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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 7,6.12-14)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말씀의 초대
주님께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축을 치는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자주 일자, 롯에게 필요한 땅을 선택하도록 하여 서로 갈라져서 살게 한다. 롯은 물이 넉넉한 이집트 동산과 같은 땅을 선택한다. 재산에 대하여 자유롭고 넉넉한 아브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제1독서). 진주는 하느님 말씀인 복음이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곳에만 복음이 선포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말씀이 불경스럽게 다루어질 것을 염려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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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혼자 사시던 시어머님이 큰 병이 드셨습니다. 온통 마음이 혼란해집니다. 아들이 여럿 있지만 하나 둘 저마다 핑계를 대며 어머니를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굳이 막내며느리인 자신이 맡아서 어머니 병 수발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항변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어리고, 성당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기에 자신은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제는 형제들이 야속해지고 그동안 시어머님에게 받은 상처들도 떠오릅니다. 아들들을 저렇게 잘못 키우셨으니, 그것은 시어머님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라며 이제 원망을 시어머님에게 돌립니다. 그동안 해 오셨던 잘못을 생각하면 저 정도 고통은 당하셔야 한다며 자신의 정당성을 시어머님 탓으로 돌립니다. 남편도 아내의 이런 주장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늙은 부모들이 어쩌면 자식들의 이런 모습 속에 혼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운명처럼 져야 할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일을 말합니다.
성지 순례 때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 성당’에 가면 아주 낮고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곳 안내원은 그 문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그 문의 영성적인 의미를 붙여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작아져야 들어갈 수 있는,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그 문을 통과해야만 성당 안의 ‘예수님 탄생’, 그곳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멸망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생명의 문은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어떤 길을 지금 걷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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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님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외국인 선교사입니다. 청나라 사람으로 ‘북경교구 신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은 조선 교우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를 조선 땅으로 보냅니다. 주 신부님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12월 어렵게 국경을 넘습니다. 그를 안내했던 분은 순교자 ‘지황’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한양에 도착하여 ‘최인길’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익힙니다. 마흔두 살의 나이에 외국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9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교우들과 함께 조선말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봉헌하는 첫 번째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배교자에 의해 입국 사실이 알려지고 최인길과 지황은 순교합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피신했지만 숨어 지내며 사목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교우들은 붙잡히고 신부님의 거처를 캐묻는 문초를 받습니다. 교우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한 신부님은 순교를 결심하며 관아에 자수합니다. 그리하여 1801년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나이 49세였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비좁기 마련이다.’ 자신을 낮추고 작아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 활동하신 첫 사제였지만 지금도 ‘소박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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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욕망을 희석시키고 욕심의 물줄기를 가늘게 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좁은 문을 당연히 어려운 문으로 여깁니다. 경쟁이 치열한 문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편견에 불과합니다. 천상 문은 경쟁이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몸을 낮추고 자신의 마음을 비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신앙생활을 힘들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내가 신앙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내게 가까이 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총 속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저 은총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받는 기쁨이 전부지만, 어른이 되면 주는 기쁨도 깨달아야 합니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좁은 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자격증
-정명숙 수녀-
자격증 시대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격증을 가지고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를 얻으며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참으로 간단한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 적용해서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왜 그리 더딘 걸까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남겨주신 ‘평화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가 내 삶의 언어가 되어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오늘입니다.
이 삶은 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 김현정-
2년 전 우연히 종교와 관계없이 다양한 이들이 모인 ‘예수전’이라는 강의에 남편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강의한 선생님을 따라 마르코복음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사회운동가적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난한 이, 이방인, 병자들, 여인, 어린이 등 소외받는 이들 편이셨던 예수님의 활동을 묵상하니 생활에서 얻는 깨달음이 한층 풍부해진다. 특히 나는 아이들과 평생을 함께할 소명 을 갖고 있기에 교육현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를 구현할 방법을 꿈꾼다.
