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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23호 창경궁(昌慶宮)
경복궁(화요일 휴무)과 창경궁(월요일 휴무)에서
달 밝은 밤에 고궁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 개장.
2017.07.16(일) ~ 2017.07.29(토) 창경궁 야간 특별관람
야간개장 : 19:30~22:00(입장마감 21:00), 매주 월요일 휴궁
인터넷예매 (옥션티켓, 인터파크티켓)
일반 입장료 1.000원(65세 이상은 무료)
경복궁은 개천절을 기념하여 9월 30일~10월3일까지
흥례문 광장에서 광복절 미디어 파사드 공연을 재공연.
창경궁 야간 개장
창경궁은 조선시대 가장 빼어났던 3 대왕대비의 공간.
스크린 미디어 아트로 연출한 ‘왕후, 사계를 품다’ 공연.
창경궁 공연
통명전에서는 해금 특별 공연 ‘왕후의 사계-가을’을 비롯.
아리랑, 민요, 판소리 실내악, 퓨전이 어우러진 고궁 음악회.
야간 특별관람은 오후7시부터 10시까지(입장마감 오후9시)다.
창경궁.
야간 특별관람 기간에는 국립고궁박물관도
경복궁 관람 시간에 맞춰 오후 10시까지 마감.
박물관은 월요일 휴관, 경복궁은 화요일 휴무.
1년에 평균 4회 정도., 야간 특별관람 기간.
야간관람권은 ‘옥션 티켓’ ‘인터파크 티켓’.,구입
65세 이상이면 전화로 21일부터 예매도 가능하다.
인터넷과 전화로 예매한 경우 관람 당일 매표소에서
예매자 본인 신분 확인 후 관람권을 배부받아 입장 가능.
한편, 한복 착용자는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한복을 입고 오면 누구나 현장에서 무료 입장.
야간 관람은 경복궁, 창경궁 누리집에서 확인 가능.
창경궁은 더없이 좋은 사색의 공간이며
발걸음마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는 곳.
현재가 아닌 과거에 조선 왕들이 걷던 곳.
창경궁은 매주 월요일 휴무.
평일 관람 시간은 아래와 같다.
...................아래.................
오전 9시~오후 5시(3~10월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3~10월 주말, 공휴일)
오전 9시~오후 4시 30분(11~2월 평일)
오전 9시~오후 5시 30분(11~2월 주말, 공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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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9년 역사를 떠올리며
왕이나 된듯이 걷기에 좋은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은 숲이 깊지 않지만
창경궁 숲길은 혼자 사색하기에 좋은 곳.
그래서, 방랑하듯 걷기에는 창경궁이 으뜸.
전각들을 벗어난 산책로에는 나이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그 사이로 난 길은 한참 뻗어나간다.
거짓말처럼 창경궁 안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아득하다.
궁궐 담장 밖 대로변에서 10m 남짓한 곳이지만
마치, ‘숨어 있기 좋은 넓고도 아늑한 곳’을 실감.
나무와 풀들만 지켜보며 가끔 새들이 지저귀는 곳.
그렇게 족히 두어 시간 남짓 나홀로 거닐 수 있는 곳.
둘인들 어떻고 셋인들 어떻고 그보다 여럿인들 어떠랴.
걸음을 나란히 디디며 걸어도 좋고 따로 걸어도 좋은 곳.
여럿이 걷는 걸음이라면 북측 대온실 방향이 좋다.
내전 터와 춘당지 터이며 지금은 두 개 연못이 있다.
그 산책로 끝자락은 온실을 지나 관덕정까지 닿는다.
명정전의 외행각을 지나면 숲길이 드러난다.
그 초입에 붉은 화살나무 한주가 시선을 끈다.
숲길은 열리고 닫히며 몇 가지의 갈래를 갖는다.
내전 터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궁궐 담을 향해 이어진다.
봄에는 생강나무와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 곳.
숲길 수로를 따라서는 봄에 매화꽃이 눈송이처럼 화사하다.
물길은 춘당지 일원으로 이어지는데 수변 경관이 빼어나
창경궁 산책길의 백미를 이루지만 슬픈 역사가 깃든 연못.
두 연못 중 앞쪽 큰연못은 왕이 농사짓던 11개 논이 있던 터.
1909년 일제는 논 뒤쪽 작은 연못 춘당지 물을 끌어와
논터에 큰 연못을 만들었고 그 위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1983년 동물원, 식물원을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긴 후에야
일제강점기 창경원에서 창경궁 원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1986년 복원때 연못 가운데 한국전통 정원양식 섬을 조성
주변으로는 우리나라 향토수종 정원수 왕벚나무를 심었다.
일제강점기 궐내 심었던 기존의 벚나무는 대부분 제거했다.
연못의 동쪽 길가에 있는 백송도 사계절 시선을 끈다.
