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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와 달단동(韃靼洞]) [제2편]
2024년 07월 27일
○ ‘제2편’에서는‘제1편’에 이어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가계(家系) 및 달단동(韃靼洞), 그리고 당시(當時)의 이성계(李成桂)가 명성(名聲)을 날리게 된 원인(原因)이 된 납합출(納哈出)과의 관계(關係)」를 조명(照明)해보고자 한다.
4.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는, 한민족(韓民族)? 이민족(異民族)?
「조선(朝鮮)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가계(家系)」는 ‘한민족(韓民族)=조선족(朝鮮族)’일까? 이민족(異民族)일까?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表現)이다. 왜냐하면 지금(只今)도 “이성계(李成桂)”에 대한 확실(確實)한 증거(證據)와 고증(考證)이 될 만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그는 누군가?」에서부터 알 수 없기 때문이다.
➊ “이성계(李成桂)”의 직계(直系) 선조(先祖)는, 고려인(高麗人)이었는가?
➋ “이성계(李成桂)”의 직계(直系) 선조(先祖)는, 당(唐)나라 사람이었는가?
➌ “이성계(李成桂)”의 직계(直系) 선조(先祖)는, 달단족(韃靼族:蒙古系)이었는가?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이는 사료(思料)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조정(高麗朝廷)”으로 “귀화(歸化)”를 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이한(李翰)”은, ‘신라인(新羅人)이다’라는 말은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말하는 것으로 : 찻째 : 신뢰(信賴)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둘째 : 또 당인(唐人)이라는 말은 중국인(中國人)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셋째 : 사공(司空) 벼슬을 했다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의 인물(人物)이 시조(始祖)가 되는 것이다. 넷째 : 또 이의방(李義方)의 직계(直系)라는 것 역시 전혀 신뢰(信賴)할 수 없는 이야기다.】
➡ 귀화(歸化)란 뜻이 무얼까? 「歸化 : 귀순(歸順)하여 복종(服從)함. 다른 나라의 국적(國籍)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國民)이 됨 [출처(出處) : Naver 漢字辭典]」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곧 국어사전(國語辭典) 및 다른 여러 사전(事典)을 찾아봐도 똑같은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곧 「고려인(高麗人)이 아닌 다른 나라(他國) 또는 이민족(異民族)으로 고려(高麗)로 들어와 항복(降伏)하고 의탁(依託), 고려인(高麗人)으로 살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귀화(歸化)”라는 단어(單語)로 설명(說明)하면 : 이자춘(李子春)과 이성계(李成桂)는 몽고(蒙古) 사람 즉(卽) 이민족(異民族)으로, 고려(高麗) 조정(朝廷)에 들어와 항복(降伏)하고, 의탁(依託)하였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이 가장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 귀화과정(歸化過程)을 살펴보면 :
(1)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6권 / 恭愍王 一 乙未 4년(1,355), 元 至正 15년 : 〈我 桓祖,以雙城等處千戶,來見,王曰 : 乃祖乃父,身雖在外,乃心王室,我祖考,實寵嘉之,今卿無忝祖考,予將玉汝於成 : 우리 환조(桓祖)【李子春 :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가 쌍성(雙城)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왕을 뵈었더니, 왕이 이르기를 : “네 조부(祖父)와 네 아버지는 몸은 비록 밖(外)에 있었으나, 마음이 우리 왕실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조(祖考)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이제 경(卿)은 할아버지(祖考)를 욕되게 함이 없을지어다. 그러면 내가 장차 그대를 잘 성취시켜 주리라."〉하였다.
(2) 고려사(高麗史) : 1,355년 未詳 (陰) : 〈是歲, 我桓祖, 以雙城等處千戶來見, 王曰, “乃祖乃父, 身雖在外, 乃心王室, 我祖考實寵嘉之. 今卿無忝祖考, 予將玉汝於成矣.” : 이 해에, 우리 환조(桓祖)가, 쌍성등처천호(雙城等處千戶)로서 와서 왕(王)을 알현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조부와 아비는, 몸은 비록 나라 밖에 있었지만, 그 마음은 우리 왕실(王室)에 있었기에, 나의 선조(先祖)들께서는 실제로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노라. 지금 경(卿)의 행동은 선조(先祖)의 이름에 더할 것이 없으니, 내가 장차 너를 귀하게 성취(成)시켜 주겠노라.”라고 하였다.〉
(3)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4하 / 乙未年 恭愍王 4년[元 順帝 지정 15, 1,355] : 〈王曰。乃祖乃父。身雖在外。乃心王室。今卿無忝祖考。予將玉汝於成矣。: 왕(王)이 말하기를 : “그대 할아비와 아비가 몸은 비록 외지(外地)에 있었으나 마음만은 왕실에 있었으니, 이제 경은 할아비와 아비를 욕되게 하지 말라. 내가 장차 그대를 중용(重用)하리라.”〉하였는데,
➡➡➡ ‘여기서 잠깐’ :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기존(旣存)의 역사통설(歷史通說)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기록(記錄)하였다. 즉(卽),
〈東史綱目 : 我桓祖自雙城來朝。: 우리 환조(桓祖)가 쌍성(雙城)으로부터 와서 조회하였다. 雙城自趙暉之叛。不爲國土久矣。: 쌍성은 조휘(趙暉)가 배반한 때부터 우리 국토가 아닌지가 오래되었다. 時。桓祖爲雙城千戶來朝。: 그때 환조는 쌍성천호(雙城千戶)였는데 와서 조회하였다. 初。穆祖( ) 性豪放。有志四方。甞知宜州。有惠政。: 처음에 목조【필자(筆者) 주(注) : 번역자들이 추가한 것이다 : 穆祖 휘는 안사(安社) : 원문(原文)에는 없다.】가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나라를 안정시킬 뜻을 두었으며, 일찍이 의주(宜州)를 다스릴 적에 어진 정치를 하였었다. 以姻婭。移居三陟縣。以事忤知縣。奔元。: 인아 친척(姻婭親戚)의 문제로 인하여 삼척현(三陟縣)에 옮겨가 살았었고 거기서 또 어떤 일로 지현(知縣)에게 거슬려 원(元)으로 도망(逃亡)하였다. 元處之南京。元志。開元城西南曰寧遠縣。又西南曰南京。又南哈蘭府。又南曰雙城。爲五千戶所達魯花赤。: 원(元)에서는 남경(南京) [원지(元志)에, 개원성(開元城) 서남쪽은 영원현(寧遠縣)이고, 또 그 서남쪽은 남경(南京)이고, 또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또 그 남쪽은 쌍성이라 한다] 에 살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
※ 동사강목(東史綱目) 14 [下] [이미지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➊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이자춘(李子春) 신도비(神道碑)에서는 : 〈전주(全州)에서 삼척(三陟)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한 것이 아니라, 「의주(宜州)를 다스릴 때【병마사(兵馬使) 또는 지주사(知州事)였는지는 알 수 없다】인아 친척(姻婭 親戚) 문제로 관리(官吏)를 그만두고 삼척(三陟)으로 내려갔는데, 삼척(三陟)에서 또 관리(官吏)와 문제(問題)가 생겨 원(元 : 蒙古)으로 도망(逃亡)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은 :
➋ 〈전주(全州)에서는 지주사(知州事)와 기생수청(妓生守廳) 문제(問題)로 지주사(知州事)와 다툼이 생겨 죽게 생기니, 170 여호(餘戶)와 함께 삼척(三陟)으로 도주(逃走)했다〉라는 말은 무엇이고,
➌ 〈삼척(三陟)에서 또 그 관리(官吏)와 문제(問題)가 생기는 바람에 다시 170 여호(餘戶)와 함께 함경도(咸鏡道)로 도주(逃走)했다는 말은 무엇이냐?〉는 것이고,
➍ 〈다시 문제가 생겨 이번에는 아예 “원(元)나라로 도망(逃亡)갔다”〉라는 것은 또 무엇이며,
➎ 〈몽고(蒙古)의 침략(侵略)에 맞서 몽고병(蒙古兵)과 치열(熾烈)하게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항복(降伏)한 것도 아니고, 항복(降伏)을 권유(勸諭)하니 투항(投降)했다〉라는 말은 또 무엇이냐? 도무지 신뢰(信賴)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만들어져 있다.