‘예수전’을 계기로 가까워진 그 선생님 역시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꿈꿔야 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경쟁과 입시에 미쳐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이들을 기계처럼 학원으로 내모는 세상에선 그 작은 촛불도 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5년 전 아이들을 위한 인문잡지를 만들기 시작하셨단다. 아무리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라도 논술 · 입시 · 특목고 · 국제중 · 영어 중 하나는 기본으로 들어가야 장사가 된다는 출판시장에서 평화 · 평등 · 자유 · 생명 · 인문 · 역사 등을 다루는 잡지를 만든다는 건 요즘 사람들이 따지기 좋아하는 경제적 가치로 볼 때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지금은 힘들어도 널 위한 거니까 준비해 둔 대로 따라만 오라 하지 말고 ‘돈보다, 대학보다, 좋은 직장보다 더 소중한 가치도 세상에는 많단다. 네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돌아보자꾸나.’ 하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남편과 나는 함께 동참하기 위해 책을 만드는 일도 거들고, 그 책을 도시 빈민 지역의 공부방과 시골의 작은 학교에 매달 보내는 후원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사회적 지위, 권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닐까?
제 식대로 말아야!
-김찬선신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손님 대접을 할 때 제가 거의 매번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형제 중에 접대의 황제 형제는 손님이 오시면
손님에게 갖가지 차와 과자 등을 내놓고
손님이 미안해 할 정도로 극진하게 대접을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내놓지 않다가 얘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내가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주전부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같이 술을 한 잔 하는데
술은 못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따라줄 줄을 모릅니다.
저를 무시하거나 배려의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정말 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술대접을 바라니 술대접을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기 바라는 것처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가 좋아하리라고
나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그를 위한답시고 그것을 그에게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다른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위하는 마음만 믿고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정말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정말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정말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압니다.
사랑의 순수성만큼,
사랑의 정도만큼 그것을 압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아야 하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 하여도
상대가 그 가치를 모르고 그래서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지 말아야 합니다.
짓밟거나
심지어는 싫다는데도 왜 주냐고 시비 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어떤 신앙 집단에서 전단을 나눠주곤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기에 나눠주는데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그것을 그냥 쓰레기통이나 길바닥에 버립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의 좋은 마음과 애씀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쓰레기가 되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나하고 관련이 없는 전단일지라도
심지어 제가 싫어하는 종파의 전단일지라도 꼭 받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안 하고는 내 몫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수고에 보람을 주지도 못해도
적어도 그들의 수고를 제가 짓밟지 않기 위해서 그러합니다.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물을 주어도 그 보물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그것이 은총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하라
-전삼용신부-
얼마 전 무릎팍 도사에 안철수 교수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가지고나온 고민은 ‘도대체 자신의 평생 직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통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번 직업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장 비효율적인 사람이라고 하듯이 그는 평생 돈과 성공을 포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책을 좋아하고 성적은 학교에서 중간 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성적이 좋아져서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게 되었고 박사과정까지 해서 한 대학교의 교수며 최연소 학과장을 역임하게 될 정도로 초고속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어느 날 한 후배의 컴퓨터를 고치며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당시 바이러스라는 것이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였지만 홀로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여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합니다. 바이러스 백신으로 돈을 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3시부터 6시까지는 백신을 만들고 낮에는 병원과 학교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7년 정도 고생을 하다가 6개월가량을 고민한 끝에 평탄한 의사의 길을 버리고 사업에 뛰어듭니다. 본래 무료사업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부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아 회사를 차리게 된 것입니다. 처음 4년은 직원들 월급 주는 것만 걱정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뒤 미국 큰 회사에서 천만 달러를 줄 테니 회사를 팔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몇 대가 평생을 먹고 살 돈입니다. 그래도 한국의 유일한 인터넷 바이러스 백신이 사라진다는 것, 자신의 직원들이 직장을 잃는 다는 것을 생각하고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또 몇 년 고생고생 하고 있는데 마침 우리나라에 바이러스로 인한 커다란 손실이 일어나는 사건이 생기고 컴퓨터 벤처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매출 백억을 돌파하게 됩니다. 회사가 안정이 되자 안철수 씨는 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립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주식을 모조리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고 갑자기 온 가족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입니다. 자신은 경영, 의사를 하던 아내는 법학, 딸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세 명이 한 도서관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돌아와 카이스트에서 천재들에게 돈만 밝히면 결국 다 망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편한 삶을 버리고 어려운 삶을 선택하고 사는 것일까요? 십자가의 성 요한도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의 선택이 있거든 항상 어려운 것을 선택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씀하시며 남들처럼 쉽고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어려운 삶을 선택해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세상 살면서 그렇게 살기에는 정말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좁고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사람은 본래 원죄에 물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뛰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안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원하는 본능대로만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본성을 이기는 것이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육체와 영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육체를 따르면 죽음이 오고 영을 따르면 생명이 옵니다.
