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올레길
이석범
여행을 다녀 오면 그 여운이 한 달은 족히 가는 것 같다. 아마도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행이란 것이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여행을 떠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여행이 아니라 멀리 출장을 다녀 와도 그랬던 것 같다. 일탈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느끼는 일종의 진한 향수와도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적당히 나이가 들다 보니 싸우지 않을 만큼 인내심도 생기고 미안한 생각도 들어서 몇 년 전부터는 1년에 한 두 번은 아내와 여행을 하기로 약속했다. 아이가 하나인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몸도 가볍다. 다행히 아직은 두 사람 모두 다리가 튼튼한 편이라 해외 관광 보다는 걷기여행을 좋아한다. 그 중 한 곳이 제주 올레길이다.
제주에 올레길이 생기면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다가 처음 떠난 것이 2년 전의 첫 번째 올레길 도보 여행이었다. 그리고 매년 한 번씩이니 이번 여행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올레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서귀포 근처를 걸었다. 두 번째는 제주 서쪽을 섭렵하고, 이번에는 성산을 포함한 제주 동남쪽을 걸었다.
사실 제주도는 대학생 시절에도 갔었고, 아들 군 제대와 함께 가족여행, 그리고 직장 시절에도 업무 차 여러 번 갔었다. 그 때는 진짜 제주의 모습은 못 보고 겉 모습만 보고 온 것임에 틀림 없다. 티켓 사서 관람하는 만장굴, 오설록, 유리의 성, 분재원, 잠수함 타기, 정방폭포 등을 둘러 보는 것이었다. 출장으로 갔을 때는 호텔에서 세미나 듣고 큰 음식점 가서 생선회 먹고 다음 날 새벽에 골프치고 오면 그만이었다. 그 때는 그것들이 즐거움 이었겠지만, 제주의 진짜 모습은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정말 아름다운 제주의 순수 자연을 볼 수 있다. 바닷길을 걷다가 백사장을 걷기도 하고, 숲을 걷다가 귤 밭이 있는 돌담 길을 걷기도하고, 갈대밭 길이 나오는가 하면 오름을 오르기도 한다. 개울을 건너기도 하고 칼 바람과 벼랑이 있는 바닷가 언덕을 오르기도 한다. 목장길을 걷기도 하고 유채밭 길을 걷기도 한다. 동해안 바닷가에도 이 같은 길이 있다면 굳이 그곳을 탐하지 않을 것이다. 바닷가도 백사장도 돌담도 숲도 산(오름)도 흙마저도 육지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원시림 같이 울창한 숲 속에 새들이 재잘거리는 길을 걷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는 파도 소리가 쏴~쏴~ 요란하게 들린다. 두어 발짝을 옮기니 급전직하(急轉直下) 시퍼런 바다이다. 정글 속에서 새소리와 파도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안으려니와 낙원에 온 기분이었다.
올레 여행이 보는 즐거움만 있는 것이라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 여행가기 전에 준비하는 것 중에 하나가 먹을거리다. 안 먹어 본 제주 토속음식이 무엇이 있을까?
지난번에는 갈치국, 오분자기뚝배기, 고등어회를 먹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몸국, 보말국, 보말수제비, 땅콩국수를 먹었다. 하루에 세끼 밖에 먹을 수 없으니 아직도 먹어 보지 못한 음식들이 있다. 자리물회, 한치물회, 성게비빔밥, 고기국수 등, 아직 모르는 음식도 많다.
성산읍 고성리 오일장입구의 ‘좋은식당’. 점심 끼니 때를 놓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가까운데 아무데나 선술집 같은 식당에 찾아 들어갔는데, 이게 웬 횡재인가? 먹을 기회가 없었던 보말국과 셍게칼국수가 있다. ‘바로 이 맛이야!’ 제주도라고 그 지방의 토속 음식이 아무 음식점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아줌마 음식이 어찌나 맛 갈 나던지, 저녁에 지친 다리를 시외버스에 싣고 다시 찾아가 몸국과 갈치국까지 기어이 먹고 왔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식당에서 만난 홀로 올레꾼, 시카고에서 온 아저씨는 오늘은 아마도 9코스를 걷고 계실 게다.
