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정승권등산학교 동문 데날리 원정대
‘지독한 사람, 꼭 오를 것이다’ 글·사진 정승권 정승권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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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킨리의 캠프1 전경. |
탈키트나에 지난 5월 25일 도착해 레인저 사무실에서 입산 신고를 마치고 허드슨 항공사를 찾아갔다.
비행기가 지금 매킨리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다섯번째 매킨리 행이지만 탈키트나에서 기다리는 일없이 곧바로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28일 아침, 우리 6명은 계획대로 매킨리와 헌터 팀으로 나누어 성공적인 등반을 서로 기원하며 남동빙하 위 랜딩 포인트에서 뜨거운 작별을 했다. 정승권등산학교 동문으로 구성된 이번 데날리원정대는 매킨리는 물론 포레이커와 헌터를 모두 오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원정대 구성과 훈련에서부터 각 봉에 3명씩 총 9명이 훈련을 꾸준히 해왔으나 결국 3명은 비자 문제로 원정을 포기해야 했다. 등반 계획은 6명이 3명씩 두 팀으로 나누어 매킨리와 헌터를 오른 후 6명이 함께 포레이커를 오르는 것으로 변경했다.
매킨리는 최흥환43세·산빛산악회 부대장을 비롯해 오성섭34세·산빛산악회, 조재범32세·바름산악회 대원, 헌터는 나를 비롯해 박민28세·골수회, 양준원26세·한솔산악회 대원으로 구성했다.
28일 저녁 헌터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 이미 캠프1에 도착한 매킨리 팀과 무전 연락이 되어 때마침 매킨리 등반을 무사히 마치고 하산하는 한국팀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이곳 헌터 베이스캠프에서는 매킨리 팀과 무전 연락은 거리와 지형 때문인지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매킨리 팀의 등반 진행을 추측하며 짐작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등반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이번으로 세 번째 헌터 북벽 앞에 섰다. 그간 눈에 익어서 ‘문 플라워’의 등반선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벽 중간에 버티고 선 토왕성폭포 크기의 빙벽 ‘The shaft’가 이 루트의 난제 중에 난제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빙벽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만큼 1200m에 달하는 북벽이 매우 작아 보였다.
북극에 가깝게 위치한 데날리는 추위가 등반을 곤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인지라 북벽 그림자에 가려질 추위의 곤혹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한 번의 비박이라도 줄이려고 했다. 하루 등반 거리에 있는 비박지까지 장비와 식량을 미리 데포 시켜 놓고, 로프를 고정시킨 다음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취한 후 이곳을 빠르게 지나쳐 이틀 거리를 하루에 오를 계획이 등반 초반의 작전이었다.
끈질기게 내리는 눈으로 랜딩 포인트에서 묶인 이틀간의 지루함은 헌터 베이스캠프에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따가운 태양 아래 텐트들이 아늑하게 꾸며졌다. 장비와 식량 데포를 위한 1차 등반의 설레임으로 줄에 갈리는 아이젠의 쇳소리는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선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틀 동안 내린 눈으로 당분간 맑은 날씨가 이어질 거라는 기대는 어제와 오늘은 물론 앞으로 족히 일주일은 좋아질 거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그건 이곳 카힐트나 남동 빙하에서 수년간 경험한 결과에서 나온 나의 가련한 예측이었다. 베르그슈른트를 지나 세락지대까지 오르는 빙사면에서 2자루의 긴 피켈과 2자루의 짧은 피켈을 번갈아 사용했다. 요세미테 엘캡에서 느껴본 홀백의 무게와는 견줄 수 없이 가벼운 장비와 세 명이 먹을 7일치 식량 그리고 스토브와 연료를 담은 홀백은 얼음면인데도 힘들게 끌어올려졌다. 하지만 눈사태 통로인 골이 패인 긴 빙사면은 얼름이 부드러워 피크는 잘 박혔고, N바디의 타격 자세는 몸을 몹시 편안하게 만들었다.
