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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7
#신명기 #Deuteronomy 30:1-2
복 받는 길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모세는 이스라엘이 결국에는 여호와께 범죄해서 저주를 받아 멸망을 당할것이라고 예언과도 같이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멸망당해 쫓겨나 이방족속의 포로가 된 백성들 얼마가 진정으로 자기들의 지난 날의 죄악들과 이로 인한 율법의 저주들을 떠올리며 회개할 것과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례들을 청종하게 될 것을 예언한다. 나라가 멸망당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 낮아진 마음으로 자기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누구의 강요도 없이 그들 자신의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는 것이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들 스스로 그런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회개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여호와의 영께서 그들의 돌과 같은 심령을 살과 같이 부드럽게 해주시고 선한 마음을 부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영께서는 선한 마음을 부어주시되 강압적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으시고 백성들의 의지를 불러 일으키셔서 그들이 스스로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은밀하게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순종은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은 자원하는 심령이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자발적 회개와 순종을 두고서 여호와의 영을 제외한 인간 자신만의 의지라고만 한다거나 반대로 인간의 의지는 싸그리 무시한채 여호와의 영의 기계적 역사로만 해석하는 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과 사람이심을 나누어 분리해버리는 것과도 같다.
여호와께서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 얼마에게 회개와 순종의 심령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무언가 구원받을만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원불멸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전적으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포로된 백성들은 나라를 잃은 비통함과 포로로서 비참한 취급을 받는 가운데서 자기들도 모르게 여호와께 회개하고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 욱여쌈을 당하게 되었을 때 교회와 신자들이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과연 자기들에게 이 힘든 상황이 죄에 대한 징벌이라는 인식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회개하고 성경과 성령을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죄의식과 회개와 순종 자체가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고, 이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참된 교회와 성도라는 확실한 증거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죄의식과 회개와 순종의 마음이 없다면 그 교회는 사탄의 회당에 불과하고 그 교인은 마귀가 흩뿌려놓은 가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회개와 순종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이전에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었던 것을 기억했었기 때문이었다. 즉 여호와의 영께서는 포로 된 이스라엘에게 자원하는 부드러운 심령을 주심과 동시에 율법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셨던 것이었다. 이는 회개와 순종을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여 깨닫는 것이 필수적인 것임을 가르쳐준다. 사도가 가르친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데, 마음으로 믿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과 성령에 근거하지 않은 회개와 순종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아무런 죄사함이나 상급을 받지 못하는 무익하고 무용한 인간적 행위일 뿐이다.
#20200827
#레위기 #Leviticus 19:26
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째 먹지 말며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고대에 피를 먹는 풍습은 짐승을 불에 익히지 않고 산채로 먹는다거나, 매우 중요한 서약을 한다거나,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피를 마시는 의식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사울의 성급한 서원으로 인해 군사들이 매우 굶주린 상태에서 요나단의 지시로 양과 소를 갑자기 잡아먹게 됐을 때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잡아 찢어먹듯이 사람으 로서의 품격을 내던지고 짐승처럼 행동한 사례가 있었고 셋째는 예수님 당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 몇을 학살하고 그들의 피를 로마가 섬기는 신들의 제물에 섞은 사례가 있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은 물론 동물의 생명 유지 역할을 피에 부여하셨기 때문에 피는 곧 생명이라고까지 말씀하신 것이다. 더군다나 피는 동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안에 산소와 영양소를 품어 신체 곳곳으로 운반한다. 때문에 동물이 죽어 피의 흐름이 멈추게 되면 핏속의 산소와 영양분으로 인해서 가장 먼저 급격한 부패가 일어나게 되므로 피를 빼지 않으면 짐승의 고기 전체가 부패한 피 때문에 못먹게 된다. 그래서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창조주 여호와를 아는 가운데서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건강을 지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든지 참 생명을 얻으려면 인자이신 당신 자신의 살과 더불어 피까지 먹고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이는 바리새인들이 오해한대로 실제 예수님의 육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의 본성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신 말씀이시므로 그분에게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피로써 우리의 죄사함을 받아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자가 중생한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자안에 거하셔서 마치 피가 육신에 생명을 공급하듯이 신자의 영에 생명을 공급하신다. 이를 위해서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전히 육에 속한 신자들은 그렇게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피와 같이 은밀하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찬이라는 성례를 통해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지체이며 떡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써, 포도주를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써 신령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점을 치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알게 되면 위험이나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점을 친다. 