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DEATH (MARANASSATI)
EXPLANATION AND INSTRUCTION
죽음에 대한 명상(마라나싸티)
설명과 가르침
THIS EVENING WE are going to reflect on death. It is another type of
reflective meditation practised with mindfulness meditation.
오늘 저녁에는 죽음에 대해서 숙고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챙김 명상에서 수행하는 숙고명상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ILL-OMENED?
불길한?
Death is a subject, which many people prefer not to talk about,
especially in other cultures and religions. Many regard discussion about
death as ill-omened, unpleasant and luckless.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얘기 나누고 싶지 않은 주제로, 특히 다른 문화나 종교를 지닌 사람
들에서 그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관한 토론을 불길하고, 불쾌하며, 재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Death as the darkest side of life is considered an inappropriate subject
for conversation. People tend to cover their awareness of the reality of
death with enormous abstract imaginings and theories. They actually try
to suppress that reality in their conscious mind. The mind is thus
deceived by intellect. Deception gradually becomes perception. This
perception of death, however, seems to have achieved general
acceptance.
인생의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서의 죽음은 대화의 주제로는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현실성에 대한 의식을 엄청난 추상적 이미지와 이론들로 덮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의식 속에서 이러한 현실을 억압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기만이 점차 일반적 인식으로 전환됩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The Buddha's way of thinking is different and in this case even
against the mainstream. He said, "death is another object for meditation."
We should recognize, accept and try to understand it. The Buddha taught
his disciples that in order to uproot mental defilement and thereby
achieve peace, one should stay vigilant and develop a sharp mindfulness
of death'12. Can we run away from death? Certainly not. It is an
inevitable process we all have to go through.
하지만 부처님의 사고방식은 일반인과 다르며, 이와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주류의 반대편에
서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음은 명상의 또 다른 주제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번뇌를 뿌리째 뽑아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항상 예민하게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날카로운 마음챙김을 개발해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습니까? 단연코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언젠가는 겪어야 할 필연적 과정입니다.
--------------------------------------------------------------------------------
12 Pathama Maranassati Sutta, Anguttara-nikaya. Chatta-sangayana
edition. Rangoon, 1955, Vol. 1, pp. 135-8,Vol. II, pp. 268-270
People do not like to talk about it because they fear death. This
is true of anybody. Some people also think that talking about death may
bring ill fate and could destine them for ruin. The Buddha, however, said
that the fear of death arises when there is no insight into it. If you do
not talk about it, you will not understand it. That is why this meditation
on death is meaningful and worthwhile, however fearful it may sound.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얘기하길 꺼려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불운을 초래하거나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것에 대한 통찰이 없을 때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리 두렵게 여겨진다 할지라도 죽음에 대한 명상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되는 이유입니다.
FEAR OF DEATH
죽음의 공포
Imagine this room with no light in silent darkness. If you come
across a wire in the dark, you may think that it is a snake, and you will
be very frightened; that is because you cannot see what it is really
there. If you come across a cat, you may think that it is a ghost, as you
cannot see what is exactly there. You just speculate on the sound of the
cat's movements and create fear within your self. Not seeing things as
they are makes you scared. It is oppressive to be in the dark because
darkness prevents us from seeing many things. Fear, however, is
automatically expelled when the light comes. What we need is light that
helps us to see a wire as a wire, and to make sure that it is not a
snake. Even when it comes to matters like death, what we have to do is
to understand it, to know what it is like and what fear of death is like.
Understanding is likened to light.
이 방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아무런 빛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둠 속에서 새끼줄을 마주친다면, 당신은 그것을 뱀으로 오해할 수 있고, 매우 놀랄 것입니다: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고양이를 마주칠 때, 당신은 그것이 유령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고양이가 움직이는 소리에 대해 즉시 추측하고 자신 속에 공포심을 유발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둠 속에 있는 것은 답답한 일인데, 어둠 속에서는 많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공포는 자동적으로 사라집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끼줄을 새끼줄로 볼 수 있게 하고 뱀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 줄 빛입니다. 죽음과 같은 문제를 관해서도,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의 공포는 어떠한 것이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해란 바로 빛과 같은 것입니다.
Many religions, throughout the ages, have tried to solve the
mystery of death and of the fear that is necessarily linked to it. They
come up with various philosophies as to what death is in order to dispel
fear of death in the minds of people.
오랜 시간동안 많은 종교들이 죽음과 죽음에 필연적으로 얽히게 되는 공포의 신비를 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쫓아내기 위해 많은 다양한 철학들이 죽음에 대해 정의를 내려왔습니다.
There is always,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a threat of death. No
matter how you ignore it, this is a fact of life. The Buddha said that we
have to have courage to analyze it and reflect upon it. That courage
comes through mindfulness.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의 위협은 항존(恒存)해 왔습니다. 아무리 그 사실을 무시하더라도, 그것은 삶의 진실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죽음을 분석하고 사유할 충분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용기는 마음챙김으로부터 나옵니다.
Many religions try to come up with what they think are solutions to solve
this psychological problem facing people who live in fear of death. In
pre-Buddhist times in India, people said that when someone died it was
just like someone changing clothes, as they did every day.
많은 종교들은 그들이 생각키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이러한 심
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 되리라는 많은 방법들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불교이전의 인도에서는, 죽음은 매일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 얘기되었습니다.
In the same way, the permanent soul was said to keep changing its
body, from one to another. They believed in rebirth. The idea of rebirth
existed even before the Buddha's time.
옷을 갈아입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불사의 영혼이 육체를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꾸는 것
으로 얘기되었습니다. 그들은 환생을 믿었습니다. 부처님 시대 이전에도 환생의 개념은 존재하였습니다.
