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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7. 주일 큐티
이사야 6:1 ~ 13
그루터기를 통한 새 싹, 새 희망
관찰 :
1)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본 환상
- 1절a.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 ~ 680년경) 이었다.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웃시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이 이어지게 되었다. 아하스왕은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했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선포되어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게 된다.
- 1절b.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이사야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를 보게 되었다. 그 보좌는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였다. 하나님의 보좌는 성전에 있었고, 성전은 하나님의 옷자락으로 가득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이 옷자락과 같이 가득하게 덮여있는 모양으로 형상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이시기에 그 거룩하심이 가득하게 충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 2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의 위에 섰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스랍들”(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이다.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에 노출되는 것이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스랍 천사의 마땅한 태도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를 날아다니는 존재로서 그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서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존재들이었다.
-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스랍 천사들의 찬양의 주제는 거룩이었다. 하나님의 거룩을 삼중찬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본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극존칭의 표현이자, 하나님의 거룩 그 자체의 존귀함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함을 찬미하고 있다.
- 4절.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스랍 천사들이 날개를 저어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의 거룩을 찬미하는 소리가 거대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흔들거릴 정도의 요동함이 있었다. 이 진동은 건물이 무너질 징조로서의 진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피조물의 마땅한 반응으로서의 진동이었다. 그리고 연기가 가득하게 되었다. 이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였다. 스랍들의 찬양으로 말미암는 이 성전의 연기는 하나님의 거룩으로 인하여서 죽어야 하는 존재들에게는 소망이 되는 은혜의 연기라 할 것이다. 그 연기가 죄를 가리워주는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2) 환상을 보는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
-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 이사야 선지자는 “때”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말한다. 이사야는 이 환상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을 절감하게 되는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죄인이라는 각성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반드시 죽어야하는, 반드시 망해야만 하는 죄인 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맞딱뜨리게 되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의 깨달음은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 선지자가 입술이 부정하다고 깨닫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선지자가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부정하다는 자기인식이다. 부정한 존재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죽음임을 이사야는 자백하고 있다. 숨길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자기인식이 이사야를 살리고 있다. 이사야가 이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소멸하시는 불에 의해 타올라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현실을 이사야는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 죄인된 자신의 본성을 발견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그렇기 때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 죽음에 직면하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3) 하나님의 솔루션
- 6절.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 “그 때” 이 때는 이사야가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서 존재론적 절망을 경험하게 된 때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으로서의 실재를 고백하며 살 길이 없어져 망하게 된 자신의 존재론적 본질을 깨달은 이사야는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도리어 화라는 것을 고백했다. 그러한 상황에 하나님은 이사야가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해 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거룩을 찬미하는 스랍의 하나를 명하여 제단에 피운 숯을 가지고 이사야에게 날아가게 명하신 것이다.
- 7절.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그 숯을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에 대게 하신다. 그 입술에 핀 숯이 닿게 되자 이사야의 입술이 타들어가고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해지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사야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죄된 속성으로서의 입술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그렇게 죄인 된 존재임을 고백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죄를 씻음받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룩으로 바르게 인식하는 자에게 깨끗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죄악을 불로 살라버리신 이후에 비로소 이사야를 부르신다. 다시 부르시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누가 갈 것인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 순종함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을 한다. 이사야는 진심과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에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셨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사야의 죄악 때문이다. 그러나 제단 숯불로 그 입을 태우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지자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음성을 비로소 듣게 되고, 하나님 앞에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고백을 담대하게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바르게 알게 된 이사야는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은혜를 얻게 된다.
4) 하나님의 심판과 그루터기
- 9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 하나님은 소명을 받은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다. 그런데 그 선포는 심판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증거하라 하시는 심판의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진짜 심판이 이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증거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듣지 않아서 망하게 되는 결과가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가 주어짐에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이 심판이고, 저주이다.
- 10절.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심판을 명하시고 계시다. 그들의 마음은 둔하게 되고, 귀는 막히고, 눈은 감기게 되어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마치 오늘날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성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각종 매체와 유튜브 등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접할 수 있는 창구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둔하게 되고, 귀는 막히고, 눈은 닫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시작이며 결과이다.
- 11절.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 이사야는 속이 탔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세대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답답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그것이 언제까지 그렇게 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존재론적 죄성을 인지하게 되었고, 스랍 천사들이 거룩을 창화하는 광경을 목격했었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듯이 하나님께 질문을 한 것은 대단한 용기, 목숨을 내어놓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질문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게 된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미 심판을 받아 황무하게 되었고, 사람이 없게 되고, 토지도 쓸모없는 땅이 되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응답을 듣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이라 인식할 말씀이었다.