마치 흐르는 강물 위에 보트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노를 저어 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그냥 있으면 망망대해에 미아로 쓸려 내려가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이기고 영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단명료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육체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은 자신은 받기를 원하면서 남에겐 주기에 인색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하면서 남을 무시하며,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법 중에 법이란 뜻입니다. 안철수 교수는 수백억의 돈도 뿌리치며 우리나라 유일한 백신을 유지시켰고 직원들이 직장을 잃지 않게 만들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지분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원하고 직원들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안철수씨는 어려운 길을 선택함으로써 이웃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을 해 준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황금률을 지킨 것입니다.
슈바이쳐박사는 신학, 철학, 음악, 의학 등 4개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피아노 실력은 너무도 뛰어나서 계속 정진하였다면 세계 제일의 피아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영광과 보장된 미래를 내던지고 오지로 들어가 그곳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한 번 사는 인생 조금 더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좁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많은 분들이 제가 좋아하는 운동을 아실 것입니다. 하도 많이 새벽 묵상 글에 그 운동을 적었으니 어떤 종목인지 아시겠지요? 맞습니다. 자전거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자전거를 좋아할까요? 자전거 타면 살이 팍팍 빠질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재미가 있을까요? 물론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다른 운동에 비해서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럼 안전한 운동이라 그럴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작년 5월에 아마 저의 모습을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양팔에 깁스를 하고 다녔던 제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안전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어떤 이유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낮아짐을 느낄 수 있으며, 그래서 보다 더 겸손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운전하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 등이 차 옆으로 오면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잘못되어서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사람이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운전자들이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제 옆을 지나가면서 쌍시옷 들어가는 욕을 하시는 분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에는 자전거 타기 싫지요. 자전거 속도가 조금만 빠르면 얼른 쫓아가서 멱살 잡고 한 판 붙고도 싶습니다.
따라서 계속 자전거를 타려면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서고자 한다면 절대로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면서도 자전거를 타다보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욕에 대해서도 점점 둔감해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내 안에 간직할 수 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자전거 타는 맛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결코 약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강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을 쓴 사람과는 달리 편한 마음과 좋은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한 측면에서 오늘 복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바로 내가 해 주는 남이 잘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황금률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좁은 문으로 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의 높이가 1미터인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허리를 굽혀서 내 키를 1미터 아래로 맞춰야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남이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관점에서는 참다운 진리의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겸손 합시다.
빠다킹신부
새 법, 곧 복음의 법
-박영봉 신부-
새 법, 곧 복음의 법은 자연법과 하느님의 법을 이 세상에서 완성한 것입니다.
복음의 법은 그리스도의 업적이며, 산상설교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들을 완성합니다.
산상설교는 옛 법의 신적이며 인간적인 진리를 모두 드러냅니다.
산상설교는 새로운 규정을 첨가하지 않지만, 마음을 개선하도록 인간을 이끕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여 인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본받게 하고,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합니다. 복음의 법은 또한 ‘생명 또는 멸망의 길’ 가운데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명합니다.
복음의 법은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마태 7,12)라는 이 황금률 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법 전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 들어 있습니다.
그 길 외에 또 다른 길은 없다
-엄재중-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황금률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것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곧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주님은 이 길이 아주 좁아서 이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하신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인간 본성 안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듯하다.