This is emphasized in the early scriptures li ke the Upanishads. They
said that when someone dies and the soul goes to another body, the
cycle of birth (samsara) goes on. So again, the idea of samsara was
already there. They said the liberation or moksha comes about when that
individual soul (each and everybody is considered to have an individual
soul) is reunited with the universal soul, which is called Atman, the
everlasting soul. When these two souls merge together there is no longer
an individual soul or a universal soul. There is only one. When you see
two, you are under an illusion. It is like that. This is a part of their effort
to dispel the fear of death. You have nothing to fear because you are
one step closer to becoming reunited with the universal soul which is
everlasting. People, are afraid of impermanence, of cessation, of
disappearance, of going away. Therefore, they try to come up with an
idea of something that is everlasting. Although people are taught these
ideas, still fear does not go away.
우파니샤드와 같은 초기 경전에서 이것은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 경전들은, 사람이 죽어서 다른 육체를 찾아 갈 때, 윤회(삼사라)가 지속된다고 말합니다. 환생과 같이, 윤회의 개념도 이미 존재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해탈(목샤)은 개별아(각각의 모든 개체는 개별아(個別我)를 지니고 있다고 간주됩니다.)가 불사의 아트만(atman)이라고 불리는 보편아(普遍我)와 통합될 때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두 영혼이 통합될 때, 개별아나 보편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 뿐입니다. 만약 두 개가 보인다면, 당신은 착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는 노력들 중의 일부입니다. 영속하는 영혼인 보편아와 통합되기 위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비영속성, 단절, 소멸, 사라져감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영속성을 지닌 어떤 것을 고안해 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이론을 배울지라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In all the Abrahamic religions, like in Judaism, Islam and
Christianity, there is one rebirth after death, which is supposed to be
after the Day of Judgement — where one will be reunited with the
Lord or God, the Creator who will welcome the dead into an immortal
state.
유태교나 이슬람교, 기독교와 같은 일신교에서도, 죽음 뒤의 재생이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후 심판의 날로 개념화됩니다: 거기서는 사자(死者)를 불멸의 상태 속으로 인도하는 주(主)나 신, 창조주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I see this again as an attempt to dispel fear of death. Fear is real. Fear
in you, fear in me, fear in everyone in the street regarding death, is real.
나는 여기서도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보게 됩니다. 공포란 실제적인 것입니다. 죽음을 지켜보는 당신의 공포, 나의 공포, 거리의 모든 사람들의 공포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All these philosophies are formulated with one aim; that is to lessen the
fear of the experience of death. All the theories, unfortunately, could do
very little to help one in the face of death.
모든 이러한 철학들은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공식화됩니다: 죽음의 경험에 대한 공포를 약화시키는 목적. 모든 이론들은, 불행하게도, 죽음에 직면한 존재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I think the actual problem is not death itself but fear of death. What we
are going to do is discuss the fear of death rather than death itself.
Imagine, if we have to live under the shadow of the fear of death
throughout our life, how can we enjoy life? Can there be real peace of
mind? Before death actually comes, one is already defeated by fear of it.
나는 실제적인 문제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하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찰하려고 하는 바는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죽음의 공포라고 하는 어두운 그림자에 짓눌려 살아야 한다면, 삶의 기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요? 죽음이 실제로 닥치기 전에 벌써, 죽음에 대한 공포에 패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Fear of death is a fear of future that results in our not being able
to live fully at the present moment. We fear and are worried that we are
going to lose what we have, unable to accept that things are
impermanent.
죽음에 대한 공포는 미래에 대한 공포이고, 현재의 지극한 순간을 완전하게 살아 나갈 수
없도록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잃어버릴 거라는 두려움과 걱정 속에 있게 되고, 사물들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합니다.
It hurts and discourages one to think that we have to leave all
hard-earned wealth and reputation, and go. The future always seems
something uncertain for human beings. Uncertainty is the whole mark of
life after death. Buddhism says that without fully accepting the
uncertainties associated with death, life never feels secure. Life is, of
course, naturally insecure. However, it is possible to feel secure amid
the insecure provided we develop our mind.
자신이 힘들게 쌓아온 모든 부와 명성을 두고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고 낙담시킵니다. 미래는 항상 인간존재에게는 불확실한 어떤 것입니다. 불확실성은 죽음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상징입니다. 죽음과 관련된 불확실성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결코 삶에 있어서의 안정감은 느낄 수 없다고 불교는 말합니다. 삶이란 물론, 근본적으로는 불안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개발한다면, 불안정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가능합니다.
THE BUDDHIST APPROACH TO DEATH
죽음에 대한 불교적 접근
As well as various techniques of meditation including vipassana,
there are teachings in Buddhism that help to lessen fear of death such
as Kamma and rebirth.
위빠사나를 비롯한 많은 명상의 기법들 뿐 아니라, 업(깜마)과 환생과 같이 죽음의 공포를 약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많은 가르침들이 불교 안에 존재합니다.
Here, however, we are approaching the problem of fear of death from
vipassana meditation point of view. In the vipassana meditation, one of
the principles is to start looking at things from the best known point and
to progress to the less known.
여기서는 그러나, 위빠사나 명상의 관점에서 죽음의 공포에 대한 문제를 접근해 보겠습니다.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지점으로부터 사물들을 바라보기 시작하여 덜 알려진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원칙들 중의 하나입니다.
What is best known here is fear. It exists in you, in me, in every one of
us. Therefore, we have to start tackling this fear. We do not start from
the unknown, which is life after death and all the mystery connected to
it. If it is unknown, how can we start with it?
여기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공포입니다. 공포는 당신이나 나,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공포를 다루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죽음이후의 삶이나 죽음과 연관된 모든 신비와 같은 미지의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미지의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What I am trying to say is that despite all these theological concepts,
including those in Buddhism — the idea of heaven, the idea of
Brahma Loka, the idea of being born as a human being, which
presuppose that there will be at least, in theory life after death —
fear sti ll surrounds death. So, instead of contemplating the less known
such as rebirth, we will start from the best known, that is fear of death.
When we understand or comprehend what it is fear, we will not then be
fearful of death anymore; as long as we live, we will live happily. That is
why we reflect on death.
내가 말하려는 바는, 불교와 유일신교를 포함한 모든 이론적 개념들: 천국의 개념, 브라흐만
과의 합일, 인간으로 재생된다는 개념, 그래서 최소한 죽음 뒤의 삶이라는 개념에도 불구하
고, 죽음 곁에는 아직도 공포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생과 같이 덜 알려진 것에 대한 숙고 대신에, 죽음의 공포와 같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공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파악하고 나면, 그때에는 죽음에 대해 더 이상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한은,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숙고하려는 이유입니다.
