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은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한국 근대시를 개척한 근대문학의 선구자이고, 불교개혁을 강력히 주장한 불교개혁가이었다. 지금껏 만해의 행적, 사상, 지향 등을 고려한 만해 연구자들이 집필한 글에 나타난 만해에 대한 호칭을 살펴보면 무려 60여 개에 달한다.1) 이는 만해가 다양한 면모를 지닌 다면적 인물임을 의미한다. 한편 조지훈은 《사조》 1권 5호(1958. 10)에 기고한 〈한용운론〉에서 만해의 성격, 사상, 행적을 분석하여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라고 그를 평하였다. 조지훈은 이 글을 기고한 이후에도 만해에 관련된 글 3편을2) 추가적으로 집필, 기고하여 초창기 만해 연구자가 되었다. 조지훈은 어떤 연고로 만해 연구자가 되었는가? 그 자신도 시인이었고, 문학을 하였기에 만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아니면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었는가? 조지훈은 만해를 만난 인연이 있었는가, 만해의 제자였는가? 이러한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해줄 수 있는 사료는 거의 없다. 조지훈은 현대 지식인 중에서도 지조가 강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지훈은 〈지조론〉이라는 글을 남겼을 뿐 아니라 4·19, 5·16이라는 격변기에 지식인의 자세에 관련된 많은 글을 남겼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지훈의 지조가 만해의 대쪽같은 성품에서 영향받은 것은 아닌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여러 궁금증을 풀기 위해 조지훈과 만해와의 관계, 조지훈이 만해를 평가한 내용과 성격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만해와의 인연 조지훈(1920∼1968)은 경북 영양 출신으로 부친인 조헌영과3) 모친인 유노미 사이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유년시절에는 조부인 조인석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월곡서당이라는 지역의 서당에서 수학하고,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조지훈의 집안은 비교적 그 지방에서 재력도 있었으며,4) 신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5) 개화 가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집안의 배경에서 조지훈은 열살 무렵에 동요를 짓고,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배리의 〈피터팬〉,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등을 읽고 문학에의 꿈을 키워 갔다. 1931년 12살때 그의 형 세림(조동진)과 ‘꽃탑회’라는 문학을 꿈꾸는 소년들의 모임을 조직하고, 그 지역 마을 소년 중심의 문집인 《꽃탑》을 꾸며냈다. 1934년 15세에는 일본의 와세다대학의 통신 강의록을 통하여 신학문을 더욱 공부하였다. 1935년 조지훈은 이때부터 시 습작이라는 새로운 경지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처럼 조지훈은 고향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문학을 향한 첫발걸음을 내딛었는데, 바로 그 당시부터 만해가 가슴에 다가서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정황은 조지훈의 회고에 잘 나타나 있다. 조지훈은 “이를 한용운 선생의 향기를 나는 일찍이 어려서 들었다.”고 하였다. 기미(萬歲)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서고 뜻 있는 인사들이 남화(南華)로 만주로 망명할 무렵에 간도로 이사가서 살다가 돌아온 고향의 안 노인 한 분이 간도서 살 때에 총에 맞은 사람을 구료(求療)해 준 일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한용운 선생이더라는 이야기를 어려서 들은 일이 있거니와 선승으로 또 학승으로 예리한 안광이 위미(萎靡)한 불교계를 해부하여 그 혁신을 《조선불교유신론》이라든가 불교계 대표의 한 분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열혈의 의욕이 뜻을 조국의 광복에 두어 만주와 시베리아에 구치(驅馳) 하던 일을 내 열 살 안팎에 부조(父祖)에게서 들어 알았으며 선생의 저서 《님의 침묵》과 《흑풍》은 문학 소년 시절의 어린 나를 감격하게 하였다.6) 조지훈은 10살 무렵에 이미 한용운 선생의 존재를 부조(父祖)를 통해 알았다는 것이다. 즉 만해가 만주 순방도중에 친일파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청년들의 습격으로 머리에 입은 총상의 상처를 치료한 고향 노인의 경험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불교개혁의 이론서인 《조선불교유신론》과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활동 등의 행적을 풍문을 통해서나마 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해의 시집인 《님의 침묵》과 소설인 《흑풍》을 문학수업을 하였던 그 시절에 읽고 감격하였다. 이런 인연은 여느 사람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지훈은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 〈논개(論介)의 연인(愛人)이 되야서 그의 묘(廟)에〉를 읽고 민족의식을 키웠다고 술회하였다. 