나를 떠나 너에게로 가는 것은 간단치 않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돌이켜볼 때 너무 과도한 주문일 수 있다. 나약한 육신과 이기적인 본성은 너무나 쉽게 내 안으로 움츠러들기 때문이다. 원수가 괜히 원수인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친 인간이기에 그에게 원수라는 딱지를 붙인 것 아니던가?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니. 역시 그 길은 너무 좁다고 한탄한다.
인류 역사 안에서 모든 위대한 종교는 대부분 인간이 갖는 이기심의 문제에 천착했다. 어떻게 하면 안으로만 숨어들려는 나를 버리고 타인에게 갈 수 있는지 그 원인과 대안을 제시했기에 역사 안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타인에게 나아가지 않고서 오로지 내 안에만 머물러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타인 없이는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너의 말을 들으면서 나를 비로소 깨닫게 되고, 너에게 이끌리면서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 자신의 전 생애와 죽음으로 증명하신 그 길 위에서, 내가 지금 당장은 자주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헤어짐의 아픔을 통해 더 큰 축복을 받은 아브람
-경규봉 신부 -
아브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차고 넘치도록 받아 큰 부자가 되었으며, 더불어 롯도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그 지방은 두 사람이 소유한 많은 가축을 방목할만한 목초지와 물이 부족했다. 더구나 그 지방에는 이미 원주민이 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목자들은 목초지와 샘의 부족으로 인하여 자주 다투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롯에게 서로 갈라지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롯은 세속적인 조건이 좋게 보이는 요르단 분지를 선택하여 그리로 옮겨가 소돔에서 살게 되었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하느님께서는 조카 롯을 떠나보내고 고독과 상심 가운데 있는 아브람을 위로하시며, 믿음과 희망의 눈으로 당신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와 그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며, 그의 후손을 셀 수 없이 많게 해주시리라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은 오랫동안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롯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 까닭은 아브람과 롯의 재산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서로가 자신의 많은 재산을 돌보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했던 화목한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다.
재물로 인하여 우정과 가정이 파괴되고, 많은 재물이 도리어 재앙을 가져오는 수가 많다(1디모 6,9-10). 그러므로 세상 모든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1역대 29,12; 마태 6,25-32)임을 깨달아 지나치게 재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마태 6,33; 루가 12,15-21).
아브람은 롯과 계속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롯에게 원하는 땅을 선택하라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아브람의 깊은 믿음(필립 2,3-4)과 겸손하고 너그러운 인격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제안은 둘 사이의 불화를 틈타 원주민들이 기습적으로 공격할 가능성을 막았으며, 롯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흐리지 않게 하였다. 나아가 아브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하느님께 의지하도록 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덕망을 쌓게 하였다. 한 공동체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며, 그 희생은 결국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아브람의 제안을 받은 롯은 세속적인 여러 조건을 따져 땅을 선택했다. 조카 롯은 하란을 떠난 이후 줄곧 아브람의 영향아래 성장하였기 때문에 보호자이자 후견인인 아브람에게 아들과 같았다. 따라서 아들로서의 의무를 이행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브람에게 전혀 양보하지 않았고, 세속적 이해관계에만 눈이 어두워 이기적인 선택을 하였다. 그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물질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적인 선택은 미구에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분리는 양가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브람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다. 따라서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는 동안은 여전히 아비 집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서 롯을 분리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더욱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오직 하느님을 믿으며, 그럼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는 더 큰 축복을 주셨던 것이다.