흰빛 수피 백송은 조선 말, 청나라에서 들여온 소나무.
작은 연못인 춘당지 주변의 가을 풍경은 더 빛을 발한다.
창경궁 안에서도 가을 단풍이 곱기로 이름난 장소이기 때문
하지만, 거기서 한걸음 더 내디뎌 관덕정 단풍이 화려.
관덕정은 활을 쏘는 정자인데 그 너머로 단풍나무가 무성.
옛부터 조선 역대 왕들이 활을 쏘며 단풍의 아름다움을 노래.
울적하던 마음마저 말끔히 씻어주는듯 불타는듯 붉음.
창경궁의 후미진 곳이라 아는 이들만 몰래 찾아드는 곳.
창경궁 궐내에서 가을 단풍철 동안은 낙엽을 쓸지 않는다.
일부러 산책로 중심으로 낙엽을 쓸어 모우기도 하여
푹신한 낙엽을 밟고 걸을 수 있는 것이 창경궁의 매혹.
한적한 곳을 원하면 남쪽 궐내각사 지역이 낫다.
봄날에는 전통 왕벚나무와 철쭉 군락이 반기지만
가을에 단풍 구경은 무리이며 빈터가 많아 한적하다.
동양화의 한폭인듯
공간의 여백이 깊다.
걸음 재촉하지 않아 편하고
누구인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걷기에 안성맞춤.
창경궁은 빈터가 많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쪽 내전도 터만 남았다.
궐내각사 인근 동궁터 일원은 이제 창덕궁에 속한다.
행각들이 복원되지 않아 명정전 전각 주변도 휑하다.
가끔 말을 아끼고 싶을때 말없이 나홀로 걷기 좋은 곳,
제주의 올레길이나 지리산의 둘레길이 아니어도,
대관령이나 죽령의 옛길이 아니어도, 굳이 산과 들로
떠나지 않아도, 반나절쯤 숲과 전각을 누빌 수 있는 옛길.
조선 역대왕들도 그렇게 걸음을 딛으며
마음의 덕을 쌓고 화를 씻어내던 산책로.
이 세상을 품는 왕의 너그러움을 얻는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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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때 한양천도 목적으로 창건.
그당시 보우대사가 짓고, 이궁으로서 사용.
그러나, 더 자세한 기록은 조선시대 멸실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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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종이 상왕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창경궁의 전신.
성종 재위 당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전각들.
각각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이때부터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불탔다.
숙종 때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건,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 일화가 궁 뜰에 묻혀있다.
사적 제 123호인 창경궁은 일제때 창경원으로 격하.
1987년부터 그 옛날 본래 궁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화문, 명정전은 조선 왕조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등이 있으며
구름다리를 통하여 종묘와 왕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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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와룡동(臥龍洞_ 창경궁로 185).,창경궁.
남북으로 나지막하게 뻗은 와룡(臥龍) 산세에 위치.
본래는 남쪽에 있는 종묘(宗廟)와 하나의 영역이었다.
일제 강점기 개설한 도로에 의해 남북으로 양분.
창경궁 터에는 세종이 1418년에 왕위를 계승하자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지은 수강궁(壽康宮).
1483년에는 성종이 당시 생존하고 있던 3대비를 위해
이 터에 궁궐을 더 크게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3명의 대비는 세조(世祖), 덕종(德宗), 예종(睿宗)의 비.
덕종은 세조의 장남으로 세자에 책봉 되었으나 운명.
1417년 그의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德宗)으로 추존.
창경궁은 1484년 9월에 완공되고
서거정(徐居正)이 각 전각의 이름을 명명했고
정전 명정전(明政殿) 상량문은 김종직(金宗直)이 지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하나의 궁궐이었으며
경복궁은 "서궐(西闕) 창덕궁은.,동궐(東闕).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경복궁, 창덕궁은 남향이고, 창경궁은 동향으로 배치.
창경궁은 동쪽에 왕실 동산 함춘원(含春園)이 있기 때문.
함춘원은 홍화문 밖 동쪽에 있던 창경궁의 외원(外苑)으로
현재 서울대 병원 자리와 낙산(駱山)을 볼 수 있게 조성한 것.
그러나, 창경궁과 함춘원의 생활공간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창건 당시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 재건된 후에도 몇 차례 화재로 불탔다.
지금 남아 있는 것 중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것은
명정전, 그 회랑과 명정문, 정문 홍화문 등.,외전(外殿)
1834년(순조 34) 다시 지은 것으로 숭문당, 함인정,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집복헌, 영춘헌 등 내전(內殿)이 있다.
그런데,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때 크게 훼손.
1909년(순종 3) 전각들을 헐고 동물원 식물원을 설치.
한일합방 후인 1911년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하여 도로를 설치.
궁 안에 벚나무 수천 그루 심고 1924년부터.,밤 벚꽃놀이.
