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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선생 묘소을 찾은 제자와 학부형(좌) 최용신선생증언을 들려주신 류달영교수님과 필자(1995)(우)
아래의 글은 안산지역신문에 기고한 '안산역사연구모임' 회원님의 글 일부이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속뜻은?
팔곡동 오야마 vs 샘골 최용신의 농촌진흥운동, 이렇게 달랐다.
비슷한 시기에 최용신 선생이 마을 샘골(지금의 본오동)에 내려왔다. 최용신 선생에 관한 글 중 일부에는 당시 샘골마을의 남자들은 음주와 노름에 빠져있고 아이들은 배우지 못해 무지하고 심지어는 마을에 일장기가 펄럭이고 신사참배까지 한 ‘암흑천지’였는데 최용신 선생의 등장으로 이것이 모두 일소되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좀 다르게 보아야 한다.
당시의 샘골은 이미 ‘깨어있는 마을’이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자생적으로 구우계(購牛契)를 조직하고, 부녀회에서는 300원의 기금도 있었다. 당시 금 1돈이 4~5원이었으니 300원이면 거금이었다. 샘골마을은 ’농민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가난하다‘는 일제가 내세운 표어가 먹히지 않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최용신 선생에게도 무관심하고 냉담하였다.
당시를 직접 살아보지 않아 제가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증언을 통해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는 1930년대에 최용신선생이 활동한 안산지역의 시대상황과 너무나 다른 표현 같다.
최용신선생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1930년대 국내의 시대상황은 물론 안산지역의 실제 모습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객관적인 샘골모습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최근 거짓 '샘골강습소 교가' 논란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한 객관적 공유가 있었다면 애초에 논란의 대상도 아닌 문제였다.
처음 안산의 최용신선생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한 1994년, 제가 만난 안산지역의 문화, 역사에 책임 있는 분들은 한결같이 최용신 평가에 매우 야박하였다.
도대체 당시 야학한 사람도 많은데 왜 최용신을 그렇게 과대평가하느냐는 것이었다.
제가 일용직으로 비용 마련하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과대평가자 라는 비난을 받아가며 외로이 최용신독립유공자 추서 신청을 한 것은 국가에서 훈장을 받는다면 안산에서 이렇게 최용신을 무시하지 않을 것 아닌가 하는 간절한 바램에서 였다.
운이 좋게도 추서 자료를 찾으면서 만난 잡지박사로 알려진 김근수교수(1910~, 전 중앙대)님은 “자네는 전혀 과대평가자가 아니며 당시의 극한의 시대환경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한 것이라며.....”용기와 추서신청서 머리글 작성에도 많은 영감을 주셨다.
잡지 한권, 한권 사서 보면서 산더미처럼 많은 잡지를 모은 분으로 또한 동 시대를 살아오신 분으로 1930년대 시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0년대에 소파 방정환선생이 처음 아이들을 모아 놓고 어린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환경에서는 놀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방정환선생은 거구의 뚱보였는데 아이들도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늙은 사람을 ‘늙은이’ 젊은 사람은 ‘젊은이’ 똑같이 어린사람은 ‘어린이’ 라고 부르자 주장하며 어린이 잡지도 발행하고 어린이날도 만들었다.
지금에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어린이는 밥이나 축내는 천덕꾸러기, 나무나 해오는 존재였고 공부는 일부 특권층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대에 최용신이 시골 산촌에 들어와 어린이 교육을 표방한 것 자체도 대단한 것이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대학이란 게 거의 없었는데 김근수 교수도 보성전문을 나왔는데 당시에 최용신이 루씨여고를 나와 대학교육은 받은 건 매우 극소수의 엘리트 여성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엄청난 수퍼갑의 모습으로 샘골이 들어간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문화정책으로 민간 신문이 생겨났고 당시 민간 3대 일간지이던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된 최용신선생의 기사는 분량, 내용면에서 상당한 비중의 보도였다.
당시의 신문은 샘골을 '문자 그대로 미개한 상태, 여기야말로 등하불명의 처녀지'로 보도하였다.
안산에서 최용신선생과 연배가 비슷한 분들로 당시에 직접 최용신선생과 함께 동역한 분이나 지인, 주변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 샘골의 모습은 한마디로 굶주리고 헐벗는 상태였다.
다 쓰러져가는 흙집, 토담집에 쌀은 구경도 못하고 도토리나 산나물, 쑥 등으로 겨우 연명했다. 초근목피로 살아보지 않은 요즘 사람들은 이야기해도 이해도 못할 것이고 솔직히 그대로 전하는 것조차 창피하게 여길 정도 였다.
더욱이 봉건적이며 양반 상놈의 구별도 심하고, 예배당에서는 남녀가 따로 앉았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 최용신선생이 샘골에 들어와 어린이는 물론 부녀자, 노인들까지 한글을 터득해 주었고 보건위생. 생활개선, 소득증대 운동을 펼쳐 상당한 성과을 냈다는 것은 놀라운 성과였다.
가장 어려운시기 수원고농 학생들이 최용신선생을 도와주었는데 이때 앞장서 직접 도운 최용신전기의 저자 류달영교수(1911~, 전 서울대명예교수)는 당시의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노예와 같은 시대환경이라고 하였다.
그런 시대가 최용신선생을 만들었다. 최용신의 활동과 정신을 슈바이처, 페스탈로치 이상으로 평가하였다.
“안산시로서 최용신선생은 너무나 자랑스런 정말 귀중한 자산이다. 소중히 잘 가꾸어 간다면 정말 훌륭한 도시가 될 것이다.”
1994년 류달영 교수는 안산시청으로 직접 찾아가 당시의 김태수 안산시장에게 "지금의 최용신 유적지 앞의 주변 공터 일대를 공원으로 편입하여 최용신기념공원으로 만들라. 당신에게도 대단한 업적이 될 것이다."고 강력히 권고 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주변 일대에 모두 아파트가 들어서자 "최용신 유적지를 손바닥만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도 뚝 잘라 파혜쳐서 주차장을 만들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한심한 사람들이다." 라고 하였다.
제가 들은 1930년대의 샘골의 시대환경은 극한의 상황이었다.
국민의 80% 이상이 문맹이던 시절 샘골 뿐만 아니라 식민지 농촌의 현실이 모두 그랬다.
참조
회원 글
http://cafe.daum.net/ansanhis/Btth/114
류달영교수 인터뷰, 음성파일
http://blog.naver.com/kmo21/40092002860
김근수교수 인터뷰, 음성파일
http://blog.naver.com/kmo21/40092274591
첫댓글 공감이 가는 역사적 사실이라 믿어집니다. 노력하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