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태국 사찰 방문기 (6)
방콕과
차이나 타운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이 글은 태국을 시작으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들의 사찰과 현지 모습을 직접 방문하여 전하는 시리즈이다.
방콕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사찰도 있고, 왓 뜨라이밋이라는 유명사찰이 있다. 왓뜨라이밋이라는 사찰은 검색을 해보면 아주 많이 나오고 황금불상을 모신 사진도 많이 나오지만 그 자세한 내용을 전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후에 이 사찰을 방문하였는데, 사찰 입구에는 관광버스가 2-3대가 있었다. 여기에 태국으로 온 중국 사람들의 이민사 박물관이 있어서 중국 사람들이 단체로 관광온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 관광객으로 넘쳐나는데 태국도 중국 관광객이 아주 많다고 한다. 사찰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시장처럼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법당이 있었고, 왓뜨라이밋은 들어가면서 왼쪽으로 우뚝 서 있는데 태국 전통 사찰이 모습이 아니고 그 규모가 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탑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래의 글은 인터넷에 소개된 왓 뜨라이밋 사찰에 대해 글이다.
차이나타운 동쪽 입구에 있는 황금불상을 모신 사원이다. 이곳이 차이나타운에 있기 때문인지 이 사찰 건물의 2층은 차이나타운 이민사 박물관이고 3층은 황금불상의 역사와 발견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4층에 황금불상을 모신 법당이 있다. 황금불상의 공식 명칭은 ‘프리 마하 붓다 쑤완 빠띠마꼰(Phra Maha Buddha Suwan Palmakon)'으로 무게는 5.5톤의 순금으로 만든 3미터 높이의 불상이다.
황금불상은 15세기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수코타이 양식의 불상으로 라마 3세때(즉위기간: 1824 ~ 1851) 수코타이에서 방콕으로 옮겨왔다.
불상은 미얀마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회반죽으로 덧입혀 놓은 것이 1955년 운송 도중 사고로 회반죽이 깨지면서 본래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황금불상은 현재 프리 마하 몬듭(Phra Maha Mondo)에 모셔져 있다. 2008년에 완공된 프리마하몬듭은 4층의 거대한 탑 모형의 건물로 황금불상이 있는 건물에 걸맞게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설했다. 이 불상은 원래 수코타이 왕조시기 조성되어 수코타이 지역에 있다가 방콕으로 옮겨온 불상이다.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태국역사를 간략하게라도 알아야 한다.
타이인들은 13세기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크메르 제국 지배하에 있던 1238년 수코타이에서 타이 족장들이 크메르를 타도하고 타이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왕 시절 오늘날의 타이 지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다 1365년에 아유타야 왕국에 넘어갔다. 아유타야 왕국은 1700년대까지 타이 남부와 중부 지역을 지배한다. 수코타이 왕국이 쇠퇴하자 차오프라야 강가에 1350년 새로운 타이 왕국이 세워졌다. 수코타이 왕국 시절에도 타이 북부에는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란나타이 왕국이 융성했으며 독립 왕국으로 유지해오다, 1558년 버마와 아유타야와 번갈아 가며 식민통치를 받으며, 오랜 기간 동안 존속되다 결국에는 아유타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의 첫 째 왕 라마티보디 1세는 타이 역사에 두가지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는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융성하게 해 힌두교 왕국인 이웃 크메르제국과 구별되게 한 것이고 둘째는 같은 이름의 힌두교 법률서와 타이의 전통 풍습에 기초해 다르마샤스트라(Dharmashastra)라는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다르마샤스트라는 19세기까지 타이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포르투갈 인들을 시작으로 아유타야 왕국은 서양과 접촉을 조금 가졌지만 1800년대까지는 이웃하는 나라들과 인도, 중국 등과의 관계가 우선되었다. 4백 년 이상 계속 된 아유타야왕국은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수도가 불타고 6개 부분으로 분열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때 딱신(Taksin) 장군이 타이 왕국을 재통일하여 톤부리에 새로 수도를 정하고 1769년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전해진 바에 의하면 탁신은 정신 이상자가 되어 톤부리 왕국은 1대로 끝나고 1782년 차크리(Chakri)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 짜끄리 왕조의 첫째 왕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톤부리에서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에 있는 방콕에 수도를 건설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수코타이 왕국, 아유타이 왕국, 랏타나코신 왕국, 그리고 현 왕조인 짜끄리 왕조로 이어진다. 이 왕가의 수장은 태국의 국왕이 된다. 이 왕가는 1782년 딱신 대왕의 톤부리 통치를 마지막으로 라따나꼬신 시대 이후부터 태국을 통치해 왔으며, 그가 라마 1세가 된다. 현재는 라마 10세이다. 짜끄라 왕조 건설 시기는 한국의 조선 22대 왕인 정조시기이다.
정조는 1776년 할아버지 영조를 뒤를 이어 1800년까지 조선을 통치하였다.
4층 법당의 황금불상
수코타이 왓마하 사원의 여기에 있던 불상을 옮겨왔다
태국지도
중국 이민사 박물관에 있는 중국인들이 차이나타운에서 법회하는 모습을 만든 인형
라마 1세를 이어 왕이 된 후계자들은 1826년 영국이 이웃 버마에서 승리한 일을 계기로 유럽 식민주의의 대두에 대응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았다. 태국은 서구 열강이 아시아로 와서 많은 나라들을 침략할 때도 나라를 잘 지켜냈다. 19세기 말에 영국과 프랑스의 압박 속에서도 쳉훙 왕국 등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독립국 가운데서는 홀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또 20세기 중반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사회주의 정권이 계속해서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본주의를 꿋꿋하게 지켜냈다. 이러한 이유로 태국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러나 군부 집권을 피할 수 없었다. 1992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군부는 물러났으나 아직 이 나라는 군인의 발언권이 강하다.
