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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 만재도 지도
만재도(晩財島)
자연의 보물을 가득 담은 섬
만재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5°28′, 북위 34°12′에 위치하며 목포 남서쪽 120km, 흑산도 남쪽 45km 지점에 있다. 면적 0.590km2, 해안선 길이 5.5km, 연평균 기온 14.1℃, 연평균 강수량 1,172mm의 작은 섬이다.
산 높이 176m인 만재도에 48가구, 99명(2013년 기준)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위에 있는 내 · 외마도, 국도, 녹도, 흑도, 제서, 간서, 백서 등과 함께 소중간군도를 이루고 있다.
위치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딸린 섬 |
위도 |
북위 34°12′ |
경도 |
동경 125°28′ |
면적 |
0.590km2 |
해안선 길이 |
5.5km |
인구 |
48가구, 99명(2013년) |
목차
만재도 개요
만재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20km의 거리에 위치한 섬으로
신안군 흑산면에 속해 있다. 예전에는 진도군 조도면에 속하였으나,
1983년 행정구역이 재편되어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0.59km2의
면적을 가진 아담한 크기의 섬이다.
섬에 사람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조선 숙종 26년(1700)경으로
평택 임씨인 임충재가 진도에서 이주해와 정착하였으며, 그 후에 김해 김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 온다.
바다 한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먼데 섬 또는 만대도라고 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晩島가 된다. 또 다른 지명 유래로는 재물을 가득 실은 섬의 의미로 만재도(晩財島) 또는 해가 지고 나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 하여 만재도라 했다
한다.
태도군도에서 남쪽으로 만재도가 있고 그보다 더 남서쪽으로 가거도가 있으며 가거도보다는 만재도가 목포항과 더 가깝다. 그런데 여객선은 목포항에서 흑산도와 상 · 하태도를 경유하여 가거도에서 1시간 정도 머무르다가 만재도로 향하는 코스로 운항하고 있다. 뱃길로 무려 5시간이 넘게 걸리다 보니 만재도가 낙도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쾌속선이 가져온 1일 생활권 시대라
해도 만재도에 가면, 꼼짝없이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다.
이 작은 섬이 한때는 돈섬, 보물섬으로 불리며 돈이 풍족했던 적이 있었다. 주민들은 만재도의 황금기를 1930~1960년대라고 회상한다. 당시는 만재도 근해에서 전갱이과의 가라지(아지)라는 생선이 대풍을 이루던 시기였다. 가라지를 잡는 수백여 척의 풍선(돛단배)들이 성시를 이루었고, 이곳에서
가라지파시가 열려 거래가 이루어지니 자연히 풍요를 누리는 잘사는 섬이 되었다. 돈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을 앞 해변에 있는 몽돌해수욕장에 진을 친 12동의 가건물 기생집에서는 노랫가락이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한다.
전갱이(가라지)
몽돌해수욕장
풍선(돛단배)
고등어보다 조금 큰 고급 어종인 가라지는 인근의 가거도나 하태도에서는 구경조차 못 하는데, 유독 만재도 부근에서만 많이 잡혔다. 해방 전후 온 민족이 가난했을
적에 만재도 사람들만은 이 가라지 덕에 부자였다 한다. 마을의 아이들이 가라지 몇 마리를 가게에 가지고
가서 사탕과 바꿔 먹는 풍속도가 만재도에는 있었다. 가라지가 가져다준 돈으로 섬 경제는 풍족했고, 그 덕분에 자녀들을 대학교육까지 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본 메이지대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인근의 하태도, 상태도, 가거도의 딸 가진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재도로 시집보내려 했던 시절이었다.
황금기에는 이 작은 섬에 100가구가 넘게 살았다. 마을
건너편 산 밑에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살던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 준다.
1960년대 초, 만재도 근해에서 가라지가 갑자기 사라져
38년간의 황금기가 끝난 것이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만 같던 풍족함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섬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부의 이주정책에 부응하여 농사라도
짓기 위해 많은 가구가 진도로 떠났다.
1965년에는 87가구 563명이 살았다. 그해 봄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3개월째 교통이 두절되었다. 농경지라고는 고작 밭 2,300평뿐으로 육지 같으면 한 농가의 경지
면적도 안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식량은 해초를 팔거나 고기를 잡아 목포에서 그때그때 사 오는 형편이라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해초와 산나물을 먹고 바람 잘 날만 기다리다가 섬 주민들이 범선(돛단배)을 타고 진도에 건너가 구호를 요청하였다.