- 12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 하나님은 매우 실제적인 답변을 해 주시고 계시다. 바벨론에 예루살렘 거민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어 예루살렘 성이 황폐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신 답변이다. 하나님은 아무 계획없이 되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기한을 정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시고 계시다.
- 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 하나님의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은 또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지만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 것에 대한 말씀이다. 거룩한 씨, 곧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 메시야가 바로 그루터기라는 말씀이다. 이 예언은 이사야 전체를 꿰뚫게 되는 예언이다. 또한 구약 전체가 관통되는 예언이다.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믿음이 하나님의 축복의 그루터기이고, 나라가 망한 이스라엘이 붙잡아야 하는 참된 소망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루터기를 통한 새 싹이 소망이다. 잘려 넘어간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짜가 나올 것이 예견되고 있다.
가르침 :
1) 하늘 보좌에서 발생하는 진짜 예배를 목도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은 “화로다 나여 죽게되었도다”였다.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나아갔다. 그곳에서 스랍들의 찬양을 보았고, 또 들었다. 하나님 보좌의 지존무상하심과 그 거룩하심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그 놀라움에 흠뻑 취해 자신의 죄악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는 소멸하는 불에 타 죽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죄악으로 말미암는 고통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부르짖게 된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은 스랍을 사용하셔서 선지자 이사야의 죄악의 근원이 되는 그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지져버리신다. 그것은 고통이 수반하지만 이사야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길이었고, 그로 인하여 이사야의 근본적인 죄악이 사라지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의 원죄와 깊은 죄의식은 그 의식이 각성되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 죄가 불타 소멸하게 되는 일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하여 의식하는 것은 그렇기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미쳐 날뛰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세상이 죄악으로 만연하고 아무리 더럽고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모두 다 씻으시고 모조리 회복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인 된 인간에게는 저주와 같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이사야 같은 대선지자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이 드러남으로 자신의 존재자체가 화이고, 또 망하게 되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사야의 죄악을 소멸케 하셨다. 이사야를 소멸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죄악을 소멸하신 것이다. 그것이 은혜이고, 소망이고, 영광이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이루실 속죄에 대한 그림자이다.
3)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하게 된다. 이 말은 내가 준비되었다는 말이다. 주님의 죄사함을 진정으로 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은 이미 죽었다가 산 존재가 되었기에 주님의 뜻에 쓰임받고자 하는 자의 갈망이 되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참다운 반응이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마땅한 반응이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줄 알고, 볼 줄 아는 자들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유다와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고, 백성들이 먼 나라로 끌려가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신다. 그러나 그것이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를 남겨두셨기 때문이다. 이 그루터기는 말씀의 그루터기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이전에 구약 전체에서 이미 말씀하신 메시야, 곧 여자의 후손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또한 다윗에게 언약된 말씀이었다. 그렇기에 다윗의 혈통이 이 그루터기의 핵심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주어졌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망할지라도 진정으로 남게 되는 그루터기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짜는 바로 그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새 싹에서 시작된다. 2021년 새로운 시작을 이루실 주님을 기대하게 된다.
적용 :
1) 하나님의 거룩을 더욱 깊이 인식하자.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을 그 어떤 존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 그 하나님의 거룩을 알아야 진짜 나 자신의 깊은 죄성을 알게 된다. 그 죄인된 자아인식의 깊이가 참다운 통회를 가져오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깊고 처절한 속울음이 터져나와야 참다운 속죄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방인도 아니었고, 일반 성도도 아닌 선지자로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존재가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사모하는 격한 열정이 없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기억하고 나의 삶 속에 있는 불경건함에서 벗어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고 또 나아가기를 열심내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예배속에 그러한 은혜를 기대하자.
2) 주님의 참다운 속죄를 경험한 이사야가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여 자신을 보내주실 것을 요청하듯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곳에 내가 가길 전심으로 갈망한다. 그것이 현재의 자리이든지, 아니면 또 다른 곳이든지 주님의 이끄시는 그 자리에 내가 나아가는 것을 나의 소망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고, 그것이 소망임을 알려주셨다. 나라가 망해도, 설령 COVID 19로 모든 세상의 일상의 삶이 무너지고, 다시 원래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참된 소망을 품게 된다. 주님이 오시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다. 또한 지금 당장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지 않을 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통치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이들의 모습이 소망이다. 내가 그 믿음의 대열에 동참하여 나아가게 될 것을 날마다 소망하고 묵상한다.
4) 2020년 암울한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이다. 상황은 암울했을지라도 주님은 여상하셨고, 언제나 함께 하셨으면 단 한 번도 실망케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살아계시고, 선하시기에 2021년 선하신 주님의 선하신 솔루션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진짜는 이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소망이 있기에 주님으로 인해서 올 해 마지막 주일을 감사로 예배드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