29일, 12시간 가까이 걸려 첫번째 비박지에 홀백과 포타렛지를 올려놓고, 또 60m 로프 3동과 30m 로프 1동을 고정시킨 후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그러나 캠프로 돌아온 시간은 다음날 새벽인지라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쉬었지만 앞으로 맑은 날씨가 이어질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소모되는 시간적 조급함이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부터 눈이 다시 내려 아쉬움은 안도감으로 바뀌는 요행을 얻는 듯했지만 눈은 그칠 줄 모르고 4일간 줄기차게 내려 등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6월 3일, 날씨는 개었으나 북벽은 더욱 하얗게 변해있었다. 이번엔 분명하게 당분간 좋은 날씨가 이어질 거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지면서 등반을 시작했다. 4일 전에 남긴 러셀 자국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하단 설벽은 북벽에서 흘러내린 눈이 많이 쌓여 러셀을 더욱 힘들게 했다. 고정 로프를 이용해 장비와 식량을 데포 시켜 놓은 첫번째 비박지까지는 손쉽게 올라올 수 있었으나 간간이 떨어지는 스노 샤워를 맞는 일은 곤혹스러웠다.
마지막 주자인 준원이가 3동의 로프를 회수하여 매달고 올라왔을 때 시간은 낯 12시가 조금 넘었고, 나는 다음 등반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비박지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홀백 로프를 매달고 민이의 확보를 받으며 오른쪽으로 휘돌아 올라가는 70° 정도의 얼음 걸리를 등반해 나갔다.
스크류의 설치 간격이 너무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좁히지 않았다. 암각에 설치된 고정 확보물에 주마링 로프를 고정시키거나 홀링을 하기에는 미덥지가 않아 스크류나 캠을 이용해 확보지점을 더욱 확실하게 했다.
이 북벽의 문 플라워 루트를 계획할 때 심사숙고했던 건 인공등반 장비에 대한 준비였다.
가장 어려운 구간인 ‘The Shaft’는 빙벽이기에 몇 개의 스크류로 어떻게 해볼 작정이었으나 A3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인공등반 구간에 소요되는 장비 무게를 어떻게 줄여야할지 고심 끝에 당연히 있어야할 하켄류를 빼버린 게 큰 실수였다. 결국 하켄이 꼭 있어야할 인공등반 구간에서 난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아이젠을 벗어야 줄사다리 사용이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도 크랙에서 얼음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아이젠을 다시 착용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큰 오산이었다. 하켄이 없어 결국 확보물 부족으로 여기서 내려가든지 아니면 무모한 등반을 하든지 해야만 했다.
박빙의 얼음은 인공등반으로 올라야할 크랙을 적당한 확보물이 없는 상태에서 돌파하는 유일한 지지점이었다. 이 얼음에 피켈을 걸고 아이젠을 신발에 착용하기란 서커스와 다를 바 아니었다. 게다가 푸석거리는 박빙은 곧 무모한 등반임을 알았고, 내가 이런 등반을 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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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찾은 헌터 북벽과 베이스캠프. |
새로운 등반 계획은 사치였다
준원이가 주마 한 개를 떨어뜨렸다는 얘기를 올라온 민이에게 들었을 때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성난 목소리로 무전기에다 대고 떠들어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주마 트래버스가 긴 구간이라 서로의 모습도 볼 수 없으니 어떻게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무전기의 신호도 자주 끊어져 등반 시간만 안타깝게 소모됐다.
급경사의 긴 걸리를 여러 피치에 걸쳐 오르는 일은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았지만, 60m나 되는 길이의 홀링은 몹시 힘들었고 또 서둘러야만 했다. 오늘 안에 첫번째 아이스 밴드 위에 올라서야 내일부터 조금 여유 있는 등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둘렀지만 결국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었다.
해는 이미 포레이커 쪽으로 넘어가 버렸고 아이스 밴드로 이어지는 한 피치 트래버스 구간의 혼합지대는 모든 등반이 어려울 것 같았다.
