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태일은 가까운 술집에 들어갔다. 술과 안주를 시키고 끝도 없이 마셔댔다. 눈앞은 흐려지
는데 머릿속은 잠들지 않았다. 자꾸만 여자와 진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겨웠다. 그저 그
한 단어로 대신 될만큼 그의 심정은 끓어오르는 불구덩이였다.
빈속에 들이부은 술은 점점 태일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조금씩 정신이 흐려졌다. 뿌
옇게 변해버린 눈동자에서 짙은 안개를 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칠흑같은 짙은 어둠이 그
를 덮쳐왔다.태일은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다 힘겹게 눈을 떴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
풀을 들어올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자신은 혼자 술집에서 많은 양의 술을 마시고 있었
다. 고로 그의 눈앞에는 많은 술병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가 눈
을 들어 바라본 곳은 술집 풍경이 아닌 너무도 낯익은 공간이었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었다. 아니, 이제는 그가 어머니 몫까지 살면서 돌봐야 할
곳이었고 진철과 은수를 비난하며 살아야할 곳이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을 뜨고 바
라본 곳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도 외투만 벗겨져 있을
뿐, 그 외에는 어제 입고 나갔던 그대로였다.
태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속이 쓰리고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
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통 기억 나지 않는 어제의 일과가 태일은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
에 몸을 담갔다. 절로 뭉쳤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거울에 수증
기 사이로 언뜻 언뜻 그의 속살이 비쳤다.
잘 다져진 근육이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게 했다. 그러다 이내 씁쓸한 미소로 바뀌
었다.
그가 타월로 허리춤을 감싸고 욕실을 나갔을 때였다. 누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기척
이 들렸다. 태일은 방으로 들어선 사람을 보곤 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은수였다.
"나가."
은수가 미처 자신을 발견하기도 전에 태일이 먼저 날카롭게 말했다. 단 한마디였다. 그럼에
도 그 말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있었다. 아니, 그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산을 감
히 바라보는 기분을 들게 했다. 태일은 은수의 모습에 속이 더 쓰려옴을 느꼈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아침부터 마주했으니 당연히 그의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은수는 태일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그저 그가 깨기 전에 꿀물을
놓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부딪힐 줄이야.
그러나 그대로 뒤돌아 나가기엔 이미 방에 발을 들여놓은 자신이 있었다. 은수는 큰맘을 먹
고 태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그의 벗은 몸을 보곤 잽싸게 고개를 떨궜다. 절로 얼굴
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태일은 부동자세로 은수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그는 그녀가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이 그
녀를 내던져 버릴 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은수는 자신이 들어왔던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
자신의 손에들린 쟁반을 바라보곤 작게 한숨 지었다. 은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뒤돌아 섰
다. 그리고 조심스레 태일이 서있는 곳을 피해 그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쟁반에 들린 컵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온 힘을 짜내 말했다.
"이거...... 꿀물이에요. 속이 안 좋으실 까봐......"
용기 내 말을 꺼낸 은수가 무안할 정도로 태일은 그녀를 쏘아보았다. 처음으로 여자의 목소
리를 들었다.
그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의 상상과 다르길 바랬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는 수줍은 얼굴만큼이나 고왔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여자의 목
소리에서 묻어나는 그 무언가가 자꾸만 그를 자극했다.
저 목소리로 아버지를 꼬여냈겠지. 참으로 복도 없는 여자였다. 차라리 돈에 눈멀어 허영심
에 가득 찬목소리였음 좋았으련만. 그랬더라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분노의 일부는 감안 돼
날아갔을 것이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태일의 목소리가 싸늘할 정도로 차가웠다.
은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새벽에 술 취해 들어오시는 걸 봤어요."
태일의 눈초리가 사납게 변했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저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것
이 너무도 불쾌하고 괜스레 짜증이 났다.
"그걸 네가 봤단 말이야?"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잠시 나왔다가......"
여자의 말을 정리해 미뤄 짐작해 본다면 그는 술에 취해 집으로 들어왔고 그 모습을 본 여자
가 그를 방까지 부축해 외투를 벗기고 침대 위에 눕혔을 것이다. 아니면 그 스스로 들어와
외투를 벗고 누웠을 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여자에게 그 후의 일은 묻지 않는 것이 나았다.