당시 송인섭 진도 군수는 긴급양식을 싣고 현지로 가서 섬 주민들의 아사를 면하게 했다. 현지를
둘러본 송 군수는 주민들이 살아갈 방법이 없어 그대로 이곳에 두는 것은 매년 같은 일이 되풀이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31가구 191명을 반강제로 진도 본토에 이주를 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이 1년 남짓 살다가 그 외진 가난한 섬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섬에서 고기만 잡다가 쟁기질, 지게질 등 농사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만재도는 1965년의
식량파동 이후로 주민이 많이 줄었지만 지금은 45가구 95명이
살고 있다.
만재도 마을 전경
지금도 고기는 인근 가거도나 상 · 하태도보다 많이 잡힌다. 그러나
어장도 예전 같지 않고 어획량도 감소되어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여느 농어촌처럼 젊은이는
떠나가고, 아기 울음소리가 더 이상 나질 않으며, 노인들만
남는 섬이 되고 말 것이다.
당시 만재도 사람들은 11월이면 마른 생선과 미역 등을 돛단배에 가득 싣고 진도나 해남
등지로 가서 식량 및 생필품과 바꾸고 지붕을 이을 볏짚을 싣고 들어와 월동을 했다.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다르지만, 겨울이 되기 전에 목포 등지로 나가 살다가 봄이 되면 섬으로
돌아온다. 그야말로 만재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섬들이 겨울에는 무인도가 되다시피 하는 실정이다.
만재도 역시 여객선의 접안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종선이 마중 나와서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른다. 섬에 다가갈수록 선착장 위로 보이는 마을이 전부이며 고즈넉한 섬이다.
선착장
선착장은 섬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100m는 족히 될 정도로 긴 방파제 안에는 고작 고깃배 네댓 척이 정박해 있다. 어른의 키보다도 낮은 높이의 옹벽 옆으로 테트라포드가 쌓여 있고 방파제가 꺾이는 부분에는 몽돌해안이 있다. 주먹만 한 자갈로 이뤄진 해변이 초승달 모양으로 크게 휘어져 있다. 만재도에서 가장 먼저 외지인의 눈길을 빼앗는 것은 아무래도 이 앞짝지해수욕장이 아닐까 싶다.
종선
방파제용 테트라포드
만재도에는 해수욕장이 모두 세 곳이 있다. 선착장 옆에 몽돌로
이루어진 앞짝지해수욕장과 앞산 아래 건너짝지해수욕장 그리고 마을 남쪽 벼랑 아래에 있는 달피미짝지해수욕장이다.
깊은 물속도 들여다보이는 맑은 바다는 에메랄드빛으로 다가와서 하얗게 부서진다. 해변에 서
있는 흰날개해오라기가 푸른 바닷물 빛을 배경으로 서성거릴라치면 딴 세상에 와 있는 듯 눈이 부시고 잠시 시간이 멈춰진다.
앞짝지해변에서 산을 올려다보면, 왼쪽은 앞산이고 오른쪽은 큰산이다. 그 뒤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은 물세이산, 물살이 센 산이다. 앞산에는 오랜 세월 동안 만재도를 지키고 있는 지킴이마냥 높고 낮은 바위들이 어우러져 우뚝우뚝 서 있다.
섬의 지형은 서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지와 동쪽에 동서로 가로놓인 산지가 중앙 저지대에서 이어져 서부를 향하여 T자 형을 이루고 있다.
해변에서 바라보면 마을의 집들은 알록달록한 지붕의 윗부분만 보일 뿐, 나머지는 모두 돌담에
숨어 있다. 태풍 때문이다. 돌담이 없으면 집이 바람에 날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지붕까지 높게 두른 돌담은 태풍이라는 거대한 적과 맞서 싸우는 성벽 같아 보였다.
