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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요한(10.23),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10.23)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10.23)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10.23)
요한(10.23)
성인명 요한 (John)
축일 10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교가
활동지역 카페스트라노(Capestrano)
활동연도 1386-1456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네스(Joannes, 또는 요한)는 당시 나폴리(Napoli) 왕국에 속한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초(Abruzzo) 지방의 카페스트라노에서 1386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안토니오 남작은 독일 출신으로 1399년 전투 중에 사망해 그는 어려서부터 아브루초 출신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1406년 페루자(Perugia)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1412년에 나폴리의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에 의해 페루자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행정관이 된 그는 정치적 부패와 부정 척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416년 페루자와 말라테스타(Malatesta)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평화를 제안하는 사절로 말라테스타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당시 성 요한은 전쟁 직전에 산 발렌티노(San Valentino) 백작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으나 혼인이 완결된 상태는 아니었다. 브루파(Brufa) 감옥에 갇힌 그는 사형의 위협을 받자 대담하게 탈출을 시도했다가 부상만 당하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감옥에 갇힌 그는 진지하게 영혼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시시(A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고 나서 회심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만약 석방된다면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회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성 요한은 수도자가 되기 위해 혼인에 대한 관면을 받고 1415년 10월 4일 페루자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오누프리우스 데 세자노(Onuphrius de Seggiano)의 지도를 받으며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에 서원을 한 성 요한은 피렌체(Firenze) 인근 피에솔레(Fiesole)로 가서 마르케(Marche)의 성 야고보(Jacobus, 11월 28일)와 함께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us, 5월 20일)의 문하생으로서 공부하고 1420년경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즉시 설교자로 나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이들을 개종시켰고 많은 이들이 수도 생활에 관심을 두고 수도원 문을 두드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1425년에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와 함께 순회 설교를 했고, 1426년에 성 베르나르디노가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문제로 이단으로 비판받았을 때 자신의 법률 지식을 활용해 교황 마르티노 5세(Martinus V) 앞에서 그를 변호해 무죄를 받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작은 형제회에서 분리되어 이단으로 단죄된 프라티첼리파(Fraticelles)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1429년에 작은 형제회의 내분을 종식하기 위해 교황이 소집한 총회에 엄격주의파(오늘날의 작은 형제회)의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러한 노력으로 1430년에 수도회 개혁과 통합을 위한 회칙이 선포되어 잠시나마 일치를 누리기도 했으나 곧이어 콘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교황의 칙령을 받아 개혁과 통합의 노력이 성공하지는 못했다.
성 요한은 1435~1436년에 교황특사로 활동했고, 1436년 12월에는 그의 노력 덕분에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437년에는 페라라(Ferrara)에 있는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개혁 작업을 도왔다. 1439년 말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였고, 1440~1442년까지 밀라노(Milano)에서 설교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1442년 말과 1443년에는 부르고뉴(Bourgogne)와 플랑드르(Flandre) 지방을 방문하여 필리프 3세가 대립교황인 펠릭스 5세(Felix V)와 동맹을 맺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그는 수도회의 총대리와 관구장 등을 역임하며 여러 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개혁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1451년에 그는 교황과 독일 황제의 요청으로 후스파(Hussite)의 개종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후스파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노력했으나 그들의 중심지인 프라하(Prague)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즈음에 튀르키예 군대와 맞서는 십자군의 상황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1454년에 설교를 통해 십자군의 필요성을 촉구하라는 명을 받고 이듬해 5월 헝가리로 갔다. 그의 열정적인 활동 덕분에 1456년 7월 초에 십자군을 모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Beograd)로 인솔했고, 그곳에서 대승을 거둔 십자군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그해 9월 1일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동쪽 끝에 있는 국경도시 일록(Ilok)에 도착한 후 당시 군대의 비위생적인 상태에서 만연한 전염병에 걸려 1456년 10월 23일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후 그에 대한 신자들의 공경이 곧 시작되어 1514년에 술모나(Sulmona) 교구 내에서 그에 대한 공경이 허락되었고, 1650년 12월 19일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X)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84년에 그를 전 세계 군종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는 카피스트라노(Capistrano)의 성 요한으로도 불린다.