등반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마링이나 홀링, 특히 홀링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금 머뭇거린 후 민이와 준원이에게 내가 트래버스를 마치면 이렇게 하라고 일러두고 횡단을 시작해 나갔지만 갈수록 문제는 심각했다. 굴곡이 심한 80° 정도의 눈 덮인 벽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암벽들 사이로 주마링 트래버스와 홀링은 어려움과 위험함을 예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이와 준원이에게 등반을 접자는 말이 나오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어느덧 시간은 다음날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결국 등반을 포기하고 우리는 저 아래로 아득히 보이는 베이스캠프를 향해 하강을 하고 있었다.
베이스캠프에 돌아온 다음날 새벽부터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고, 오후부터는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사태가 우리 텐트를 덮쳐버릴 듯 여기저기서 계속 쏟아져 내리며 굉음을 냈다.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3일 동안 텐트 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하루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새로운 등반계획의 구상은 한낱 사치스러운 일에 불과했고, 그건 오히려 두려움과 외로움 그 자체였다. 모든 계획과 결정은 이곳을 빨리 탈출한 후 생각하고 싶었다.
매킨리 등반팀 지원하기로 결정
랜딩 포인트에는 탈키트나행 비행기가 이틀째 날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은 랜딩 포인트에도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등반도 진행하기가 어려울 듯싶었다. 더욱이 포레이커가 눈앞에 빤히 보이지만 등반 가능성을 타진하기에는 용기가 서질 않았다. 15일간 우리가 움직인 고도의 폭은 800m 정도였고, 움직인 거리의 시간 폭은 고작 하루거리였다. 직장 문제로 먼저 돌아가야 할 민이는 매킨리라도 등반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는 준원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계획한 원정이라 그들이 매킨리 등반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웨스트 버트레스로 오른 매킨리 팀을 서포트하는 것이 이 원정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가장 보람되고 충만한 등반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아무 이의가 없다는 것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쌀과 압력밥솥, 그리고 김치와 젓갈을 모두 챙겨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캠프1에서 매킨리 쪽으로 시야가 트인 까닭인지 그동안 교신이 두절됐던 매킨리 팀과 교신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지금쯤 매킨리시티4300m에 있어야 할 매킨리 팀이 하이캠프5100m에서 정상 등정을 위해 대기 상태라는 얘기였다. 이렇게 날씨가 나빴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올라갈 수가 있었는지 몹시도 대견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최흥환 부대장과 교신 이후로 그들이 무사히 매킨리 등정을 하리라는 기대에 우리는 등반을 좀더 천천히 하기로 했다. 그래도 매킨리 팀과 상봉하려면 아직 5일은 더 올라가야만 했다.
쏜살같이 내려가는 외국팀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지쳐있었고 얼굴 표정들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 눈에도 빨리 걸을 수 없는 우리 모습이 매우 안타깝게 보일 것이다. 이렇게 매킨리는 오르고 내리는 등반가들이 많아 그때마다 재미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얻은 정보 중에 그동안의 날씨 얘기는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것뿐이었다.
3300m의 캠프3을 지나 4300m의 매킨리시티로 가는 길목인 ‘모터사이클 힐’을 오를 때 레인저 더그 스코트가 말한 게 생각났다.
그의 말은 걸어 오르는 모습이 모터사이클의 페달을 힘차게 밟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도무지 그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힘든 언덕이었다. 오히려 깔딱고개 정도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다.
랜딩 포인트를 떠난 지 4일 만에 윈디코너를 돌아서자 매킨리 팀과 그동안 또 두절되었던 무전 교신을 다시 할 수 있었다.