돌담집
T자모양의 섬
만재도는 신안 사람들도 잘 모르던 외진 섬이었다. 이 섬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 봄의 왈츠 덕이다. KBS 2TV 드라마 봄의 왈츠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청산도에서 85%가량 촬영했고, 만재도에서 10%, 비금도에서 나머지 부분을 찍었다. 만재도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불과 몇 분에 불과했지만, 공중파 방송의 위력 때문에 섬의 이름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드라마
장면 중 어린 시절의 수호와 은영이가 목선을 타고 청산도에서 표류해 와서 잠시 머무르던 섬의 배경이 만재도였다.
어린 수호와 은영이가 표류돼 온 곳이 달피미짝지였고, 은영이가 자갈로 작은 탑을 쌓아 소망을
빌고 수호가 은영에게 주려고 조개껍질을 줍던 곳이 앞짝지 해변이다.
최근에는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 1박 2일 촬영지로
채택되면서 만재도의 매력이 전 국민에게 소개되었다. 1박 2일
프로그램 덕에 만재도를 찾는 관광객도 늘게 되었다. 특산물로는 우럭,
돔, 장어, 전복, 해삼, 홍합 등이 많이 나며 돌김,
미역, 톳 등 각종 해조류가 유명하다.
감성돔
돌돔
해삼
만재도 둘러보기
필자는 이 섬을 탐사하려고 20년을 벼르던 터라 설레기까지 했다. 예전에도 완도에서 탐사선(등대호)을
몰고 만재도로 가던 중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도중에 되돌아온 적이 네 차례나 된다. 1992년에는 먼
바다를 항해하다 키가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다른 배에 견인되어 돌아왔고, 1994, 1997년에는 항해
중 풍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2007년 추수감사절을
일주일 앞두고 탐사선 등태호를 타고 꿈에 그리던 이곳을 방문하여 일박하게 됐다. 그리고 2012년 6월에 동료들과 이 섬을 방문하고 서해안 격렬비열도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
지금은 매일같이 정기 여객선이 드나들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목포를 잇는 배편은 이틀에
한 번, 짝숫날만 운항하였다. 짝숫날 풍랑으로 출항하지 못한
선편은 다음날 날씨가 좋아지더라도 홀숫날이라는 이유로 배가 가지 않는 교통의 오지에 속한 곳이다. 갑자기
급한 환자나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해경이나 119의 도움 없이는 해결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만재도는 방파제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 두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길 입구에 만재도의
유일한 편의 시설인 만재슈퍼가 있고 이곳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면 만재침례교회로 가는 오르막길이다. 마을로
들어가니, 돌담길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돌담길 사이로
노인 몇 분이 어선의 주낙을 정리하고 손질한 주낙에 미끼를 끼우고 있었다. 섬마을의 평화로운 풍정이다. 도시의 노인들이 은퇴 후 겪는 무위고(無爲苦)에 비하면, 약간의 벌이도 되는 소일거리가 있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노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는 주민
주낙을 손질하는 주민들
어느 섬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만재도 역시 거의 비어 있다. 젊은 사람들은 뭍으로 도시로 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주로 노인층이라는 점이 다른 섬의 사정과 다르지 않다. 특히,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철이면 노인들은 자식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한겨울을 보내기 때문에 몇 가구 남아 있지 않게 된다고 한다. 해초를 뜯거나 고기를 잡는 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 입구에 있는 슈퍼에서 해안을 낀 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가면 또 다른 마을이 나오는데 입구에 장흥 고씨
세장산비가 서 있다. 입구에 치안센터가 있는 마을길은 서쪽으로 이어지는데 빈 집이 태반이고 텃밭들이
많은 편이다.
오른쪽으로 새로 지은 단층짜리 회색 건물이 만재도 보건소이다. 그 앞은 제법 넓은 마당이
있는데 예전에 흑산초등학교 만재분교였던 곳이다. 그러나 학교였음을 입증할 만한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콘도로 사용되는 민박 시설이 들어서 있다.
학교 옆의 동백나무 숲이 할머니 당숲이다. 오래전부터 섬사람들은 이 할머니 당숲에서 당제를
지내왔다. 할머니 당숲 안으로 드니, 교장선생님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 풀밭이다. 만재도 사람들이 할머니 당숲을 소중히 여기고 숭앙하는 이유는 숲 바로 아래에
섬의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이 있기 때문이다. 섬에서 물은 곧 생명의 원천이다.
