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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본격적인 겨울을 시작하기도 한참 전에 이런 눈폭탄을 맞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서울 관악구에는 40cm나 왔답니다. 대관령도 아닌데 이만한 눈이 올 수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늘이 하는 일은 역시 사람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문제는 일회성으로 그칠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이제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인데 말입니다. 올 겨울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인가? 미리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럴 수도 있겠구나 준비는 해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기후변화로 인한 결과인 줄 압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에 대하여 대부분 소극적입니다. 눈앞에 먹고살 걱정이나 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오늘 살아남지 못하면 내일은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11월을 보냅니다. 이제 시작되는 겨울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고민해봅니다. 그닥 춥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보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없는 살림에 따뜻한 것이 낫기는 하지만 자연의 순환을 생각하면 그것도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지요. 추울 때는 추워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익숙하니 그다지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열대지방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그냥 춘하추동 확실하게 나타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4계절의 풍경도 확실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게 대한민국 아니겠습니까. 이 하늘이 준 복을 스스로 발길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힘써 지켜야 합니다. 한 사람이 작은 일부터. ㅎㅎ
한 주간 고생하였습니다. 건강하게 행복한 주말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멋진 12월을 맞이하지요. ^)^
2024년 11월 마지막 날, 주말에 김종우 목사 드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로마서 13 :1)
<글레디에이터 II>
지도자의 잘못된 통치를 알면서도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포악하고 부도덕하고 잔인하고 나아가 하는 짓거리까지 괴팍한데 그것을 뻔히 보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합니다. 그런 통치자에게도 충성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하게 됩니다. 아무튼 국가사회가 유지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엮여서 작동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기본적인 규율이 무너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되었다고 그 때마다 처분하고 바꾼다면 아마도 국가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국민 모두의 마음을 흡족하게 통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부족하지만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직분과 직책에 대한 준수 의무라는 것도 있습니다. 군인이라면 당연히 일단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옛날 같으면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 왕이 악하든 착하든 그것을 떠나 우선하는 것이 국가 최고통치자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부대나 군인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라도 왕의 신변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일차적 의무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지도자가 악행인 줄 알면서 그 악행을 하도록 명령을 내릴 경우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복종해야 합니까, 거부해도 되는 겁니까? 어쩌면 개인의 가치관으로 판단할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숨어있습니다. 최고 통치자에게 함부로 반기를 들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악하다 해도 그를 추종하는 측근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들은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아가 그가 위기 때 혹 사고를 당하면 기회는 왔다 생각하고 자기가 나서서 권력을 쟁취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좋아서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퇴출을 바라면서 충성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행여 반역을 할 때 그에게 뱐역자 처벌이라는 명분을 주고 권력을 넘겨줄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주변에 분명히 숨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나설 수 없게 됩니다. 홀로 영웅이 된다는 일은 자칫 환상입니다.
쌍둥이 황제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고, 있는 자들만 희희낙락하며 즐기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최고의 오락이 검투장 시합입니다. 피가 튀며 생사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입니다. 검투사들은 그야말로 파리목숨입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환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 특출한 영웅이 등장하였습니다. 남다른 실력과 재능를 지니고 있습니다. 권력쟁취에 혈안이 되어 있던 ‘마크리누스’는 진작 ‘하노’(본명 루시우스)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검투사로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힘이 ‘분노’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최대로 이용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로마 군에게 잃은 하노의 분노는 온 로마를 향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최고 사령관이었던 ‘아카시우스’ 장군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크리누스는 하노에게 그와 대면시켜줄 것을 약속합니다. 하노의 실력과 재능은 황제 앞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마크리누스는 황제와도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두 황제의 특성을 잘 꾀고 있는 그는 황제의 마음까지 사며 권력에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대단한 즐거움을 선물로 주려고 정말 대단한 검투경기를 주최합니다. 황제와 관중이 모두가 완전히 몰입하고 그 경기로 인하여 어찌 보면 황실의 인기까지 얻게 됩니다. 백성의 현실과 원성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아우레리우스 황제의 딸인 ‘루실라’는 아카시우스 장군의 아내이지만 오래 전 떠나보낸 아들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목숨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이 홀로 떠나보낸 아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아픔이고 상처입니다. 아들이 그 엄마의 사정을 제대로 알고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검투장에서 본 뛰어난 투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마의 직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보고 싶던 아들 루시우스입니다. 20년의 세월 속에서 변했다고 하지만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몰래 찾아옵니다. 그리고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에게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주인 엄마의 꿈을 전해받습니다. 이 로마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꿈.