성 요한에 대한 공경은 1880년에 보편 교회로 확산하면서 1890년 로마 보편 전례력의 3월 28일에 포함되어 기념해 왔다. 3월 28일(또는 10월 23일)에 기념하던 그의 축일은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그가 선종한 날인 10월 23일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8일 목록에서 10월 23일에 기억하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증거자를 언급하고, 10월 23일 목록에서 헝가리 빌라크(Villack) 근처에서 작은 형제회의 사제인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이 거룩한 삶과 가톨릭 신앙 전파에 대한 열정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기도와 기적을 통해 막강한 튀르키예 군대를 격파하고 베오그라드 포위 공격을 무찔렀다고 전해 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작은 형제회의 사제인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이 엄격한 수도 규칙 준수를 옹호하고 가톨릭 신앙과 도덕을 지키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사목 활동을 수행했으며, 열정적인 권고와 기도로써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수호하는데 헌신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헝가리 왕국의 다뉴브 강변에 있는 일록(헝가리어로는 Ujlak) 근처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10.23)
성인명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 (Maria Scolastica Josephine)
축일 10월 23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수녀,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발랑시엔(Valenciennes)
활동연도 1749-1794년
같은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스꼴라스띠까, 스콜라스띠까, 요셉피나, 조세피나, 조세핀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3일 목록에서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의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Maria Clotildis Angela, 또는 클로틸드-조세핀 파이요[Clotilde-Josephine Paillot])와 하느님께 봉헌한 다섯 명의 동료 동정 순교자들이 1794년 프랑스 혁명 당시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감탄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단두대에 올라갔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다섯 명의 동료 순교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르술라회(Ursulines)의 성 야고보(Jacobus)의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Maria Scolastica Josephina, 또는 마리-마르그리트-조세핀 르루[Marie-Marguerite-Josephine Leroux])와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Maria Cordula Josephina, 또는 잔-루이즈 바레[Jeanne-Louise Barre]), 다음으로 클라라회(Poor Clares) 출신의 복녀 요세피나 르루(Josephina Leroux, 또는 안-조세핀 르루[Anne-Josephine Leroux]), 끝으로 비르지타회(Birgittini) 출신의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Maria Francesca Lacroix, 또는 마리-리에빈 라크루아[Marie-Lievine Lacroix])와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Anna Maria Erraux, 또는 마리-오귀스탱 에로[Marie-Augustine Erraux])가 그들이다.
이들은 1794년 10월 17일에 먼저 순교한 다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1789~1799년) 중에 발랑시엔에서 순교한 11명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로 불린다. 우르술라회는 수도회의 소명대로 발랑시엔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서 발랑시엔의 수녀들도 수도회와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서 1792년에 인근 국경을 넘어 벨기에 몽스(Mons)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발랑시엔을 정복한 1793년에 몽스로 피신했던 수녀들이 돌아와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발랑시엔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발랑시엔 수녀원에는 모두 32명의 수녀가 있었는데, 1794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혁명군이 입성하면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혁명정부의 법령에 따른 선서를 하고 수녀원을 떠나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는데, 21명의 수녀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혁명군의 요구대로 선서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겠다고 남았고, 정부의 승인 없이 가톨릭 학교를 운영해 법령을 어겼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먼저 10월 17일에 다섯 명의 수녀들이 자신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고 당당히 진술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아 단두대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를 포함한 여섯 명도 같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재판관과 사형 집행인을 비롯한 모든 박해자를 용서한다는 말과 함께 기쁜 얼굴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는 1920년 6월 13일 11명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그들은 순교한 날에 따라 10월 17일과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는 1739년 11월 25일 프랑스 북부 모뵈주(Maubeuge) 근처 바베(Bavay)에서 태어나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우르술라회에 들어가 수도 서원을 한 후 1790년에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어렵게 수도회의 소명을 이어갔지만, 어쩔 수 없이 벨기에의 몽스 수녀원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활동을 재개하다가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는 1749년 7월 14일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에서 태어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에 입회했고, 혁명의 광풍 속에서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는 1750년 4월 3일 프랑스 북부 아라스(Arras) 근처 사이앙오스트레방(Sailly-en-Ostrevent)에서 태어나 우르술라회의 수녀로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1747년 1월 23일 캉브레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함께 순교한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의 언니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하다가 1769년에 발랑시엔의 클라라회에 입회하였다. 1791년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선서를 거부하고 수녀원에서 추방되어 친척 집에서 얼마간 지냈다. 그 후 동생이 몽스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원장을 허락을 받고 동생과 함께 지냈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우르술라회 수녀들과 함께 발랑시엔으로 돌아온 후 정식으로 우르술라회의 수녀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발랑시엔을 재점령한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동생과 함께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는 1753년 3월 24일 모뵈주 근처 퐁쉬르상브르(Pont-sur-Sambre)에서,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는 1762년 10월 20일 퐁쉬르상브르에서 태어났다. 둘 다 비르지타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혁명정부에 의해 수도회가 해산된 후 몽스의 우르술라회로 피신했다가 발랑시엔으로 되돌아온 후 우르술라회에 수녀로서 단두대 위에서 순교하였다.♣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10.23)