여기까지가 현재까지의 간략한 태국 역사이다.
현 왕조 바로 직전의 랏타라코신 시대 초기에 새로운 수도가 건립되었다. 대부분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새로 왕조를 건설하면 초기의 왕들은 국가와 종교를 재건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왕실의 명령으로 방콕에 수많은 새로운 절들이 신축되거나 중창되었으며 북부의 마을들에 방치되었던 수 천 개의 고대 불상들도 잘 보존하기 위하여 방콕에 있는 절들로 옮겨지게 되었다. 왕들은 왕실의 일원이나 귀족들에게 이러한 임무를 맡아서 하도록 허락했다. 아마도 ‘프라 부다 마하 수와나 파티마콤’이 ‘왓 프라야 크라이’로 옮겨진 것은 라마 3세 왕이 통치하던 시기 (1824-1851)에 프라야 크라이 코사의 명령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왓 프라야 크라이’를 창건한 ‘프라야 크라이 코사’는 라마 3세 왕의 부관으로 훗날 ‘프라야 쵸유엑 라쥬세티’라는 칭호를 하사받은 차오 수아 분마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왕은 다른 사찰과의 경합 끝에 수도의 사찰로 지명된 이 절에 ‘왓 쵸타나람’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창건자를 기리기 위하여 계속해서 ‘왓 프라야 크라이’라고 불렀다. 그 창건자는 핀클라오 왕대에도 공직에 있었으며 ‘프라야 크라이 코사’라는 작위를 받았다.
불상을 옮기는 장면
불상을 배웅하는 사람들
어둠과 폭우로 작업을 중단했다
불상을 옮기때 사용한 밧줄
차이나타운 이민사 박물관 전시대
차이나타운 이민사 박물관에 있는 중국인들의 태국 이동 경로도
라마 3세 시기에 수코타이에서 방콕으로 거대한 불상을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뗏목으로 강을 이용하여 방콕으로 옮겨왔다. 지금 왓 뜨라이밋에 있는 불상은 지난 8월호에 소개된 수코타이 역사공원 지역에 있는 가장 큰 유적지인 왓 마하탄에서 가져온 것이다.
3층 벽에 붙어 있는 설명서에는 태국어, 영어, 한자로 이 불상의 이동경로와 설명이 그림 자료와 함께 잘 나와있다. 아래 글은 영어를 번역한 것이다.
1935년 ‘왓 프라야 크라이’에서 ‘왓 트라이밋 위타야란’으로 거대한 불상을 옮기는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동 아시아 회사에서 이 일을 위하여 트럭을 공급했다. 챠로덴 크렁로(路)를 통해 운반이 이루어졌다. 전에 이미 ‘왓프라야 크라이’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의 주요 제자인 문수사리불상이 주불상을 보좌했다. 간간히 트럭에 탄 사람들이 나무로 된 끝이 포크와 같이 구부러진 형태의 막대기를 들고 전선과 바퀴달인 운반도구의 줄이 불상들의 무리에 닿지 않도록 주위를 기울이고 있었다.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왓프라야 크라이’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성스러운 불상을 배웅하기 위해 나왔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들이 가시는 길목에 줄지어 서 있었다. 부처님의 상들이 ‘왓 트라이밋 위타야람’에 도착하자 체디곁에 있는 임시 거처로 모셔졌다. 이때는 ‘왓 트라이밋 위타야람’ 사찰 또한 황폐한 모습이어서 개축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이 불상은 사람들에게 ‘루앙 포 왓 프라야 크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많은 다른 사찰들도 이 부처님을 모셔가고 싶어서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계획이 변경이 되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처님은 수 년 동안 ‘왓 트라이밋 위타야람’ 사찰에 계속 안치되어 있었다.
1955년 5월 25일 ‘루앙 포 왓 프라야 크라이’부처님을 비하라로 옮긴 것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직접 했다. 체디 옆의 임시거처에서 부처님을 여러 개의 둥근 나무통 위에 놓고 천천히 굴려서 비하라 앞의 잔디로 옮겼다. 불상 주위를 밧줄로 묶고 불상 밑으로 밧줄을 둘러서 머리위에 매다는 고리를 만들어서 도르래와 갈고리로 비하라 2층으로 감아올리려는 계획이었다. 오전 11시 무렵에 작업을 시작해서 황혼 무렵이 되었는데도 계속 실패만 거듭했다. 마지막에 불상을 조금 들어올리기는 했으나 무게를 못 이기고 밧줄이 끊어졌다. 폭우와 번개가 치는데 불상에 땅으로 추락하여 그 날은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불상을 다시 살펴보니 벽토 조각의 흔적이 있었다. 벽토 아래로는 여러 겹의 칠이 입혀져 있었다. 이 칠을 모두 벗겨내니 빛나는 순금의 부처님께서 그 안에서 나타나셨다.
불상이 있는 4층 법당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절을 하는 사람,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들, 안내하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로 넓고 화려한 법당이 비좁았다. 젊은 여성이 배꼽티를 입고 야하게 기념사진을 찍다가 안내인에게 꾸중을 듣고 옷맵시를 고쳐 입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