◈ 서책(書冊)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記錄)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무언가 중요(重要)한 몇 가지를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난(非難)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疑問)을 지울 수가 없다.
➡ 「14세기(世紀) 봉건왕조(封建王朝) 시대(時代) 또는 사회상(社會相)」을 살펴보면 : “이게 과연(果然) 제정신을 가진 자(者)들의 기록(記錄)일 수 있나?” 반문(反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곧, 당시(當時)의 체제(體制)로 보면 도저히 용납(容納)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참형(斬刑)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중죄(重罪)요, 대역죄(大逆罪)다. 더구나 몽고(蒙古)의 침략(侵略)에 맞서 싸우지 않고, 백성(百姓) 1,000 여호(餘戶)를 이끌고 투항(投降)했다는 것은, 「사자(死者)는 부관참시(剖棺斬屍)요, 가문(家門)의 남자(男子)들은 모조리 참형(斬刑)을 당하고, 여인(女人)들은 노예(奴隸)와 관비(官婢)로 끌려갔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요, 당시(當時)의 전주이씨(全州李氏) 직계(直系)라던 이안사(李安社) 가문(家門)은, 멸문(滅門)당했다」라는 이야기다.
㈠ 기생(妓生)을 데리고 수청(守廳)드는 문제(問題)로 관리(官吏)와 다퉈 ‘죽게 생겼다’라는 이야기는 양반가(兩班家)로서 가장 파렴치(破廉恥)한 짓이요,
㈡ 또 170 여가(餘家)를 데리고 몰래 도주(逃走)했다는 말은 ‘왕권(王權)을 무력화(無力化)했다’라는 극형(極刑)을 당할 수 있는 대역죄(大逆罪)요,
㈢ 삼척(三陟)에서 또 그 문제(問題)로 다시 170 여가(餘家)를 데리고 함경도(咸鏡道)로 도주(逃走)했다는 말 또한 ‘왕권(王權)을 무력화(無力化)했다’라는 극형(極刑)을 당할 수밖에 없는 대역죄(大逆罪)다.
㈣ 또 다른 기록(記錄)으로 “삼척(三陟)에서 중원(中原) 땅으로 들어가서 몽고(蒙古)로 도망(逃亡)을 쳤다”라는 말 역시(亦是) 극형(極刑)을 당할 수밖에 없는 대역죄(大逆罪)다.
㈤ 의주(宜州) 병마사(兵馬使)가 되었든 그곳의 관리(官吏)가 되었든 간에 “몽고(蒙古)가 침입(侵入)하자 병사(兵士)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대항(對抗)할 생각을 하지 않고 투항(投降)을 권유(勸誘)하자 1,000 여가(餘家)를 데리고 항복(降伏)했다”라는 말 역시(亦是)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도 남을 대역죄(大逆罪)다.
예로부터 「대역죄(大逆罪)」는 능지처참(陵遲處斬) 형벌(刑罰)을 받는다. 즉 「대역죄(大逆罪)를 범(犯)한 자(者)에게 과하던 극형(極刑)으로, 죄인(罪人)을 죽인 뒤 시신(屍身)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各地)에 돌려 백성(百姓)들이 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형벌(刑罰)이다.」 여성(女性)들은 모조리 노비(奴婢), 관비(官婢)가 된다. 가내(家內)를 멸문(滅門)시켜 멸각(滅却)【滅却 : 남김없이 없애버림】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은 예외(例外)가 될 수 있었을까? 고려왕조(高麗王朝)든 조선왕조(朝鮮王朝)든 예외(例外)는 없었다. 이성계(李成桂) 윗대 조상(祖上)들은 별 볼 일 없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예외(例外)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記錄)이 왜 지금까지 그대로 전(傳)해지고 있는 것일까? 그 사유(事由)는 「이것보다 더 중요(重要)한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다」라는 것이다. 즉(卽),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전주이씨(全州李氏)를 비하(卑下)하고, 이런 가계(家系)가 무슨 얼어 죽을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가계(家系)냐?’ 혈통(血統)이냐? 비하(卑下)하며, 비웃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함에도 기록(記錄)으로 남겨 놓았다는 점이다. 이게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게 고찰(考察)의 요체(要諦 : 核心)다.
「한국인(韓國人)들은 과연(果然) 제정신인가? 전주이씨(全州李氏)들은 지금 제정신인가?」묻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러한 치욕(恥辱)【수치(羞恥)와 모욕(侮辱)】을 당하고 겪으면서도 이러한 기록(記錄)을 생생(生生)하게 남겨 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즉(卽),
첫째 : 「일제(日帝)가 강제합병(强制合倂)과 식민지(植民地) 통치(統治)를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해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를 희생(犧牲)시키며, 한반도(韓半島) 백성(百姓)들을 이등국민(二等國民)으로 전락(轉落)시켜 식민통치(植民統治) 및 수탈(收奪)을 용이(容易)토록 하고, 독립투쟁(獨立鬪爭)을 약화(弱化)시키려는 목적(目的)으로 치욕(恥辱)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가감(加減), 첨삭(添削) 등을 거쳐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는 한민족(韓民族)이 아닌 몽고(蒙古) 달단계(韃靼系) 이민족(異民族)이었음을 숨기기 위해 차라리 치욕(恥辱)을 선택(選擇)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첫째’에서 설명(說明)한 일제(日帝)의 식민통치(植民統治) 방식(方式)이 함께 포함(包含)된 것이다.