만재도에는 할머니 당숲과 짝을 이루는 할아버지 당숲이 있다. 등대 옆에 위치한 숲인데,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176m)을 할아버지 당숲이라 한다. 할아버지 당숲은 동백과 후박나무가 우거진 숲이다. 땔감이 아무리
부족해도 절대 손을 대지 않은 채 신령스럽게 모셔온 당숲이다.
동백나무 숲
후박나무 숲
폐교 앞으로 난 포장길을 따라 곧장 가면 발전소로 이어진다. 발전소
정문에 있는 준공기념 표지석을 보니 1997년으로 새겨져 있다. 내연발전소가
준공된 덕분에 섬사람들은 달라진 세상을 맞게 되었다. 마을주민들은, 호롱불만
켜고 살다 백열등 하나 밝히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며 처음 본 그 환한 빛이 마치 천국의 빛과 같았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발전소 옆에는 데크 시설을 해 두었는데, 이곳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시작된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이내 계단은 끝나고 산책길이 이어진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는 척박한 땅이지만 고구마나 감자, 시호라는 약초를 재배하는 곳이다. 이곳이 쇠끝너머(마을너머)인데
여기에 지하수를 담수해 하루 100t가량의 식수를 생산할 수 있는 취수원도 설치해 놓았다.
시호
여기서 계속 올라가면 능선. 해변에서 채 10분도 되지 않아 오른 능선인데 사방이 뻥 뚫리면서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마을
뒤편으로는 아찔한 벼랑이고 꼭 코끼리를 닮은 내마, 외마 두 개의 섬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인 바위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는 큰산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송신탑으로 가는 길이다.
전화가 섬에 들어온 것은 1986년이었고 휴대폰도
2005년에 SK텔레콤에서 섬 능선에 송수신 안테나를 세우면서 통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신호가 약해 잘 끊기고 배터리를 많이 소비한다. 오른쪽은
급경사의 절벽이라 바위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만재도는 마을이 있는 쪽을
제외한 북서쪽은 아찔한 벼랑이다.
송신탑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왼쪽은 현란한 자태를 뽐내는 암석해변, 오른쪽은
단순하면서도 고고한 몽돌해변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이곳에서 해발 176m의 마구산을 바라보며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갔다.
암석해변
몽돌해변
폐교 앞에서 왼쪽으로는 해안길이 이어지고, 그 앞에는 갯바위와 연결된 아주 짧은 방파제가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는 갯바위 지대이면서 낮은 곳이라 파도가 치면 넘칠 것 같은 그런 지형이다. 왼쪽으로는 짝지 해수욕장이 이어지고 갯바위를 타고 동쪽으로 가면 끝지점에도 방파제가 있다. 방파제 가는 길목에도 작은 해수욕장이 하나 있다.
만재도가 선편으로 가는 거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 있어 한 번 가 보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작은 섬이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섬이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마침내 가게 된 것도 감회가 새로웠다. 가기 힘든 섬이지만 만재도는 태고적 신비한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보물섬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만재도 관광
가거도나 마라도, 백령도 등은 국토의 끝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데 비해 만재도는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섬이라 이 섬이 갖고 있는 보물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여객선으로 5시간 남짓 걸려야 도착하는 만재도는 접근성이 좋지 않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그만큼 자연 그대로 본연의 생태환경을 잘 보존하고 있는 장점이 이 섬에는 있다. 큰 배를 접안할 수 있는 선착장이 없어 차도선이 닿질 않으므로 자동차는 물론 오토바이도 경운기도 없다. 간간이 들려오는 어선의 엔진 소리를 제외하면 온통 자연의 소리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다르고 닿는 소리가 다르다. 높새바람,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의 소리가 제각기 다르고 세기에 따라, 방향에 따라 또다른 소리결을 만들어 낸다.
파도 소리 또한 해변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다르다. 바위에
세차게 부딪쳐 내는 역동적인 소리, 몽돌에 닿는 뭉근한 소리, 모래알에
닿는 깨알 같은 소리. 뭍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새들이 숲의 소리를 만들어 내고 파도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갈매기 소리는 물때에 따라, 어선의 드나듦에 따라 합창의 멜로디와 강약이 달라진다. 돌담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노동요(勞動謠)나 타령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소리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태고적
원시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섬은 온갖 소음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평화로운 휴양, 진정한
휴식을 누리게끔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간직한 만재도의 보물을 찾아 배를 타고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의 해안은 다양한 형태의 해식애(海蝕崖)가 일품이다. 처음 접한 해안의 절경은 서들개. 삼각형
모양의 해벽이 거대하여 웅장함에 압도당하고 만다.