날씨가 나빠 8일간 하이캠프에 있다가 결국 식량이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매킨리시티로 내려왔다는 최흥환 부대장의 얘기였다. 참 지독한 사람이다. 아마도 그는 식량만 있었으면 성공할 때까지 내려오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꼭 정상에 오르리라는 걸 나는 확신했다. 또 우리의 서포트가 분명 필요할 거라는 사실이 모두를 즐겁게 했던 교신이었다. 흐린 날씨로 매킨리가 시원하게 보여야 할 윈디코너에서 매킨리는 물로 주변의 포레이커나 헌터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전망 좋은 위치에 있는 우리는 랜딩 포인트를 떠난 후 4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눈과 흐린 날씨에 시달려야만 했다. 언제쯤 날씨가 좋아지려나.
지새우는 밤, 아름다운 달
오랜만에 보는 청명한 날씨였다.
오늘은 매킨리시티로 입성하는 날. 때마침 날씨는 맑게 개었고 15일간 헤어졌던 원정대원 모두가 다시 만나는 날이다. 매킨리 정상이 손에 잡힐 듯 했다.
매킨리 정상에서 매킨리시티까지 뻗은 남서벽은 언제 보아도 매혹적이다. 드넓은 설원 위에 자리잡은 매킨리시티에는 항상 그랬듯 각국 원정대들의 텐트들이 즐비하게 보였다.
우리를 마중 나온 최흥환 부대장과 성섭이와 재범이의 초췌한 모습들에서 그동안 등반의 어려움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성섭이는 5일, 재범이는 6일, 나는 8일.”
“무슨 소리야?”
“하이캠프에서 버틴 기간이야.”
“성섭이가 제일 먼저 내려 왔구나.”
“음식 많이 죽이는 사람부터 내려 보냈지.”
아늑하게 만들어진 식당텐트에 모인 우리 6명은 그동안 서로의 등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매킨리시티의 하얀 밤을 지새웠다. 헌터봉에 뜬 달은 아름다웠다. 다음날, 웨스트 버트레스의 헤드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림잡아 70명 정도 되었다. 어제 저 많은 인원이 정상에 올랐다는 것인데, 하이캠프에서 하루만 더 버텼으면 저 속에 함께 있었을 최흥환 부대장은 아쉬운 듯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그저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런 그를 바라다보는 나 역시 안타까운 하루였다.
하지만 정상을 향한 대원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부터 우리의 등반계획이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오성섭·조재범·박민 대원이 1차 정상 등정 시도를, 최흥환 부대장과 양준원 대원이 2차 등정을 시도하기로 했다.
나는 2차 정상 등정 시도 때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루트를 혼자 오를 계획이었지만 1차 등정이 성공하지 못하면 시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원들은 매킨리시티에서 이틀간 쉬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다. 그리고 날씨가 좋아 등반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6월 14일, 오후 6시경 하이캠프로 떠난 3명이 도착했다는 무전연락을 받았다.
그곳 날씨가 매우 좋다는 것과 성섭이는 조금 머리가 아프다는 연락이었다. 내일 정상 등정 시도가 무리 없이 이어질 것 같다는 그들의 무전 내용은 이곳 매킨리시티에 있는 2차 등정 시도 팀과 나에게도 흥을 돋우게 하는 일이었다.
6월 15일, 아침 결국 오성섭 대원은 고소 적응의 어려움으로 하이캠프에 남고, 조재범과 박민 대원이 정상으로 출발한다는 무전 연락을 받았다.
다시 오후 3시경 박민 대원이 데날리 패스 안부까지만 오른 후 캠프로 돌아왔고, 조재범 대원 혼자 정상으로 향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 오후 10시경 하이캠프로 돌아온 조재범 대원이 정상을 올랐다는 소식을 오성섭대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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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터 북벽 ‘문 플라워’루트를 등반하고 있는 정승권 씨 |
홀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루트 등반
하루 종일 무전기를 끼고 있었건만 매킨리 정상과 이곳 매킨리시티 캠프가 무전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재범이의 등정으로 오늘 우리 모두는 기쁜 하루가 되었고, 1차 등정으로 인해 다음 등반을 홀가분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일 2차 등정 시도 팀인 최흥환 부대장과 양준원 대원이 하이캠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고, 나는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루트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16일,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식당텐트에서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부대장과 준원이의 잠을 깨우지 않게 조용히 캠프를 떠났다.