필자(筆者)의 견해(見解)는 “첫째+둘째”의 설명(說明)으로,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는 몽고인(蒙古人)이라는 이민족(異民族)이었음 을 숨기고, 일제(日帝)는 여기에 강제(强制) 식민통치(植民統治) 및 수탈(收奪)을 정당화(正當化)하고, 독립투쟁(獨立鬪爭)을 약화(弱化)시키려는 목적(目的)으로 치욕(恥辱)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가감(加減), 첨삭(添削) 등을 거쳐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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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1)+(2)+(3)” 사료(史料)를 보면 :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는 몽고인(蒙古人)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身體)이 밖에 있다」라는 말은 우리 백성(百姓)이 아니었다는 뜻이고, 「마음은 왕실(王室)에 있다」라는 말은 : ‘당시(當時) 고려(高麗)는 천자국(天子國)’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 시조(始祖)는 신라인(新羅人)이었다”라고 역설(力說)하고 있으나, 역설적(逆說的)이지만 “신라인(新羅人)이 아니었다”라는 주장(主張)에 힘이 실리게 된다.
그것은 「몇 가지 중요(重要)한 사실(事實)에 대해서는 함구(緘口)한다거나 그 증거(證據)나 고증(考證)할만한 사료(思料)가 없고, 잘 모른다거나 확실(確實)하지 않다거나 등등으로 묘사(描寫)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시(當時)의 “고려(高麗)는 천자국(天子國)”으로 : 국적(國籍)이나 이민족(異民族)이었거나 큰 문제(問題)는 없었다는 사회적(社會的) 인식(認識)이었다는 것이다.
➊ “이성계(李成桂)”의 직계(直系) 선조(先祖)는, 고려인(高麗人)이었는가?
➋ “이성계(李成桂)”의 직계(直系) 선조(先祖)는, 당(唐)나라 사람이었는가?
➌ “이성계(李成桂)”의 직계(直系) 선조(先祖)는, 달단족(韃靼族:蒙古系)이었는가?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列擧)한 “➊∼➌”의 예(例)에서 “어느 곳에 해당(該當)된다”라고 볼 수 있을까? “달단동(韃靼洞)”을 언급(言及)되는 것으로 보면 “➌”의 예(例)에 해당(該當)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달단동(韃靼洞) 【‘달단(韃靼) 골(洞)’이란 달단족(韃靼族)이 사는 마을로 반도(半島) 땅에 있을 수 없다.】」이란 :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1만(萬) 5 천리(千里)”도 넘는 우랄산맥【오랍산맥(烏拉山脈) : Ural Mt’】서남(西南)쪽과 우랄산맥[Ural, Mt] 동(東)쪽의 ‘서(西) 시베리아분지(盆地)’의 지명(地名)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성계(李成桂)의 고조(高祖)인 이안사(李安社)로부터 시작(始作)된 이곳 달단동(韃靼洞)의 패자(霸者)이자, 군벌(軍閥) 토호세력(土豪勢力)이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당시(當時)의 장례제도(葬禮制度)를 보면 : 「‘달단동(韃靼洞)’에 묘지(墓地)를 쓰고, 그 이후(以後)에도 본시(本是)의 조선(朝鮮) 본향(本鄕)으로 옮기지 않았다」라는 말은, 「그곳이 그들의 본향(本鄕)이요, 터전(故鄕)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筆者) 소견(所見)으로는 :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아니라 함흥이씨(咸興李氏) 또는 달단이씨(韃靼李氏)」여야 역사적(歷史的)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라고 본다.
➡ 여기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국(開國)시킨 장본인(張本人)’이라고 볼 때, 그에 관한 정확(正確)한 것들이 후손(後孫)들에 의해 기록(記錄)되지 않았다는 사실(事實)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의 후손(後孫)들은 바로 조선(朝鮮)의 군주(君主)들이었기 때문이다. 왕조실록(王朝實錄)이라는 세계(世界)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록(記錄)을 남겨 놓았음에도 자신(自身)들의 위대(偉大)한 개국시조(開國始祖)에 관한 것들을 제대로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은 큰 모순(矛盾)이요, 후손(後孫)답지 않은 행동(行動)이다.
●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이지만, 이는 사료(使料)를 참고(參考)한 것이다. :
즉(卽),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은, 〈「몽고(蒙古) 일파(一派)였던 달단계(韃靼系)」로, 몽고(蒙古)가 흥성(興盛)하자 몇 대(代)를 군벌(軍閥), 토호세력(土豪勢力)으로 군림(君臨)하였다. 그러나 몽고(蒙古)의 쇠퇴(衰退)와 고려(高麗)의 부활(復活)로 가문(家門)에 위기감(危機感)이 닥치자, 이자춘(李子春)은 이성계(李成桂)를 데리고 고려조정(高麗朝廷)을 찾았고, 원(元)의 잔적(殘敵)들을 몰아 내는데 힘을 쏟고 있던 고려(高麗)는, 이들을 이용(利用)하여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안정(安定)시키고자 한 것이니 고려조정(高麗朝廷)과 이성계 가문(假問)의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맞아떨어지니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은, 고려(高麗)로 귀화(歸化)를 하게 되고, 조정(朝廷)은, 그 가문(家門)에게 북방지대(北方地帶) 안정(安定)을 꾀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설명(說明)이 된다.
➨ 몇 가지 종류(種類)의 사료(史料)를 보자. 즉(卽),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및 기타(其他) 문헌(文獻)들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와 그의 선대(先代) 묘지【墓地: 陵】는 “달단동(韃靼洞)”에 모셔져 있다』라고 빠지지 않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달단동(韃靼洞)”에서 ‘마을, 골짜기, 골’ 등을 의미하는 “동(洞)”자를 빼고 나면 “달단(韃靼)”이라는 부족명(部族名) 또는 국가명(國家名)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달단(韃靼)”이란 본시(本是) “타타르(Tartar=Tatar)”라고 하며, “Tartary=Tatary”라고 한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들 종족(種族)이 동방(東方)과 동북방(東北方)에서 활동(活動)했다는 말은 “한글 해설서”에서 나오는 말이다. 「달단족(韃靼族)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색목인(色目人)이다.」 이걸 알면 이들이 동아세아(東亞)에서 활동(活動)했다는 것은 곧 거짓이자, 사기극(詐欺劇)이다.
➡ 여기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적(核心的)인 요소(要素)는 「“달단동(韃靼洞)”이라는 지명(地名)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어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단(韃靼) 마을”이라는 뜻은, 그곳에 “달단(韃靼)들이 집단(集團)으로 모여 살던 곳”이었거나, 또는 달단(韃靼) 부족(部族)들의 고향(故鄕) 또는 터전이었다거나 무언가 “달단(韃靼) 곧 타타르[Tatar]”와 깊은 관련(關聯)이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 “달단(韃靼), 타타르[Tatar]”와는 전혀 관련(關聯)이 없으며, “십원”한 장도 관련(關聯)이 없는 “1만(萬) 5천(千) 여리(餘里)” 먼 곳에서 살던 종족(種族)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생뚱맞은 “달단동(韃靼洞)”이라는 지명(地名)이 생겨난 것일까? 이건 아주 희극적(喜劇的)인 얘기다.