그런데 점을 치는 것은 사람의 예측과 통제 영역을 벗어나는 사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비성과 종교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점을 치기 위한 모든 의식들은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성을 가지고 여러 방식들을 찾아내고 쌓아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점치는 자들이 의지하는 신비한 대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일 수 밖에 없다. 마귀가 점치는 자를 통해서 의뢰인에게 미래를 예언해주는 이유는, 그렇게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 원하는 것들을 던져줌으로써 그들로 더욱 자기를 의지히게 만들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멸망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어떤 점치는 자가 너무나 용해서 미래를 딱딱 알려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써 그것들을 대적하고 무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점치는 자들은 그야말로 접신하여 신들린 자가 되는 것에서부터 오늘의 운세나 혈액형 운세나 타로 및 사주 카페 처럼 가벼운 문화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사도 바울이 자기에 대해 예언하면서 쫓아다니는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을 본받아서 강력하게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이다. 마귀가 점치는 자를 통해서 알려주는 단편적인 미래보다 더 확실하고 불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과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어떤 시험과 환난을 당하더라도 반드시 피할 길과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과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에게 주신 이 미래에 대한 예언은 너무나 스케일이 커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잘 와닿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믿음을 키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씩 그 언약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술법을 쓴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비롯된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짐트의 술사들이 모세가 한 것처럼 자기들의 술법으로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고 그릇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이 그러하다. 혹자는 이는 단지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하나, 내 생각에는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신비한 원리로써 실제로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어느 지역에는 마술사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마술사들은 사도들이 행한 성령의 이적들을 보고서는 자기들이 지금까지 추구했던 마술들이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은 5만이나 되는 방대한 마술책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불살라 버렸다. 그러나 이런 술법을 행하는 자들은 비단 교회 밖 세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도 위장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추종자들 몇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어 용의 권세를 주어 이적을 행하게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 용과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거짓 선지자들은 모세의 이적을 흉내낸 애굽 술사들처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시행되는 성령의 은사를 흉내내어 유사한 이적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이적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인데 겉으로만 보면 너무나 비슷해서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교인들은 그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누군가가 신비한 이적을 행한다고 할 때 그가 성령의 은사로 하는 것인지 용과 짐승의 권세를 받은 것인지를 분별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이적을 통해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지 아니면 교회를 무너뜨리는지를 보면 된다. 교회를 건강하게 세운다는 것은 그 이적자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권세에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성령의 신비한 은사를 행하는 이는 설령 교인들이 자기를 찾아오려 하더라도 사적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먼저 목사와 장로회를 거치게 하여 공적으로 행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이적자가 교회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자기가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교만하여서 목회자와 장로를 무시하고 그 위에 서려 하며 교회 내에서 자기 무리를 만들어 분열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보편적으로 전파될수록 이런 신비한 이적은 점점 감소해간다. 그래서 오늘날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한 이적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경과 성령으로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복음 사역을 수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사탄은 전략을 바꾸어 이적을 행하는 술법이 아니라 다른 것을 술법으로 쓰는 술사들을 교회에 심어놓는다. 그래서 사탄의 지령을 받은 교회 내 술사들은 이적을 행하는 술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좋아할만한 것들을 술법으로 삼는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자기의 탁월한 지성으로,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으로, 재력으로, 세상 지위와 권세 등으로 교회 내에서 술법을 부린다. 처음에는 교회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들의 술범을 동원하여 해결해줌으로써 신뢰를 쌓고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러다가 자기가 교회를 좌지우지 할만한 상황이 되면 그 때부터 교회를 무너뜨리게 된다. 대한민국 교회 중에서 불법의 대명사로 불리는 ㅇㅇㄷㅅㅂㅇ교회, ㅅㄹㅇ교회, ㅁㅅ교회, ㅎㄷㅅ교회 등이 바로 그러하다. 물론 그 안에는 참된 신자들도 분명 있겠지만 사데 교회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남들보다 탁월한 능력으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교회를 지배하려는 모든 자들이 사탄의 권세를 받은 술법을 행하는 술사라고 보면 된다.