배낭 속에 넣은 건 물 1ℓ와 약간의 간식 그리고 카메라와 우모복 뿐이어서 배낭은 가벼웠다. 방향은 웨스트 버트레스 루트와는 정반대였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싫지 않았다. 기나긴 설벽을 같은 동작으로 한없이 움직여 나가는 이 루트는 재미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며칠 전 헌터 북벽에 있는 문 플라워 루트의 흥미로움에 비할 수 없는 지루함이었다. 이 루트를 오르려고 했던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가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이다. 이곳에서 동양인들의 사고가 많이 발생해 서양인들이 붙인 이름인데, 그 오명을 조금이라도 씻고 싶은 충동에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날 정상에 오른 후 웨스트 버트레스 루트로 하산해 다시 매킨리시티 캠프로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을 통해 내 체력의 한계를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고도 1700m를 하루에 올려야 했기에 에너지 고갈에 대한 폐와 심장의 고통, 추락에 대한 공포, 판상 눈사태의 위협과 함께 12시간을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오후 6시경, 정상 능선이 보이는 6000m의 드넓은 설원지대인 풋볼필드에 올라설 수 있었다.
웨스트 버트레스를 통해 정상 능선을 오르는 몇 사람이 멀리 보였지만, 정상에 대한 욕심은 거두고 아취데콘스 타워를 거쳐 웨스트 버트레스로 하산을 서둘렀다. 정상을 올랐던 경험이 있기도 했지만, 많이 지쳐있는 상태라 매킨리시티까지 내려가려면 여기서 정상의 그리움을 접는 것이 현명한 판단인 듯했다.
데날리 패스에 도착하니 하이캠프에 도착한 2차 등정 시도 팀인 최흥환 부대장과 교신할 수 있었다.
상당히 좋은 컨디션이라는 것과 준원이도 마찬가지라는 내용이었다. 긴 사면의 데날리 패스를 횡단하듯 내려서는 일은 위험하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터져 나갈 듯한 폐와 멎을 듯한 심장의 고통이 없다는 것과, 그리고 조금 후면 우리 대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마중 나온 부대장과 준원이의 표정은 덤덤했다. 마치 대장은 이런 등반을 당연히 해야 한다는 듯 부대장과 준원이가 건네준 한 그릇의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내일 그들의 정상등정을 기원했다.
어느덧 하이캠프에 추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배웅하고, 나는 그들의 정상 등정을 다시 한번 기원하며 땅거미가 짙게 깔린 매킨리시티를 향해 서둘러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헤드월을 내려설 무렵 매킨리 남서벽의 하얀 설벽에는 내가 남긴 발자국 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나는 발자국을 자주 쳐다보며 긴 하산의 지루함을 달랠 수 있었다.
조금 후 오늘 떠난 캠프에 도착하면 성섭이와 재범이 그리고 민이가 나를 반겨줄 것이다.
정상에 올랐던 재범이가 등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고, 그 이야기에 나는 취할 것이다. 또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으며, 텐트에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이캠프에 있는 부대장과 준원이가 정상으로 향할 것이다. ‘그런데 내일 날씨가 나빠지면 어떡하지.’ 꽤 늦은 저녁, 고요한 매킨리시티의 설원을 걸으며 이런 상념들 속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지루하고 초조하게 보냈던 다음 날, 그리고 다시 저녁 10시경, 2차 정상 등반 팀인 최흥환 부대장과 양준원 대원이 정상에 오른 후 이제 막 하이캠프로 돌아왔다는 무전 연락을 받았다. 이제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들을 훌훌 털어 버리는 시간이 되었다.
식당텐트에 모여 있는 우리는 그동안 서로의 노고에 자축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 속으로 행복하게 빠져들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어 혼자 중얼거렸다.
“데날리 신이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