헤어짐은 곧 상실이며, 상실의 아픔은 상당히 크다. 그러나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고향과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도록 명령하셨고, 롯과도 헤어지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것과 헤어지도록 하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이 세상의 것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부모, 형제자매, 부부, 친구 모두 헤어져야만 하며, 자신이 소유한 재물, 지식, 능력 등과도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헤어짐은 하느님께서 안배하시는 또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헤어짐으로 인하여 커다란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주님의 안배하심을 믿자.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주심을 믿자. 주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 곧 천상의 땅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자. 헤어짐과 상실의 아픔을 통해 더 큰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는 신앙인이 되자............◆
좁은 문, 생명에 이르는 문
-이상영 신부-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고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리고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 생명에 이르는 문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떤 특정적인 집단만을 위하여 그와 다른 집단으로 나누는 식의 제외적인 태도를 말씀하고 계시는것은 아닐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엄청난 양의 고통스러운 내면 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을 슬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을때에는 언젠가 나타날 편안하고 아무런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이상향의 장소를 예언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쁨 가운데서,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는 하느님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바라는 그 길이, 우리가 갈망하던, 안하던간에 이미 우리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지금 여기에 사는 하늘의 새들이나 들에 핀 백합들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상태는 외계의 것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애써 얻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가 성장하면서 그것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언제라도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부자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와 사회적 권능에 너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아이들의 발치에 앉아 관찰해 볼 수는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과거와 미래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무한한 현재를 온 가슴으로, 완전한 신뢰 속에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드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린이들은 이미 그 안에 있고, 열심인 한 율법학자에게도 그가 거기에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앞날에 대한 기대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멈춘다면 바로 우리 발치에, 우리 코앞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일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찾을 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다른 필요한 것들이 새들과 백합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가 아닌 어디에서 우리가 은총을 내리시며 무한히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 안에서 우리의 모든 희망과 두려움이 허깨비처럼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들판에 뭍혀있는 보물과도 같고, 엄청나게 값진 진주와도 같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찾을 때, 꿈에도 몰랐던 풍요로운 우리 자신을 찾는 셈이며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는줄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들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남김없이 내 주고 우리 삶에서 모든 것, 특히 삶 자체를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매달리는 갈망이나 고정관념, 이기적인 욕망을 송두리채 던져버려야 하겠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하느님께 내 맡겨야 하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받는 것이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하느님께 해드리기
-서철신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한다. 이는 ‘남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기’, ‘남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기’로 말할 수 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다른 이’가 꼭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하느님이라면 어떨까? ‘하느님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하느님께 해드리기’, ‘하느님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하느님께 하지 않기’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어 내 기도를, 내 하소연을 들어주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드리고, 하느님의 기도를, 하느님의 하소연을 들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잊지 않고, 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만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하나하나 적어보고, 또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적어보자. 그리고 반대로 내가 하느님께 해드렸으면 하는 것을 해드리고,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 정신을 하느님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양승국신부-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좁은 문>
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리도 자주, 강하게 결심하곤 했지만 정말 실천하기 힘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통법규 준수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한 상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이 그렇게 들었는지 어렵습니다.
제가 주로 어기는 법규는 과속입니다. 제한속도 시속 60이나 80 도로를 다닐 때 마다 ‘이게 과연 현실성 있는 속도냐?’며 화까지 냅니다. 그러다가 날아온 딱지도 만만치 않습니다.
