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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구역
시편 16:1~11
오늘 읽은 시편 16편 표제에는 ‘믹담’(Michtam) 이라고 했는데 황금의 시, 귀한 시, 명심 시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매우 가치 있고 정금보다도 더 귀한 시인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의 내용을 보게 되면 구약의 영역에서는 감추어진 참된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1-2 절은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복이 되는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여기서 믿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보호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시은소라는 것이 있어서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시은소에 몸을 숨기면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하자면 시은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말하자면 긴장과 초조, 불안과 공포에서 허덕이고 있다가 어떤 때는 지치고 쓰러지며 삶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우리 심령의 참된 안식처, 피난처가 어디입니까? 그것이 돈입니까? 지식입니까? 명예입니까? 권세입니까? 예술입니까? 사랑입니까? 이런 것들이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우리 심령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가 있습니까? 거기에 피할 만 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피할 수 있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의 많은 시편에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산성이시라, 피난처시라 했는데 바로 이런 뜻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우리와 예수님 사이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말씀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면서 이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절대 안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 이하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그리고 예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절대 안전합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은 요한 칼뱅의 강령의 하나인 구원의 안정성(the security of salvation)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장차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도 주님의 양인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또한 영생 얻은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할 때 우리는 사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인데 우리를 주님의 양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택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안전합니까?
갓난아이가 그냥 두면 살 수 없는데 어떻게 자라납니까? 어머니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어린애를 어머니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습니까? 어진 어머니는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바칠지언정 자기의 아기를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꼭 그렇습니다.
우리 어린 심령이 어떻게 성장해서 구원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우리의 어린 심령을 붙들어 주십니다. 인도하여 주십니다. 생명수로 먹여 주십니다.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원수가 올 때 막아 주십니다. 시험에 빠지려 할 때 우리를 이끌어 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오늘까지 보존하고 우리의 연약한 심령이 아주 멸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늘나라까지 능히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있다가 물 위에 무엇이 보이니까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나다”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확인하고 마음에 안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나도 물 위로 걸어가게 해 주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오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담대히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물결이 밀어닥치는 것을 보자 두려운 생각이 나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어요?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이 세상 죄악 물결에 휩쓸려 빠져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튼튼한 손이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면 아주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보호를 기다리며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절대 안전합니다. 누가 감히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또 “주는 나의 여호와 시오니 나는 담대히 주를 의지할 수 있나이다” 했습니다.
주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복종시켜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의지하고 필요를 채워 달라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내가 돈이 얼마 필요한데 아버지더러 달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하면 이것은 거지행세입니다. 똑같이 돈 달라는 일인데 아버지께 달라는 것은 당당한 자식으로서의 권리이지만 남에게 달라고 하면 구걸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주는 나의 주시오니”하는 것은 주님밖에 다른 이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라야 복이 됩니다.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신앙은 두 주인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한 주인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뭐랬어요?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의 불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있으면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국가라는 것이 오늘 20세기에 제공된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우리에게 혜택을 입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값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 값은 언제나 인간 자유의 상실입니다. 국가를 신처럼 섬길 때 개인의 자유를 이 신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자유를 잃으므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유 없는 인간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음으로 참된 안전을 얻게 됩니다. 국가가 중요합니다.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가 우상처럼 되어 버릴 때 국민의 자유를 박탈이 되고 행복을 빼앗기고 결국 국가의 운명도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하여 있기 때문에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국민의 자유를 어느 정도 유보하고 있습니다. 국민들도 불편을 느끼면서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권자는 국가와 정권을 혼동하여 생각함으로 신처럼 섬기라고 한다면 역사에 오점을 남길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국민이 강제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위함에서 헌신적이 될 때 나라가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모두가 다른 신입니다. 다른 신들에게 예물을 드리면 괴로움이 더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의 신들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 신들이 우리에게 평화와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체험합니다. 돈을 섬기는 맘몬신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거스틴이 “오, 주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품 안에서 참 평안을 찾기까지는 조급하고 불안하나이다”라고 고백한 말은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옛날 이사야 선지도 같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었으면 온전히 다 제거해 버리십시다. 다윗의 말대로 “입술로 그의 이름도 부르지 맙시다.”
이제 본문 5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산업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익을 취하며 육신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는 내 산업과 내 잔의 소득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소득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내 상태가 초라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쁘게 그것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소원합니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부어 주시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세요. 내게 그의 약속 가운데 있는 유익을 주시고, 약속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미래의 행복을 누릴 자격을 주소서. 그러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 복을 위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산업과 잔의 소득으로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산업의 소득이십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산업입니다. 거기서 하나님 자신이 성도들의 산업이시며 성도들의 영원한 축복은 그러한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소득을 기뻐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고 있습니다.