그냥 그대로, “그곳이 달단동(韃靼洞)이니 그리 알아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제적(强制的) 주입식(注入式) 교육(敎育)”은, 일제(日帝) 강점시기(强占時期)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강제(强制)했던 것이고, 1,945년(年) 이후(以後), 미군정(美軍政)에서, 1,948년 정부수립(政府樹立)부터는 ‘바톤[(baton)’을 이어받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政權)으로 이어지고, 그 이후(以後)는 계속 정권(政權)들이 이어받아 의무교육(義務敎育)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강제(强制)【위력(威力)을 써서 남의 자유(自由) 의사(意思)를 누르고 무리하게 행(行)함】하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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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조보감(國朝寶鑑) 82권 / 文祖代理 2 / 순종(純宗) 29년(기축, 1829) : 《竪洪原韃靼洞永興宮闥里紀蹟碑。韃靼洞。太祖禦元丞相納哈出大破之地也。宮闥里。太祖從母崔氏舊基。太祖。幼鞠養於崔氏也。因洪原永興儒士等上言。道臣。奉審基址回達也。: 홍원(洪原)의 달단동(韃靼洞)과 영흥(永興)의 궁달리(宮闥里)에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달단동은 태조가 원(元)의 승상 나하추[納哈出]를 막아서 크게 파한 곳이며, 궁달리는 태조의 종모(從母) 최씨(崔氏)가 살았던 곳인데, 태조는 어릴 때 최씨에 의해 양육되었다. 이는 홍원ㆍ영흥 유사(儒士)들이 상언하여 도신이 그 옛터를 봉심하고 회달한 데 따른 것이다.》
위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분명(分明)하게도 “달단동(韃靼洞)”이 있었다는 뜻이다. 문제(問題)는 그곳이 한반도(韓半島) 땅이냐? 본시(本是)의 달단(韃靼) 땅이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➊ 납합출[納哈出 : 나하추 : ? ∼1,388]【出處 : 두산백과】: 〈원나라 초기 공신(功臣)의 후예로서, 대대로 요동(遼東) 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의 국세가 떨어진 말기에는 선양[瀋陽:奉天]을 근거지로 해서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원나라의 멸망 5년을 앞둔 1362년(공민왕11) 2월 고려의 반역자 조소생(趙小生)의 유인을 받은 그는 동북면(東北面) 쌍성(雙城:함남 永興)을 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삼철(三撤:北靑) ·홀면(忽面:洪原) 등지에 침입하였으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이성계(李成桂, 태조)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함흥평야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다.
북원(北元)이 세워진 “1,368년 이후”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는데, 특히 전술에 뛰어났던 이성계를 깊이 존경하였다. 고려에서는 그에게 정1품의 관위(官位)인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 벼슬을 주었으나 후에 명 태조 주원장에게 항복【필자(筆者) 주(注) : 1,387年】,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져 윈난[雲南]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필자(筆者) 주(注) : 1,388年】하였다〉라고 하였다.
【납합출(納哈出)이 명(明) 군(軍)에게 항복(降服)한 것은 “AD 1,387年”이다.】
➋ 납합출(納哈出 : 나하추)【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納哈出[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納哈出 :(蒙古語:ᠨᠠᠭᠠᠴᠦ,鮑培轉寫:Naγaču;?∼1388年8月31日),元末明初大臣,官至太尉,屬蒙古札剌亦兒氏。為成吉思汗四傑之一木華黎裔孫,乃蠻台之孫,埜仙普化之子。: 원(元) 말(末)과 명(明) 초(初)의 대신(大臣)으로, 태위(太尉)에 이르렀는데, 몽고(蒙古) 찰랄역아씨(札剌亦兒氏)에 속했다. 성길사한(成吉思汗)의 네명의 뛰어난 장수의 하나였던 목화려(木華黎)의 후예(後裔)로, 내만태(乃蠻台)의 손자(孫子)로, 야선보화(埜仙普化)의 아들이다. 元朝滅亡後,納哈出駐兵開元金山,計有二十萬之眾,繼續抵抗明朝,與脫古思帖木兒呼應。有史料稱其為開元王。: 원(元)의 멸망(滅亡) 뒤에, 납합출(納哈出)은 개원(開元)하고 금산(金山)에 병사(兵士)을 주둔(駐屯)시켰는데, 합쳐 2십여(十餘)만 무리들로, 끊이지 않고 명(明)나라에 대항(對抗)하였는데,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가 호응하여, 사료에서 칭하기를 개원왕(開元王)이라 한다. 天元九年【1,387年】,明將馮勝進逼金山,納哈出無力抵抗,於是投降。降後,封海西侯。次年,隨傅友德征雲南,途中病亡。: 1,387년[天元 9년], 명(明) 장수 풍승(馮勝)이 진격(進擊) 금산(金山)에 닥치자, 납합출(納哈出)은 세력이 없이 저항하다가 투항(投降)하였다. 투항(投降)뒤에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차년(次年)에 박우덕(傅友德)을 따라 운남(雲南) 정벌에 나섰으나 도중에 병(病)으로 죽었다.〉라고 하였다.
납합출(納哈出)의 선대인(先大人)이었던 “목화려(木華黎)”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木華黎長大成人後,身長七尺,黑面,虎首虯鬚,沉毅多智,勇猛善射。: 목화려(木華黎)가 다 크고 난 뒤에, 신장(身長)이 7척(尺)이요, 얼굴은 검은색이었고, 호랑이 머리와 양쪽에 뿔이 나 있는 규룡(虯龍) 수염이며, 강인하며 지혜가 많고, 날래고 사납고 활을 아주 잘 쐈다〉라고 하였으며,
〈신원사(新元史)에서는 : 生時有白氣出帳中,神巫異之曰:「此非常兒也。」及長,身七尺,虯鬚黑麪,沈顏多智略,猿臂善射。: 태어날 시에 백기(白氣)가 장막(帳幕)에 어른거리니, 무당(巫堂)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 「이 아이는 예사롭지 않은 아이(兒)다」라고 말하였다. 성장(成長)하니 신장(身長)이 7척(尺)이요, 규수(虯鬚)에 검은 얼굴을 가졌으며, 심안(沈顔)에 지략(智略)이 많고, 팔이 길고 힘이 있어 활을 아주 잘 쐈다〉라고 하였다.
인종(人種)으로 보면 : 말 그대로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색목인(色目人)으로 흑인종(黑人種)과도 같은 흑면(黑麪)【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當時)에 납합출(納哈出)의 선대인(先大人)들은 일반적(一般的) 색목인(色目人)이었는데, 특이(特異)하게도 목화려(木華黎)는 검은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 그리고 그 뒤의 설명(說明)에는 : 역사통설(歷史通說)과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의 만주(滿洲) 땅과 달단동(韃靼洞) 주변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대패(大敗)했다는 설명(說明)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에게 궤멸(潰滅)된 자(者)가 무슨 재주로 “1 만리(萬里) 서(西)쪽의 금산(金山)까지 도주에서 2십여(十餘)만 병사(兵士)들을 모아 주둔(駐屯)시키고 명(明)나라에 대항(對抗)했을까? 또 힘이 없어 명(明)에 투항했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 이건 진짜 ‘코메디’ 극(劇)이라고 해도 아깝지 않은 각색(脚色)이다.