Another cause of fear is pride in day to day life. We are so
proud of who we are, of what we have, of what we have achieved as a
person or family, that we start behaving as though we are not going to
die. On the other hand, knowing that we have to leave any achievement
and go at death looks simply so horrifying. Pride is one of the many
aspects of attachments and of not-letting go.
공포의 또 다른 이유는 일상생활에서의 자만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우리의
소유에 대해, 그리고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적으로 성취한 것들로 인해 매우 자신만만해서,
마치 우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성취한 어떤 것이라도 남겨 두고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공포스럽게 보입니다. 자만심은 집착과 구속의 많은 측면중의 하나입니다.
Apart from fear, you can also expect tension and conflict even
between brothers and sisters and between families due to pride. We
follow our egoistic tendency by often saying; "I want to do this and no
way will I compromise with that." Our pride! That always creates
problems.
공포 외에도, 자만심으로 인해 형제 자매들간, 그리고 가족들간에 긴장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우리의 이기적 경향을 따라갑니다: "나는 이것을 원하고, 절대 타협하지 않을거야." 우리의 자만심을 보세요! 그것은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Sometimes it is not about right and wrong that we keep arguing with
each other, but rather about resistance from within, where we usually
claim "this is my idea, this is my culture." So when you are too proud of
your culture, you can never enjoy other cultures. That is pride.
때때로 서로간에 다투는 것은 그것의 시시비비 때문이라기 보다는, 내적인 저항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우리는 대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것은 내 생각이고 나의 문화야."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문화에 대해 너무나 자긍심이 강하다면, 다른 문화를 결코 즐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만심입니다.
Young people here in this retreat like Tom, Zaw Zaw and Saw Marlar,
you have the opportunity to enjoy both cultures — maybe even
more than two.
집중수행기간중인 톰, 조조, 소 말라와 같은 젊은이들은 문화와 mdash 양쪽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어쩌면 두 가지 이상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The best thing is to look at things from the Buddhist perspective that
nothing is perfect; so no one culture, either Burmese or British, is
perfect. Neither is superior to the other. Both have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가장 좋은 것은 완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불교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미얀마 문화든 영국 문화든 완전하지 않습니다. 어느 것도 우월하지 않습니다. 양쪽 문화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When we look at life in this way, we gain more than we lose. Otherwise,
if we are too proud of the Burmese culture we will not be able to get
anything from the British culture and vice versa. You stand to lose out
much that way. This kind of pride is what we are going to tackle through
reflection on death.
우리가 삶을 이런 식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미얀마의 문화에 대해 너무 자부심이 강하다면, 영국 문화로부터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많은 것을 잃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자긍심은 죽음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Lack of the right attitude is another ground where fear of death
is bred. Death is very much a part of life. Death has to be viewed in the
context of life, and life in the context of death. We go to funerals, we
see the dead. If we do not view them in the context of life, we do not
get the full picture. Looking at life alone can make us forgetful and
arrogant, behaving as if we are never going to die13. Focussing on death
alone can bring us disappointment, negative fear and pessimism. Life
and death are the two sides of the same coin.
올바른 태도의 결핍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라나는 또 다른 토양이 됩니다. 죽음이란 삶의
커다란 한 부분입니다. 죽음은 삶의 맥락 속에서 조망되어져야 하고, 삶은 죽음의 맥락 속에서 조망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가고, 사자(死者)를 봅니다. 우리가 삶의 맥락 속에서 이런 것들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전체적인 그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마치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고 망각적이고 건방지게 살아 갈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It is so much relieving to know that death is common to all
— no matter whether you are a billionaire or a pauper, a ruler or a
ruled, a doctor or a patient, a man or a woman, a grown up or a baby.
Terrifying and painful experience of death is not unique to anyone nor is
it escapable.
죽음이 모든 존재에게 평등하다고 알게 되면 매우 안도하게 됩니다: 억만장자든 가난뱅이든,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환자든 의사든, 여자건 남자건,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할 것 없이.
죽음의 두렵고 고통스런 경험은 개개인에게 독특하지 않을뿐더러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Contemplation of death is something that can make one a wise
person and enables one to view life seriously. When Sidhartha Gotama
was a prince, his father arranged everything so that he would not see
old people, sick people and dead bodies.
죽음에 대한 바른 사유는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고, 삶을 진지하게 보도록 만듭니다. 싯달따 고따마가 왕자였을 때, 그의 부왕은 노인이나 병자, 망자의 시신을 보지 못하도록 모든 스케줄을 조정하였습니다.
This was because his father, having consulted with his astrologers was
told that his son, the prince, would one day leave home for a homeless
life, and the king did not want his son to leave home but wanted him to
succeed him when he died.
이것은 그의 부왕이 점성술사에게서 자신의 아들이 어느 날 왕궁을 떠나 집 없이 살거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아들이 집을 떠나기를 원치 않고 자신의 사후 왕위를 계승할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So till the age of twenty-nine, he had never seen any of those things.
But just to have seen a dead body, an old man and a sick man once
was enough for him to be convinced that this was a real problem facing
him as well as the rest of the world, including those nearest and dearest
to him, his family.
그래서 29세가 될 때까지, 고따마는 그러한 일들을 결코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망자의 시신과 노인, 병자를 한번 본 순간,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원근에 있는 사람과 가족을 포함한 모든 세상사람들이 직면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라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That was something that made him determined to go through all the
extraordinary experiences, renouncing the princely life, following the
well-known religious teachings available in India at that ti me and
undergoing the hard life of an ascetic.
그것이야말로 모든 특별한 경험들을 끝내고, 왕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당시 인도에서 가능
하였던 잘 알려진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며, 고행자의 힘든 생활로 나아가게 만든 핵심이었습니다.