6절에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 들어갈 때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평화를 주시고 만족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된 평화, 참된 만족, 참된 기쁨은 외부의 환경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참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 8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이것이 행복한 생활의 첫째 비결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행복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며 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떤 불리한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언제나 행복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는 하루도 불행을 느끼시며 사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사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모든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산을 바라볼 때, 녹음이 우거진 싱싱한 나무, 우람찬 바위, 아름다운 꽃,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시편 121편 1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고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했습니다. 동녘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바다가 잔잔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여러분, 무슨 일에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행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사업을 할 때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군에 나가 나라를 지키는 수고를 할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우리에게만 맡기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평안할 때만 함께 하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는 엉뚱하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하였습니다.
요셉의 일생은 행복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환경과 조건이 좋아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도 어려운, 감당키 힘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환경이 결코 요셉을 불행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며 행복하게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의 비결입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밤새 지켜 주시고 피곤을 풀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주신 하나님, 식욕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옷을 입을 때 의복을 장만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일터에 나갈 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일하면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동안 나를 지켜 주신 하나님을 보세요. 가정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세요. 잠자리에 드실 때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가 삶에 지치고 피곤하다가도 하나님의 품에 안겨 내 영혼이 소생케 하심을 입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너무도 괴로워 눈물을 흘리다가도 하나님의 손이 내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실 때 그 행복은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실망과 좌절을 느끼지 아니하고 오히려 찬송을 부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의 이 약속이야말로 우리에게 끊임없는 위로와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이 말씀은 하나님과 영원한 친교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교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를 통해서 친교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드린 기도를 보세요.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시는 줄 아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한 것이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는 것이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와 같은 대화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의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일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이 맞지 아니할 때 불행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일할 때 거기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도 언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거기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만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세상의 행복이란 쥐엄 열매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떡을 먹고 배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것으로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비록 그가 탕자라고 하더라도 돼지의 먹이를 먹고 배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생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살며 그 안에서 기쁨의 생활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하나님을 항상 우리 앞에 모시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고독한 밤에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환난의 날에도 세상 바라보며 한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8절 하반절에 뭐랬어요?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내 우편에 계신 것을 확신할 때 행복합니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이 내 곁에 언제나 계신 것을 믿을 때 두렵지 아니합니다. 고독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1.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수라
예수 내 친구 오직 내 사랑
온 천지가 변해도 주 날 버리잖네
2. 미친 바람 휘몰아 어둠 닥쳐도
주 날 도와주시니 겁낼 것 없네
3. 인생살이 고달파 낙심 말아라
영원한 그 사랑이 주안에 있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우편에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참된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 아니합니다. 어떤 두려움에서도 요동치 아니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나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고 내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어떤 어려운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이 내 우편에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요동치 아니하고 오히려 “내가 두려울 때에 그를 의뢰하리니”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항상 내 우편에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몇 주일 전에 결혼 주례를 하다가 감격적인 일을 체험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우리 교회에 잘 나오는 아주 우수한 청년들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처음에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 60장 찬송 1절과 3절을 부르고 마지막에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 몸과 이 영혼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94장 1절을 부릅니다. 그런데 순서를 보니까 294장이 아니고 168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를 3절씩 다 썼단 말이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신랑에게 물었습니다.
“이 순서지 신랑이 만드신 겁니까?”
“예”
“우리 교회에서는 보통 60장과 294장을 하는데 여기 보니 60장은 한 절, 168장은 세 절 다 썼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예, 목사님, 저는 이 교회를 열심히 다닙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이나 제 처가의 부모님은 신앙 생활을 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에서는 모든 면에 부족을 모르고 사는 가정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오시는 손님들도 다 그런 수준의 분들이 오십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오시는 손님들에게 더구나 교회라고는 평생 처음 나오신 우리 양가 부모님에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저는 오늘 제 결혼식에서 내 진실하신 친구 예수님을 그 어른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그분들이 이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고 가신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습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수없이 해보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진 신랑은 처음 만났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식 도중에 찬송을 부르기 전에 이 사연을 설명하고 모두 일어나 찬송을 부르는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찬송을 부르며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의 새 가정에 하나님의 늘 함께 하셔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은 사람, 우리 앞에 주님을 항상 모시고 사는 사람, 주님이 우편에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요동치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기쁘고, 영광이 즐거워하며, 육체도 안전히 거할 것입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영원하신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을 모시자.
