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눅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용서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저지른 죄가 괜찮다는 것도 아니며 그 사람과 다시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에게 같은 일을 반복해서 당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니 용서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하지만 용서는 말 그대로 용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를 100% 신뢰하시면서 엄청나게 큰 책임감이 따르는 큰 사역을 바로 맡기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나를 바로 사용하지는 않으십니다. 나를 신뢰하시는 만큼만 나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번역을 해서 언제까지 출판사로 넘긴다고 약속을 하고 마감일을 매번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은 항상 저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십니다. 다만 그런 책임을 맡을 일을 또 맡겨주시지는 않습니다. 제가 신뢰를 쌓을 때까지 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분명 죄를 지었는데 그를 용서했다고 해서 그 죄가, 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죄이며, 그 사람이 회개를 했더라도 나에게 다시 신뢰를 얻는 시간을 반드시 거처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 단체 재정을 맡은 분이 돈을 횡령했는데 제가 용서했다고 해 봅시다. 용서를 받았으니 그다음 날, 다시 재정을 맡겠다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얘기해야 맞습니다. "집사님, 저는 집사님을 사랑하고 용서했어요. 하지만 집사님을 신뢰하진 않습니다. 그 신뢰는 집사님이 깨셨고요. 다시 신뢰가 쌓을 때까지 집사님께 돈을 맡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집사님을 다시 신뢰할 수 있냐, 없냐는 온전히 앞으로의 집사님 행동에 달렸습니다." 하, 정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역자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이런 말을 듣고도 자기를 낮추어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일 만큼 완전하게 회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제가 논점을 분명히 하느라고 뼈 때리는 표현을 썼지만,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조건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입장이라면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은 그만큼의 선에서 상대방과의 신뢰는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조목조목 내가 뭘 잘못했고, 그것은 죄이며, 그 일로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대가를 치를 것이고, 다시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랬다고 해서 상대방이 전과 같이 대해 줄 것을 기대하진 마십시오. 신뢰는 내 쪽에서 깼고 이제 상대방의 손에 결정권이 쥐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부관계는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어딘가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해 놓고 해결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다시 반복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 사람이 용서를 빌지 않더라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용서했다고 그 사람을 신뢰해야 하는 것도,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며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도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세상에 좋아하지 못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될 교인, 또 신뢰해서는 안 될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보다 더 하나님 안에서 성숙해 지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적인 사랑의 특성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꼭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깝게 지내란 말도 아닙니다. 멀리해야 할 사람도 있고 또 각자는 크게 문제없지만 둘이 만났을 때 서로에게 피해가 되는 조합도 있습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상대방이 회개를 하지 않아도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용서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회개를 했든 말든, 나에게 용서를 빌든 말든, 내가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또 상대방이 회개를 하고 다시 이전과 같이 지내고 싶다고 해도 그럴지, 말지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다시 신뢰하고 친하게 지낼지, 말지에 내가 결정합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으로 용서를 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특별히 죄가 아니라 능력 부족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회사에서 직원을 고용했는데 항상 2% 부족합니다. 일 처리를 끝까지 못하고 항상 실수가 있습니다.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사실 상관없습니다. 못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일부러 안 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의 태도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같습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그 직원의 능력 부족이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안 바뀝니다. 업무 내용을 바꿔서 그 사람의 능력에 맞는 일을 시켜야 합니다. 직원의 능력의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맞는 자리에 재배치하는 것도 상사의 임무입니다. 그 직원은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자꾸 요구하는 상사가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 상사도 자꾸 실수하는 부하직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것입니다. 이럴 때는 그것이 능력 문제임을 알고 그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고 월급도 하는 일에 맞게 조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와 신뢰의 좋은 설명입니다. 용서했다고, 사랑한다고, 그 사람의 능력(인간관계에서는 신뢰도) 이상의 일을 맡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면 사실 용서하고 나서 이혼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경우가 두 가지인데 하나가 상대의 음행입니다(마 5:32).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는 용서하고도 이혼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혼을 선택해도 용서는 해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상대방이 회개를 안 할 수도 있고 계속 그런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할 수도 있고, 내 쪽에서 음행을 했던 사람과 같이 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고도 같이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성경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며 성경적으로 허락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되도록 이혼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설명하면 제가 이혼을 종용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을 했다면 버릴 수 있다는 뜻이며 그 외의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믿지 않는 상대 배우자가 갈라서길 원할 때입니다. 이것은 내 쪽에서 원하는 경우는 아닙니다.
(고전 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그런데 음행한 배우자와 계속 같이 살기로 했다면 용서하고 바로 다음 날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음행을 행한 배우자가 자신은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람을 핀다면 그 사람을 신뢰해서 되겠습니까? 사실 철저히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그 일을 하겠다는 무언의 선포입니다. 능력 부족 부하직원을 그 능력에 맞는 일을 시키고 월급을 조종하는 것이 상사의 임무이듯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상대방도 그 상태에 맞게 대우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신뢰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아무 근거 없이 신뢰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하지 않고 신뢰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내 신뢰를 얻어내지도, 얻어낼 생각도 없는 상대방에게 무조건 기회를 주고 신뢰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안 합니다. 그러니 상대방은 또 그것으로 나를 조종하고 같은 죄를 또 반복하는 것입니다. 말은 누가 못합니까? 돈도 안 들고 그냥 하면 되는 건데요. 하지만 그 말을 삶으로 증명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용서와 신뢰가 서로 다른 것임을 설명 드리기 위해 가장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했습니다. 배우자의 불륜이나 부하직원의 능력 부족으로 오는 인간관계 마찰은 일반적인 사항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자 인간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에 지혜롭게 적용하면 인간관계의 문제를 많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은 타락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죄성이, 성도들에겐 육신이 있으므로 인간관계 문제는 100% 깔끔하게 해결되진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지만 이 얼마나 자유를 주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상대방의 회개와 관계없이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신뢰를 다시 얻어서 이전과 같은 관계로 회복하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행하느냐,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행동으로 자신의 회개를 증명하지 않는 사람을 이전처럼 신뢰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