창경궁은 1983년 12월 30일, 72년 만에 원 명칭을 되찾았다.
창경궁은 1986년 벚나무도 뽑아내고
오늘날, 지금 모습으로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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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년(성종 15년) 창건된.,'창경궁 & 외원(外苑) 함춘원'.
현재, 함춘원 유적은 함춘문 뿐이고 그 안에 석단(石壇)은
1776년 정조가 즉위한 그해에 설치한 경모궁(景慕宮)의 유적.
성종24년(1493) 2월 명명된 함춘원은 창경궁의 동쪽 동산.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담장 밖 높은 지역의 민가를 철거하고
기화이초(奇花異草)를 심어 심원하고 엄숙하게 했던 외원(外院).
이때 함춘원은 소산(小山) 마두봉을 중심으로
그 둘레가 심원하여 구중궁궐을 방불케 하였다.
동쪽으로는 낙산까지 전지역 민가를 철거해 확장.
연산군10년에는 함춘원 장외에 별정군을 배치.
연산군12년 함춘원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연산군은 1만 기생을 뽑아 ‘흥청(興凊)’이라 칭하고
유흥에 동원,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을 만들어 연회.
한양 동북쪽 100리를 금표로 지정해 사냥터로 만들었다.
이런 연산군의 사치와 놀이에 국가재정은 악화되었고
그 부담은 백성들의 몫이 되어 연산군을 도처에서 비난.
연산군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죽이거나 잔혹하게 고문.
당시의 사료에
“포락(凉烙, 단근질하기),
착흉(嫂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영조40년(1764)에 '사도세자 사당' 수은묘를 이곳에 이전.
사도세자를 장헌의 시호(諡號)로 올리고 묘우를 승격 개칭.
북부 순화방에 있었던 수은묘는 경모궁으로 개칭하게 된 것.
경모궁(종로구 연건동 28-2)1,233평은 사적 제237호
함춘원지에 위치한 사도세자를 향사하는 묘우(廟宇).
또 이곳에는 정조 순조 익종의 어진이 봉안된 망묘루가 있었다.
광무3년(1899) 8월에 장헌세자를 장조(莊祖)로 존호를 올리면서
경모궁 장조(莊祖) 신위를 종묘로 옮기며 경모궁은 그 기능을 상실.
이로 인해 경모궁 내에 있던 망묘루는
북부 순화방 장조의 생모 영빈 이씨 묘사인
선희궁 경내로 옮기고 이름을 평락정이라 하고
망묘루 정조 순조 익종 헌종 철종의 어진을 옮겨 봉안.
또한, 경모궁의 이름도 궁 대신에 경모전으로 고치게 된 것.
광무4년(1900)에는 경모궁터에
6성조(태조 세조 성종 숙종 영조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영희전(永禧殿)을 옮겨 건립.
그뒤, 함춘원 구지(舊址) 즉 경모궁 일대에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세워지며
이곳 함춘원은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고
6·.25때 옛 건물이 불타 원래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함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전후면의 기둥은 두리기둥, 가운데 기둥은 네모.
1973년 함춘문 일대가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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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서울대학교 병원 내.,암센터 병동.
그곳에서 길을 건너면 창경궁 돈화문.
조선시대 '창경궁 후원' 함춘원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이 함춘원지.
창경궁 동쪽에 담장을 둘러쌓았던.,원림.
함춘원 내 경모궁은
조선후기 건물 중 하나.
현재, 조선시대 함춘원 옛터에는
함춘원 내 경모궁의 출입문이었던
함춘문이 옛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함춘원..........................
1973년 8월 14일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서울대학교병원 부근 일대는 함춘원 옛터.
함춘원은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을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궁궐 동쪽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잡인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1493년(성종 24) '창경궁 후원' 함춘원이라 불렀다.
연산군 때 함춘원 밖의 백성의 집을 없애고 넓혔으며,
군대를 배치하여 일반인이 못 다니게 대문을 만들었다.
그뒤 중종은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덕빈 시신을 임시로 묻는 등 관리 소홀.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사에 나눠주었다.
이후에 약 140 여년간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장조는 영조의 차남으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 대신 국정을 맡기도 했으나 유폐되어 운명.
영조는 사도(思悼) 시호를 내리고 1762년(영조 38)
사도묘(思悼廟)를 건립한 뒤 수은묘(垂恩廟)로 개칭.
1764년(영조 40) 수은묘를 함춘원으로 옮겨 지었으며,
1776년 정조 즉위 후, 사도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4년(정조 8)에는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이라고 하였다.
1899년(광무 3)에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경모궁에 있던 장조 신위를 종묘(宗廟)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기능을 잃게 되자 경모전(景慕殿)으로 고쳤다.
