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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4. 묵상글 들 ( 2022년 12월 24일. -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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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4. 2022년 12월 24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9)
오늘 <독서>는 새 다윗의 나라를 다스리는 메시아 오시기 전에, 먼저 다윗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화답송> 역시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시 89,5)고 노래하며,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환호합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찬양드리는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가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줍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 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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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4. 2022년 12월 24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 앞으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성이 더 크게 나라를 걱정하고 내로라하는 이들은 기득권세력이 되어 자기의 잇속에 매여 있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변덕스럽지만, 하느님은 요지부동하신다. 하느님은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1,75). 이것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영적인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 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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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4. 2022년 12월 24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1월 30일 한국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꿈과 열정을 담아낸 영화 ‘탄생’이 개봉되었습니다. 영화는 개봉되기 전에 바티칸에서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시사회 현장에서 김대건 신부님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윤시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조선의 청년 김대건은 바다 건너 어느 곳에 바티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청년은 언젠가 바티칸에 가고 싶은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년 김대건의 꿈은 200년이 지난 오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 김대건의 역할을 하였지만 청년 김대건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의 제목 ‘탄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탄생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탄생은 새로운 시대의 기준점이 되기도 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에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천동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지동설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선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탄생’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살던 시대의 조선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새로운 문물은 왕조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봉건제도가 아닌 산업혁명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시대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는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같은 형제 자매였습니다. 귀족도, 평민도, 노예도 모두 같은 형제 자매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새로운 학문을 배웠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웠습니다. 문을 굳게 잠갔던 조선의 문을 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함께 하였던 가톨릭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서웠고, 고통과 죽음의 터널이 길었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동료 순교자들은 103위 성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탄생을 역사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예수님 탄생 이전(Before Christ)과 예수님 탄생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던 한 아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께서 오셨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 창녀, 이방인,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면 우리들 역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세주의 탄생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경건한 마음으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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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4. 2022년 12월 24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UN 산하 전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 네트워크(SDSN)에서는 매년 ‘세계행복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서 한국은 전체 149개국 중에서 59위를 차지했습니다. 1인당 GDP가 35,000달러가 넘는 우리나라이지만 행복 순위는 한참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통해 행복한 나라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유사시에 기댈 누군가가 있다.’
자신이 겪은 사고나 트라우마를 겪으며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면, ‘왜 내게 발생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를 부정적인 틀에 가둬둘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쉽게 바꿔서 행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질문의 초점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 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로 바꿀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계속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나의 삶을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도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듣고는, 자신들은 나이가 많다며 ‘왜’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문이 닫혀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했던 말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에서 벗어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왜’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어디에 맞춰져 있습니까? 이제는 ‘나’에서 ‘우리’를, ‘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나’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큰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간다면, 주님의 뜻에 한층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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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희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허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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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4. 2022년 12월 24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 하기
“참나로 사는 방법”
-회개, 겸손, 감사, 찬미-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어떻게하면 참나로 살 수 있을까요? 옛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한번뿐이 없는 유일회적 삶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참나로 살 때 아름답고 행복하며 자유롭습니다. 두가지 방법입니다.
1.인생 순례 여정중 순례자 신분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 순례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여 현재 어느 시점時點에, 또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중 현재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는지 살펴보며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내 삶의 성경을 수시로 렉시오디비나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신구약성경을 1차적 렉시오디비나의 대상으로 하여 자연성경, 내 삶의 성경을 렉시오디비나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오늘은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에 대해 주로 언급하려합니다.
하나뿐이 없는 아직은 미완未完의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나이 곱하기 햇수하면 전체쪽수가 나옵니다. 날마다 한쪽씩 써내려 가는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지금까지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 하면서 하느님 섭리 은총의 발자취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저절로 뒤따르는 회개와 겸손, 감사와 찬미를 통한 참나의 발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배우고 확인하는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나탄의 신탁(oracle)은 하느님께서 나탄에게 삶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에 이어지는 주님의 설명은 온통 주님이 주어가 된 문장입니다. 다윗이 주어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어입니다. 바로 주어 자리에 주님을 놓고 읽는 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수도원에 보내주셨다,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로 읽는 것이, 즉 내가 주어가 아니라 하느님 주어로 읽는 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대신하여 다윗에게 이점을 가르치는 나탄입니다.
“나는 양떼를 따라 다니던 너를 목자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나는 그의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해질 것이다.”(사무하7,8ㄷ-12.14ㄱ.16)
온통 다윗이 주어가 아닌, 하느님의 주어가 되어 다윗을 위해 하신 위업의 나열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저절로 회개와 겸손이요 무지의 교만이나 탐욕에서 벗어나 참나를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문장의 주어가 되어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께 저절로 샘솟는 감사와 찬양의 삶이 될것입니다.
내 중심에서 내 삶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내 삶을 관망해 보는 것, 바로 이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회개와 겸손을 통해 참나의 아름답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방법이 바로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내가 삶의 주어가 아닌 하느님이 주어가 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 참나를 사는 방법은 하느님 중심의 렉시오디비나 방법 하나뿐입니다. 내가 삶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지 않고는 참된 회개도 겸손도 감사도 찬양도 나올수 없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렉시오디비나에 절대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의 노래(canticle)로 온통 하느님이 주어가 된 문장으로 하느님 위업의 나열입니다. 하느님의 위업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즈카르야입니다. 아마도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기까지 불신의 벌로 벙어리가 되어 피정하며 지내는 동안 깊이 자기 삶의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를 하느님 중심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렉시오디비나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난 빛속에서 부르는 자유로운 영혼의 찬미가입니다. 이또한 마리아의 노래처럼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노래에 속합니다. 우리 천주교 수도자들이 아침성무일도 끝무렵에 매일 아침마다 즈카르야와 함께 부르는 찬미가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1,68-79)
온통 하느님이 문장의 주어가 된, 하느님 중심의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교만으로 눈먼 내 중심의 독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하느님 중심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읽는 삶의 독서가 바로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이렇게 내 삶의 역사를, 내 가정공동체의 역사를, 내 수도원의 역사를, 내 나라의 역사를 하느님의 눈으로 읽는 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의 렉시오디비나는 끊임없이 확장됩니다. 이렇게 렉시오디비나가 전방위적으로 확장되어 생활화, 일상화될 때 삶의 정화와 성화는 물론 관상적 영적 삶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 수행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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