Realizing that death arises at all times while we are still alive in
the conventional sense is also very helpful to defeat fear of death. The
old cells in the blood die and are being replaced continuously by new
ones. It is said that the cells that die and are reborn momentarily are to
be in their billions.
또한 통상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생존해 있는 모든 시기에 죽음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고 깨닫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는데 매우 도움을 줍니다. 혈액 속의 노화된 세포는 사멸하고 신생 세포로 계속해서 대체됩니다. 순간적으로 사멸하고 신생되는 세포의 수는 수십억 개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The mind replaces itself in the same way but in a much quicker speed.
This is the law of impermanence, something the Buddha takes it an
ultimate truth. Brain cells that do not replace give a clearer explanation
of impermanent nature. They only deteriorate without being replaced by
new ones. Death in this sense is happening here and now. It is important
to see and accept it scientifically.
마음은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을 대체하지만, 훨씬 더 빠르게 움직입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의 법칙으로, 부처님이 궁극적 진리로 간주한 핵심이었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뇌세포는 무상한 성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뇌세포는 신생세포로 대체되지 않고 단지 사멸할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죽음은 지금 여기서 항상 일어납니다. 그런 사실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During the time of the Buddha, Kisa Gotami, a young mother,
suddenly lost her only child. She could not and did not accept that her
toddler son was now dead. She refused to be convinced by the appeal
of common sense reality. She went on looking for a cure to bring him
back to life. It was only too understandable that she as a mother would
react in the way she did. The child meant everything to her.
부처님 재세(在世)시에 끼사 고따미라는 젊은 엄마가 독자를 갑자기 잃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일반적 의미의 현실감을 통한 호소에 의해 자신의 아기가 죽었다고 확신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다시 되살릴 치료법을 계속해서 찾았습니다. 어머니로서 그녀가 반응했던 방식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 그녀에게 아기는 모든 것이었으니까.
The same happened to Patacara, a young lady who lost her two
sons, husband and parents within a matter of days so mercilessly and
unbelievably. It was too much for her to take. She had a complete
breakdown. She could not accept that such thing had happened to her.
무정하고 믿기 어렵게도 문제가 된 며칠사이에 두 아들과 남편, 부모를 잃은 빼때까라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들을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심신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From meditation point of view, the suffering for these two young
mothers increased because they did not accept what had really
happened but kept rejecting it. The grief was being multiplied anytime
they refused to accept it in their mind.
명상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젊은 어머니에게 일어난 고통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받
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거부함으로써 증장(增長)되었습니다. 슬픔은 그들이 그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마다 배가(倍加)되었습니다.
Both had the good fortune of meeting the Buddha who could
convince them to accept what had happened and show them to see the
way things are. The Buddha asked Kisa Gotami to bring mustard seeds to
make medicine she was looking for to bring her son back to life.
그녀 둘 다는 부처님을 만날 행운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을 수용하도록 확신시켰고 사물들의 존재방식을 직관할 수 있도록 보여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끼사 고따미에게 그녀의 아들을 되살릴 약제를 만들기 위해 겨자씨를 가져오도록 요청하였습니다.
The Buddha said that the seeds must be from a family which has never
experienced death. She went out in search for the seeds only to find
that there was no such family that had never experienced death. Kisa
Gotami came back to her senses, buried her dead child and returned to
the Buddha for the path to the deathless.
부처님은 결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는 가족들로부터 얻어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겨자씨를 찾아 나섰으나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가족이 없다는 사실만을 발견하였습니다. 끼사 고따미는 제정신을 찾아 아들의 시신을 묻고 불사의 길을 가기 위해 부처님께 귀의하였습니다.
Both, Kisa Gotami and Patacara accepted what had happened to them
and became noble disciples of the Buddha not long after that. Patacara
became the one who excelled most among the female disciples in the
disciplines of the monastic community (Vinaya).
끼사 고따미와 빼때까라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받아 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처님의 고귀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빼째까라는 승단의 제자들 중 비구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Vipassana is to help us see and accept things as they are and
thereby not to create more suffering out of suffering. This is what
mindfulness practice is all about.
위빠사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따라서 고통으로부
터 또 다른 고통이 증장되지 않도록 해 줍니다. 이것이 주의 집중 명상이 행하는 바 입니다.
With the presence of sufficient mindfulness, Patacara was able to see the
ever-changing world as it was when contemplating on the river flowing
where she was to wash her feet.
빼째까라는 충분한 주의 집중의 상태에서 자신의 발을 씻으려고 담근 강물의 흐름을 관조
하다가 항상 변화해 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통찰할 수 있었습니다.
She was now in harmony with the impermanent world, never expecting it
to be otherwise than it was.
그녀는 이제 무상한 세상과 조화를 이루었는데, 이는 과거에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었습니다.
The desire of wanting the world and her life to be in a certain way and
not wanting them to be in a certain way ceased within her.
세상과 자신의 삶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해 주기를 원했고 자신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존
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갈망이 그녀 속에서 멈추었습니다.
Peace within was achieved while the world went on the way it did. The
two young ladies were no longer touched by the world. They did not live
beyond the world but certainly above it all just like a lotus flower above
water.
세상이 과거와 똑같이 흘러가는 순간에도 내적인 평화는 성취되었습니다. 젊은 두 어머니는 더 이상 세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그녀들의 삶은 세속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초월해 있었습니다.
REFLECTION ON THE REALITY OF DEATH
죽음의 현실성에 대한 숙고
Reflection on death helps lessen fear of death and bring peace
of mind ultimately. Mindfulness of death, if developed, can help us
realize the immortal state (Nibbana) here and now. There are many
causes of death such as various kinds of diseases and accidents.14 A
man for some reason could just take the life of another man. An animal
can harm you and become a cause of death. While sleeping, eating or
working and while being in the sea or land or on air, death can happen
at any time. It is not predictable nor is it certain.15
죽음에 대한 바른 사유는 죽음의 공포를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마음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만약 충분히 개발되기만 하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지금 여기서 열반의 상태(닙빠나)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질병과 사고등이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동물은 당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고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잠자다가, 식사하다가, 걷다가 혹은 바다나 육지나 공중에서도 정해진 때가 없이 죽음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시기는 예측할 수도 없고 확실하지도 않습니다.
