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관광지 중 가장 유명한 평안북도 묘향산군에서 1990년 발생한 중대사건을 밝힌다.
이곳에는 냉전시대 사회주의 국가 각계각층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혹은 김일성, 김정일이 외국방문 때 선물 받은 물품을 전시한 국제친선전람관이 있다.
1980년대 초 대남공작원 훈련을 받고 20대 초반부터 남파돼 대학을 다니며 활동하던 20대 후반 공작원(간첩)이 1990년 가을 사업총화 보고도 하고 활동지침과 자금을 받아가기 위하여 은밀히 평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시기 평안북도 묘향산군에 살고 있던 아버지가 칠순 잔치를 벌였다. 공작원은 차를 타고 갔다 오라는 중앙당 본부의 권유를 거부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군대에 간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조국 산천을 유람하면서 조용히 다녀오겠다면서 신변 호위원 2명과 함께 잔칫집으로 갔다.
그런데 묘향산에 도착한 뒤 공작원은 조용히 혼자 고향산촌을 돌아보면서 걸어가겠다고 했다. “남파돼서도 무사했는데 조국 땅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호위원들에게 묘향산을 관광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어 보냈다. 그리고는 혼자 어린 시절 뛰어놀던 농촌 길을 따라 걸으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가에 서 있던 군인 6명이 담배를 한 대씩 달라고 하였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가방을 들고 가는 그에게 접근한 군인들은 인민군대를 보니 반갑다고 하면서 가방을 열어 고급담배 한 갑씩을 주었다. 군인들은 가방 안에 좋은 술과 담배, 옷을 비롯한 여러 가지 좋은 상품들을 보고 달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냉전시대 사회주의 국가 각계각층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혹은 김일성, 김정일이 외국방문 때 선물 받은 물품을 전시한 국제친선전람관이 있다.
1980년대 초 대남공작원 훈련을 받고 20대 초반부터 남파돼 대학을 다니며 활동하던 20대 후반 공작원(간첩)이 1990년 가을 사업총화 보고도 하고 활동지침과 자금을 받아가기 위하여 은밀히 평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시기 평안북도 묘향산군에 살고 있던 아버지가 칠순 잔치를 벌였다. 공작원은 차를 타고 갔다 오라는 중앙당 본부의 권유를 거부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군대에 간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조국 산천을 유람하면서 조용히 다녀오겠다면서 신변 호위원 2명과 함께 잔칫집으로 갔다.
그런데 묘향산에 도착한 뒤 공작원은 조용히 혼자 고향산촌을 돌아보면서 걸어가겠다고 했다. “남파돼서도 무사했는데 조국 땅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호위원들에게 묘향산을 관광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어 보냈다. 그리고는 혼자 어린 시절 뛰어놀던 농촌 길을 따라 걸으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가에 서 있던 군인 6명이 담배를 한 대씩 달라고 하였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가방을 들고 가는 그에게 접근한 군인들은 인민군대를 보니 반갑다고 하면서 가방을 열어 고급담배 한 갑씩을 주었다. 군인들은 가방 안에 좋은 술과 담배, 옷을 비롯한 여러 가지 좋은 상품들을 보고 달라고 하였다.
-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예고편 캡처
하지만 군인들은 만만하게 자기들에게 고급담배 한 갑씩을 주니 공작원이 겁을 먹고 그랬을 것으로 짐작하고 공작원 가방을 강제로 빼앗으려 덤벼들었다. 처음에는 인민군을 보고 반가워했지만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자 전문훈련을 받은 그는 군인들을 가볍게 제압한 뒤 집으로 갔다.
그런데 군인들이 소속된 부대 중대장은 부하들이 어디서 얻어맞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저리들”이라고 욕하면서 당장 가서 군대의 맛을 보여주고 오라고 했다. 군인들에게 아버지 칠순잔치에 오라고 집 주소를 알려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부대의 부소대장 중 한 명이 중대에서 싸움 좀 할 줄 아는 약 30명의 군인을 선발하여 공작원이 알려준 집으로 달려갔다.
묘향산관광을 갔던 호위원들은 북한 내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나겠는가? 하며 마음 놓고 묘향산 관광에 빠져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공작원 부모들은 예견하지 못했던 아들이 집에 오자 좋아서 반기며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30명의 군인이 들이닥쳐 모조리 부수고 나이 많은 부모들까지 때리자 방어만 하면서 말리던 공작원이 그들을 쳐 쓰러뜨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거의 20명 정도를 때려눕히자 하사관 한 명이 집 마당에 나무를 쪼개는 위치에 박혀있던 도끼를 뽑아들고 그의 뒤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가 쓰러지자 군인들은 돌아갔다. 부모들은 인민군대의 도끼에 맞아 쓰러진 아들을 안고 통곡했다. 공작원은 ‘적후에서도 죽지 않았던 내가 고향에 와서 억울하게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죽고 말았다.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고만 있었다. 얼마 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호위원들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도 놀라 즉시 중앙당에 통보하였다. 중앙당 담당자들은 즉시 현장으로 와 시신을 수습해 평양에 올라와 사실 그대로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화가 난 김정일은 “인민군대 1개 사단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손실을 당했다”며 “공작원을 죽인 그 중대를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새벽 4시쯤 완전무장을 한 대남공작원 훈련생(준비생)들이 중대 마당 주위에 매복하고 중대병실에 들어간 사람이 인민무력부의 이름으로 중대장 이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대병실 앞마당에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부대원들은 영문을 모르고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채 병실 앞마당에 집합했다. 무장도 하지 않고 손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로 소대별로 집합해 서 있는 중대원들에게 기관총과 자동보총의 몰 사격이 쏟아지고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돌격하여 무자비하게 쏴 죽이었다.
공작원 훈련생들은 실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쌓은 숙련된 조직원들이었다. 더구나 자기들의 유능한 선배를 살해한 자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한 것이다.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영문도 모르는 병사들까지 한 사람 남기지 않고 몰살시켰다. 그들 가족에게는 조국을 위해 위훈을 세우다가 죽었다는 전사(사망)통지서만 보냈다.
또 공작원 관리를 잘하지 못한 중앙당 담당 부서 성원들과 호위원들은 출당, 파면시켰다. 비밀보장을 위해 인민보안부에서 관리하는 18호 관리소에 온 가족과 함께 이주민으로 보내었다. 물론 몰살당한 중대의 상급군관(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