시편 16: 1-11
1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 시작하는 말
사람들은 다 무엇인가를 앞에 두거나 누구인가를 앞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부방이나 집무실에 성취해야 할 목표를 적어 놓는 것은 물론, 머리와 가슴속에 새겨 넣고 그것을 위해 전 생애를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받고 싶은 위인이나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거나 지갑에 넣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패한 것을 머릿속에 담아 두는 바람에 새 일을 시도할 엄두를 못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원수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원수를 갚기 위해 전 생애를 쏟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악귀나 잡신을 쫓기 위해 부적을 항상 집안에 붙여 놓거나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집안에 집터를 지킨다는 지신인 터주를 비롯한 잡신들을 항상 보배처럼 모시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자들은 그것들이 무슨 보호자인 양 걸핏하면 그것들에게 피하곤 합니다. 우리는 피해야 할 보호자이신 주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2. 주 하나님을 지고의 복으로 여기는 성도
믿음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구국의 공을 세워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존경받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죽이려는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도 주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해 온 다윗을 다윗의 친구이자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을 들어 사울 왕의 칼에서 보호하셨습니다. 아들인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할 때에도 다윗 왕은 주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해 온 다윗 왕을 그의 신하이자 친구인 후새를 들어 압살롬의 칼날에서 보호하셨습니다.
만일 북한 공산군이 투하하게 된다면, 무력 적화 통일을 위해 남한에 투하할 북한의 핵실험을 보고서도, 여전히 동족이므로 도와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울 왕은 다윗의 동족이었고, 압살롬은 다윗 왕의 아들이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머리와 손발을 가지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와 고난과 죽음은 물론, 맞설 수 없는 적들과 잡신들로 인한 위기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어딘가로 피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 피해 보호받으시기 바랍니다.
한 조종사가 나이지리아의 어느 정글 위를 날고 있었을 때, 비행기 엔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초록색 깃발을 보게 되었으므로 그 곳을 향해 미끄러져 하강했습니다. 다행히 그 곳은 깨끗하게 정돈된 공지였으므로, 착륙하면서 비행기가 조금 상하긴 했으나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두 달 후의 안식년에 그 사고에 대해 간증을 했을 때, 한 여성도가 사고가 난 날짜와 시간을 물었습니다. 바로 그 위기의 때에 주님께서 그녀를 일깨워 주신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절박한 필요에 처해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30분쯤 당신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 제 마음에는 평안이 임했으며, 따라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온맘닷컴)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피하는 사람을 반드시 보호하십니다.
오래 전에,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는 작은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닥쳐온 대형 허리케인으로 호수의 제방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들의 보금자리가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순식간에 차 올라 고목까지 물에 잠기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고목 꼭대기까지 오른 그들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급격하게 불어나는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 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받쳐 올렸습니다. 찰스가 또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 순간, 그녀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리고는 최대한 목을 물 위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찬송가 432장)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느끼면서 솟아나는 소망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바로 그 때에 호숫가에 올려져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그들을 향해서 떠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배를 타고 구원받았습니다.
가이드포스트에 실린 그 가족의 간증 실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고백한 다윗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뭡니까?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하고 증언하여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믿고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은 잘되는 것 같으나 결국엔 괴로움이 더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인간적으로는 그들과 관계하며 살아야 하지만, 영적으로는 단호하게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다윗이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주 하나님은 다윗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고, 다윗의 분깃을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의 생업에 결실을 주시고, 영적 생명에 생기와 활력을 돋구는 생명수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고, 기업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다윗이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한 또 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마다 다윗의 심장이 다윗을 교훈할 정도로 다윗을 각별히 훈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피하는 우리 성도들을 보호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육의 복도 주시고, 또한 받은 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과 복음을 위해 쓰도록 훈계도 하십니다. 우리 모두 더욱더 성도다운 성도, 믿음의 사람다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항상 앞에 모셔야 할 주 하나님
여러분! 당신께 피하는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신령한 복과 생업의 복을 주시고, 받은 복으로 사랑과 복음을 위해 쓰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안 모실 수가 있습니까?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체험적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머리 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모시고 있는 것이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머리와 마음속에 항상 주 하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고시촌으로 유명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교회에서 올해 사법시험 2차 합격자 47명이 배출됐습니다. 인치승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화제의 교회인 아름다운교회는 200평 남짓한 규모에 대학생과 고시생 등 400명을 포함해 신도가 600명 정도 됩니다.
이 교회는 지난해에도 41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고, 재작년에는 신도 19명이 사시에 최종 합격했습니다.
이효준 전도사는 “수험생들이 편안한 마음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목사님이 많은 배려를 해 주신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일은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부모들이 자녀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교회에 나가는 것부터 금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성령의 능력과 지혜가 필요한 시기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하거나 가사를 돌보거나 사업을 하거나 직장 일을 하거나 힘든 일을 하거나 어려운 인생 문제를 풀거나 항상 주 하나님을 모시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흔들리지 않고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으며, 따라서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영도 즐거워하고, 육체도 안전히 거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윗이 예언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셨지만, 음부에 버려지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이 길은 영생에 이르는 길이고, 주 앞의 영원한 기쁨과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는 길입니다.
4. 맺음말
우리 모두 하나님을 항상 머리와 가슴속에 모시고,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여 영육의 복을 받으시고, 사랑과 복음을 위해 쓰며 살다가 때가 되어 천국의 영생 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