The Buddha Gotama recounted to His disciples how Araka, one of
the previous Buddhas taught His disciples on how to reflect on death.
The Araka Buddha summarized that human Life is short, fleeting, fragile,
full of unfulfilled desires and anxiety.
고따마 부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과거 부처의 한 분이었던 아라까 부처님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친 바를 자세히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The Araka Buddha, who became enlightened when people had a
relatively longer life span than our times gave many analogies to life.
Life is likened to dewdrop on the tip of a blade of grass that disappears
soon after the sun rises.
아라까 부처님은 현재보다도 수명이 훨씬 길었던 시대에 깨달으신 분으로, 삶에 대한 많은
유추점을 제공하십니다. 인생은 해가 뜨면 곧 사라져 버릴 풀 끝에 달린 이슬 같은 것입니다.
Life is also like dust that is washed away mercilessly by heavy rain. A
line drawn with a stick on the surface of water lasts but briefly, even so
life is ephemeral. A stream having flowed a great distance in tranquility,
may reach a precipice only to fall down very quickly without a pause.
인생은 폭우에 무자비하게 휩쓸려 떠내려가는 흙먼지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막대기로 물의
표면에 그은 선과 같이 짧은 순간 생겼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것입니다. 고요함 속에서 긴 거리를 흘러온 강물은 일순간의 멈춤도 없이 매우 빨리 떨어져 내려야만 할 낭떠러지에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Human life is as little and swift as the stream that falls from the
mountain. A strong man, having collected sputum from the floor of his
mouth spits it out fleetly and naturally. Life is like a drop of sputum that
is done away with by the man. A piece of meat is burnt away very
quickly indeed once it is put into a saucepan that has been heated all
day. Life is similar to that piece of meat. It lasts but not for long. Once
an animal has been selected to be slaughtered, each step it makes helps
its advance towards the slaughterhouse. Similarly, life moves forward
only to death. Once born, none escapes death.16 One should also reflect
that one cannot escape from death and that none in the world does."
인간의 삶이란 산에서 떨어지는 강물같이 짧고 신속한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입에서 가래를 모은 후에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내뱉습니다. 인생은 사람이 내뱉는 가래와 같은 것입니다. 하루종일 달군 프라이팬 위에서 한 점의 고기는 순식간에 타서 없어집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짧은 시간 존재하지만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합니다. 축생이 도축되기로 한번 결정되면, 각 단계는 도살장을 향한 과정을 밟게 됩니다. 유사하게, 삶은 죽음을 향해서만 달리게 됩니다. 태어난 것은 무엇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숙고해야만 합니다.
Now we are going to reflect upon the reality of life, especially
death. From now on, I will start giving instructions on how to meditate on
death. There will be four stages.
이제 우리는 인생의 현실성, 특히 죽음에 대해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명상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네 단계가 있습니다.
STAGE ONE
첫 번째 단계
The first is to remind ourselves about the reality that death is
very much a part of our life. The kings and queens, the Prime ministers,
the presidents, actors, and actresses, the rich and the poor —. can
you imagine that any of them would escape from the process of death?
첫 번째는 우리네 인생의 매우 큰 부분이 죽음이라는 현실에 관해 자신에게 스스로 상기하
는 것입니다. 국왕이든 여왕이든, 수상이든 대통령이든, 남자 배우건 여자 배우건, 부자건 가
난한 이든: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죽음의 과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If there is no way to get out of it, why fear? Sometimes when I go to a
funeral, I imagine myself to be in the coffin. For many, this would seem
something terrible and even stupid. I find it terrible too. However, this is
the way I have been taught and I have found that fear has lessened by
doing so.
만약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면, 왜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때로, 장례식장에 갈
때면, 나는 나 자신이 관속에 누워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은 공포스럽고 심지어 우둔한 짓 같이 보일 것입니다. 나 자신도 그것이 공포스럽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가르쳐 온 길이며, 공포가 경감될 수 있는 방법이란 걸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You can also see what is going on in the hearts of the relatives left
behind. Now, just reflect whether anyone you have come across —
the ruler, the ruled, the beautiful, the ugly, men and women, the
educated, the uneducated, the academic, the non-academic, the old and
the young — can get away from this.
여러 분들은 뒤에 남겨진 가족친지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또한 볼 수 있습
니다. 이제, 여러 분이 마주 치는 누구나 죽는다고 사유해 보십시오: 지배자건 피지배자건,
미인인건 추녀건, 남자든 여자든, 고등교육을 받은 이든 아니든, 학자건 아니건, 늙었건 젊건
간에 죽음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고찰하십시오.
It is inevitable for everyone. Death can happen at any time. Th ere is no
guarantee or appointment. Death has no calendar. Because there is no
guarantee, we need a lot of insurance.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보
증이나 정해진 날은 없습니다. 죽음에는 달력이 없습니다. 보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수많
은 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We rush to take insurance and we are often asked, "Are you insured?"
People would say, "I'm fully insured. I have got two or even three
insurance policies."
우리는 보험에 들기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합니다. 그리고선 가끔씩 "보험에 들었어?" 하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완전 보험에 들었어. 나는 두 개 심지어는 세 개의 보험증권
에 들었어." 라고 말합니다.
We may feel we need to have even more because life has no insurance.
You feel relieved to have it. Say, I have life insurance. That would not be
for me. If I die what will happen to that insurance from Nationwide? It will
be for those who are living.
우리는 삶이 아무런 보험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보험이 필요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당신
은 보험에 들면 안도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생명보험에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전국적으로 보험과 관련하여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보험은 살아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일 겁니다.
In the first stage, it is essential to recognize that death is very
much a part of life and that it can happen any time, any day and there is
no appointment. A mother cannot save her son or the son his mother.
첫 번째 단계에는 죽음이 인생의 매우 큰 부분이고,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정해진 날
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구할 수 없고, 아들은 어머니를
구할 수 없습니다.