「납합출(納哈出)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활동(活動)했다」라는 말은, 『전형적(典型的)인 역사왜곡(歷史歪曲)이요, 역사조작(歷史造作)이다.』 아래의 납합출(納哈出)과 그의 조부(祖父)와 부(父)의 생애(生涯)를 살펴보자.
중국 위키백과[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및 열전(列傳) 등에서 : 납합출(納哈出)의 조부(祖父 : 할아버지), 부(父 : 아버지)의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➌ 乃蠻台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납합출(納哈出)의 조부(祖父)
《乃蠻台(13世紀∼1348年),又譯乃馬台,蒙古帝國札剌亦兒氏。木華黎的五世孫,國王忽速忽爾之子。元成宗大德五年(1301年),受命征討海都、篤哇,以功被任命為宣徽院使。元仁宗延祐七年(1320年),擔任嶺北行省右丞。至治二年(1322年),轉任甘肅行省平章政事。元文宗天曆二年(1329年),調任陝西行省平章政事。任內,賑濟災民。繼任陝西行台御史大夫。至順元年(1330年),擔任上都留守、虎賁衛親軍都指揮使,改任知嶺北行樞密院使、封宣寧郡王,鎮
守北邊。元順帝至元三年(1337年),取代朵兒只襲為國王。至元六年(1340年),擔任遼陽行省左丞相,歷官皆有政績,年邁辭歸大都,卒後追封魯王。其子埜仙普化,埜仙普化子納哈出.》
➨ 조부(祖父)는 : 《嶺北行省 右丞。甘肅行省平章政事。陝西行省平章政事。陝西行台御史大夫。上都留守、虎賁衛親軍都指揮使,嶺北行樞密院使、宣寧郡王,鎮守北邊。遼陽行省左丞相,年邁辭歸大都 : 령북행성 우승, 감숙행성평장정사, 섬서행성평장정사, 섬서행태어사대부, 상도유수, 호분위친군도자휘사, 영북행추밀원사, 선녕군왕, 북변(北邊) 진수(鎭守), 요양행성좌승상, 대도(大都)로 돌아왔다.》
➍ 埜仙普化(?—?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납합출(納哈出)의 부(父).
《埜仙普化(?—?) : 譯名又作也先不花、野仙溥化,蒙古札剌兒氏,埜仙普化是木華黎六世孫、孛魯的玄孫、阿里乞失的曾孫,忽速忽爾的孫子,乃蠻台的兒子。元朝末年大臣,元順帝時中書平章政事。其子納哈出。埜仙普化早年入宿衛,掌管速古兒赤(怯薛官名,掌內府尚供衣服),歷任朝列大夫、給事中,拜為監察御史。後來擔任河西廉訪副使。至正十三年(1353年)擔任淮西添設宣慰副使,率軍鎮壓泰州農民起義。入為中書參知政事,轉任御史中丞。至正十七年(1357年),拜為中書右丞,奉旨宣撫彰德路、大名路、廣平路、東平路。至正十九年(1359年),統帥探馬赤軍去遼陽行省鎮壓紅巾軍。至正二十年(1360年),為中書省參知政事,前去調解孛羅帖木兒和察罕帖木兒的矛盾。至正二十一年(1361年),為中書左丞,加太尉銜,任遼陽行省左丞相。至正二十二年(1362年),升為中書右丞,次年罷。至正二十八年(1368年),明朝大軍北伐,他奉命防守入海口,護衛畿輔。》
➨ 부(父) : 《給事中,監察御史。河西廉訪副使。淮西添設宣慰副使,中書參知政事,御史中丞。中書右丞,統帥探馬赤軍去遼陽行省鎮壓紅巾軍。中書省參知政事,中書左丞,太尉銜,遼陽行省左丞相。中書右丞,明朝大軍北伐,他奉命防守入海口,護衛畿輔。: 급사중, 감찰어사, 하서렴방부사, 회서(淮西)청설선위부사, 중서참지정사, 어사중승, 중서우승, 요양행성의 홍건적을 진압, 중서성참지정사, 중서좌승, 태위함, 요양행성좌승상, 중서우승, 명나라가 대군으로 북벌을 하자, 해구(海口)를 방수하는 봉명을 받았고, 기보(畿輔)를 호위(護衛)하였다.》라고 하였다.
➥➥〈두산백과…위키백과 등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납합출【納哈出 : 나하추】의 가계(家系)는 : 대대(代代)로 요동지방(遼東地方)의 군사적(軍事的) 책임(責任)을 맡았고, 심양[瀋陽 : 奉天]을 근거지(根據地)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稱)하며 만주지방(滿洲地方)에 세력(勢力)을 뻗쳤다〉라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그러나,
➥➥➥ 위의 “조부(祖父)와 그의 부(父 : 아버지)”의 관직명(官職名)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요양행성(遼陽行省)의 좌승상(左丞相)을 지냈는데, 이는 이들이 역임(歷任)한 많은 관직(官職) 중에서 하나의 관직(官職)이었을 뿐으로, 이곳의 요양(遼陽) 또는 만주(滿洲) 땅을 중심(中心)으로 대대(代代)로 군벌(軍閥)이나 근거지(根據地)로 활동(活動)했다는 이야기는 단 한 글자도 없다.」 이게 뭔 일인가?
반대(反對)로, 『납합출(納哈出)은 금산(金山)【알타이산(Altai, 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山)】을 근거지(根據地)로 수십만(數十萬) 무리를 모아 명(明)나라에 대항(對抗)했다』라고 하였다.
「“금산(金山)”은, ‘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산(Altai, 山)=벨루하산(Belukha, 山)’」을 말하는 것이다. 「1 만리(萬里) 서(西)쪽 땅에 있는 산(山)」의 이름이다.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산(Altai, 山)=벨루하산(Belukha, 山)=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해발고도(海拔高度) 4,506m, 4,440m인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조선사(朝鮮史)에서도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따로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 「만주(滿洲)와 달단동(韃靼洞)」은, 바로 금산(金山)【알타이산(Altai, 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山)】과 깊은 관련(關聯)이 있다는 것이고, 이 주변일대(周邊一帶)가 이성계(李成桂)와 그 가문(家門)이 4대(代)에 걸쳐 몽고(蒙古) 몽고 조정(蒙古 朝廷)으로부터 총독(總督)에 임명(任命)되어 ‘지방(地方) 토호군벌(土豪軍閥)’로 세력(勢力)을 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는 : 당시(當時)에 이러한 각축장(角逐場)이 될 만한 조건(條件)을 갖춘 땅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오늘날의 만주(滿洲) 땅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라는 것인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日帝)가 첩자(諜者)들을 보내어 철저(徹底)하게 조사(調査)한 보고서(報告書)가 이를 증거(證據)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곧 「일제(日帝)가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은밀(隱密)하게 첩자(諜者)들을 보내어 조사(調査)한 바에 따르면 : 19∼20세기(世紀) 초(初)에 이르기까지에도, 이곳은 무인지경(無人之境)과 같았다」라고 하였다.