앞산자락의 녹도를 스쳐 지나가면 주상절리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모양도 다양해진다. 주상절리 기둥이 마치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듯하다는 지붕바위 앞에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새어 나오는 감탄사를 거두기도 전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붉은
용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진 용바위가 나타나고, 그 옆 거북바위를 거쳐 구멍이 뚫린 남대문바위가 이어지며
해상유람의 절정을 보여 준다.
맑은 바닷물이 일품인 해변에는 자잘하고 구슬 같은 돌들이 파도가 칠 때마다 스르르 스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고 그 해변의 뒤편엔
암벽등반을 하는 등산가들이 탐을 낼 만한 거대한 절벽이 바다로부터 하늘로 솟아 있다.
해식동굴
터널바위
저자 : 이재언 |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대학에서 복지학을 전공했고,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0년-1996년까지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선 등대호를 타고 선교활동을 하던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 2009년부터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중이며 전남일보 섬전문 시민 기자이다
세상과 잠시 떨어지고 싶다면… 만재도로
만재도(신안)=글·사진 스포츠월드 김산환 기자 [세계일보 기사 입력일 : 2008/07/09]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쾌속선을 타고 흑산도와 홍도,
상태와 하태도를 거쳐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까지 꼬박 4시간을 달려왔는데도 여정은 남아 있다. 목적지는 만재도. 가거도에서 만재도까지는 또 1시간을 가야 한다.
목포를 기점으로 했을 때 만재도는 가거도에 비해 가깝다. 또 지리적으로도 가거도가 국토
최서남단이다. 하지만, 뱃길로는 만재도가 가장 멀다. 이는 쾌속선이 이용객이 많은 흑산도와 홍도, 가거도를 먼저 방문하기
때문. 따라서 만재도를 향하는 여행객은 원없이 배멀미를 겪는다. 혹자는
당연히 그런 곳을 왜 가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만재도에 있다. 만재도에 가본 사람만이 배멀미에 반송장이 돼가면서도 만재도를 찾는 이유를 안다. 며칠쯤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단절을 선언하고 싶은 이들, 세상의
끝에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만재도는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다.
만재도는 작은 섬이다. 고작해야 50여가구에 100여명이 산다. 만재도(晩才島)는 ‘재물이 많은 섬’이란 뜻. 1960년대까지는 가라지(전갱이과) 파시가 형성돼 섬의 이름값을 했다. 그러나 그런 호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 몇해전에는 분교마저 폐교됐다. 어쩌면 지금 이 섬에서 평생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하늘로 돌아가면 ‘빈 섬’이 될지도 모를 그런 섬이다.
만재도는 T자를 왼쪽으로 뉘어놓은 모양이다. 만재도에서
동쪽으로 뻗은 해안은 해변으로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져 있다. 만재분교 뒤로 솟은 야트막한 산이 없다면
파도가 섬의 이쪽과 저쪽을 수시로 넘나들 그런 섬이다. 만재도에 발을 딛는 일은 ‘상륙작전’을 방불케
한다. 바다가 얕아서 선착장에 쾌속선을 댈 수가 없다. 따라서
쾌속선이 바다에 멈추면 조그만 연락선이 승객을 태우러 온다. 이것은 만재도를 빠져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섬의 동쪽에서 기적이 울리면 쾌속선이 보이지 않아도 연락선은 서둘러 바다로 마중을 나간다.
기실 만재도는 신안 사람들도 모르던 외진 섬이었다. 이 섬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 ‘봄의 왈츠’ 때문이다. 어린 수호와 은영이 섬에 표류해 온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당시 드라마를 찍었던 곳은 섬 한가운데 자리한 마을 앞 몽돌 해변. ‘짝지’라
불리는 이 해변은 파도가 들고 날 때마다 고른 숨소리를 낸다.