1900년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 어진을
봉안하던 영희전을 경모궁 옛터에 옮겨 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함춘원 옛터였던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 함춘원 옛모습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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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의 정문 격인 함춘문 밖은
조선시대 말을 방목했던 방마장이며
그 규모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한양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한적한 편이지만, 산책하기 좋은 궁궐.
창경궁은 조선왕조500년 숨겨진 비화의 요람.
창경궁 터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
남경(南京) 천도를 위해 보우(普愚)스님의
진언에 따라 궁궐을 지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뒤 조선 초 세종이 즉위한 해 상왕(上王)인 태종이
머물 궁궐을 이 곳에 짓고 수강궁(壽康宮)이라 하였다.
수강궁 공사는 수군(水軍)과 서울에 주둔한 군인들을 동원
수강궁이 완공되자 효성이 지극한 세종은
경복궁에서 태종을 뵈러 수강궁에 수시로 출입.
그러나 수강궁이 지어진 해에 불상사가 일어났다.
세종의 장인이었던 영의정 심온(沈溫)은
그해 명나라 사신으로 중국에 머물고 있을때
심온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상왕인 태종에게 모함.
"심온 형제가 호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 것이
부당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크게 노하였다.
이는 태종이 세종에게 전위(傳位)하고
그후에도 국정(國政)을 간섭한다는 의미.
태종은 즉시 이에 관련된 자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귀국 길 심온을 의주에서 체포해 서울로 압송후 사약.
이때 세종비(世宗妃) 심씨는 머리 풀고 발을 벗은 뒤
수강궁 태종 앞에 가서 자기가 대신 죽게 해달라 간청.
그러나 태종은 왕비의 생모 안씨까지 노비로 만들었다.
그후 태종이 장남 양령대군을 한양에서 축출한 사건.
세종의 형인 양령대군은 어느 날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아차산에 올라 온종일 놀자 궁중은 이일로 발칵 뒤집혔다.
상왕 태종은 너무 염려하여 식사도 거르고
사람을 놓아 양령대군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
밤이 깊어 양령대군이 돌아오자 태종에게 알렸다.
태종은 환관에게 명하여
의복과 술을 가지고 가서
양령을 데려 오도록 하였다.
...........수강궁(壽康宮)에 관한 기록..............
1419(세종 1)년에 서울 창덕궁 동쪽에 지은 궁전.
7월 11일 세종이 원경왕후 민씨인 대비의 탄일이므로
태종이 세종(世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거처하기 위해
현재 창경궁 자리에 지었던.,이궁(離宮)인 수강궁(壽康宮).
세종은 상왕전인 이곳에 나아가 안팎 옷감을 드리고,
곧 내전에서 장수(長壽)하길 비는 의미로 술잔을 올리며
축수(祝壽) 헌수(獻壽)하였더니 소헌왕후 심씨인 공비(恭妃)와
명빈 대부인(明嬪大夫人) 송씨·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시연(侍宴)하였고, 또 성대한 예로 상왕 태종에게 장수(長壽)하기를
비는 의미로 술잔을 올리며 축수(祝壽)하는 헌수(獻壽)하고자 하나
상왕이 허락치 않고 다만 술자리를 수강궁(壽康宮) 남쪽 언덕에 있는
선양정(善養亭)에 마련해 잔치, 종척·대신과 병조 당상·대언들이 시연.
,
양녕대군도 와서 참여하였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춤추고,
상왕도 임금과 더불어 또한 춤추며 마음껏 즐기고 파하였다.
입직(入直) 재상, 고관 재추(宰樞), 군사종까지 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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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령대군은 이에 얼굴을 가리고 수강궁의 태종을 뵈었다.
태종은 양령대군을 보자 기쁘기도 하고 일변 노엽기도 하여
"네 행실이 나쁘지만 내가 부자의 정으로 용서하니 그리 알라."
그러나 양령대군이 끝내 뉘우치는 빛이 없자,
태종은 양령대군의 일을 조정대신들에게 논의.
경기도 광주로 그후 이천(利川)으로 이주시켰다.
수강궁에서 태종이 승하한 뒤에
이곳은 그의 후궁들이 거처하였다.
그뒤 단종도 이 곳에서 즉위했으며
세조는 말년에 이곳에 머물다가 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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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
창경궁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동향으로 건축.
옛 수강궁 자리에 '창덕궁의 별궁' 이궁(離宮)을 건립.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東闕) or 동궁(東宮).
원래, 동궁은 왕세자가 거처하는 세자궁이다.
세조 반정 때
폐위된 '단종'의
상왕궁으로 쓰였다.
창경궁은 성종 때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하여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건축.
아직도 궁궐 내 미공개 지역이 있고
아직도 복원이 진행 중인 곳들이 있고
아직도 원래 모습이 밝혀지지 않은.,궁궐.