남편도 이미 아내의 꿈을 나누고 있습니다. 자기 군대가 로마 근교에 집결해 있기에 불러들이면 승산이 있습니다. 하노의 힘까지 보탠다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계획을 짜서 실천합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하녀의 밀고로 발각됩니다. 모두가 죄인이 되어 검투장에 나가게 됩니다. 사실 하노가 원수처럼 벼르고 있던 사람은 엄마의 남편인 아카시우스 장군입니다. 장군은 로마를 위해 하노를 대신 세우려 합니다. 이 권력투쟁을 뒤에서 마크리누스가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황제 하나를 관감히 처리하고는 실세 2인자까지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들을 하나씩 제거합니다. 황제도 아카시우스도 루실라까지. 그리고 하노까지 제거하면 끝입니다. 영화 ‘ 글레디에이터 II’(Gladiator II)를 보았습니다. 권력의 비정함을 봅니다.
그 날 어떻게 나뉘는가?
교회를 다니다 보면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일정한 교육을 받으면 세례를 받습니다. 옛날에는 그 때 세례명을 주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본받을 만한 신앙인 또는 교회 역사 속에 등장했던 훌륭한 신앙인의 이름을 따서 세례명으로 줍니다. 그런가 하면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어느 대단한 목사님이 다윗이란 이름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천주교에서는 영세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보다는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도 옛날에 저와 만나기 전 성당을 다녔습니다. 그 때 영세명이 카타리나였습니다. 어쩌면 좀 신비스럽기도 하고 남달라 보이기도 해서 굉장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이름을 주었던 것은 그런 사람처럼 신앙을 가져보란 의미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많은 이름 중에 특히 ‘다윗’은 매우 대단한 이름이지요. 종종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숭앙하는 인물 중에 모세가 있고 다음으로는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제대로 세운 성군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을 온전히 차지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확실하게 세운 왕입니다. 한 번의 못된 죄를 빼고는 흠잡을 데 없이 처음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잘 섬겼던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맘껏 드리고 싶어 했던 정말 하나님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신앙인이었지요. 오죽하면 하나님도 인정해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왜 다윗에게서 구세주가 나왔는지도 설명합니다. 행 13 : 22 - 23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래서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마 1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우리 구주 예수님이 누구의 자손으로 오십니까?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이방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시는데 한 여자가 찾아옵니다. 마 15 :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누가 찾아왔다고요? 한 가나안 여자가 다급히 찾아온 것입니다. 딸이 귀신 들렸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프고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고쳐보려고 얼마나 애썼겠습니까? 그런데 고쳐집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고치기 힘듭니다. 마침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분이라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생긴 믿음입니까? 이웃 지방이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알고 있었겠지요.
성경을 읽거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나 말씀을 들어보면 앞뒤가 잘 안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흘러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 사건도 어쩌면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방 여자가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대답을 보십시오. 마 15 :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이방인은 당신과 상관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방 땅에는 뭐하려고 가셨답니까? 앞뒤가 맞지를 않지요? 이방사람과는 상관없다면 그 이방 땅에는 갈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이방 땅에도 믿는 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하나님 백성보다 믿음이 있는 이방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진작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11 : 21 - 22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구원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착각 속에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약속의 땅을 향해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천국에 와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았지만 약속의 땅에 다 들어간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순례의 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천국 열차 티켓을 받았을 뿐입니다. 타고 안타고는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불행하게도 가는 도중에 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말립니까? 예,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옆에서 말려줄 돕는 자가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니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갑시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들 때 짐도 나눠 져주고 그러면서 갑시다. 우리 함께 배워야지요. 그리고 함께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혼자 천국 오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지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이방여자가 어떻게 이 뜻을 알고 이렇게 부를까요? 우리 마 1 : 1절에서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으로 온다고요? 다윗의 자손으로 온답니다. 옛날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을 때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셔서 오히려 내가 네 집을 지어주마 약속하십니다. 삼하 7 : 12 - 16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영원한 나라로 세워질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 약속과 예언을 따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 이방여자가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 우리 딸 좀 살려주십시오, 하고 말하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왜 구태여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단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도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메시야에 대해서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럴 만한 분이 유대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듣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누구에게 오셨는지 다시 확인해봅니다. 마 15 :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누구를 찾으려고 오셨답니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이방인은 대상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럴 바에는 그 이방 땅에 뭐하려 오십니까? 분명 목적이 있어서 오셨겠지요. 이 사건 바로 뒤에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십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은 이 여자를 만나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다급하게 자기를 필요로 하는 신자가 있음을 아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믿음을 시험해봅니다. 예수님이 모른 척해도 여자가 자꾸 따라붙습니다. 제자들도 귀찮아합니다. 마 15 : 25 - 26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제는 당시 유대인들의 습성대로 이방인을 개 취급합니다. 그럼에도 여자가 물러섭니까? 아닙니다. 뭐라고 합니까?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제 합격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내 자존심을 망가뜨려도 맞습니다. 가끔 보면 설교 듣다가 시험 들어서 교회 나오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시험 들으라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요? 렘 23 :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그렇습니다. 때로는 불방망이가 되어서 우리를 때립니다. 아프지요. 화가 납니다. 그렇다고 맞장 뜨겠습니까? 아니면 뛰쳐나갑니까?
