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와의 차 한 잔⑥
“평생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려 했다”
서울고 뉴스레터 제10호(2017.11.09)
이순재 (5회, 83세) 탤런트
탤런트 이순재 동문(5회)은 올해 여든셋 국내 최고령 연기자다. 미수米壽 (88세)를 바라보는 이 현역배우는 “연기란 끝이 없는 작업이고 그래서 해볼만하고 보람도 있다”고 말했다. ‘세일즈맨의 죽음’ 연극무대는 지난해 연기인생 60주년 기념공연을 포함해 네 번 섰다. ‘국민배우’소리를 듣지만 “그렇게 불리는 여러 배우 중 한 사람일 뿐이고 여전히 나는 정상의 연기자가 아니다”라고 이 동문은 말했다.
+ 61년째 연기생활을
지속하시는 비결이
뭡니까?
“나는 연기인생에서 정상에 서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게 이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인지 모르죠. 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내 앞의 누군가를 따라가야 했어요. 정상에 올랐다면 거기서 끝났을 지도 모릅니다.”
+ 서울고 시절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명문 고를 나왔다는 자부심이죠. 조회 때면 한 시간씩 훈화를 하신 김원규 초대 교장선생님의 ‘여러분은 선택 받은 학생들’이라는 말씀과 엄격한 스파르타 식 교육이 당시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줬습니다.”
그는 젊은 날 한겨울에 허허벌판서 야외촬영을 하다 보면 추위에 떠는 여배우를 안아주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서울고 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자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서울고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시죠.
“우리 땐 공부하느라 소풍도 일요일에 갔습니다. 서울고는 운동 못하는 학교로 정평이 났죠. 당시 야구는 만날 콜드게임으로 졌어요. 올해처럼 대통령 배 야구대회 우승소식을 접하면 격세지감이 듭니다. 그 시절 운동 중에 송구만 우리학교가 잘했는데 실력이 빼어났던 한 선배 덕에 우리가 고교대항 송구대회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경복고 운동장, 배재고를 꺾고 올라간 결승전에서 우리가 휘문고에 5대3으로졌어요. 그런데 심판이 상대팀의 더티플레이를 묵인했습니다. 그 바람에 경기 후 패싸움이 벌어졌고, 우리학교가 거의 초토화됐어요. 이튿날 열린 조회에서 김원규선생님이 모든 운동경기 출전금지를 선언했고 송구연맹에서도 탈퇴했습니다.”
+ 기억에 남는
그 시절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시인 조병화 선생님은 전공인 물리 외에도 대수와 국어작문을 가르치셨습니다. 럭비 코치도 겸하셨죠. 수업을 한 30분 하고 나서 ‘가서 위대한 시집을 가져오라’고 하신 후 뒷산에 올라 당신의 처녀시집에 실린 시를 낭송하셨습니다. 일종의 정신적 훈화였죠. 체조교사였던 조영식선생님은 훗날 경희대를 설립하신 후 조병화·안병욱선생님 등을 데려가셨습니다. 경희대라는 이름도 우리가 공부한 경희궁에서 왔어요.”
현역 최고령 연기자인 그는 우리학교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나왔다. 그런 그가 시추에이션드라마‘거침없이 하이킥’을 찍을 때 재미있는 설정이라는 이유로 ‘야동 순재’로의 전락을 마다하지 않았다. 옛TBC 전속 탤런트 시절엔 수사극 ‘형사수첩’에 범인으로 33회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모두들 맡기를 꺼린 소녀 강간치사 사건 범인역도 했습니다. 범인 연기도 막상 해보면 재미 있어요. 이미지가 실추될 까봐 꺼리는데 막상 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배우는 망가져야 한다면 망가지는 직업입니다.
연기자는 다양한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어야죠.”
+ 연기자의 길을
걷는 서울고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시고
싶습니까?