조지훈은 만해에 대한 애틋한 동경을 갖고 1936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는 시원사(詩苑社)에 머무르면서7) 인사동에서 고서점인 일월서방(日月書房)을 열었다. 이 즈음 그는 조선어학회에 관련을 맺고, 보드레르,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레르의 작품을 읽으면서 문학에의 꿈을 더욱 키워갔다. 그리고 그는 〈춘일(春日)〉, 〈부시(浮屍)〉 등의 초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8년 봄에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대학과정의 학교인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 전신)의 불교과에 입학하였다.8) 그리고 바로 이 즈음에 조지훈은 만해와의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한 정황도 조지훈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9) 내가 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정축년(1937) 여름인가 한다. 그 때 나는 성균관 뒤에 살았기 때문에 고개 하나만 넘으면 성북동의 심우장-선생의 우거(寓居)로 찾아 뵐 수가 있었다. 어느날 가엄(家嚴)을 따라 심우장으로 선생께 뵈이러 가는 도중에서 선생을 처음 뵙게 되었다. 먹물 드린 고이 적삼에 헬메트를 쓰시고 무슨 보따리를 들고 고개를 넘어 오시던 그 고기(古奇) 청수(淸水)한 모습은 매우 인상이 깊다. 그 뒤 이따금 선생께 나아가 뵈었으나, 일제 말기에 가까운 세상은 날로 소란해지고 나도 절간으로 고향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서울을 떠나 살게 되어 선생을 보입는 기회가 드물어 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조지훈의 이러한 회고를 통해 그가 만해를 여러 번 만났고, 그 만남은 그의 부친과도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지훈은 초창기 만남에서 만해에게 들은 이야기이나,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다. 조지훈은 중앙불전 재학 중, 1939년에는 《문장》지 3호에 〈고풍의상〉을 추천받고, 동인지 《백지(白紙)》를 주도적으로 발간하면서10) 그 지면에 〈계산표〉, 〈귀곡지〉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시로 지칭되는 〈승무〉를 추천받아 발표하였다. 그 추천인은 정지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앙불전을 졸업하던 해인 1941년 4월에는 월정사 강원의 외과(신학문) 강사로 취임하였다. 1942년 3월에는 상경 직후에 관여하던 조선어학회의 편찬원이 되었고,11)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일제 경찰에 심문을 받았으며, 1943년 9월에는 낙향을 하였다. 일제 말기의 조지훈의 생활이 이처럼 다사다난하였기에 만해와의 긴밀한 접촉은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간에 조지훈은 만해의 행적을 우리에게 전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게 되었다. 나의 혼돈된 기억이 그 어느 해인지를 헤아릴 수 없으나 선생을 마지막 뵈 온 것은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셨을 때 때가 때인지라 일송 선생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버려 둔 것을 선생이 망명 시절 고인에게서 받은 권우(眷遇)와 지사 선배에 대한 의리에서 쾌연히 일어나 성북동 꼭대기 심우장까지 일송 선생의 관을 옮겨다 모셔 놓고 장사(葬事)를 치루시던 무렵이다. 그때 내 마침 서울에 친지(親知)왔다가 이 소식을 듣고 심우장에 나아가 일송 선생의 영전에 뵙고 장사날까지 머물러 있다가 물러 나온 것이 선생의 모습을 뵈온 마지막 인연이 되었다. 일송 선생의 장사날 이십여 명 안팎의 회장자(會葬者) 속에 연연(然然)하시던 그 모습, 와야 할 조객(弔客)들이 일제 관헌의 눈치를 꺼려 오지 못하고 조사 낭독 하나만으로 제약된 영결식에 조사의 낭독을 고인의 동향 후배라 하여 가우(家嚴)께 미루시고 묵묵히 저립(佇立)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나의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12) 만해가 일송 김동삼 선생이 일제에게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자 그 시신을 인수하여 장사를 지낼 때의 정황의 목격담이다. 그 때의 만해의 표정, 마음을 정밀히 묘사하여 우리에게 귀한 사료를 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지훈은 만해와의 애틋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조지훈은 그 자신에게서 만해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학문, 의욕, 정서를 갖춘 인물이었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근원적인 기품(氣品)에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선비적, 지사적인 지조정신에서 만해를 존경하였던 것이다. 만해의 평가, 그 정신과 지조 조지훈은 남다른 인연으로, 그리고 그 자신이 시인, 문학인으로서 만해에 대한 평을 극명하게 하였다. 조지훈처럼 만해를 자신 있게 표현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였다. 