언젠가 과속 단속 경찰관으로부터 ‘좁은 도로에서 왜 그렇게 빨리 달리십니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마땅히 할 말이 없더군요. 늘 빨리 달렸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바쁘다는 핑계로 신호등을 자주 무시합니다. 여유를 가지고 조금 일찍 출발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량이 없는 교차로에서는 빨간불임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지나갑니다. 밥 먹듯이 규칙을 어깁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더 안 좋은 것은 아이들이나 후배들이 뒤에 타고 있을 때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때로 현실성이 없어보일지라도 정해진 속도나 기본적인 신호체계들, 각종 교통법규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렵더라도, 더디더라도, 목숨 걸고 지킬 때, 평생 대형 사고는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거금’의 범칙금을 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주어진 법규에 따른다는 것, 상식적인 선을 유지한다는 것,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는 것,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정녕 어려운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좁은 문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정도(正道)를 의미하겠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에 충실한 길,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계명을 이행하는 길. 결국 그 길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고지식한 길,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길을 걸어가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생명의 문인 좁은 문을 향해 걸어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더 그렇습니다. 반복되는 악습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원초적 본능과 욕망에 따라 자신을 맡깁니다.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겠지요. 비록 오늘 우리가 너무도 어려서, 너무도 젊어서, 아직 일정한 단계까지 성장하지 못해서 좁은 길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클지라도, 겸손한 기도와 꾸준한 자기정화작업, 하느님께 대한 지속적 의탁을 통해 조금씩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오늘 예수님 말씀, 약간 섬뜩하기도 하고, 그래서 걱정되기도 하시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기본적으로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경고성 발언은 당시의 인간들이 저지른 작태가 해도 해도 너무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빨리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의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심을 배경으로 건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처럼 그렇게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하루는 우리를 사랑했다가 그 다음 날은 미워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오랫동안 넓은 길을 걷고 계셨던 분들, 멸망의 문에서 서성거렸던 분들, 이제 엎질러진 물에 대해 한탄하지 마십시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잘못과 죄 속에서 살지 마십시오. 더 이상 괴로워도 슬퍼도 하지 마시고 모든 과거를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통회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죄 자체보다도 죄로 인한 낙담으로 하느님을 멀리하는 수가 많습니다. 낙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고개를 떨어트린 채 뒤로 물러서 있지 마십시오.
이제 일어나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께 가까이 가십시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시지 않는다
-이봉하수사-
각 나라마다 주요 거리에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문을 한두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광화문, 남대문 등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여러 문들이 있습니다. 또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나무나 돌로 만든 인위적인 문뿐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문을 만나게
되는데 저는 그곳에 가서 한 번씩 통과를 하면서 문이 주는 의미를 담아오곤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멸망의 문과 생명의 문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습니다. 그 선택은 성령 안에서의 분별과 바른 양심을 통한 자유와 책임을
줍니다. 또한 이러이러한 문이 좁은 문이요 이러이러한 문이 넓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영원한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하여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반대로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다고 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 19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비유 외에도 생명과 죽음에 관한
다른 비유들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길과 문을
알면서도 죽음으로 가는 넓은 길과 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걷는 것과 신앙인들이 알고 걷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우리는 상선벌악이라 알고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좌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답게 세상이 주는 단맛보다는 신앙생활에서
오는 쓴맛을 즐기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돼지와 진주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강영구신부-
그대에게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聖經)은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2,7)
“야훼 하느님께서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하나하나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시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계셨다.”(창세2,19)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같이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의 숨결(입김)로 사람이 되었지만,
짐승들은 사람이 이름을 지어줌으로서 짐승이 됩니다.
하느님의 숨결로 사람이 된 인간은 두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곧게 서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짐승은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네 발로 깁니다.
당연히 사람의 관심사와 짐승의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땅을 바탕으로 하늘로 향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거룩한 것, 즉 하늘과 관련 있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짐승의 관심사는 땅에 있습니다.
거룩한 것에 관심을 두지도 않을 뿐 아니라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개나 돼지에게는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나 뼈다귀 따위가 진주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지금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一明)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대로 해주어라
-이홍기 몬시뇰-
1. 오늘 복음에는 내용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독립적인 세 가 지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거나 진주를 돼지에 게 주지 말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남에게서 바라는대로 해주라는 이른바 황금률이고,
세 번째 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 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는 말씀은
당대에 널리 알려진 격언을 예수님께 서 인용하신 듯 합니다.
‘거룩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이 는 제사 음식 등 예배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하늘 나라에 관한
복음이리라 짐작 합니다.
2세기 초엽의 어느 교부의 저서 ‘디다케’에서는 거룩한 것을 성체 성 혈과 연결시킵니다.
개와 돼지는 유대인들이 불결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역시 정확히 짚기 어렵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 또는 그리스도께 대 한 적개심을 가진 유대인들로 보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 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복음 을 믿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광도 주셨고,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귀 하고 거룩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짖거나 게으른 생활로 이 거룩한 선물들을 제대로 활용하 지 않거나 더럽힙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욕심과 평안을 위하여 하느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마다하고 낙 태를 일삼으며
그 좋은 자연 환경을 쉽게 파괴하기도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경고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2. 두 번째 말씀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 주라시며,
이것이 율 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가르침이 황금과 같이 귀하고 중요하다고 보아 황금 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사랑 의 이중 계명도
모든 율법과 예언을 포함하는 가장 근본적인 계명이라고 하십니다(마태 22,37-40).
