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가 남긴 마지막 선물,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저 자: 박완서
- 출판사: (2010년)
- 별 점: ★★★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박완서가 죽기 5개월 전에 펴낸 책입니다. 노년에 누리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이야
기 하는 한편, 지나간 삶도 반추하듯 돌아보고 있습니다.
박완서는 머리글에서 “책을 낼 수 있어 기쁘고, 아이들과 손자들이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글을 쓰는 일은 어
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었고,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고 합
니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후에 흙을 주무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복
이다. 마당에 몸 붙이고 사는 것들을 돌보느라 손이 많이 가지만, 그 덕분에 몸이 건강해지는 것도 복”이라고 합니
다.
박완서는 집 앞의 숲을 보며 신록예찬을 펴고 있습니다. “5월의 신록은 매해 보는 거지만 새롭고 눈부시다.
신록의 빛깔도 수종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젖빛이 도는 아카시아도 있고, 순전한 녹두색도 있고, 갈색이나 보라색이 도는 것도 있다.
이런 미묘한 차이가 원근과 수종에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바람이 불 때 마다 움직이고 살랑이는 모습도 다르다.”
“그러나 한 결 같이 몽실몽실 부드럽고 귀여운, 꼭 아기 궁뎅이 같은 게 오월의 나무들이다.
내 소유가 아니어서 욕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유와 평화, 그게 차경借景의 묘미 아니겠는가.
내가 늙고 힘에 부쳐 마당이 쑥대밭이 된다 해도 저 숲의 사계절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집에서
산다는 게 큰 복이다 싶다.”
노년에 장만한 전원주택은 박완서에게 노년의 안정감과 유년의 뜨락 같은 안온함을 주었습니다.
“새벽에 눈만 뜨면 마당으로 나간다. 해뜨기 전에 흙과 풀이 가장 부드럽고 냄새도 좋다.
엄청 무더운 여름 동안 흙의 생산성은 나의 노쇠한 노동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겁다.
육체노동에는 원초적인 평화와 행복감 같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하루가 안심스러워진다.”고 고백합니다.
백여 평이나 되는 마당에 처음에는 화려한 수입화초들을 심었으나, 이 화초들은 다음 해에 심을 씨를 받을 수도
없었고, 뿌리에서 나지도 않았습니다. 해마다 사서 심도록 종자개량을 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자 그 꽃들도 덜
예뻐지기 시작했습니다.
안 사다 심는 사이 마당은 어디에선가 날아든 봉숭아, 백일홍, 상사초, 벌개미취, 꽈리 같은 토종 화초들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들은 박완서의 유년의 뜰에 있던 꽃들이었습니다.
박완서는 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중 새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요즘 나의 아침상은 새와의 겸상이다.
창 옆 산수유 열매를 먹으러 작은 새들이 찾아온다.
입맛이 없는 날에는 새가 날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린 적도 있다. 기다릴 사람 없는 밥상보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이 훨씬 덜 쓸쓸하다. 산수유 붉은 열매를 쪼던 새가 목을 뒤쪽으로 젖히는 순간을 포착하면 나는 진밥을 먹
다가도 목이 메어 된장국 한 모금을 떠 놓고는 목을 뒤로 젖힌다.”
“나를 목 메이게 하는 것은 진밥이 아니라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의 더께, 터무니없이 무거운 돌대가리와 누추하
고 육중한 몸으로 감히 창공의 자유를 꿈꾼 헛된 욕망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무렇지도 않는 것 같은 시가 와서 나
의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과 만나니 나 같은 속물도 철학을 하게 만든다. 시의 힘이여 위대하도다.”고 노래합니다.
시집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에 대한 소개가 공감이 갑니다. “이 시집은 다시 읽어도, 아무 데나
읽어도, 내 정신도 조금은 깊고 높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다시 읽어도 거듭해 읽을수록 더 좋아지는 건
좋은 시만이 줄 수 있는 큰 복인 것 같다.
멋모르고 그냥 느낌으로 좋아하던 난해한 시에 뛰어난 시인들의 웅숭하고 친절한 해설이 붙은 것도 금상첨화다.”