요즘은 그런 부모가 없겠지만 우리 자랄 때만 해도 부모님의 말씀이 엄청 거칠었습니다. 그런데 이해는 갑니다. 키우는 자식들이 보통 서넛이 넘습니다. 요즘 하나 둘 키우는데도 힘들다고 하는데 서넛, 많으면 여섯 일곱이 보통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하루 종일 아이들과 전쟁합니다. 이놈 잡아놓으면 저놈이 말썽이고 이곳저곳에서 야단납니다. 그러니 말이 고울 틈이 없지요. ‘빌어먹을 놈아!’ 이건 너무 점잖은 수준입니다. 별 욕이 다 나옵니다. ‘나가 뒈져, 이 놈아!’ 그럽니다. 그래서 정말 나가서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가장 마음 아파하고 가장 슬퍼합니까? 그 부모 아닙니까? 정말 죽으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 아버지 하나님 말씀에는 그런 욕은 없습니다. 단지 올바른 말씀이니 우리 마음이 찔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말씀대로 고치도록 힘써야 바른 신앙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를 꼬집어서 지적한다고 토라지는 겁니다. 세상에! 하나님 말씀이 누구 한 사람에게 하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지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듣다보면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 잘못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치도록 해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이 비뚤어져 아예 교회를 떠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불쌍합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지 맙시다.
자 이 가나안 여자가 대답한 것에 예수님이 매우 흡족해 하십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립니다. 마 15 :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아멘! 우리도 이런 신앙 가지면 참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해주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사람 중에 즉 유대인 중에 칭찬 받은 사람보다 오히려 이방 사람 중에서 칭찬 들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백부장도 이방인입니다. 마 8 :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 이 말씀이 바로 이방 백부장을 보고 하신 것입니다. 정작 이스라엘 중에는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있다, 없다?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두렵게 합니다. 11 - 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오늘날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모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희망사항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어두운데 쫓겨나지 않도록 잘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왜 이를 갈겠습니까? 너무 억울해서 이를 가는 것 아닙니까? 왜 억울합니까?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얼마나 힘쓰고 애쓰며 신앙했습니까? 기도하죠, 봉사하죠, 헌금하죠. 그런데 그런 모든 수고가 꽝이 된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억울한 신앙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곳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치유사역을 이어가십니다. 마 15 : 29 - 3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참으로 놀라운 일들 아닙니까? 정말 신기하지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사람이 역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줄 믿습니다. 모든 영광은 우리 하나님께. 할렐루야! 우리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 같아도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나타내는 지혜도 하나님의 주신 은혜인 줄 믿습니다. 생명을 비롯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 어느 것 하나라도 받지 않은 것이 없는 줄 믿습니다.
내가 얼마나 공들여 힘들여 노력한 결과인데 무슨 하나님의 은혜냐고 따지는 사람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요. 하나님을 모르니 모두가 자기 노력의 결과입니다. 자기가 잘난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보겠습니다. 눅 12 : 19 - 21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부자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 공로요 자기가 즐기면 됩니다. 그래서 잘먹고 잘살자 그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그 생명을 취하십니다. 그 모든 공로가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이 묻습니다. 고전 4 :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생명을 받았고 배울 수 있는 지혜를 받았습니다. 재물 얻을 능력도 받았습니다. 신 8 :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부모님을 모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물이 있는데 그 지은 자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삽시다. 그래야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헛된 인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시 49 : 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똑같은 피조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형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과 영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자 이제 예수님 말씀하신 중에 우리의 미래가 달린 것이 있기에 다시 한번 주지하고 정리하려 합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다시 볼까요? 마 8 :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방인의 믿음이 하나님 백성이라 자칭하던 유대인보다 나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이 장래 일어날 일까지 예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11 - 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자 이 말씀 속에서 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천국에 앉을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구분해봅니다. 동서로부터 오는 사람들과 나라의 본 자손들입니다. 동서로부터 오는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진작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입니다. 소위 일찍부터 하나님 백성이라 자칭하던 사람들이지요. 오늘로 표현한다면 ‘기성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기성교인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난답니다. 그리고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와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말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마지막 때를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마 24 :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맞습니다. 동서로부터 모아오는 것입니다. 초림 때는 기성교인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서로부터 오는 신자들은 새롭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초림 때로부터 2천 년 후 오늘날로 옮겨봅니다. 오늘 기성교인은 누구이며 동서로부터 오는 신자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질책하신 것 중에 하나가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며 신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바뀔 때 바뀌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가 법입니다. 예컨대 조선 시대가 열리자 고려시대의 법은 끝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시작될 때 조선시대 법은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어 신약의 시대가 열리니 구약의 율법시대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신약의 시대도 끝나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 재림 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때입니다. 법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법은 곧 말씀입니다. 그 때는 새 시대의 법을 알고 믿는 자들을 불러 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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