따라서 사랑의 계명과 황금률은 서로 연결되며, 어떤 면에서 황금률은 사랑의 계명의
시행 세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웃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 지를 알고자 노력하고
그대로 해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윤리 도덕과 예의를 중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윤리 도덕과 예의의 바탕도 자세히 살펴보면 남이 좋아하는 바를 하고 싫어하는 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자동차를 몰면서 교통도덕을 지킨다든가 공공 장소 에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든가
목욕탕에서 물을 아낀다든가 하는 일상적인 일에서 거짓말, 비방, 욕설, 부정, 비리 등의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 등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일본 사람 들을 욕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사람들은 공공질서를 잘 지키 고 적어도 자기 나라 사람들끼리는 이웃이 싫어하는 바를
하지 않는 것이 몸에 베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남이야 싫어하든 말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얼 마나 자기 하고픈대로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이웃 사랑의 바탕은 남 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인데,
우리는 첫째도 둘째도 나, 나의 가족 중심으 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은 신자 생활의 첫걸음이자 목표입니 다.
그렇게 살 때에 비로서 우리는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3. 세 번째 말씀은 넓은 길, 큰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험한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신앙생활의 정도를 밝힌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험한 길과 좁 은 문은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를 싫어하지만 이 길과 문으로 가야만
생명에 이른다는 진리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과 험한 길은 이웃을 위해 땀을 흘리고 고생하는 삶입니다.
예를 들면 물욕을 버린 가난한 생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는 삶,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는 삶,
아무리 고 단하고 귀챦아도 날마다 세상과 이웃을 위하여 꾸준히 바치는 기도의 삶 등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활이 힘들고 싫다고 피하고 가능하면 편안하고 재미있는 삶,
손해 안보고 이익이 많은 일 등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예수님의 말씀대로 멸망으로 이끄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분이야말로 좁은 문, 험한 길을 가신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두려워 멀리 도망가는 십자기의 길,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야 말로 생명과 부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지금 당장은 어렵고 싫더라도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예수님처럼 좁고 험한 길로 갑시다.
시편에서 노래하듯이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웃으며 곡식을 거둘 것입니다.
그 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도 하느님을 닮 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
† 황금률 -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
-박상대 신부-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셨고(5,3-12), 이어서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율법조문에 해당하는 십계명을 그 근본정신에 따라 과감하게 심화시켜 새롭게 해석한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선포하셨다.
산상설교의 둘째 부분(6-7장)에서는 신앙인의 성덕에 관한 가르침으로서 자선(慈善)과 기도(祈禱)와 단식(斷食), 그리고 가치관, 재물관, 대인관계 등에 대한 새로운 삶의 태도를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은 세 가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것이며, 셋째는 멸망에 이르는 넓은 문과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 중에서 좁은 문을 택하라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볼 때 산상설교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 하나가 독자적인 주제가 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 바로 산상설교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6절)는 말씀은 지금까지 예수님에 의해 선포된 새로운 의(義)의 길과 가르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개와 돼지는 혼탁하고 무질서한 세상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앞에 놓고 유혹하는 세속과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가르침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수행하는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들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와 세속의 유혹을 놓고 저울질하거나 갈팡질팡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산상설교의 많은 가르침 하나 하나는 귀한 구슬과도 같다. 이 구슬들을 서로 꿰어 보배가 되도록 하는 실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선포되는 "황금률"이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12절)는 말씀이 바로 황금률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황금률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임을 덧붙여 강조하셨다. 황금률이란 이 구절의 말씀이 황금처럼 귀하고 소중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황금률은 동서고금의 어느 문화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륜(人倫)의 도(道)이다.