#20190827
#에스겔 35:1-15
세일 산은 아마도 에돔 족속을 대표하는 산이었던 것 같다. 즉, 하나님께서 세일 산을 향하여 멸망의 심판을 예언하신 것은 에돔 족속에 대한 예언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을 멸망하시려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때에 그들을 돌보지 않고 침략자에게 그들을 넘겨준 것 때문이다. 게다가 여느 이방 족속들과 같이 호시탐탐 이스라엘 땅을 노리고 항상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분노하며 질투하여 악하게 대적해 왔다. 에돔 족속의 죄질이 다른 이방 족속들 보다 더 안좋은 것은 그들은 이스라엘과는 이삭이라는 한 조상에서 시작된 혈육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야곱은 선택되고 에돔이라고도 하는 에서는 버림받았다고 하더라도 두 민족은 서로 화합을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야곱과 에서의 시대에 에돔의 조상인 에서는 야곱에게 이것저것 다 빼앗겼어도 많은 시간이 흘러서 야곱을 용서하고 화해하였다. 야곱 또한 형인 에서를 맞으러 가면서 선물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밤새 씨름하듯이 기도하였다. 그렇다면 에서의 후예인 에돔 족속은 조상 에서를 본받아 형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후대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헤맬 때 길을 내어 주지도 않았고 오랜 기간 동안 아무런 호의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적보다 더 심하게 미워하고 대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에돔 족속을 다른 이방 족속들보다 더 괘씸하게 여기셔서 가중처벌을 내리신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증오하여 행동한 그대로 그들에게 갚으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무리 불의와 불법이 판을 치는 개차반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이 땅에서 여러가지로 그리스도의 심판 같은 징계를 당한다 할지라도, 누구든지 그 교회를 조롱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 또한 명성이니 사랑이니 순복음이니 하는 대형교회들의 숱한 비리에 대해서 에돔 족속과 같이 조롱하고 비난하며 무너지기를 바랐던 것을 회개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들을 살리실지 죽이실지는 그리스도의 권한이지 우리의 알 바 아니다. 그저 우리는 그런 영향력 있는 교회들의 비리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려지고 더럽혀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그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심어놓으셨을 참된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형제 된 의무일 것이다. 그래야만이 우리 각자가 소속됭 교회가 불법과 불의로 인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다른 교회의 지체로부터 동정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어떤 문제로 인해 교인들끼리 파가 갈리고 심각한 내부 분열이 발생했다고 치자. 서로의 의견 대립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령 내가 아무리 성경에 근거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 하더라도 상대편을 증오하기까지 나아가서는 안된다. 아직 그렇게밖에 판단하지 못하는 상대편의 미숙함과 억지까지도 수용하면서 최대한 사랑하는 가족을 대하듯이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내부분열을 일으키는 문제의 근원을 찾아 제거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가 이렇게나 저렇게나 해결되었을 때에는 대립한 쪽과 형제의 화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는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으로 비추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남북한은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한민국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북한은 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은 것 같다. 북한이 에돔처럼 대한민국을 미워하여 끔찍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켰으나 대한민국은 이 침략과 위기 또한 잘 극복하였고 지금까지 발전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마치 에돔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이 그 땅은 너무나 황무해져서 사람이 살기 어려울 지경까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북한에 대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북한이 수십년 전에 끔찍한 전쟁을 일으켰다고 우리도 이제 똑같이 앙갚음으로 되돌려줘야 할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책일까? 그런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피면 우리 또한 저들에게 에돔 족속처럼 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북정책은 지난 날 저들의 끔찍한 만행은 잊지 말되, 원래 한민족이었던 형제 된 나라의 의무로서 저들에게 지속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저들은 마치 이성 없이 잡혀죽기 위해 태어난 짐승처럼 미사일을 쏴대고 위협하더라도, 우리는 저들의 무력을 충분히 저지할 국방력이 있기 때문에 끈기를 가지고 저들을 돌이킬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른 대북정책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우리의 손길을 거부한다면 정사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하시겠지만 우리는 그 보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소위 극우 기독교인들이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은 매우 성경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어떠한가? 과거 저들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던 시대에 저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보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보다, 유대 민족을 속국 삼은 로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악랄하게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조차도 당신의 칼로 삼으시면서도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지나치게 가혹하게 하였다고 책망하시며 심판하시겠다고 하였는데, 설령 일본을 칼로 삼으셔서 구한말 조선의 죄악을 징계하시려 했다 한들, 저 일제의 죄악은 바벨론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일본이 받을 그리스도의 심판은 바벨론보다 더 심할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과거 우리 민족에 저지른 죄악을 사과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노리는 계략을 짜는 저들은 우리로서는 마치 아말렉이나 블레셋과 같은 철저한 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이야 우리가 무력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저들을 압도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부득이하게 충돌하게 된다면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할 수 있는 대항 조치를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아말렉을 진멸하시고 블레셋을 대적하신 것과 같이, 끊임없이 악을 행하는 저 일본을 철저히 심판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그렇다고 일본에 있을 소수의 그리스도인들까지 멸망의 대상이 되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보다 국력이 약하니까 비굴하게 굴종하여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극우 기독교인들의 견해는 신앙 양심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