그래서인지, 알면 알수록
좀 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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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휴무일인
월요일을 제외하면
늘 관람이 가능하다.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성종 때에 건축한 궁궐이다.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며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보완하는 역활을 하고 있었다.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며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상왕전이다.
그후 성종 14년(1483년) 3대비를 모시려고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조선왕조 역사 상 궁중 비극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장희빈의 시신이 창경궁 밖으로 나가고
연산군이 폐위되어 초라하게 빠져 나가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던 창경궁 선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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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강화로 유배갈 때 지났던 창경궁의 선인문.
이문을 지나면서 연산군은 "새 임금의 덕에 의해 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새 임금의 은덕에 감사한다."
본의에 의한 말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은 폐위된 것에 분이 안풀렸는지
그해 유배지 강화 교동에서 31세로 죽었다.
일제강점기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 박물관이 들어서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 동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翼閣)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옥천을 건너는 옥천교(玉川橋)
옥천교 다리를 지나면
명정문 (明政門)이 있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동향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문 왼쪽 서북쪽 모서리 계단으로 위층으로 왕래.
1484년에 세웠으나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영조는 홍화문 앞에서
균역법 찬반을 백성에게 물었다.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기념으로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 했다.
창경궁 동쪽에 있는 동산.,함춘원(含春苑).
창경궁 춘당지를 조성할 때 흙을 운반하여
동산을 만들고 후원을 조성했다고 전해온다.
함춘원지
함춘원지
함춘원지 사적 제237호. 지정면적 4,142㎡.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있으며
함춘원이 있었던 터이므로 ‘함춘원지’라 한다.
대한의원은 기존 광제원에서 개원했다가 1908년
함춘원 마두봉 언덕에 준공된 본 건물로 이전했으며
이곳은 일찍이 창경궁의 외원이었던 함춘원이 있던 장소.
마두봉은 창경궁을 조망할 수 있는 유서 깊은 곳.
대한의원 본관은 1907년 3월 착공, 1908년 11월 준공.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되었다가,
1928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개편되었다.
1908년 대한의원.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1978년 서울대학교병원 신관 개원 후 주변 건물들은
1978~1979년 모두 철거되고 본관 건물은 병원연구소.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연산군때 마두봉(대한의원 터) 이 곳은
창경궁이 내려다보이는.,함춘원의 중심.
그 둘레가 심원하여 궁궐을 방불케 하였다.
이때 함춘원 동편 낙산까지 민가를 철거하여
연산군은 주색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백성들이
볼 수 없게 함춘원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고 한다.
조선8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
아녀자를 포함한 미녀와 기생,아름다운 처녀를 뽑고
운평, 계평, 채홍,속평 등으로 분류해 불렀다는 연산군.
궁궐 기생의 칭호를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그 중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는 기생을 승격시켜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 하여 ‘흥청(興淸)’이라 불렀다.
‘흥청(興淸)’ 전을 가흥청(假興淸)이라 불렀다 한다.
‘가흥청(假興淸)’에서 승격하면 ‘흥청(興淸)’이 된다.
흥청 중에서 왕을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
왕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
"옷에 물한방울 묻히지 말고
저 연꽃을 따오너라." - 연산 -
연산이 흥청망청 즐겼다는 일화.
봄에 연꽃이 활짝 피면
물속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연꽃 향기가 연못 주변에 가득하다.
중종때는 원 상태로 복원해
철거민이 돌아와 살게 했고
신성도 철거했다고 전해온다.
함춘원은 그후로도 역대 왕들이 봄에 즐겨 찾던 곳
임진왜란 때 상당 부분이 파괴된 후 관리되지 못했고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임금의 가마와 외양간,
마구간 및 목장을 관리하던 관청 사복시(司僕寺)에 할당
이후 조선말까지 방마장(放馬場)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경모궁 일대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세워지면서
경모궁은 원래 모습을 거의 잃어버렸고,
6.25전쟁으로 옛 건물마저 모두 불타버렸다.
지금은 경모궁터에 석단과
함춘문(含春門)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석단(石壇)은 경모궁(景慕宮)의 유적
함춘문(含春門) 만이 함춘원에 관련된 유적이다.
.
함춘원은 궁궐 후원으로 성종 때(1470∼1494) 조성.
주변의 민가·가묘 등을 거의 다 철거하여 조성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기 전까지는 왕들이 즐겨 찾던 곳.
인조 때(1623∼1649)에 그 절반을 떼어
말을 놓아 기르는 곳으로 사용한 함춘원.
1764년(영조 40) 사도세자 사당 수은묘(垂恩廟)를 옮겨 건축.
이때 방마장(放馬場)을 제외한 나머지 땅에다 지었던 것 같다.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함춘원과 경모궁이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동국여지비고>에서도
함춘원이 경모궁의 서쪽 담장과
서로 접하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
조선 전기까지 창경궁 앞 동쪽 언덕이
모두 다 궁궐의 원유인 함춘원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일부는 말을 기르는 곳으로 사용된 함춘원이 되고,
나머지는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이 되었던 것 같다.