선생은 애국지사요 불학의 석덕이며, 문단의 거벽이었으며, 선생의 진면목은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13) 조지훈은 만해가 지사로서의 강직한 기개와 고고한 절조의 바탕에서 독립운동, 불교개혁, 문학 등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세 측면은 상호 조응, 보완되어 각각을 완성시켰던 것으로 만해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이것이 한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를 저변으로 한 정점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이 되었던 것이다.14) 조지훈이 만해를 이처럼 단호하게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만해 탐구를 진지하게 한 측면도 있지만, 그 자신이 만해의 정신을 추종하고 따르려 하였던 열정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한다. 한편 조지훈은 만해의 시에 나오는 ‘님’은 중생이요, 한국의 중생으로서 우리 민족이라고 하였다. 그는 만해의 삶 자체가 민족 정기의 지표, 민족정신의 기둥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가 보건대 시인의 존재는 결코 현실과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실상 더 나은 현실에의 고양(高揚)을 염원하는 영원한 구도자인 동시에 부패한 현실의 개폐(改廢)를 의욕하는 영원한 혁명가인 것이다.15) 그는 시인의 사회 참여와 혁명에의 정열을 당연시 여기었다. 나아가서 그는 시인적 정열과 철학자적 구상이 없는 사람은 혁명가가 되지 못한다고 단언하였다. 이런 전제에서 그는 만해를 시인이자 혁명가로도 보았다. 만해 한용운은 시인이요, 혁명가요, 종교철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이 삼면(三面)을 일체화함으로써 약소민족운동의 애국시인으로서 한국적 시인의 전형을 이룬 분이다.16) 그는 만해가 다양한 문학 작업을 하였지만 그 기본은 시인으로 보았고, 만해가 다양한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혁명가적인 파란이 흐르고 있으며, 만해가 승려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지만 그 저변에는17) 불교 현대화운동의 선구자의 성격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지훈은 만해를 혁명가, 선승, 시인의 일체화로 보았지만 이중에서 하나의 특징을 들라면 자신은 서슴없이 시인이라는 이름을 택한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대표적인 이름은 어느 것이나 다 민족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업적이 되었지만 그의 혁명가적 종교가적 또는 예술가적 생명의 일원상(一元相)의 구현은 시(詩)로서 나타나게 되었고 그의 생애의 면목은 지절시인(誌節詩人)으로서의 이름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으며, 이 지절시인으로서의 바탕은 다름 아닌 그의 혁명가적 정신과 경력, 선승적 기질과 수련의 소치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18) 요컨대 지절시인, 즉 지조 있는 시인이 만해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조지훈은 만해가 순국하지는 않았지만 만해의 일생이 정신사적으로 민족을 위하여 순의(殉義)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해의 시가 유약하고, 여성스러운 소재가 등장하고 있지만 만해의 시에 흐르고 있는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실례로 자신이 문학소년 시절에 만해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야서 그의 묘에〉라는 시를 읽고 많이 울었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왜 만해가 그렇게 괴로워하였는가를 이해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조지훈은 만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암흑(暗黑) 속에서 새 역사(歷史)의 바람에 귀를 세운 사람, 새 역사(歷史)의 물결에 해도(海圖)를 꾸민 사람―만해 한용운은 폭풍우(暴風雨)를 몰아치는 암흑 속을 그 자신이 빛이 되어 뚫고 간 시인(詩人)이다. 누가 시인을 현실에 눈감은, 현실에 유리된, 현실에 초연한 무용의 장물(長物)로 보는가. 만해 한용운이야말로 시인의 본질을 특히 20세기 전반기의 한국시인의 전형으로서의 혁명시인이요, 종교시인이요, 서정시인이었던 것이다.19) 조지훈은 이처럼 만해를 시인으로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 현대시 60년사를 관류하는 것은 민족의식으로 보고, 수많은 지사 시인의 대표로 손꼽을 수 있는 대상자는 단연 한용운이라고 주장하였다. 지금껏 살핀 바와 같이 조지훈이 만해의 시인의 측면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한 것은 만해 정신사 그 저변에 자리잡고 있었던 지조이었다. 지조 있는 시인, 민족의식이 뚜렷한 시인이 바로 만해였던 것이다. 조지훈은 지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지조(志操)란 것은 신념(信念)을 위하여 인위(人爲)가 자연을 거세(去勢)하는 힘이니 이는 고귀(高貴)한 부자연(不自然)이다.20) 나아가서 조지훈은 과부가 재혼하고 가난이 부귀에 연연(然戀)하는 것이 본능의 자연스러운 욕구라면, 육체적 쾌락과 불의한 부귀를 거부하는 절조(節操)에는 고행이 뒤따른다고 보았다. 절개는 부자연이기에, 지조에는 고집을 지니게 된다고 보면서 비타협 정신은 간혹 체념과 기벽으로, 창광(猖狂, 미치광이)으로 오해받기도 한다고 보았다. 