해변에서 바라보면 마을의 집들은 알록달록한 지붕만 빼고 모두 돌담에 숨어 있다. 태풍 때문이다. 돌담이 없으면 지붕은 훌쩍훌쩍 바람에 날아간다. 마을로 드는 길은
돌담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길은 산책로가 좋다. 양쪽이 바다로 되어 있어 끊일 듯 이어진 섬을
따라 거니는 맛이 있다. 어디를 가도 30분이면 바다와 맞닥트리는
섬에서 여행자들은 발길이 닿는 데로 이 섬 구석구석을 훑고 다닌다. 그러다 쉬기 좋은 공간을 만나면
눌러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다.
만재도는 마을이 있는 쪽을 제외한 북서쪽은 아찔한 벼랑이다.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서 보면
거제 해금강이나 홍도가 부럽지 않다. 코끼리를 닮은 무인도 내마와 외마도 볼만하다. 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가도 된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마구산(176m)으로 가는 능선에는 키낮은 풀들이 우거진 오솔길이 있다. 30분쯤
걸으면 뱃사람들의 의지가 되는 작은 등대가 있다. 등대 너머로는 길쭉한 돌기둥이 잇달아 붙어 있는 주상절리형의
벼랑이 펼쳐졌다.
트레킹이나 낚시 외에 만재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니 꼭 무엇을 할 필요는
없다. 세상과의 인연을 잠시 접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면 될 뿐이다. 잘
터지지 않는 휴대전화는 꺼 놓는 게 좋다. 반나절쯤 몽돌해변을 훑는 파도로 마음을 씻고, 또 반나절쯤은 마구산의 오솔길에 앉아 수풀을 흔드는 바람을 느껴본다. 그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어 며칠쯤 보내고 나면 잊고 살던 ‘자아’와 맞닥트릴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귀띔
지난해까지 만재도에는 짝수날에만 쾌속선이 오갔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매일 운항한다. 쾌속선은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오전 8시 출발, 만재도에서는 오후 1시에 출발한다.
목포에서 만재도까지는 5시간, 만재도에서 목포까지는 4시간 걸린다. 목포에서 만재도까지 뱃삯은 61,700원. 동양고속(061-243-2111).
여름철에는 낚싯배도 운영된다. 이 배는 목포에서 다른 섬을 들리지 않고 곧장 만재도로 가기
때문에 쾌속선보다 빠르다. 2∼3시간쯤 걸린다. 뱃삯은 왕복 9만원. 만재이선장(061-285-9820)
만재도에는 변변한 숙박시설이 없다. 지난해 폐교한 만재분교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민박이 유일하다. 이곳은 마을 이장이 관리를 한다. 식당도 없다. 민박집에 부탁을 하면 식사를 마련해 준다. 최규환 이장(010-7174-8654)
만재도
만재도(신안)=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한국일보 기사 입력일 : 2006.03.16.]
재물이 가득한 섬, 혹은 해가 질 무렵 고기가 많이 잡힌다 해서 이름했다는 만재도(晩才島). 섬 주민들은 한 곳에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산다. 가구수는 채 50이 안되고 인구도 120명 남짓이다. 정말 작은 섬마을이다.
이 작은 만재도가 한때는 '돈섬'으로 '보물섬'으로 불리며 떵떵거리던 적이 있었다. 주민들은 만재도의 황금기를 1930~60년대라고 회상한다. 전갱이과의 '가라지'라는 생선이 대풍을 이루던 시기다.
고등어 보다 조금 큰 고급 어종인 가라지가 인근의 가거도나 하태도에서는 구경도 못하는데 유독 만재도에서만 많이 잡혔다고 한다. 뱃일을 나가면 배가 무거워 다 건져오오 못한 정도였다고 한다. 이 가라지 덕에 해방전후 우리 국민 모두가 가난했을 때 만재도 사람들만은 부자였다. 하기야 육지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보낸 그들이다.
가라지가 물어다 준 돈으로 섬은 풍족했고 덕분에 많은 이들이 대학물까지 먹을 수 있었다. 일제 때 일본의 메이지(明治)대에 유학생까지 배출했던 풍요의 섬이었다. 인근의 하태도, 상태고, 가거도의 딸 가진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재도로 시집 보내려 했다. 마을의 아이들이 가라지 몇 마리 들고 가서는 가게에서 과자와 바꿔먹던 시절 이야기다.
