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아버지가 셀프하세요. 거기가 어디라구 딥스? 깁스? 빕스? 왜 그렇게 못 알아들으세요. 그냥 됐어요. 어머니도 노후 준비하세요. 시대 따라 살아야죠. 현대는 셀프 시대입니다.
집을 사 줬는데 한번 와서 자라 하지 않는다. 차를 사 줬는데 차 한번 타라 하지 않는다.
극히 현대적인 시대 스스로 있어 온 자인 양 그의 계명처럼
귀에 불 못을 박는다.
운동하세요. 걸으세요. 즐겁게 사세요. 운동화 신기가 힘든데, 운동화 벗기가 힘든데,
즐거울 일이 있나 탁한 세상, TV도 신문도 안 본다.
셀프 부양하셔야 돼요. 시대 따라 살아야죠.
시대 따라 요양원에 사는 노부모 시대 따라 남은 재산 기부하는 노부모
노인이 웃는다, 벌거벗고 웃는다.
ㅡ시집 『모자입니까』(천년의시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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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영 : 1949년 부산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달리의 눈물』 『그린마일』『[우리가 퇴장하면] 강남이 강남일까』 『모자입니까』.
출판사리뷰
시집 『모자입니까』는 ‘존재’에게 던지는 수많은 ‘존재물음’이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면서 ‘존재이해’의 다양한 지평들을 탐구하는 시적 여정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시간, 일상성, 삶 속에 던져져 있는 존재인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에 대한 탐구가 이귀영 시의 한 특성인 셈이다. 시인은 죽음의 숙명을 바라보고, 해결되지 않는 ‘존재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짐으로써 불안과 염려와 고통의 정서를 여러 객관 상관물을 동원해 표현한다. 한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신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해 낸다. 현존재가 일상의 시간 속에서 겪는 모든 사태를 시적 서사를 통해 보여 줌으로써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례들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이귀영의 시적 존재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다. 죽음이 인간의 존재성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철학소哲學素임을 감안할 때, 시인에게 죽음은 인간-존재와 신-존재를 구별하는 차이의 기호가 되고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필연적 기표가 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죽음을 통해 유한자인 인간과 신의 존재를 사유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해설을 쓴 오민석 문학평론가에 말에 따르면 “모든 인간 존재의 귀결은 하나로 규정되며, 그 하나는 바로 죽음”이다. 이 때문에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 시적 존재론은 가짜”이며, 이귀영의 시는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그러나 결국엔 다가올 죽음의 장막을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도달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에 대해 사유한다. 추천사를 쓴 박찬일(시인, 추계예술대 교수)의 말처럼 이귀영의 시편들은 “동일성의 사유들에 대한 일관된, 일련의 끊임없는 저항물”이다. 이때 이귀영의 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피 흘리는 현존재의 절규이자 고통스럽고 처절하며,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