성인명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 (Maria Cordula Josephine)
축일 10월 23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수녀,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발랑시엔(Valenciennes)
활동연도 1750-1794년
같은이름 고르둘라, 꼬르둘라,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셉피나, 조세피나, 조세핀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3일 목록에서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의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Maria Clotildis Angela, 또는 클로틸드-조세핀 파이요[Clotilde-Josephine Paillot])와 하느님께 봉헌한 다섯 명의 동료 동정 순교자들이 1794년 프랑스 혁명 당시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감탄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단두대에 올라갔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다섯 명의 동료 순교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르술라회(Ursulines)의 성 야고보(Jacobus)의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Maria Scolastica Josephina, 또는 마리-마르그리트-조세핀 르루[Marie-Marguerite-Josephine Leroux])와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Maria Cordula Josephina, 또는 잔-루이즈 바레[Jeanne-Louise Barre]), 다음으로 클라라회(Poor Clares) 출신의 복녀 요세피나 르루(Josephina Leroux, 또는 안-조세핀 르루[Anne-Josephine Leroux]), 끝으로 비르지타회(Birgittini) 출신의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Maria Francesca Lacroix, 또는 마리-리에빈 라크루아[Marie-Lievine Lacroix])와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Anna Maria Erraux, 또는 마리-오귀스탱 에로[Marie-Augustine Erraux])가 그들이다.
이들은 1794년 10월 17일에 먼저 순교한 다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1789~1799년) 중에 발랑시엔에서 순교한 11명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로 불린다. 우르술라회는 수도회의 소명대로 발랑시엔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서 발랑시엔의 수녀들도 수도회와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서 1792년에 인근 국경을 넘어 벨기에 몽스(Mons)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발랑시엔을 정복한 1793년에 몽스로 피신했던 수녀들이 돌아와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발랑시엔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발랑시엔 수녀원에는 모두 32명의 수녀가 있었는데, 1794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혁명군이 입성하면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혁명정부의 법령에 따른 선서를 하고 수녀원을 떠나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는데, 21명의 수녀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혁명군의 요구대로 선서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겠다고 남았고, 정부의 승인 없이 가톨릭 학교를 운영해 법령을 어겼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먼저 10월 17일에 다섯 명의 수녀들이 자신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고 당당히 진술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아 단두대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를 포함한 여섯 명도 같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재판관과 사형 집행인을 비롯한 모든 박해자를 용서한다는 말과 함께 기쁜 얼굴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는 1920년 6월 13일 11명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그들은 순교한 날에 따라 10월 17일과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는 1739년 11월 25일 프랑스 북부 모뵈주(Maubeuge) 근처 바베(Bavay)에서 태어나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우르술라회에 들어가 수도 서원을 한 후 1790년에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어렵게 수도회의 소명을 이어갔지만, 어쩔 수 없이 벨기에의 몽스 수녀원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활동을 재개하다가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는 1749년 7월 14일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에서 태어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에 입회했고, 혁명의 광풍 속에서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는 1750년 4월 3일 프랑스 북부 아라스(Arras) 근처 사이앙오스트레방(Sailly-en-Ostrevent)에서 태어나 우르술라회의 수녀로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1747년 1월 23일 캉브레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함께 순교한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의 언니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하다가 1769년에 발랑시엔의 클라라회에 입회하였다. 1791년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선서를 거부하고 수녀원에서 추방되어 친척 집에서 얼마간 지냈다. 그 후 동생이 몽스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원장을 허락을 받고 동생과 함께 지냈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우르술라회 수녀들과 함께 발랑시엔으로 돌아온 후 정식으로 우르술라회의 수녀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발랑시엔을 재점령한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동생과 함께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는 1753년 3월 24일 모뵈주 근처 퐁쉬르상브르(Pont-sur-Sambre)에서,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는 1762년 10월 20일 퐁쉬르상브르에서 태어났다. 둘 다 비르지타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혁명정부에 의해 수도회가 해산된 후 몽스의 우르술라회로 피신했다가 발랑시엔으로 되돌아온 후 우르술라회에 수녀로서 단두대 위에서 순교하였다.♣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10.23)
