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전재산도 내놓은 박상진의사의 생가를 찾다.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이 몰락했던 박상진의사의 애국심
<박상진 생가 소개 안내판>
내 가족이나 친척에게도 전 재산을 주는 것은 선뜻하기 어려운 일인데 나라를 위한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내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1884년 12월 7일 경남 울산(蔚山) 송정동(松亭洞)에서 시규(時奎)의 장남으로 태어나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맡았던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입니다.
<박상진 생가의 전경>
이 집은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의사가 살았던 집입니다. 박상진의사는 1902년 허위선생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했습니다.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5년 조선국권회 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섰고, 박상진의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형집행으로 38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박상진의사의 생전의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것>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가 가문에서 태어난 박상진의사는 일찍이 한학을 배웠습니다. 특히 박상진의사는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의식을 키웠습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기념비>
광복회 포고문 중에서 우리 동포는 조국을 위해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일치단결해서 광복회의 의로운 깃발 아래 왜적을 몰아내고 국권을 기필코 회복해야한다.
광복회의 실천강령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대한광복회 조직 인물 그림>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탄로됨으로써 박상진의사는 1918년 봄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박상진의사가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하여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 사업으로 인해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헐벗고 굶주려 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해 가는 친일 부호배들에게 철퇴를 가하였습니다.
후에도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은 암살단?주비단?의열단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료-국가보훈처>
<울산광역시 북구에서 관리하고 있는 박상진 의사의 생가>
대지주였던 박상진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은 몰락하였고,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형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인 박상진의사의 생가도 남의 손에 넘어 갔으나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사업을 완료하였습니다.
울산에 방문하실 일이 생기면 꼭 박상진의사의 생가에 들려서 박상진의사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취재 : 청춘예찬 윤송희 대학생 기자> |
출처: 청춘예찬 원문보기 글쓴이: 굳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