A few weeks ago, I went to a funeral of a prominent doctor who
suddenly fell ill and passed away within a week. The wife, also a doctor,
three daughters and one son were crying. However, he was lying dead
and breathless.
수 주전에, 나는 갑자기 병을 얻어 일주일만에 유명을 달리한 저명한 의사의 장례식에 갔습
니다. 의사인 그의 아내와 세 딸, 한 아들이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채 누
워 있고,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He could not appreciate their worry or tears. He could not treasure
them anymore. This is the nature of death. He was very affluent but he
had to leave everything and go.
그는 가족들의 걱정과 눈물을 고맙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는 더 이상 가족들을 소중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죽음의 본성입니다. 그는 매우 부유했지만 모든 것을 남겨 둔 채
떠나야 했습니다.
In such a way, death is suffering. The Buddha said in the first sermon
"death is a painful experience" — "Maranam pi dukkham". It is
painful to a Buddhist as well as a non-Buddhist, to a doctor and a
patient, to a monk and a lay person, to an old person as well as an
infant. The ruler fears it as much as a homeless person does. It is a
universal experience.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은 고통입니다. 부처님은 초전법륜에서 "죽음은 고(苦)다.(Maranam pi dukkham)"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불교도이거나 비불교도이거나, 의사나 환자나, 비구나 사미나, 노인이나 어린애나 똑같이 고통스런 것입니다. 지배자도 거리의 낭인과 같이 똑같은 정도로 두려워 합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We live in fear of death only when we live in the future. When
observing present pain, we do not observe the one that has not arisen,
in other words, the pain in the future. Nor do we focus on the pain that
is gone.
우리는 미래 속에 살 때에만 죽음의 공포 속에 사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통을 관찰할 때, 아
직 일어나지 않은 고통, 다른 말로 하자면 미래의 고통을 관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고통에 집중하는 것도 아닙니다.
We focus on the present one. If you want to learn how to live in the
present, we have to focus on the present object. Train your mind with
the object arising at the present.
우리는 현재의 고통에 집중합니다. 당신이 현재에 사는 법을 배우길 원한다면, 지금 현재의 현상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들로 당신의 마음을 훈련시키십시오.
Fear of death exists at the present. We are going to observe that. The
first thing, as I have just explained, is to reflect that death is very much
a part of our life and nobody can escape from that. It can happen
anywhere, anytime, to any body — in any form. Vipassana
meditation trains one to live at the present moment and is, therefore, the
path to the deathless here and now.
죽음의 공포는 현재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관찰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제가 좀 전에 설명했듯이, 죽음은 인생의 매우 큰 부분이고,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떤 형
태로든. 위빠싸나 명상은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도록 훈련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 불멸로
향하게 하는 바른 길입니다.
STAGE TWO
제 2 단계
At the second stage, you are going to apply that reflection to
specific people. When we do meditation on loving-kindness, we start with
ourselves. But now we are not going to start with ourselves. If we do
that, we may become more frightened. Death is a frightening
phenomenon.
둘 째 단계에서는,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과정을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자비의 염
(念)을 행할 때는,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자신에서 시작
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더 겁먹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겁
이 나게 하는 현상입니다.
At this stage, we are going to apply reflection on death to a
neutral person. Recollect people who are neutral to you, the people
towards whom you have not formed like or dislike, say, people in the
street or in the station. Look at the crowd and look for someone who is
not going to die, someone who can escape from this process. Is there
any such?
이 단계에선, 나와 중립적인 사람들에게 죽음에 관한 사유를 적용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중
립적인, 당신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말하자면 거리나 역에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십
시오. 군중을 살펴보고, 죽음이 막 닥치지는 않은 어떤 사람, 죽음의 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
는 어떤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I think all of you know Sir James Goldsmith, the billionaire. He
could write a draft worth millions or even a billion. When he died only
his wife was with him and only a few people attended his funeral. His
eldest daughter who was in Mexico was not even informed. She did not
know.
여러 분들은 제임스 골드스미스 경(卿)이라는 억만장자를 모두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수백만 심지어 십 억대에 달하는 어음을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단지 그의 아내만이 그와 함께 있었고, 그의 장례식에는 단지 몇몇의 사람만이 참석했습니다. 그의 장녀는 멕시코에 있었는데 참석통지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From that point, Sir James Goldsmith's signature was worth nothing. The
bank would no longer accept his signature. The billions that he
accumulated are nothing to him now. This is the reality of life. How
fearful life is and how painful death is. For the neutral person you can
also imagine someone like that. You can imagine a crowd as well as an
individual.
그 시각 이후로, 골드 스미스 경의 서명은 가치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은행은 더 이상 그의
서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축적한 수 억 달러의 재산은 지금에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삶은 얼마나 공포스럽고 죽음은 얼마나 고통스러
운가요. 중립적인 사람에게도 당신은 이와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군중에게도 동일한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At any stage of this type of meditation, should you feel sad or
frightened, please bring in mindfulness as practised in the vipassana
meditation. When we become frightened, what we do in vipassana
meditation is to look into our minds and note frightening, frightening, and
frightening. When we become upset, we note upset; we feel fear we
recognize fear, fear, and fear. Fear is a meditation object. Fright is a
meditation object. It can bring an immediate psychological relief.
이런 형태의 명상의 어떤 단계에서도, 당신은 슬프거나 두려워 할 수 있으므로, 위빠싸나 명
상에서 수행한 대로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십시오. 겁이 날 땐, 위빠싸나 명상에서 배운 대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겁이 남, 겁이 남, 겁이 남이라고 이름을 붙이십시오. 마음이 동
요되면, 동요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공포심이 일어나면, 공포, 공포, 공포하고 인식합니다. 공
포는 명상의 주제입니다. 겁이 남도 명상의 주제입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심리적 안도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STAGE THREE
제 3 단계
At the third stage, you are going to focus on someone near and
dear to you who has passed away. In my case, it can be my father, my
great aunt, my eldest brother and my niece. If you know someone only
in death but not in life, you may not choose him or her because it may
not help you to see death in the right context. All my grandparents died
before I was born.