한용운 선생은 그 지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벽(奇癖)이 있었다. 참으로 선생을 이해하고 보면 그 기벽은 기벽이 아니라 웃어 버릴 수 없는 눈물이 깃들여 있는 확집(確執)일 뿐이다.21) 조지훈은 적어도 지조라는 측면에서는 일제하에서 만해와 어깨를 겨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보면서, 만해의 후반생 불의에 대한 증오와 비타협의 고고한 투쟁으로 인식하였다. 즉 만해의 삶은 민족정기의 지표, 민족정신의 기둥이라고 그의 지조를 높이 평가하였다. 선생은 지사의 일생 행적에 일말(一抹)의 의아를 허하지 않고 민족 정기의 동정신(童貞身)으로 초발심의 정과(正果)를 증득한 것이다.22) 조지훈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지조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23) 한편 만해는 성공을 위해서는 인내가 절대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인내에는 쓰라린 고통이 수반된다고 하였다. 인내라는 것은 참기 어려운 것 혹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니 그러고 보면 인내는 즉 고통이다. 세상에는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나니 고통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인내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는 고통을 받기 위하여서의 인내가 아니라 목적을 달하기 위하는 과정에서의 필지(必至)의 곤란을 방편적으로 인내하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인내는 고통을 위하는 인내가 아니오 목적을 위하는 인내다. 그런데 인내를 굴종과 분간치 아니하면 아니 되나니 유시(有時)에는 인내를 굴종으로 오인하기도 쉽고 굴종을 인내로 가식(假飾)하기도 쉬운 것이다. 인내라는 것은 참지 아니하려면 참지 아니할 수가 있는 것을 목적을 위하여 능히 참는 것이오. 굴종이라는 것은 아니 참을 내야 아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견디는 것인대 그것은 참는 것이 곧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내는 능동적이오 굴종은 굴종을 위하는 피동적이다.24) 이처럼 만해는 목적을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되는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인내와 굴종을 구분하였다. 인내는 목적을 위한 능동적인 행위이고, 굴종은 단지 참는 것 자체라는 것이다. 단지 참는 것 자체인 굴종의 뒤에는 명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만해는 쓰라린 고통을 수반한 인내를 통하여 나라와 겨레의 자주, 독립, 자존 그리고 자신의 명예, 이름을 지키기 위한 대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조지훈은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사람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단적인 예가 만해였다고 한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인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自存) 자시(自恃)를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자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 때문에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이다.25) 조지훈은 위당 정인보가 만해를 추도하면서 쓴 시조, “풍란화 매운 향내 임에게야 견줄손가/ 이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가/ 불토가 이외 없으니 혼(魂)하 돌아오소서”에 나온 풍란화 매운 향내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만해의 인품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매운 향내’이 네 자가 만해의 진면목을 도파(道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고결한 선비가 사람을 기리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인데 정인보가 만해를 기리는 이 시조는 만해의 품격을 단적으로 일컫는 사례로 보았다. 조지훈은 만해의 진면목을 지조에서만 찾은 것은 아니다. 그는 만해의 정신을 보았고, 만해의 다양성을 보았으며, 만해의 진실을 찾았으며, 만해가 추구한 삶 전체를 조명하였다. 그는 만해라는 인간성을 찾아 우리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술을 즐기셨다. 취후(醉後)에 비분강개가 심하므로 지기지우(知己之友)들이 술을 조금 들라고 말리면 한 잔만 더 하겠다고 술을 따르면서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돌보시더라는 얘기도 있다. 선생은 다정다한(多情多恨)의 인(人)일 수밖에 없었다.26) 만해는 그 암울한 일제말기하의 혹독한 시절을, 숱한 지식인들이 타협과 굴종의 길을 걷던,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득세하였던 그 시절을 이처럼 술을 마시며 이겨냈다. 그는 새세상, 새역사를 기다리다 해방 1년 전에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지금껏 우리는 조지훈이 보고들은 추억을 통해 만해를 보았다. 이는 만해를 통해 조지훈을 조명한 것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