만약 여자의 도움으로 자신이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꽤나 낭패였다.
거기다 상종하기 싫은 여자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 묻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태일은 미간을 양껏 찌푸리곤 눈짓으로 그녀가 놓아 둔 컵을 가리켰다.
"들고 나가."
"네?"
"필요 없으니까 가지고 나가."
"그래도......"
어떻게든 말을 이으려던 은수는 태일의 눈빛에 주눅들어 마지못해 컵을 다시 쟁반에 받쳐들
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태현의 낮은 목소리가 은수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다신 내 방에 들어오지마. 여긴 네가 함부로 드나들 정도로 더러운 곳이 아니야."
"......"
"남편의 아들을 유혹하는 계모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거든 앞으로 행동 조심해. 나까지 네
더러운 수작에 끌어들이지 말란 말이야."
은수는 자신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쟁반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
다. 문고리를향해 한 손을 내뻗었다. 순간 쟁반을 들고 있던 손에 균형이 깨지면서 컵이 바
닥으로 떨어졌다. 컵은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져 본래의 형태를 잃었고 수많은 파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녀가 애써 타왔던 꿀물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당황한 은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겁지겁 꿀물과 유리 파편을 손바닥으로 긁어모았
다. 더 이상 태일의 방에 번지지 않도록. 그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미......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금방 치울게요."
태일은 굳은 얼굴로 은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맨손으로 물과 유리조각을 모아 쟁반에 옮
겨 담았다. 다른 도구를 이용해 치워도 될 일을 그녀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해결하
려 들었다. 아마도 태일 자신이 했던 말 때문인 듯 싶었다. 자신의 방은 그녀가 드나들 정도
로 더러운 곳이 아니라는.
정말 다른 물건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지 않기 위해 저렇게 미련한 방법을 쓰는 것일까?
태일의 이마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냥 나가."
"아니에요. 거의 다 치웠어요. 조금만 더......"
은수가 진땀을 흘리며 대꾸하자 태일은 화난 몸짓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은수의 손목을 붙잡
아 거세게 일으켜 세웠다. 은수의 몸이 휘청하면서 그녀의 놀란 눈이 태일을 향했다. 그녀
의 눈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태일은 그것을 알아채곤 윽박질렀다.
"나가라는 말 안 들려!"
은수의 동공이 불안에 떨며 쉼 없이 흔들렸다. 마주한 태일의 성난 눈빛이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웠다.
또 다시 그녀의 몸이 떨리며 잠시 숨을 멈췄다.
태일은 은수의 눈에서 일렁이는 두려움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녀의 까만 두 동
공은 자꾸만 그의 눈길을 붙잡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그 느낌은 그를 기분 나쁘
게 만들었다.
태일은 자신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하고 찝찝한 물기로 눈을 돌렸다. 은수가 쏟은 꿀
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태일의 눈에 잠시 놀란 빛이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곧 기분 나쁜 감정으로 변했다. 그것은
은수의 손에서 베어난 핏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은수 본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태일은 격한 숨을 몰아쉬곤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놓여진
무언가를 집어들곤 그녀의 품으로 던졌다.
은수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건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장지
였다.
태일이 말했다.
"나가라고 했을 때 그냥 나갔으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네가 들어왔다 나간 공기의 흔적만 지
워지면 끝일테니까. 그런데 이젠 네 더러운 피까지 내 방을 더럽혔어."
그제야 은수는 자신의 손에 묻어난 피를 보았다. 그러나 상처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만큼 그의 대한 공포가 컸고 자신의 상처를 알아채고 화장지를 던져준 태일에게 조금은 고마
운 마음이 자리했다.
허나 그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태현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시린 말이 그녀의 심장을 겨냥해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이 집을 네 더러운 손길로 물들일 생각하지마. 더 이상 내 어머니의 손
길을 더럽히지말란 소리야. 그땐 내가 널 죽여버릴 거야."