세 번째 단계에서는 당신과 가깝거나 그리운 이들 중 이미 사망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춥
니다. 나의 경우에는, 내 아버지나 큰 이모, 큰 형, 그리고 조카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미
사망한 어떤 사람들 중 직접 보지 못한 경우는 올바른 의미에서 죽음을 관찰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그런 사람들을 고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나의 조부모들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사망하셨습니다.
As I have never seen or even heard of how they lived their life, I cannot
meditate on them. You are going to choose someone whom you have
seen both in life and in death. Death has to be reflected in the context
of life. You focus by recollecting a few points on how they lived their
lives and how they died. Their bodies lie lifeless and breathless. So, the
third reflection is on the people who are close to you but have passed
away.
조부모들이 어떤 삶을 영위하셨는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명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둘 다 볼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을 골라야 할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맥락에서 사유될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오고 죽어 간 방식의 몇 가지 점들을
회상함으로써 당신은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생기를 잃고 숨조차 쉬지 않
고 누워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사유는 이미 사망한 가까운 이를 주제로 삼습니다.
STAGE FOUR
네 번 째 단계
The fourth stage may be a bit hard for you. It could be the
hardest. It is to apply the reality to yourself. You are not going to include
someone you love or someone you do not like. If you include someone
you love, you will be very upset. If it is some one you do not like, you
will be very happy — the kind of happiness that can be full of
revenge and ill will. You may be able to include them at a later stage but
not now. In the fourth stage, you reflect on yourself, on how you lead
your life and one-day you will go lying breathless, lying in a coffin.
네 번 째 단계는 여러 분들에겐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제 당신 자신의 현실에 적용시켜 보자. 당신이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포함시키지 않겠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포함시킨다면 당신은 매우 동요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포함시킨다면 당신은 매우 행복해 할 수도 있습니다: 복수심과 악의에 가득 찬 그런 종류의 행복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좀 더 뒷 단계에 포함시킬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사유합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영위해 왔고, 어느 날 당신은 숨을 멈추고 관속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I should make one thing special here by offering myself to be
included in your meditation object. You are also going to reflect and
apply that reality to me, the person giving you the meditation
instructions. It is important to do that.
나는 여러 분들의 명상의 소재로 나 자신을 제공함으로써 뭔가 특별한 것을 만들겠습니다. 여러 분들은 죽음의 현실성을 사유하고 그것을 명상 지도법사인 나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그렇게 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I have seen in our country. People become so attached to their teacher
that they become blind and they do not look for other teachers any
more. If you go to, say, the Mogok Vipassana Meditation Centre, you
learn automatically how to criticize the others such as the Sunlun,
Mahasi, etc. This happens in many other centres.
나는 내 나라에서 그런 장면을 목격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스승에게 너무 집착해서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스승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모곡 위빠싸나 명상 센터에 가게 되면, 순룬 마야시와 같은 스승들을 매도하는 법을 자동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많은 센터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To me, Sunlun Sayadaw is a remarkable teacher. Mahasi Sayadaw is
distinguished. Mogok Sayadaw is great. Sayagyi U Ba Khin is excellent.
Ledi Sayadaw and Anagam Saya Thet Gyi are also extraordinary. Mingun
Cetawun Sayadaw and Kathitwine Sayadaw are marvelous. All of them are
great. They are great people. But we should not misuse their greatness
to create blind faith by impairing our investigative sense and by starting
to criticize others, which these great teachers did not do. Attachment or
even devotion can make you blind.
나에게 순룬 사야도는 매우 특기할 만한 스승이셨습니다. 마하시 사야도는 훌륭하셨습니다. 모곡 사야도는 위대했습니다. 우바 킹은 뛰어난 점이 있었습니다. 레디 사야도와 아나감 사야 떼 기이는 비범했고, 밍군 세따윤 사야도와 케시뜨윈 사야도는 경이로웠습니다. 그들 모두는 위대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 자신의 탐구적 감각을 손상하고 다른 스승들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위대성을 오용하도록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행위는 이러한 위대한 스승들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집착 심지어 헌신조차도 당신을 눈멀게 할 수 있습니다.
I have been talking to you like this and we have been together
for a few days. One day I will go. I will have to. That is the reality of life.
So you focus and apply the reality of death to yourself and then me, the
person giving you the instructions.
이러한 얘기를 여러 분들에게 나는 계속해 왔고 몇 일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 또한 (죽음으로) 갈 것입니다. 나는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분들이 죽음의 현실성에 집중하고 여러 분 자신에게 그것을 적용하고 명상 지도법사인 나에게도 적용시켜야 합니다.
I will repeat the instructions again. The first is to reflect that death
is a part of life. There is no escape from it and no one escapes from it.
There is no appointment. It can happen at any time. Like a clay pot that
can be broken at any time, we are vulnerable at any moment.
나는 이 가르침을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죽음이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없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정해진 시간도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진흙 항아리와 같이, 우리는 어느 순간이라도 쉽게 파괴될 수 있습니다.
We are like a fruit, which can fall to the ground at any time. The sun that
has risen has only one way to go — to go down in the west. In
the same way, life leads to nothing but death. That is the reality. The
second instruction is to apply this to a neutral person(s) — a
crowd or an individual, who is neutral to you, someone you neither like
nor dislike. Try to meditate on both their life and their death. Thirdly, you
will reflect upon the life and death of those who have been close to you
but have now departed. Fourthly and lastly, you will be reflecting upon
yourself and on me.
우리는 언제라도 땅에 떨어질 수 있는 과일과 같습니다. 태양은 오직 한 길로 떠올라서 서쪽으로 집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삶의 길은 죽음으로 통합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이것을 중립적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개인이나 군중에게 적용합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해 명상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당신과 가깝지만 이미 사망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명상하십시오. 네 번째와 마지막은, 당신자신과 명상 지도법사인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입니다.
PALI CANONICAL TEXTS
빨리어 경전
There are discourses from the Pali Canonical texts dealing on the
subject of reflection on death. The following is a translation of one of
them. It has been translated by the late Venerable Prof. H. Saddhatissa,
the founder of the World Buddhist Foundation, London. It is given here
for meditative reading to cultivate insight into death.