박완서는 시를 읽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물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
어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
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
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
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박완서의 사춘기는 우리 민족의 격동기였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입학해서 같은 학교에서 해방을 맞고, 미군정시
대를 거쳐 남한만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궁핍과 불안이었습니다. 내남없이 하루하루의 삶은 고달프고 남루했습니다.
박완서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심장에 새겨진 화인이었습니다.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
부터 대표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까지 많은 작품에서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박완서는 20살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한국전쟁을 겪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박완서의 기억은 처절합니다. 지독
한 추위가 몰아쳤던 1.4후퇴 때의 기억을 60년이 지났어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때 그 지독한 추
위와 함께 성장도 멈췄다고 회고합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탈출해야 했던 그 때, 군인들의 오발사고로 두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오빠를 손수레에
싣고, 젖먹이 조카 둘과 올케, 늙은 어머니와 피난길에 올랐지만, 20살 처녀에게는 가족이 짐이었습니다. 손수레
나 지게로 짐을 나르는 사람들보다 단신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더 부러웠습니다.
오빠가 없었더라면, 식구만 없었더라면 나도 저렇게 훨훨 날아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박완서에 대한 식구들의 철석같은 믿음이 차마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으
니까요.
구파발에서 무악재까지 손수레를 끌고 왔으나 바퀴가 망가져 더 가지 못하고 근처 허름한 집에서 밤을 보냅니다.
혹시나 들킬까봐 불도 못 피우고, 밥도 못해서 엄동설한에 생쌀을 씹어야 했습니다. 그해 추위는 모질었다고 합
니다. 그 후에 닥친 온갖 고난의 역경까지 얼어붙게 하는 매서운 추위였다고 기억합니다.
그 겨울의 추위가 냉동시킨 기억은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 보관된 식품처럼 썩은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신선도
를 유지하고 있으니 기억이 아니라 질병 같다고 생각합니다. 박완서는 올케와 함께 북한으로 끌려가다가 겨우 탈
츨해서 다시 가족들과 만납니다.
박완서는 이 때 생리도 멎었었지만, 성장도 멎었다고 회고합니다. 무자비했던 전쟁과 지독했던 추위를 함께 기억
합니다. 박완서는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 믿는다. 나는 아무편도 아
니다. 다만 바퀴 없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합니다.
지금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작품 한 점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박수근화백을 만난 것도 한국전쟁 통이었
다고 합니다. 전쟁이 나고 집안이 몰락하면서 갓 스무 살 나이의 처녀가 조카들과 노모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라 공장도 없고,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경기라곤 미
군부대와 관련된 곳뿐이었습니다.
미군부대 PX가 지금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는데, 미군 물자와 PX를 드나드는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로 그 일
대만 딴 세상처럼 화려했고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곳은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들어가기만 하면 온갖 진귀한 보물
이 널려 있는 꿈의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물건을 빼돌리다가 들통이 나면 바로 해고를 당하곤 해서 기회만 잘 잡
으면 취직하기 쉬운 자리였습니다.
박완서도 근처를 얼쩡거리다 그곳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서울대생이라는 것이 눈길을 끌었을 거라고 합니다. 박
완서가 배치된 곳은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는 초상회부였는데, 궁기가 절절 흐르는 다섯 명의 중년 남자들이 있었
는데, 박수근이 그 중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박완서가 하는 일은 미군들에게 주문을 받고, 그린 그림을 가져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짧은 영어에다 한창 예
민하고, 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때라 처음에는 초상화를 그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집에서 굶고 있는 조카들이 생각나고, 자기만 바라보는 화가들 때문에 미군을
상대로 호객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뻔뻔해지고, 영어로 미군들에게 수작을 부릴 수 있게 되어 주문이 늘어나자 화가들에게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 덕에 당신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교만한 마음이 그들을 한껏 무시하고 구박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의 심정을 박완서는 “더는 타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했고,
그 불행감에 거의 도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수근이 화집을 한권 들고 와서 이 그림이 내가 그린 그림인데. 일제 강점기의 관전인 조선미술
전람회에 입선한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박완서는 극장 간판장이들이라고 함부로 대한 사람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동안 열중했던 불행감으로 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
분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박수근과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퇴근길을 같이 하면서 시국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함께 나누며 위로받
기도 했습니다. 박완서는 이런 만남을 회고하면서 그 때는 교만했고, 불행감에 도취했노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습
니다.