➎ 달단족(韃靼族)에 대한 ‘중국어 위키백과’를 살펴보자.
• 韃靼人[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韃靼人,中國及歐洲古代對歐亞草原游牧民族的統稱,源於蒙古語族群塔塔爾部的族稱,現專指俄羅斯境內一突厥語族群. : 달단인(韃靼人)【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달단인(韃靼人)은, 중국(中國)과 구주(歐洲)【구라파(歐羅巴) : 유럽】의 고대 초원(草原) 유목민족(遊牧民族)을 총칭(總稱)한다. 몽고어족(蒙古語族) 무리로 탑탑이부(塔塔爾部) 족을 말하는데, 현(現) 아라사(俄羅斯)【Russia : 러시아】 경내(境內)의 돌궐어족(突厥語族) 무리다〉라고 하였다. 즉(卽)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십원 한 장도 관계(關係)가 없다”」라는 뜻이다.
• 〈塔塔爾族,當代中國的少數民族之一,東歐韃靼人後裔 : 탑탑이족(塔塔爾族)은, 그 시대에 중국(中國) 소수민족(少數民族)의 하나로, 동구(東歐)【동구라파(東歐羅巴) : 동유럽】달단인(韃靼人)의 후손(後孫)들이다.
• 〈韃靼利亞(Tartary),中世紀到20世紀歐洲部分地區的稱呼,大約位於裏海北部和中部到烏拉爾山脈 : 달단리아【韃靼利亞 : Tartary】는, 중세기(中世紀)에서 20세기(世紀)에 걸쳐 구주(歐洲)【구라파(歐羅巴) : 유럽】의 땅에 나눠 있는 지구(地區)의 칭호(稱號)로, 대략적(大略的)으로 “리해(裏海)【카스피해】북부(北部)와 중부(中部)의 오랍이산맥(烏拉爾山脈)【우랄(Ural)산맥(山脈)】에 자리해 있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대륙(大陸) 측(側)에서도 : 「달단족(韃靼族)에 대해 위와 같은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의 한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서방(西方) 땅【구라파(歐羅巴)+동구라파(東歐羅巴)】북방지대(北方地帶)를 한때나마 누비고 다녔던 옛 유목종족(遊牧種族)이다.
◈ 이들 달단족(韃靼族)들의 일부(一部)가 조선에 투항(投降), 의탁(依託)하여 무리를 이뤄 살게 되면서부터 이들이 고려(高麗) 때의 “유랑집단(流浪集團)”으로, 「양수척(揚水尺). 화척(禾尺). 재인(才人). 백정(白丁)」등이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居處)도 없이, 가축(家畜)을 기르며, 이들 가축(家畜)이 먹이로 하는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하며 사는 무리(衆)를 칭(稱)하는 것이다.
이들은 : 「신라(新羅) 말기(末期) 및 고려(高麗) 초(初)에 유입(流入)된 북방종족(北方種族)이었던 “글란(契丹 : 거란)과 여진(女眞 : 말갈(靺鞨), 또한 달단(韃靼 : Tatar) 족(族)”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북방종족(北方種族)’이란 말은,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신라(新羅), 고려(高麗)가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을 때 가능(可能)한 설명(說明)이다.】
특히 여기서 “백정(白丁)”은, ‘색목인(色目人) 장정(壯)’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유목민(遊牧民)으로 가축(家畜)을 도살(屠殺)하는 것에는 전문가(專門家)다〉
◈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 고증(考證)해 보면 :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동구라파(東歐羅巴)와 아세아(亞細亞)를 석권(席捲=席卷)하고 있었던 천자국(天子國)이었음으로 역설적(逆說的)으로 증명(證明)해 주고 있다」
즉(卽), 「카스피해[裏海 : Caspian Sea]의 북부(北部)와 동부(東部)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달단(韃靼)이 있었다. 그 남(南)쪽은 조선(朝鮮)의 땅이었다」라는 것을 증명(證明)해주고 있는 이야기다.
◈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방(西方)의 우랄산맥【Ural Mt’ : 오랍산맥(烏拉山脈) : 오랍이산맥(烏拉爾山脈)】을 중심(中心)으로 동(東)쪽과 서(西)쪽에서 살던 유목종족(遊牧種族)」으로, 「이들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출몰(出沒)했다든지 침략(侵略)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제정신이 아닌 자(者)들이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러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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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의 또 다른 기록(記錄)을 살펴보기로 하자.
(5-1) 대동야승(大東野乘) 동각잡기(東閣雜記) 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 《至元甲戌十二月。穆祖薨于慶興府。葬于城南。後遷于咸興府之義興部韃靼洞。: 지원(至元) 갑술년(甲戌年 1274) 12월에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 : 고조(高祖)】가 경흥부(慶興府)에서 흉(薨)하므로 성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함흥부의 의흥부달단동(義興部韃靼洞)에 이장(移葬)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 〈 고조고(高祖考)를 목왕(穆王), 그 능(陵)을 덕릉(德陵), 비(妣) 이씨(李氏)를 효비(孝妣), 능을 안릉(安陵)이라 하고, 증조고(曾祖考)를 익왕(翼王), 그 능을 지릉(智陵), 비 최씨(崔氏)를 정비(貞妣), 능을 숙릉(淑陵)이라 하고, 조고를 도왕(度王), 능을 의릉(義陵), 비 박씨를 경비(敬妣), 능을 순릉(純陵)이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능을 정릉(定陵), 비 최씨를 의비(懿妣), 능을 화릉(和陵)이라 하여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4대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5-2) 東溟集 7권 / 七言律詩 89수 / 함경도 관찰사 윤이지 영공을 전송하다〔送北伯尹令公 履之〕 : 주(注) / 함경남도(咸鏡南道) 함주군(咸州郡) 덕산면(德山面)과 홍원군(洪原郡) 용운면(龍雲面)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 이성계(李成桂)가 외적과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는 달단동승전기념비(韃靼洞勝戰紀念碑)가 있다. 【필자(筆者) 주(注) / 탁본(拓本) 이미지를 보면 : 기적비(紀蹟碑)라고 하였다.】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문집(文集) 속에… … [주-D004] 함관령(咸關嶺) : 함경도 관찰사 윤이지 영공을 전송하다[送北伯尹令公 履之]를 번역(飜譯)한 그 주석(註釋)에 “달단동승전기념비(韃靼洞勝戰紀念碑)기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건 AD 1,829년 순조(純祖) 29년에 “달단동승전기념비(韃靼洞勝戰紀念碑)”를 건립(建立)했다고 하였다. 【필자(筆者) 주(注) / 탁본(拓本) 이미지를 보면 : 기적비(紀蹟碑)라고 하였다.】
【‘고전번역원 DB’를 검색(檢索)해 보면 : 달단동승전기념비(韃靼洞勝戰紀念碑)는, 오직 동명집(東溟集) 함관령(咸關嶺) 편의 ‘주석(注釋)’에서만이 검색(檢索)이 되고 있다. 즉 동명집(東溟集)을 번역(飜譯)한 분이 풀어 놓은 “주석(註釋)”에서만이 설명(說明)되고 있다는 것이다.】
➡ 이계집(耳溪集)【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제5권 / 시(詩) : 삭방풍요(朔方風謠) 정유년(1777, 정조1) 겨울, 출척당하여 경흥부사로 보임되었을 때이다【丁酉冬, 黜補慶興府使】함관 평정 [咸關平] : 함흥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큰 고개가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험준함은 철령(鐵嶺)에 버금간다. 태조가 이곳에서 나하추(納哈出)를 대파하였다.