죽음에 관한 명상을 주제로 다루는 빨리어 경전의 주석들이 있습니다. 아래는 그중 하나의 번역입니다. 런던에 있는 세계 불교도 재단의 창립자인 승려 교수 H. 사다띠싸에 의해 번역된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통찰력을 키우기 위한 명상적인 읽을거리로 여기에 제공합니다.
A RECOLLECTION ON DEATH
죽음에 관한 회고
THE DART (SALLA SUTTA)18
화살
1. Life is unpredictable and uncertain in this world. Life here is
difficulty, short and bound up with suffering. (574) 19
이 세상에서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삶은 곤경덩어리고 순간적이며 고(苦)
와 연결되어 있다.
2. A being, once born, is going to die, and there is no way out of
this. When old age arrives, or some other cause, then there is death.
This is the way it is with living beings. (575)
존재는, 한 번 태어나면,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것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나이가 들거
나 다른 원인이 도래하면, 거기에 죽음이 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3. When fruits become ripe, they may fall in the early morning. In
just the same way a being, once born, may die at any moment. (576)
과일이 익으면 이른 아침에 떨어 질 수도 있다. 그와 똑같이 태어난 존재는 언제 죽을지 모
른다.
4. Just as the clay pots made by the potter tend to end up being
shattered, so is it with the life of mortals. (577)
도자기공에 의해 구워진 도자기가 깨지듯이 죽을 운명은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5. Both the young and the old, whether they are foolish or wise,
are going to be trapped by death. All beings move towards death. (578)
젊거나 늙었거나, 어리석거나 현명하거나, 죽음의 덫에 걸릴 것이다. 모든 존재는 죽음을 향
해 나아간다.
6. They are overcome by death. They go to the other world. And
then not even a father can save his son or a family their relatives. (579)
죽음은 모든 것을 이긴다. 이리하여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으
로부터 구할 수 없고 가족들은 자신들의 친척들을 구할 수 없다.
7. Look: while relatives are watching, tearful and groaning, men
are carried off one by one, like cattle being led to the slaughter. (580)
보라: 친척들이 지켜보고 울고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죽음에 끌려간다.
8. So death and ageing are endemic to the world. Therefore the
wise do not grieve seeing the nature of the world. (581)
그래서 죽음과 늙음이 온 세상을 휘감는다. 그리하여 현자는 세상의 본성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다.
9. You cannot know his path as to where he has come from, or
where he is going. So it makes no sense to grieve for him. (582)
당신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어디로 갈 건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비통해하
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10. The man who grieves gains nothing. He is doing no more than
a foolish man who is trying to hurt himself. If a wise man does it, it is the
same for him. (583)
비통해 하는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려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리 현자라 해도 비통해 한다면 어리석은 이와 다를 바가 없다.
11. Peace of mind cannot come from weeping and wailing. On the
contrary, it will lead to more suffering and greater pain. (584)
마음의 평화는 비탄과 통곡으로부터는 오지 않는다. 반대로, 더 많은 고통과 아픔이 밀어닥
칠 것이다.
12. The mourner will become pale and thin. He is doing violence
to himself, and still he cannot keep the dead alive; his mourning is
pointless. (585)
비통해 하는 자는 창백하고 여위어 간다.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죽은 자를
되살려 놓을 수 없다: 그의 비탄은 의미가 없다.
13. The man who cannot leave his sorrow behind him only travels
further into pain. His mourning makes him a slave to sorrow. (586)
슬픔을 자신의 뒤에 남겨 놓지 못하는 사람은 더 많은 고통으로 빠져 들 뿐이다. 그의 비탄
은 자신을 슬픔의 노예로 만들뿐이다.
14. Look at beings who are facing death, who are living out their
previous deads; people are terrified when they see that they are trapped
by death. (587)
보라! 죽음에 직면한 존재를, 앞선 사람들보다 오래 생존한 존재를: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
음의 그물에 걸린 것을 알 때 두려워한다.
15. What people expect to happen is always different from what
actually happens. From this comes great disappointment; this is the way
the world works. (588)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항상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는 다르게 마련이다. 이로부터 심한 낙
담이 초래된다: 이것이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16. A man may live for a hundred years, or even more, but in the
end, he is separated from his relatives, and he too leaves life in this
world. (589)
수 백년 혹은 그 이상을 살더라도, 그의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끝내는 이별한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현생에서의 삶을 떠난다.
17. So we can listen and learn from the noble man as he gives
up his grief. When he sees that someone has passed away and lived out
their life, he says, "he will not be seen by me again". (590)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슬픔을 포기한 고귀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배울 수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죽거나 오래 사는 것을 볼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18. When a house is burning, the fire is put out by water. In the
same way, the wise man, skilful, learned and self reliant, extinguishes
sorrow as soon as it arises in him. It is like the wind blowing away a tuft
of cotton. (591) (emphasis added)
집이 불 탈 때, 물로 끌 수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솜씨있고 학식있으며 자신을 믿는 현자
는 자신 안에서 슬픔이 올라 올 때 즉시 꺼 버린다. 면화솜을 날려 버리는 바람처럼.
19. The person who is searching for his happiness should pull
out the dart that he has stuck in himself, the arrowhead of grieving, of
desiring, of despair. (592)
행복을 찾는 사람은 자신에게 박혀있는 화살촉을 뽑아야 한다. 슬픔의 화살촉, 갈애의 화살
촉, 절망의 화살촉을.
20. The man who has taken out the dart, who has no clinging,
who has obtained peace of mind, passed beyond all grief, this man, free
from grief, is still. (593)
화살촉을 뽑아내어 매달리지도 않고, 마음의 평화를 성취한 이는 모든 슬픔을 초월한다. 슬
픔에서 자유로운 이 사람은 고요하다.
--------------------------------------------------------------------------------
19 Salla Sutta, Sutta-nipata, translated by Ven. Dr. H. Saddhatissa. 1994,
Curzon Press. England. pp.68-9.
19 The number given at the end of each stanza is the number of the Pali
stanza in the original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