구약성서의 제2경전에 속하면서 지혜문학의 한 유형인 토비트서에서도 저자는 야훼신앙과 전통을 지닌 유대인이 가져야 생활표본으로 황금률을 제시하고 있다.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토비 4,15) 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 탈무드도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모두 풀이다."(샤바트 31a)라고 말한다.
오늘 예수께서 다시금 선포하시는 황금률은 나중에 가서 말씀하실 "사랑의 이중계명"(22,34-40)과 더불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자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 된다. 사실 이 두 기둥에 비추어 다른 모든 계명과 규율들이 해석되어 마땅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중간에 몇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구절들을 한번 보도록 하자.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7-11절)
이 생략된 구절들을 곁들여 오늘 복음을 음미하면 "준다", "받는다", 그리고 "주고 받는다"는 놀라우면서도 평범한 세 가지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잘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삶은 "give, take, give & take"라는 원리 안에서 영위됨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주기만 할 수도 없고, 받기만 할 수도 없다. 모두가 "주고받는"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 기왕에 줄 것이면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주어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다.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거룩한 진주는 우선적으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의미하지만 나아가서는 하느님나라를 위한 귀중한 복음을 의미한다. 복음이 짓밟히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 물어뜯기는 일이 있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이 효과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좋게 돌아올 것을 바라면서 전해준 것이 비록 나쁘게 돌아온다 하더라도 전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황금률을 실천하는 일은,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아무나 가지 않는 "좁은 문"이요, 그래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너희의 진주>(마태 7,6.12-14)
-유광수신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것이나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잘못하다가는 개나 돼지가 물어뜯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개나 돼지가 물을려고 할까? 개나 돼지가 좋아하는 것은 음식 찌꺼기나 갈비뼈다귀이지 거룩한 것이나 진주가 아니다. 누가 개나 돼지를 좀 더 인격적으로 대해주어야지 하고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룩한 것이나 진주를 갔다주면 그것들은 먹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가 자기들이 먹을 것이 아니니까 뱉어 버리고 오히려 돌아서서 그것을 가져다 준 사람을 물어뜯으려고 덤벼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분수에 넘치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거룩하고 값진 귀중한 진주인지를 모르고 그것을 받고도 반가워하거나 고마워하지 않고 던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불쾌해 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5장에서 말씀하신 진복팔단의 가르침이다. 이 진복팔단의 가르침은 생명에 이르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것이고 값진 진주이며 좁은 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거룩한 것이고 진주인지를 모르고 던져버린다. 아니면 자기가 청하는 것들이 아니라고 오히려 불평하고 돌아서서 물어 뜯으려고 한다. 과연 진복팔단의 가르침이 생명에 이르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거룩한 것이고 진부인가를 알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그 가르침을 거룩한 것으로 또는 진주로 알아보았다면 그래서 그 가르침이야 말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의 모습은 거룩해졌을 것이고 진주처럼 빛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대로 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보다는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과연 나는 진복팔단의 가르침 중에서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진복팔단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진정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좁고 얼마나 비좁은 길인지 모른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그런 정신으로 살기 보다는 반대로 남이 내가 원하는대로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것이 아주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정신이 바꾸지 않는 한 진복팔단이라는 진주를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기보다는 그것을 던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복팔단의 가르침이 거룩한 것이고 진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진복팔단이 제시한 좁은 길을 걷게 될 것이고 또 그 좁고 비좁은 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은 점 점 더 거룩해지고 진주처럼 빛날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는 삶이 바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완덕을 닦는 삶이다.
시인 괴테는 "위대한 것을 위대하다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야만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진복팔단의 정신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야만인이며 그것은 마치 거룩한 것과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버려버리는 개나 돼지와 같은 것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행복에 이르고 생명에 이르는 이 길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 좁은 길을 걷으려고 하지 않고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우리가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을 걷고자 한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신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고, 그것이 곧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씀하신 완덕을 추구하는 삶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대한 것을 위대하다고 깨닫지 못하는 야만인"으로 살아서는 안되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신 대로 남에게 해 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는 복된 날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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