〈咸關平, 朔方淸 : 함관이 평정되자, 삭방이 맑아졌네. 納哈出猖狂, 侵凌北諸城 : 나하추 미쳐 날뛰어, 북방 성들 침략했지. 중략(中略), 都連浦外無東漁, 韃靼城下始春耕 : 도련포 밖에는 동쪽에서 고기 잡는 이 없고, 달단성(韃靼城) 아래에선 비로소 봄갈이 들어갔다네〉라고 하였는데,
➡ 이 땅 어디에 「달단성(韃靼城)」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자(者)가 있을까? “달단성(韃靼城)”은 당연(當然)히 ‘달단족(韃靼族)’들이 살던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곳은 “조선(朝鮮) 영토(領土) 안(內)에 있었다」라는 말과 같다.
※ 달단동승전기념비(韃靼洞勝戰紀念碑) 각(閣)【필자(筆者) 주(注) / 탁본(拓本) 이미지를 보면 : 기적비(紀蹟碑)라고 하였다.】: 「소유자(所有者) : 조선(朝鮮) 총독(總督)」이라는 글자가 선명(鮮明)하다. 이걸 믿으라는 이야기는 배고파 낑낑대며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지나가는 ‘분견(糞犬 : 똥개)’이 “孔子 曰, 孟子 曰(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이걸 누가 그곳에 만들어 놓았을까? 「바로 일제(日帝)의 밀명(密命)을 받은 자(者)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이걸 어떻게 증명(證明)할 수 있느냐? 당연(當然)히 증명(證明), 고증(考證)할 수 있다. 그 원문(原文) 마지막에서 말하기를 : 「세운 굳건한 비석(碑)이 고요하게 변방의 새막(塞漠)에 있다【堅 之 石 以 靖 塞 漠】」라고 했기 때문이다.
「새막(塞漠)」 : ‘변방(邊方)=변경(邊境)’의 사막(沙漠)의 땅 / 인용(引用) 예(例) :
…[陶谷集 2권 / 詩 : 和副使玉連環體 / 동풍에 변방 사막의 얼음 풀리니 : 東風泮塞漠]
…[陶谷集 3권 / 詩 : 還到遼東 次東岳韻(요동에 돌아와서 동악의 시에 차운하다) / 猶從塞漠寄衰喘 : 변방 사막길에 쇠잔한 목숨을 맡긴 채]
… [역주 資治通鑑 綱目(7) 己酉年(A.D.49) : 하니 吏士雖疫이나 援不獨存이라 惟援이 得事朝廷二十二年에 北出塞漠하고 南渡江海하여 觸冒害氣하여 僵死軍事北出塞漠, 謂討烏桓.]하였는데, 北出塞漠이란 오환(烏桓)을 토벌한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오환(烏桓)=오환(烏丸)’ 역시(亦是) 오늘날의 요동(遼東), 요서(遼西) 땅에 없었다는 것을 명백(明白)하게 증명(證明)하고 있다.】
「함경도(咸鏡道) 함관령(咸關嶺) 땅이, 북방(北方)의, 변방(邊方)의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는가?」를 증명(證明)하면 된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가 사막지대(沙漠地帶)라고 한다면 :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19세기(世紀) 초(初), 제2차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났다」라는 말과 같다.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 : 1,829年)가 서 있어야 할 곳은, 「1 만리(萬里) 머나먼 서북방(西北方) 땅, 새막(塞漠)의 땅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념비(紀念碑)”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고, 생뚱맞게 기념비(紀念碑)라는 말은, 그 출처(出處)가 의심(疑心)스러운 것이다.
더하여 그 비문(碑文)【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마지막에 「이 비석(碑石)은, 고요하게 새막(塞漠)에 굳건하게 서 있다」라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잖은가!
〈누구 맘대로 : 서북(西北)쪽 “1 만리(萬里)”도 넘게 떨어져 있는 새막(塞漠)의 땅에 굳건하게 서 있는 돌로 만든 비석(碑石)이 반도(半島) 땅으로 나들이를 나왔는가? 소풍을 나왔나? 하심심해서 잠깐 산책(散策)이라도 나오셨나?〉 이런 것들이야말로 바로 ‘블랙 코메디(black comedy)’ 소재(素材)다.
➡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 (1,829) [출처(出處) : 고전용어 시소러스] : 〈조선 순조(純祖) 때 함경도 홍원(洪原) 함관령(咸關嶺) 부근에 건립한 비.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인 이성계(李成桂)가 원(元) 나라 납합출(納哈出) 군대를 물리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움〉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 고려(高麗) 당시(當時)【AD 1,362년】에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또 고황제(高皇帝) 때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400년(年)도 넘게 지난 AD 1,829년[純祖 29년]에 생뚱맞게, 어이없이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는 「믿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은 뜻이 아니고 무엇이냐! 또 기념비(紀念碑)인가? 기적비(紀蹟碑)인가? 참 헷깔리는 학계(學界)다.
그렇다면 그 비문(碑文)은? 현존(現存)하고 계시는가! 아니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서지(書誌) 상에만 존재(存在)하고 있는 건가? 인터넷에 떠도는 탁본(拓本)을 보면 : 기적비(紀蹟碑)가 맞는 말이다.