조선후기 함춘원에 대해서는
<동국여지비고> 원장(苑墻)에
설치된 문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즉, 함춘원 동산의 동쪽은
경모궁의 일첨문(日瞻門)이며
서쪽은 좌첨문, 북쪽은 유근문(逌覲門),
동북쪽은 유액문(逌掖門), 동남쪽은 우액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수은묘에서 경모궁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경모궁 시행 의례를 정하는 동시에 건축에도 정성.
이러한 과정에서 함춘원도 새롭게 정비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경모궁에 친히 편액을 써 달았으며,
창경궁 서쪽에 일첨(日瞻), 월근(月覲)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고 매월 한번 이상씩
이곳을 찾았으며 현재는 무성한 숲뒤로 건물과 도로가 나 있지만,
당시 이곳은 창경궁과 접하고 있었고, 두개의 출입문이 있었던 곳이다.
1899년 장조(사도세자에게 올린 존호)의 신위를
종묘에 옮기기 전까지 중요시되었으며 1900년에
경모궁에 영희전(永禧殿)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함춘원과 경모궁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파괴되었는데,
1973년에야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
한편, 사료상으로는
경희궁에 부속된 후원도
모두 함춘원으로 되어 있으나,
경희궁 후원 이름은.,방림원(芳林苑).
경모궁(景慕宮)은 조선 장조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부근 일대' 함춘원지.
지금은 함춘문(含春門)과 석단(石壇) 만이 남아 있다.
함춘원은 창경궁(昌慶宮) 동쪽에 위치한 후원으로,
창경궁 요금문 서쪽, 경희궁 개양문 남쪽에 있었다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그 유지가 남아 있고,
입지 규모로 보아 대표적인 곳이 창경궁 동쪽.
함춘원은 성종 15년(1484년)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궁궐 동편 지세를 보강하기 위해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을 둘러 잡인 출입을 금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24년(1493) 2월에
함춘원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져
창경궁의 부속 후원(後苑)이 되었던 곳.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담장 밖
높은 지역 민가를 철거해 구역 확장,
기묘한 화초를 심어 창경궁 후원으로 조성.
담밖에 별정군(別定軍)을 배치해 일반인 통행금지
대문과 함께 함춘원 북쪽에 성을 쌓기도 하였던 곳.
그후 중종은 철거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덕빈(德嬪) 시신을 임시 매장.
점차 함춘원 관리가 소홀해졌고,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시(太僕寺)에 나눠주면서
이후 140여년간 방마장(放馬場)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방마장
현재, 해화역 인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일대는
일제때 경성제국대학(구 서울대학교) 터.
조선시대 함춘원에 속한 방마장 터였던 곳 같다.
마장동 동명은 조선 초 이곳 목마장이 있던데서 유래.
조선 전기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에 속했던 마장동.
영조 27년(1751) '도성삼군문분계총록' 기록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마장리계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東署 인창방 동소문외계 마장리.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를 5부 36방,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경성부 인창면 마장리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마장리가 되고
1936년 4월 1일 경성부 마장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區制度 실시로 성동구 마장정.
1946년 10월 1일 성동구 마장동이 오늘에 이른다.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한양 도읍지를 찾다가
왕십리에서 만난 노인이
한 말이 왕십리 지명의 유래.
"여기서 십리를 더 가면.,
조선이 천도할 도읍지인데
미련한 무학이 알까 모를까?"
조선시대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은
대학로를 포함한 낙산 자락까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창경궁의 규모는 현재보다 훨씬 컸던듯.,
영조 40년(1764)에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 사당 수은묘(垂恩廟)를 이곳에 옮겨 지었고
영조 52년(1776년) 정조 즉위 후 경모궁으로 고쳐 불렀다.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扁額)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
헌종 5년(1839년) 12월
봉안각(奉安閣)이 소실
그러나, 곧 중건되었다.
광무 3년(1899) 8월에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존호를 올리면서 경모궁에 있던
장종의 신위를 종묘(宗廟)로 옮기자
경모궁은 그전까지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경모궁 내에 있던 망묘루(望廟樓)는
북부 순화방에 있던 장종의 생모 영빈(暎嬪)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 경내로 옮기고 이름을 평락정(平樂亭).
망묘루에 있던 정조·순조·익종·헌종·
철종의 어진(御眞)을 옮겨 봉안하였다.
또한 경모궁 이름도 경모전으로 고쳤다.
.....................주........................
어진은 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며
진전은 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이곳에 어진을 모셔 두는 데 그치지 않고
정기적으로 예를 갖추어 의식을 행하였다.