“후배 연기자들에게 연극예술 창조의 길을 권합니다. 잘하는 후배들에게는 미국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에 가서 한 2년간 연기수업을 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보라고
하죠. 스타로서 정상에 오르려면 운이 따라야 하지만 예술가로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길은 정진하면 평생 갈 수 있어요. 사실 장동건처럼 비주얼이 좋은 배우는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야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기에 정진해 원숙한 연기를 펼치면 정상은 밟지 못하더라도 나처럼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최초의 일일 드라마(눈은 나리는데) 주인공이었고 최 장수 일일 드라마 (보통사람들)와 최고 시청률 일일 드라마(보고 또 보고)에 출연했다. 1982년 KBS 드라마 ‘풍운’에서 대원군역을 맡았을 땐 만조백관 앞에서 4분간 사자 후를 터뜨리려 담배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승호, 신영균, 최불암 등 체구가 큰 사람들이 대원군을 연기했어요. 하지만 대원군은 5척 단구였습니다. 마르고 풍채가 볼품없었죠.”
그의 키는 단구에 가까운 165cm다. 술은 애초에 멀리했다.
1980년대 초 TBC와 통폐합된 KBS 시절이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주인공인 3부작 ‘코리아 환타지’에서 그가 안익태 역을 맡았다. 연출자의 주선으로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게 지휘동작을 배우러 갔다. 대중예술연기자를 무시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뒤돌아나오면서 그가 한마디 했다.
“국내 지휘자 중 세계적인 수준의 지휘자가 있습니까? 안익태는 세계적인 지휘자입니다.”
아홉 개 기관 홍보대사 맡아
여러 번 망가지는 연기를 했지만 그는 대한적십자사·서울시 등 지금까지 아홉 개 기관의 홍보대사를 맡았다. 연기자에 대한 인식이 바뀐 덕이었다.
“연기자의 이미지가 좋아져 홍보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 겠죠. 무보수지만, 좋은 일이고 무엇보다 나를 필요로 한다니까 합니다. 과거엔, 특히 순수예술 하는 사람들의 괄시가 극심했어요.”
그는 14대 국회 민자당 소속 지역구 의원을 지냈다. 호남세가 강한 중랑 갑에서 앞서 13대 때 700표 차로 낙선했지만 3800표 차로 설욕을 했다. 전체 후보 합동유세장에서
그는 청중들에게 현역의원인 상대당 후보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달라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최고의 모범선거구였습니다. 여야간 협치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갈 때 재수를 한 그는 첫 도전 때 정치학과를 지원했다고 한다. 대전 피난 시절이었다.
“또 떨어지면 갈 데가 없어 철학과에 응시했죠. 전과할 생각을 했었는데 당시 서울대 철학과 교수들이 쟁쟁했고 유일하게 정교수가 다섯 명인 학과라 마음을 돌렸습니다.”
의원 시절 그는 ‘연예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본회의 정책질의를 했다. 연기자의 저작인접권을 보호하는 입법도 주도했다. 지금은 몇 백억 원이 왔다갔다하는 엄청난 권리다.
14대 의원 임기를 마치고서 그는 현실정치를 그만뒀다. 지역구에서 초대 중랑문화원장을 거쳐 중랑구 사회복지 협의장으로 있을 땐 기관장 판공비를 없앴다.
“이게 전례가 돼 후임자들도 판공비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정치할 때도 돈 한 푼 받은 일이 없어요.”
그는 정치를 접은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으로 꼽았다. 정치를 왜 그만 뒀을까?
“두 번 출마했을 땐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돈도 없었지만 8년간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전히 하늘이 푸르르고 꽃은 아름다웠지만 미처 느끼지 못했죠. 어느 일요일엔 주례를 아홉 번 섰습니다. 바쁘기도 했지만, 지역구에 불 나고 물난리 나면 다 내 책임 같았어요.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도전해 낙선했다면 한동안 정치판을 기웃거렸을 겁니다.”
그는 좌우명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좀 양보하며 살자”와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자.” 후자는 우리학교 초대 교장 김원규선생님이 남긴 말로서 초동 캠퍼스 본관입구에 새겨져 있다.
(이순재동문의 좌우명이 된 초대 교장 김원규선생님의 가르침은 서초동 캠퍼스에 세워진 비석에도 새겨졌다)
글: 이필재(29회)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