(5-3) 북관기사(北關紀事) / 왕업이 흥기한 사적[興王事蹟] : 주(注) : 덕릉과 안릉의 봉안과 이봉(移奉) 사실이 사책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叢書)에 “목조는 지원(至元) 1년(1264) 갑자 5월에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아, 그대로 알동천호(斡東千戶)에 충원되었다. ➊ 지원 11년 갑술 12월에 훙(薨)하니, 공주(孔州) 곧 경흥부(慶興府)이다. 성 남쪽 5리에 장사하였다.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이다.” 하고, ➋ 동각잡기 상(東閣雜記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에는 “강 북쪽의 알동(斡東)과 해관성(奚關城) 사이는 옛날의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으니 …… ” 하였다. ➌ 임하필기(林下筆記) 권32 〈순일편(旬日編) 북관(北關)의 고적(古蹟)〉에는 “처음에는 알동 향각봉(香角峯)에 있었는데 태조 4년(1395)에 경흥부로 이봉하였다.” 하였다. ➍《북관기사》에서는 알동에 있던 능을 익조(翼祖)가 경흥부로 이봉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5-4) 新增東國輿地勝覽 49권 / 咸鏡道 洪原縣 : 고적(古跡) 달달동(韃靼洞) : 〈古跡 / 韃靼洞。在縣南三十里 : 본현 남쪽 3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5-5)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권 太祖朝故事本末 / 선계(璿系) : 18세 목조(穆祖)의 휘는 안사(安社)이다. 태조가 목왕(穆王) 【덕을 펴고 의를 잡는 것을 목이라고 한다】이라 추존하였다. 태종이 시호를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 더 올렸다. 고려 지의주사(知宜州事)의 벼슬을 하였고, 원(元)에 벼슬하여 남경(南京) 5천호소(南京五千戶所)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 지원(至元) 11년 갑술 고려 원종(元宗) 15년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태조실록 권수총서(太祖實錄卷首總書)’에 이르기를 목조(穆祖)의 기신(忌辰)은 12월이라고 하였고, 동각잡기(東閣雜記) 또한 12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축년일록(逐年日錄)을 상고하니, 모두 3월 10일을 기신(忌辰)으로 삼았으므로 그대로 좇는다.】 능은 덕릉(德陵)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에 있으니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목조(穆祖)는 경흥부(慶興府)에서 죽었다. 처음에는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태종(太宗) 10년 경인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 동각잡기(東閣雜記)에 함흥의 달단동(韃靼洞)이라고 하였다】이다.
➡ ‘12월’에 죽은 목조(穆祖) 곧 이안사(李安社) 기신(忌辰)을 ‘3월 10일로 했다’라는 말은, 기가 막히고, 아주 코믹한 이야기다. 「12월에 죽은 사람의 제삿날을 3월 10일로 했다」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라는 뜻이고, 실제(實際) 그런 인물(人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도 모른다는 뜻이다.
또 그 장지(葬地)조차 기록(記錄)마다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한 지방(地方)의 토호세력(土豪勢力)이자 군벌(軍閥)이자 한 지역(地域)을 다스리는 총독(總督)【달로화적(達魯花赤)】이 언제 죽었는지, 장지(葬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말은, 참 애달프고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게 무슨 수백(數百) 년 전(前)의 이야기도 아니고, 겨우 「고조부(高祖父)의 기신(忌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장지(葬地)도 이곳에 있다, 저곳에 있다」라고 하는 것들은… …「이안사(李安社)라는 인물이 진짜 존재(存在)했는가?」라는 의문(疑問)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달단동(韃靼洞)’이니, ‘이안사(李安社)가 남경(南京) 5천호소(南京五千戶所)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라는 등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 “아니다”라는 의심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 이것은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일어났던 사건(事件)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달단동(韃靼洞)이니, 남경(南京) 5천호소(南京五千戶所) 다루가치【達魯花赤】」니 하는 말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 지대(地帶)”에서 있었던 사건(事件)이고, 이럴 때 「이안사(李安社)의 기신(忌晨)이나 장지(葬地)가 불분명(不分明)하다」라는 것도 충분(充分)히 이해(理解)될 수 있는 사안(事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5-6)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叢書) 006 : 목조(穆祖)가 죽자 공주(孔州)에 장사 지내다.
〈至元元年甲子五月, 欽受宣命, 仍充斡東千戶句當。 至元十一年甲戌十二月薨, 葬于孔州 【卽慶興府】 城南五里, 後遷葬于咸興府之義興部 韃靼洞, 卽德陵。: 지원(至元) 원년 갑자년【1,264, 高麗 元宗 5】 5월에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그대로 알동 천호(斡東千戶)의 직책을 맡았다. 지원 11년 갑술년【1,274, 忠烈王 卽位年】 12월에 목조(穆祖)가 훙(薨)하니, 공주(孔州)【경흥부(慶興府)이다】 성(城) 남쪽 5리에 장사 지냈다.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 지냈는데 곧 덕릉(德陵)이다〉라고 하였다.
(5-7) 태종 10년 경인(1410) 10월 28일(신유) : 덕릉과 안릉을 옮겨 함주 달단동에 합장하다 : 〈辛酉 / 遷德、安二陵, 合葬于咸州 韃靼洞之原。: 덕릉(德陵)과 안릉(安陵) 두 능을 옮겨 함주(咸州) 달단동(韃靼洞)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洞在咸州北五十里。 葬用灰隔。 德陵在西, 安陵在東。 : 달단동(韃靼洞)은 함주(咸州) 북쪽 50리에 있다. 회격(灰隔)을 써서 장사 지냈는데, 덕릉이 서쪽에 있고 안릉이 동쪽에 있다. 啓陵以八月庚申, 卽日發引, 九月到咸州, 安于殯殿, 至是乃葬。: 8월 26일(庚申日)에 능을 판 다음, 그날로 발인(發引)해서, 9월에 함주(咸州)에 도착, 빈전(殯殿)에 봉안하였다가, 이때 이르러 장사 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 “제2편”에서는 많은 의문(疑問)을 해소(解消)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하나하나 자세(仔細)하게 설명(說明)하려면 많은 분량(分量)이 된다. 또 필자(筆者)의 글을 보시는 독자(讀者)들께서는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지식(知識)을 가지신 분들이 대부분(大部分)이기 때문에, 이 정도(程度)의 내용(內容)은 충분(充分)히 이해(理解)하시리라 믿고 있으며,
※ 이러한 글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 특히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와 관계(關係)되는 내용(內容)은,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추구(推究)하고자 하는 것이지, ‘전주이씨(全州李氏)’에 대한 추호(秋毫)의 다른 뜻이 없음을 밝히는 바다. [3편으로 계속(繼續)]
2024년 07월 27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제3편'에서는 납합출(나하추)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계는 납합출이 없었다면 : 영웅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고, 그의 존재가치가 없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성계" 가문은 이민족(異民族)이 아닌 신라인 또는 고려인으로 "몽고가 흥성하니 항복했다가 다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 그러나 이는 '조선 태조 고황제'라는 신분때문에 선입견이 작용된 것이다'라고 봅니다.
* "이성계" 가문이 정말로 신라 또는 고려인이었다면 "당시의 한자를 기록매체로 사용한 것을 감안하면 : "귀환(歸還)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라는 것이 올바른 의미라고 봅니다.
* 귀환(歸還) : [한자사전 : 1. 본디의 처소(處所)로 돌아옴. 2. 전쟁터(戰爭-) 또는 외지(外地)에서 다시 돌아오거나 감]이라고 하였으니,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 당연히 이성계 가문이 신라 또는 고려인이었다면 "귀화(歸化)"라는 단어 대신 "귀환(歸還)하였다"라고 기록했을 것은확실합니다.
* 다만 당시에 "고려"는 천자국이었으니 사해(四海)를 모두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은 비록 밖에 있으나 마음만은 항상 고려(조정)에 있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