성인명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 (Maria Clotilde Angela)
축일 10월 23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수녀,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발랑시엔(Valenciennes)
활동연도 1739-1794년
같은이름 글로틸다, 글로틸드, 끌로틸다, 끌로틸디스, 메리, 미르얌, 미리암, 앤젤라, 엔젤라, 클로틸드, 클로틸디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3일 목록에서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의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Maria Clotildis Angela, 또는 클로틸드-조세핀 파이요[Clotilde-Josephine Paillot])와 하느님께 봉헌한 다섯 명의 동료 동정 순교자들이 1794년 프랑스 혁명 당시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감탄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단두대에 올라갔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다섯 명의 동료 순교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르술라회(Ursulines)의 성 야고보(Jacobus)의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Maria Scolastica Josephina, 또는 마리-마르그리트-조세핀 르루[Marie-Marguerite-Josephine Leroux])와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Maria Cordula Josephina, 또는 잔-루이즈 바레[Jeanne-Louise Barre]), 다음으로 클라라회(Poor Clares) 출신의 복녀 요세피나 르루(Josephina Leroux, 또는 안-조세핀 르루[Anne-Josephine Leroux]), 끝으로 비르지타회(Birgittini) 출신의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Maria Francesca Lacroix, 또는 마리-리에빈 라크루아[Marie-Lievine Lacroix])와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Anna Maria Erraux, 또는 마리-오귀스탱 에로[Marie-Augustine Erraux])가 그들이다.
이들은 1794년 10월 17일에 먼저 순교한 다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1789~1799년) 중에 발랑시엔에서 순교한 11명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로 불린다. 우르술라회는 수도회의 소명대로 발랑시엔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서 발랑시엔의 수녀들도 수도회와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서 1792년에 인근 국경을 넘어 벨기에 몽스(Mons)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발랑시엔을 정복한 1793년에 몽스로 피신했던 수녀들이 돌아와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발랑시엔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발랑시엔 수녀원에는 모두 32명의 수녀가 있었는데, 1794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혁명군이 입성하면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혁명정부의 법령에 따른 선서를 하고 수녀원을 떠나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는데, 21명의 수녀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혁명군의 요구대로 선서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겠다고 남았고, 정부의 승인 없이 가톨릭 학교를 운영해 법령을 어겼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먼저 10월 17일에 다섯 명의 수녀들이 자신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고 당당히 진술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아 단두대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를 포함한 여섯 명도 같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재판관과 사형 집행인을 비롯한 모든 박해자를 용서한다는 말과 함께 기쁜 얼굴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는 1920년 6월 13일 11명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그들은 순교한 날에 따라 10월 17일과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는 1739년 11월 25일 프랑스 북부 모뵈주(Maubeuge) 근처 바베(Bavay)에서 태어나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우르술라회에 들어가 수도 서원을 한 후 1790년에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어렵게 수도회의 소명을 이어갔지만, 어쩔 수 없이 벨기에의 몽스 수녀원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활동을 재개하다가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는 1749년 7월 14일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에서 태어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에 입회했고, 혁명의 광풍 속에서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는 1750년 4월 3일 프랑스 북부 아라스(Arras) 근처 사이앙오스트레방(Sailly-en-Ostrevent)에서 태어나 우르술라회의 수녀로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1747년 1월 23일 캉브레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함께 순교한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의 언니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하다가 1769년에 발랑시엔의 클라라회에 입회하였다. 1791년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선서를 거부하고 수녀원에서 추방되어 친척 집에서 얼마간 지냈다. 그 후 동생이 몽스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원장을 허락을 받고 동생과 함께 지냈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우르술라회 수녀들과 함께 발랑시엔으로 돌아온 후 정식으로 우르술라회의 수녀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발랑시엔을 재점령한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동생과 함께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는 1753년 3월 24일 모뵈주 근처 퐁쉬르상브르(Pont-sur-Sambre)에서,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는 1762년 10월 20일 퐁쉬르상브르에서 태어났다. 둘 다 비르지타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혁명정부에 의해 수도회가 해산된 후 몽스의 우르술라회로 피신했다가 발랑시엔으로 되돌아온 후 우르술라회에 수녀로서 단두대 위에서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