이 번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김영갑이란 사진작가를 알게 된 것이다. 올레길에는 티켓을 사서 들어가는 관광지는 없고, 들과 바다와 마을과 오름으로 길이 이어져 제주의 속살을 보는 것이 보통인데 ‘김영갑갤러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57년 충남 부여 출생, 한양공고를 졸업, (아마도) 우연히 제주에 갔다가 제주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평생 홀로 카메라와 사진과 함께 제주에 묻혀 살다가 49세 젊은 나이에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그것도 불과 얼마 전 2005년에. 놀란 것은 그의 사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냥 평범한 제주의 오름을 앵글에 담은 것인데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 분은 제주도 만을 찍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오름, 그것도 중산간 지역을 집중적으로 찍었다고 한다. 제주에 미쳐서 사진에 영혼을 담고, 그는 죽어서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한다.
제주는 언제 가도 아름답다. 첫 번째 여행은 7월에 두 번째는 5월에 이번에는 3월에 했다. 김영갑은 ‘제주의 풍경은 농부들이 만든다’고 했다. '무슨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서......'. 올레의 모든 길을 그래서 계절 마다 가 봐야겠다. 뿐이겠는가? 오름도 가봐야 하고, 새로 개발되었다는 한라산 숲길도 가봐야 하고, 겨울 한라산도 가봐야 하고, 가파도에도 가봐야겠다.
(위:김영갑갤러리, 아래: 김영갑이 좋아한 '용눈이오름')
첫댓글 "동해안 바닷가에도 이 같은 길이 있다면 굳이 그곳을 탐하지 않을 것이다. 바닷가도 백사장도 돌담도 숲도 산(오름)도 흙마저도 육지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청정한 제주내음이 풍겨오는듯,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바닷가도 백사장도 돌담도 숲도 산(오름)도 흙마저도 육지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원시림 같이 울창한 숲 속에 새들이 재잘거리는 길을 걷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는 파도 소리가 쏴~쏴~ 요란하게 들린다. 두어 발짝을 옮기니 급전직하(急轉直下) 시퍼런 바다이다. 정글 속에서 새소리와 파도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안으려니와 낙원에 온 기분이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정말 아름다운 제주의 순수 자연을 볼 수 있다. 바닷길을 걷다가 백사장을 걷기도 하고, 숲을 걷다가 귤 밭이 있는 돌담 길을 걷기도하고, 갈대밭 길이 나오는가 하면 오름을 오르기도 한다." 잘 읽고 갑니다.
제주도가 눈에 선합니다... 한번가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그곳~글 잘 읽었습니다.
지난 달 제가 딸 애와 다녀온 그 곳이어서 더 반갑고 열심히 글을 읽게 만드네요.좋은글 제공에 감사드려요..
'원시림 같이 울창한 숲 속에 새들이 재잘거리는 길을 걷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는 파도 소리가 쏴~쏴~ 요란하게 들린다.
두어 발짝을 옮기니 급전직하(急轉直下) 시퍼런 바다이다. 정글 속에서 새소리와 파도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안으려니와
낙원에 온 기분이었다.."
선생님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용기를 내셔서 더욱 건필 하십시오.
글 잘 쓰실수 있는 선생님으로 생각되어져 기쁩니다. 야간반 팟팅!
제주는 언제 가도 아름답다. 첫 번째 여행은 7월에 두 번째는 5월에 이번에는 3월에 했다. 김영갑은 ‘제주의 풍경은 농부들이 만든다’고 했다. '무슨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서......'. 올레의 모든 길을 그래서 계절 마다 가 봐야겠다. 뿐이겠는가? 오름도 가봐야 하고, 새로 개발되었다는 한라산 숲길도 가봐야 하고, 겨울 한라산도 가봐야 하고, 가파도에도 가봐야겠다." 감상 잘하고 갑니다.^^
제주도 올렛길을 다녀 오신 감상을 적었군요, 저도 가보고 싶은 길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댓글 달아 주신 선생님들 감사 드립니다. 지난주에 중국출장이라서 수업에도 참석 못했습니다.
교수님 지적하신 대로 많이 부족합니다. 주제를 잘게 나누어 쓰라고 그러셨는데, 엄두가 안나서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개로 나누어 써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