조선시대 어진은 국왕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
특히 창업주인 태조 이성계 어진은 정통성의 상징이며
조선의 국왕들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태조 어진을
새로 제작하고 진전에 봉안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진전은 한 분의 어진을 모신 진전과
여러 왕의 어진을 모신 진전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로는 태조 진전이 대표적이며
후자의 경우로는 궐 안 선원전과 도성 내 영희전.
중구 수표로 27 중부경찰서, 영락교회
한성부 남부훈도방에 있던 영희전(永禧殿)은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살았던 궁이자 거처였다.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이며
1428년 윤번 딸과 혼인후 이곳에 나와 살았고
의경세자와 해양대군(예종)과 의숙공주를 낳았다.
그후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가족과 경복궁으로 들어가면서,
이 집은 세조의 잠저로 불리웠다.
영희전은 혼인한 의숙공주와
부마 정현조에게 내려주면서
의숙공주가(家)로서 불리웠고,
광해군 즉위 이후에는 사당이나
역대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 되었다.
................................................
광무 4년(1900년)에는 경모궁 터에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6성조
어진을 봉안하던 영희전(永禧殿)을 옮겨 건축.
함춘원지 경모궁터
그뒤 일제강점 후 함춘원 옛 터,
즉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 건축.
그후로는 한국전쟁으로 옛 건물이 불타
경모궁은 원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함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집,
앞면과 뒷면의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가운데 기둥은 네모기둥으로 여기에 각각
문을 달고 창방 위에 안상을 끼우고 홍살을 달았다.
공포는 초익공(初翼工)으로 매우 간결하며 겹처마.
조선후기의 세련된 건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석단 길이 30m, 폭 18m, 전면 4곳에 돌계단이 있다.
함춘원지 경모궁터
창경궁 동쪽 월근문(月覲門)은
정조가 경모궁으로 가던 24번 문.
조선시대 왕이 머물던 창경궁과
유생들이 공부하던 성균관을 이어주던
26번 집춘문은 약 100년 만에 다시 열린다.
창경궁 후원에서 북동쪽에 있는 집춘문은
창경궁의 정문(홍화문)이 아닌 후문 중 하나로,
왕이 문묘나 성균관으로 행차할 때 '왕실 전용문'.
서울 종로구는 최근 집춘문에서 문묘 사이에
길을 내는 공사에 들어갔으며, 8월 말 완공 예정.
현재 집춘문 밖에 개인 주택과 담장이 있어 왕래 불가.
26번 집춘문은 '봄을 모은다'는 뜻이 담긴 문.
왕이 창경궁에서 나와 문묘로 제사지내러 가거나,
불시에 성균관 유생들의 학문을 시험하기 위해 자주 왕래.
조선왕조실록에 집춘문이란 단어가 27번 나온다.
성종이 성균관에 행차하는데 사용한 기록으로 미뤄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낙성 때 있었던 것으로 추정.
현재 집춘문은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것이며
조선 유교사회에서 문묘는 중요한 성지였다.
집춘문은 대한제국 말 창경궁과 더불어 수난.
일제는 1908년 창경궁에 동물원을 짓고
곰·호랑이·원숭이 같은 짐승과 새들을 사육
1911년 창경원으로 격을 낮췄고,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킨 도로(율곡로)를 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10년 한일병합을 전후로
집춘문이 폐쇄된 것으로 보이며 집춘문과 문묘 사이
주택가 및 담장도 일제시대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왕이 행차한
집춘문에서 문묘에 이르는
거둥길 66m도 복원될 예정이다.
거둥길은 임금이 행차한 길을 일컫는 말로,
왕에 대해서는 "거동(擧動)"이 아닌 "거둥길"
거둥길은 18세기 후반 정조 시절 도성도에서 확인된다.
집춘문을 나와 문묘로 가는 길을 표시한 붉은 선이 그것.
종로구는 집춘문을 막고 있는 담장을 옮겨 길을 낼 계획.
거둥길이 복원되면 단체 관광객들이 창경궁을 구경한 뒤
집춘문으로 나와 문묘로 가는 도보 코스를 운영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인들이 공자를 모신 문묘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에
"거둥길"은 외국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조선시대 풍수설을 믿던 안 믿던
창경궁을 부분 복원할 때도 참고해야 할듯.
함춘원은 원래 풍수설에 의해 조성된.,창경궁 후원.
함춘원 인근 흥인지문 역시 풍수설에서 유래된 이름.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之(갈 지)가 풍수설에 의한 것.
덧 말.
1392년(고려 공양왕4년)7월에 이성계가 조선 건국
1394년10월에 정도전이 경북궁 부지 신축방향 결정.
정도전(1342년~1398년)은
이성계(1335년~1408년)를
조선왕조 초대왕으로 추대.
당시 정도전 나이 50세였다.
조선왕조 건국1등공신 실세로서
문관직과 무관직도 같이 맡으면서
단연 막강한 2인자의 자리를 굳혔다.