그 후 박수근은 조금씩 이름이 알려져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때라 백내장으로 고생하
다가 타계했습니다. 박완서는 박수근 유작전 소식을 듣고 가서 본 전시회에서 <나무와 여인>이라는 소품에 매료
되어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고, 그 때의 감동이랄까,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충격을 참아내기 어려워, 놓여나기
위해 쓴 글이 처녀작 <나목>입니다.
박완서는 남편을 잃은 지 몇 달 되지 않아 외아들마저 잃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픔은 깊고도 길었습니다. 참척
의 고통은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픔을 잊게 해준 것이 손녀가 태어나고 커가는 모습
이었습니다.
“딸네서 손녀가 태어났고 그 애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남한산성을 자주 가게 되었다. 아이는 어떤 꽃보다
예쁘게 자랐고, 시냇물 소리보다 더 즐겁게 웃었다. 내가 다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될 줄은 꿈에
도 몰랐다.
그 아이는 겨우 콩꼬투리만 하였으나 생명의 무게는 동등했다. 생전 위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새로운 생
명에 의해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고 회고합니다.
박완서는 “죽어간 내 피붙이는 각자 고유하고 특별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도,
바꿔치기 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우주였다. 하나의 생명의 소멸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의 소멸과 마찬가지이
다. 어떻게 몇 백만 분의 일이라는 숫자 안에 도매금으로 넘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피붙이만이라고 그 도매금
에서 빼어내어 개별화시키고 싶었다.”고 합니다.
연배는 비슷하나 박완서가 문단에 나왔을 때 이미 대가의 반열에 있어 가까이 하기 어려웠던 작가가 박경리입니
다. 토지를 완간한 즈음부터 왕래도 잦고 친교도 생겼다고 합니다. 박경리 유고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
가분하다>를 보면서 박경리와의 연을 풀어놓습니다.
박경리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가끔씩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년 들어 어머니를 닮아간다는 말도
하고, 꿈속에서 자주 어머니를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고 하곤 했습니다. 아무리 걸출한 여성이라고 어머니는 극복
하고자 하나 극복되지 않는 악몽인 동시에 결국은 그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의지처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박경리의 시 <일 잘하는 사내>가 박완서의 마음에 닿았다고 합니다.
다시 태어나면/무엇이 되고 싶은가/젊은 눈망울들/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다시 태어나면/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농사 짓고 살고 싶다/내 대답/돌아가는 길에/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왜 울었을까/(...)
박완서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십년만 젊어질 수 있다면 죽기 전에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한
살고 싶다고 합니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 마당쇠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혼자 먹고 살 만큼의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합니다. 세금 걱정도 안하고 대통령이 누군지 이름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고요히 땅으로 스미고 싶다
고 합니다.
박경리는 늘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했습니다. 부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이라
고,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박경리는 입으로 하는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천성의 농사꾼이었다고 박완서는 회고 합니다.
박완서는 한국 문학 100년사의 금자탑인 <토지>에 대해 축복이며 기적이라고 평합니다. “토지는 우리의 파란만
장한 근세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직업, 고귀한 인간성으로부터 바닥 상것의 비천함까지 천태만상의 인산군상이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박제를 만들어 모자이크 한 게 아니라,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
이고 있습니다.”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고 하는 게, 마치 지류의 맑고 탁함을 가리
지 않고 받아들이는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이 작은 나
라에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노년의 박완서는 미니멀니즘을 추구한 듯싶습니다. “옷이건 그릇이건 가구건 그것이 거기 있다는 걸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만큼만 갖고 있고 싶지 그 이상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 버려야 한다. 설사 값나가는 것이라 해도 쟁여
놓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된다. 집안에서는 눈에 보이는 공간에서건 눈에 안 뛰는 공간에서건 썰렁하게 비워놓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에 숨통이 터진다.”고 했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했던 박경리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박경리와 박완서 두 작가가 천국에서도 잘 지내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지 않을까 싶습니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