돈은 사람을 불러 당시에는 섬에 100가구가 넘었었다. 마을 건너편 산자락에는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던 집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여러 남정네들이 작은 마누라를 두고 살 정도였다고 하니 풍요의 정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60년대 초 어느 해부터 갑자기 가라지가 뚝 끊겼다. 어르신들 얘기로 딱 38년간의 황금기가 끝났다고 했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던 풍족함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섬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부의 이주 정책으로 진도로 농사 지으러 떠난 가구도 꽤 된다.
지금도 고기야 인근 가거도나 상ㆍ하태도 보다야 많이 잡힌다고 하지만 예전만큼 넉넉한 편이 아니다. 여느 농어촌 마냥 젊은이는 떠나가고, 아기 울음 그치고, 노인들만 남는 섬이 되고 있다.
막막했던 이 섬은 최근 새로운 희망에 들떴었다. 지난해(2005년) 이곳에서 윤석호 감독의 드라마 '봄의 왈츠'를 찍으면서 부터다. '겨울연가'나 '가을동화', '여름향기' 같은 윤 감독의 드라마로 배경이 됐던 곳들이 모두 유명 관광지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 드라마를 통해 섬의 아름다움이 소개돼 관광이라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이 섬에는 드라마 오픈세트장까지 갖춰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군청이나 도청의 지원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고 주민들 또한 새로운 모험에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잘 된 드라마 한편으로 지역이 얼마나 달라지는 지를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 섬풍경의 주무대를 완도군 청산도에 빼앗겼고 만재도는 들러리만 서고 말았다. 방영된 것도 단 몇 분. 아역의 수호와 은영이가 목선을 타고 청산도에서 표류해 와서 잠시 머물던 섬이 이곳 만재도인데 섬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뒤늦게 아쉬워했다. 작년에 좀 더 적극적으로 촬영장 마케팅을 나서지 못했을까, 촬영 온 그들에게 좀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을까, 후회했다.
그렇다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윤 감독을 매혹시켰던 이 섬의 아름다운 풍광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규환(54) 이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낚시꾼이나 찾던 섬을 가족이 와서 편안히 쉴 수 있는 휴양지로 만들겁니다. 폐교를 고쳐 숙박시설을 만드는 등 한 걸음 한 걸음 준비해 나갈랍니다. 주민들과 한데 뭉쳐 행여 아름다운 섬이 난개발로 망가지지 않도록 그렇게 만들렵니다."
'삼시세끼 어촌편' 지정된 만재도, 만재도는 어떤 곳?
요트피아 박상배 기자 [기사 입력일 : 2015.01.03.]
배우 차승원·유해진·장근석이 출연한 '삼시세끼 어촌편'의 촬영지인 만재도는 전라남도 목포 남동쪽 105km, 흑산도 남쪽 45km 지점에 있으며, 거주인구는 현재 50여 명 정도의 작은 섬마을이다.
1700년경 평택 임씨가 처음 들어왔으며, 그 뒤 김해 김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섬의 최고점은 마구산(177m)이며, 섬의 지형은 서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지와 동쪽에 동서로 가로놓인 산지가 중앙 저지에 이어져 서부를 향한 T자형을 이룬다.
해안은 암석해안이 많고, 서쪽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되어 있으며, 1월 평균기온 3℃, 8월 평균기온 26℃, 연 강수량 1,227mm이다.
만재도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우럭·전갱이·도미·농어·불볼락·꽁치·갈치 등 어족의 회유가 많아 연중 어로를 할 수 있는 좋은 어장으로 어업이 성하며, 해녀들은 돌미역과 돌다시마, 해삼, 전복, 홍합, 우뭇가사리 등을 주로 채취하고 농산물로는 고구마·보리·콩 등이 소량 생산된다.
만재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파출소, 보건소가 있고 정기여객선이 매일 운항된다. 만재도는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배로 가며, 하루 한번 배를 운항한다. 운항시간은 오전 8시 목포항을 출항하여, 도착은 오후 1시 30분 정도이며, 목포에서 만재도로 직항은 없고 목포출발-비금-도초-흑산-홍도-상태-중태-하태-가거도를 거쳐 만재도로 와야 한다. 만재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가는 길은 힘들지만, 그만큼 너무 아름다운 섬이다"고 한다.
삼시세끼와 만재도
《삼시세끼》는 2014년 10월 17일부터 tvN에서 방영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번외 편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만재도에서 촬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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