문학작품 속에서 재현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고 했으나,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이를 획기적으로 입증해냈다.
마지막으로 150여 권의 책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해온 박종대 번역가는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 핵심 인물에 대한 소개를 곁들인 상세한 해설을 3권 말미에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독일에서 ‘무질의 노벨레’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1996년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학업을 중단해야 했는데, 논문을 마저 끝내지 못한 아쉬움을 이 번역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이제야 학문과 연결된 삶의 한 시기를 갈무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질을 떠나보낼 수 있을 듯하다”고 밝힌 개인적 소회에서 보다시피, 번역가는 무질의 대표작 『특성 없는 남자』의 한국어판을 완성도 높은 번역으로 내놓기까지 꼬박 십 년간 이 책 번역에 매진했다.
추천사
다 해어져가는 현대사회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붕괴를 하나의 형식 안에 담아내고자 한 대담한 시도. _도이칠란트풍크
『특성 없는 남자』은 유럽 소설이 이뤄낸 독보적인 업적 중 하나다. _옵서버
이 책의 경이로운 점 중 하나는 추상적 통찰과 문학적 은유를 기가 막히게 엮어냈다는 것이다. _밀리언스
목차
80. 느닷없이 지성회의에 모습을 나타낸 슈툼 장군을 알게 되다 9
81.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현실 정치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 울리히가 협회들을 설립하다 19
82. 클라리세가 울리히의 해年를 요구하다 26
83.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 또는 사람들은 왜 역사를 지어내지 않을까? 33
84. 일상의 삶에도 유토피아적 성격이 있다는 주장 44
85. 슈툼 장군이 민간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애쓰다 55
86. 제왕적 상인, 그리고 영혼과 사업의 이해관계적 합병. 정신으로 이르는 모든 길은 영혼에서 출발하지만 누구도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72
87. 모스브루거가 춤을 추다 93
88. 위대한 것들과의 연결 100
89. 사람은 시대와 함께 걸어가야 한다 103
90. 이성적 지배 권력의 폐위 113
91. 인간 역사에 대한 정신의 투기. 하락장인가? 상승장인가? 119
92. 부자들이 갖고 있는 삶의 몇 가지 규칙 133
93. 몸 문화의 길 위에서도 시민 오성은 제어하기 어렵다 137
94. 디오티마의 밤들 139
95. 대저술가, 이면의 생각 148
96. 대저술가, 표면의 생각 154
97. 클라리세의 신비스러운 힘과 사명 158
98. 언어적 결함으로 몰락한 나라 175
99. 어중간한 똑똑함과 그 똑똑함의 생산적인 다른 반쪽, 두 시대의 유사성, 사랑스러운 제인 이모, 그리고 새로운 시대라 불리는 허튼소리에 대하여 187
100. 슈툼 장군은 국립도서관에 침투해 사서와 도서관 하인, 정신적 질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 197
101. 적대적인 두 사촌 206
102. 피셸 집에서의 싸움과 사랑 227
103. 유혹 242
104. 전투 상황에 돌입한 라헬과 졸리만 257
105. 고결한 사랑에는 웃음이 없다 266
106. 현대인은 신을 믿는가, 아니면 세계적인 회사의 수장을 믿는가? 아른하임의 망설임 272
107.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예상 밖의 정치적 성공을 거두다 282
108. 구원받지 못한 민족들과 ‘구원’이라는 용어에 대한 슈툼 장군의 생각 290
109. 보나데아, 카카니엔. 행복과 균형의 체계들 297
110. 모스브루거의 해체와 보존 309
111. 법률가들의 사전에는 반쯤 미친 인간이란 없다 316
112. 아른하임이 자신의 아버지 자무엘을 신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울리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로 마음먹다. 졸리만은 왕족 아버지에 대해 좀더 상세히 알고 싶어하다 323
113. 울리히는 초월적 이성과 종속적 이성 사이의 경계 언어로 한스 제프, 게르다와 이야기를 나누다 339
114. 상황은 점점 첨예해지고, 아른하임은 슈툼 장군을 무척 자애롭게 대하고, 디오티마는 무한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울리히는 읽은 대로 살아갈 가능성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363
115. 너의 젖꼭지는 양귀비 잎 같다 384
116. 삶의 두 그루 나무, 그리고 정확성과 영혼의 세계사무국에 대한 요구 395
117. 라헬의 검은 날 424
118. 그를 죽여라! 430
119. 대항책과 유혹 448
120. 평행운동이 소요를 부르다 462
121. 대담 476
122. 귀갓길 498
123. 반전 508
목차
제3부 천년제국으로(범죄자들)
1. 잊고 있던 여동생 9
2. 신뢰 17
3. 상가喪家에서의 아침 33
4. 한 친구가 있었다 45
5. 그들이 부당한 짓을 하다 55
6. 늙은 신사가 마침내 고요히 잠들다 67
7. 클라리세에게서 편지가 오다 72
8. 2인 가족 79
9. 울리히와 대화를 나누지 않을 때의 아가테 93
10. 스웨덴 성채로 이어진 소풍. 다음 단계의 도덕 105
11. 성스러운 대화. 시작 125
12. 성스러운 대화. 변화무쌍한 속행 136
13. 울리히는 돌아가고, 자신이 그사이 놓친 걸 장군으로부터 알게 되다 166
14. 발터와 클라리세에게서 새로 일어난 일. 한 떠돌이 공연자와 관객들 181
15. 유언장 200
16. 외교적인 디오티마 남편과의 재회 216
17. 디오티마가 읽는 책을 바꾸었다 229
18. 편지 쓰길 어려워하는 도덕주의자 247
19. 모스브루거 앞으로! 257
20.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자본과 문화에 의구심을 품다 276
21. 네가 가진 것은 신발까지 모두 불속으로 던져버려라 294
22. 다니엘리 명제에 대한 코니아토프스키의 비판에서부터 원죄까지. 원죄에서 여동생의 감정적 수수께끼까지 313
23. 보나데아 또는 재발再發 335
24. 아가테가 실제로 도착하다 358
25. 샴쌍둥이 369
26. 채소밭의 봄 385
27.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테가 슈툼 장군으로 인해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다 418
28. 너무 지나친 명랑함 428
29. 하가우어 교수가 펜을 들다 444
30. 울리히와 아가테가 이유를 하나 더 찾다 456
31. 아가테는 자살을 생각하고 한 남자를 만나다 469
32. 그사이 장군은 울리히와 클라리세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가다 488
33. 미친 사람들이 클라리세를 환영하다 496
34. 한 위대한 사건이 태동중이다. 라인스도르프 백작과 인Inn강 523
35. 한 위대한 사건이 태동중이다. 조정참사관 메제리처 526
36. 한 위대한 사건이 태동중이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다 536
37. 하나의 비유 556
38. 한 위대한 사건이 태동중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569
해설 |삼천 년 역사의 서양 정신과 사유의 전쟁을 벌이며 000
새로운 도덕을 꿈꾸는 남자 601
로베르트 무질 연보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