1394년10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
정도전은 도성이 들어설 사대문안을 결정
한양 도성안 5부49방( 현대용어로 구,동 이름)
그외, 경복궁,사정전,근정전 등 궁과 누각,
숭례문,흥인문,돈의문,숙청문까지 그의 작품.
그런 그가 실수한 것이 있다면, 경복궁터 결정.
오늘날,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는 왜 궐터의 주산을 북악으로 고집했던걸까?
당시, 왕사 무학(1327년~1405년)의 판단은 달랐다.
무학은 인왕산 자락을 새 궁터 최적지로 주장.
"인왕산 아래 궁궐을 낙산을 바라보게 짓는다면
인왕산이 주산이 되고, 북악산 좌청룡, 남산 우백호.
새왕조는 태평천하(太平天下)를 얻게되는 것" - 무학 -
차손(次孫)이 장손(長孫)을 꺾고
누르며 제압할 것을 걱정하고, 우려.
북악산이 좌청룡, 남산이 우백호가 되어
장손이 흥왕(興旺)할 것이라고 짚었던 무학.
그런 반면, 건국1등공신 정도전 생각은 달랐다.
궁궐터 자체는 무학 추천지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정도전과 무학은 궁궐터의 주산이 달랐다.
당시 대권욕을 품었던 실세 이방원(1367년~1422년).
차손이 발전, 흥왕하는 좌향을 선택하고 싶어했던 것.
눈치 빠른 정도전은 '예기'를 들어 남향이 적합하다 주장.
'예기'에는 '천자당의이립-제휴북면견천자
(天子當依而立-諸侯北面天子)'라 적고 있다.
즉, 임금이 병풍을 치고 그 앞에 서면
제후는 북을 향해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
도리에 일치하고 마땅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결국, 기세등등한 건국1등공신 실세 정도전이
왕자 중 실세였던 이방원의 웅지와 맞아떨어져
경복궁의 좌향은 차손이 흥왕하는 남향으로 결정.
그러나, 경복궁의 좌향을 남향으로 잡아
세우도록 결정내린 건 불행의 시작이라면서
당시 이성계의 왕사 무학은 안타까워 했던 것.
"궁궐을 자좌(子坐)로 지어 세우면
5대 왕이 지나기 전에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못가 나라가 흔들릴 난리가 일어난다."
태조 이성계에게 왕사 무학이 호소했지만,
정도전 이방원의 대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1453년(단종1)에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
1592년 임진왜란7년전쟁(선조 25년~ 선조31년)
정도전은 무학의 견해 만 무시하고 누른게 아니다.
조선왕조 건국 800년 전
이미 신라 말, 의상대사에 의해
'산수비기(山水秘記)'를 통한.,예언.
"도음을 택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점차 연존(延存)의 바람이 있을 것이겠지만,
정씨가 시비를 하면 150년이 지나기 전에 찬탈의 화
또한, 200년 내외에 난(亂)이 이를 것이니 잘 생각하라."
물론 '승려'는 무학,
'정씨 성'은 정도전.
역대 조선왕조 518년 역사 27대 역대 왕 중에서
장자(장손)로서,보위를 계승한 역대왕은 9명에 불과.
그것도 그나마 치적을 빛내거나, 장수한 왕이 드물었다.
병약, 단명,후사 없이 승하한 왕들이 대부분이고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평균수명은 47세 불과했다.
경복궁, 청와대 터의 '불길'기운이 작용한.,풍수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수양대군).
52세 승하까지 기울증(우울증)에 시달렸다.
무당, 축문, 독경, 기도, 부적 등이 동원되었지만
그 어떤 수단도 경복궁 '불길'기운을 누르지 못했다.
조선 역대왕 가운데 최장수자는 83세에 승하한 영조였다.
영조는 재임 중 경복궁에서 살지 않았다.
창덕궁에서 태어나 경희궁에서 영면했다.
즉위 내에 창덕궁과 창경궁, 경희궁을 왕래.
경복궁의 '불길'기운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 모친이 워낙 튼튼했다.
영조는 어머니의 건강 체질을 물려받았던 것.
경종(숙종과 장희빈 아들)의 동생이었던 영조는
경종 즉위18세 때부터 궁밖에서 백성들과 어울려
검소하게 살았기에 밥도 잡곡밥을 좀 더 좋아했다.
저녁은 거르지 않았고,주색에도 경계가 있었던 영조.
경복궁에서 벗어나 창덕궁에서 살았기에 수명이 늘어나
영조는 조선왕조 역대 왕 중에서 천수를 누렸던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518년만에 27대 역대왕들을 끝으로,
일본제국주의 의해 합병(국권피탈)당한 이후에도
역대 조선총독 8명 역시 경북궁터 '불길' 기운에서
벗어나고 탈피 할 수 없어 끝이 좋지 않았다는 풍수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