태일의 눈빛은 살기를 담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자 없다는 듯 그의 눈에 드러난 살기
는 강했다. 은수는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극한 공포에 사로
잡혔다. 그저 이 방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미 그녀의
품에 있던 화장지는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였고, 조금씩 그녀의 몸은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
다. 자신의 등이 딱딱한 문에 가로막히자 급하게 뒤돌아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나 문
은 그녀의 손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은수의 손이 문고리에서 떨어지며 그 위로 태일의 손이 얹어졌다. 태일의 자극적이면서도 거
친 숨소리가 은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차라리 그 솜씨로 날 유혹해봐. 혹시 알아? 침대에서 내가 널 더 행복하게 해줄지."
은수의 몸이 굳어졌고 놀란 눈도 커진 그대로 멈췄다. 그녀의 멈춰졌던 숨이 거칠게 내뱉어
졌다. 태일의 비웃음이 귓가를 울렸다.
은수의 손이 모욕감을 감추려는 듯 꽉 쥐어졌다.
"난...... 난......"
나오려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그러다 막 눈물이 그녀의 명령을 거역하고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 태일의 손이 방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꺼져."
은수의 앞에는 너무도 반가운 공간이 펼쳐졌고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은수는 무
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 한 걸음 옮겨 그 방을 빠져 나왔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그녀
의 뺨은 굵은 눈물줄기로 물들었다.
태일은 뚫어질듯 문을 응시하다 옷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옷을 꺼내들고 몸에 걸치려다 무심
코 은수의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그는 갑자기 끓어오르는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
하고 들고 있던 옷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빌어먹을!"
들썩거리는 어깨와 부풀어오르는 가슴이 그가 격한 분노에 휩싸였음을 알렸다.
빌어먹을, 망할 계집 같으니라고!
왜 이렇게 사람의 정신을 흩트려놓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보통 여우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
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천한 계집에게 잠시
라도 자신이 반응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수치였고 그것은 그를 더욱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
다.
'차라리 그 솜씨로 날 유혹해봐. 혹시 알아? 침대에서 내가 널 더 행복하게 해줄지.'
태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 내리곤 까칠한 턱을 매만졌
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다니, 태일은 자신이 미치지 않았나 의심스러웠다. 자꾸만 자신이
지껄인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괴롭혔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금지된 사랑 3
순진한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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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09 00:22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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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일의 마음이 미세하게 은수에게 옮겨지는 것 같은데.... 둘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그리고 여우님 넘 어깨 움츠리지 마세요... 일류면 어떻고 삼류면 어떻습니까? 다 같은 글쟁인데요..ㅎㅎㅎ
금지된 사랑이라는 제목 자체가 꽤 난항을 예상하듯이 그들의 운명도 꽤 가혹할 겁니다..물론 결말은 아직 미정이랍니다..ㅎㅎ님의 격려 감사합니다!
재밌게 잘봤어요^^은수가 어떻게 태일 父의 여자가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첨 뵙는 분이시네요^^ 반가와요~~ㅎㅎㅎ 재밌게 봐주셔서 넘 땡큐하구요...은수와 진철에 관한 이야긴 나중에 나올 겁니다..^^
아 너무 재밌어요!! ㅋㅋㅋ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
ㅎㅎㅎ재밌게 봐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를 드려야죠~! 글을 자주 올리지 못하는 점 양해바래요~
님의 욕망과 덫도 무지 잼나게 봤었는데에..올만에 인소닷에 와서 님의 글을 뵈니 좋네여..은수의 맘에 넘 상처를 주는 군욤~~태일이~~여우님 힘내세염~~화이팅입니다~~~잼나게 잘 보았어염~~
제가 썼던 예전 글도 보셨군요...넘 감동임돠~~ㅎㅎㅎ님의 격려를 원동력으로 열쒸미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어요~!!정말 매일매일이 너무나 기다려져요~^^
우히히~~~정말이삼??? 그 말 해준 님이 넘 이뻐서 죽겠다규~~~~~ㅋㅋㅋ
소재가 넘 잼있어요.. ^^ 느려도 좋으니 끝까지 써주세요~ 꼭!!! ^^ 좋은하루요~
ㅎㅎㅎ소재가 마음에 드시나요?? 느려도 정말로 끝까지 봐주실거죵?? 님 말씀 믿고 끝까지 쓰렵니다..ㅋ 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소설 끝까지 완결해주세요~부탁할께~부탁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