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유명 인기가수 김수철이 부른 노래가사의 한구절이다. 이구절 따라 나도, 오늘은 특별한 국토순례기를 기록하기 위해 팔봉산으로 가련다.
상서로운 땅 "瑞山"이 낳은 인고 56회 카페주인 일민거사 李憲琦 회장과 洪性俊 사무총장 그리고 李康大형이 카페 회원과 산악회 회원들을 자신들의 고향에 있는 팔봉산으로 특별 초청하였다. 사유는 오직 하나, 팔봉산의 정기를 나누어 갖고 가을의 정취를 함께 맛보자는 자상한 배려 때문이다.
서산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된 것은 삼한시대 마한에 속하였으며, 오늘의 지곡면 일대에 <치리국국>이란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백제시대에는 <기군>, 통일신라 시대에는 <부성군>, 그리고 고려 충렬왕 10년에 처음으로 <서산>이라 불리워젔다.
신라시대 부성군엔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하기도 했으며 서산이 갖는 길지로써 지세가 센탓인지 서산군은 고려, 이씨조선에서 수차레 강등과 復郡의 행정구역 개편을 겪다가 1988년말에 와서 대전 다음가는 충남 제일의 군으로 성장, 길지로서의 용트림을 시작했으며 1989년 1월1일 군에서 시로 승격되었다.
복되고 즐거운 일이 많은 조짐의 상서로운 땅, 서산은 태초부터 좋은 이름을 지녔으며 또한 서산은 미리부터 오늘의 서해안시대를 예비한 느낌이 짙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준공 개통으로 수도권 진입은 1시간으로 단축되었고 인근 평택항은 대중국무역의 전초기지가 된다.
또한 서산시는 일찍부터 중국과 연락이 잦아 대륙문화 수입의 선진적 역할을 하였다. 백제 조상미술의 선진지역으로서, 이것이 웅진 또는 사비로 전해젔고, 다시 신라에 전해 졌으며, 일본에 건너가서는 아스까 시대의 조선미술의 제1차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저 있다.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의 세곡을 인천으로 운송하는 조운선의 중요한 루트였다.
따라서 서산은, 인천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인천시민의 35%가 충청향우들이며 이중 대다수는 서산, 당진 향우들이다. 망아지는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드시 서산, 당진과 서울과의 육로 교통은 수월하지 않았다. 그대신 인천과의 해상교통은 인근 대산항과 구도항을 이용하여 왕래가 잦아, 인천으로의 유입이 많았으며, 특히 인천 유학생들이 많았다.
이곳 팔봉면 양길리 출생인 일민거사는 옛적 삼정승 육판서 반열에 있는 노동부장관직에 올랐으니 예조판서에 해당될 터이고, 6. 25 전란중 황해도 옹진에서 이곳으로 피난나온 閔鳳基학생은 서산중학을 졸업하고 인천고등학교로 유학을와 현직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의정단상에 올랐으니 이 또한 보통 일인가?
그 외 具定會, 趙載憲, 池龍澤, 韓昌洙등 10여명이 서산, 당진 출신들이다. 마침 동행한 李鐘得형이 한마디 거든다. 그도 역시 서산 부운면 출신이다. 대통령 령부인 이희호여사가 서산초등학교 출신이고, 인기연예인 박주아, 인기코미디언 이영자 또한 이곳 출신이란다. 참으로 다양(!)하다. 이 모두가 팔봉산의 정기를 이어 받아 태어난 인물들 아니겠는가?
2002년 10원 12일(토) 8시30분, 사당전철역 5번 출구에 모인 친구들은 반갑게 손잡으며 정다운 인사를 나눈다. 이른 아침 짙게 깔린 안개를 제치고 서해안 고속도로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초이스 관광(주)에서 제공한 경기 71 바4509호 차내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한결 여유로운 남행길여정에 오른다.
모두 35명(서울 24명, 인천 11명)의 정겨운 얼굴들은 초청자 일민거사의 차내 인사말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으로부터 105년전 오늘, 즉 1897년 10월 12일 흥선대원군의 셋째아들이 고종으로 등극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며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역사적 고증을 듣는다. 그리고 여행의 또 한 멋은 그 지역의 토속음식을 맛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오늘은 서산의 명물 박속 낙지탕을 선보이겠다고 하여 차내의 박수를 받는다.
사당역을 출발한지 1시간 30분만인 10시정각, 서산 톨게이트를 통과 해미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질펀한 너른 황금들녁이 차창밖으로 펼처진다. 해미평야라고 한다. 한다리(大橋) 金氏 世居地입구를 지나 서산시내로 들어스니 키가 50cm 밖에 안되는 코스모스 행렬이 도로 좌우에서 낮선 여행객을 반겨 맞아준다. 보통의 코스모스와는 또다른 수종이라고 한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마침 제54회 충남도민 체육대회가 이곳 서산에서 개최되고 있다. 육교와 거리 곳곳에는 체육대회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어지러히 걸려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구경좀하고 갔으면 좋으련만 산행객들의 갈길이 바쁘니 할 수 없지.
차창 오른편으로 팔봉산의 험준한 봉우리가 질펀한 평야에서 우뚝 솟아 연연히 이어저있다. 낮은 산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인상이 든다. 마침 도로옆길을 오르던 경운기가 곡식을 잔뜩 싣고 논뚝에 빠저 애를 태우고 있는모습을 차창밖으로 지켜본 鄭石宮회장과 일행들이 우르르 내려가 힘껏 밀어 올려 도로를 오르게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좋은일을 했으니 산행은 무사하리라.
시간은 10시 40분, 드디어 팔봉산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간단한 음료수를 준비하고 산행길을 시작하려고 한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팔봉산으로 들어가 볼까나?
팔봉산은 산의 형세가 병풍처럼 펼처저 있고 9개 마을을 품에 안은 듯 정기있게 솟아 있으며 산의 명칭은 여덟 개의 산봉우리가 줄지어 있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세가 수려하며 맑은 공기와 탁트인 주변경관이 절경으로 휴식을 포함 3시간 정도의 등산코스로 적합하나 오늘 우리의 등반은 주봉인 제3봉을 오르고 하산하는 것으로 산행계회을 세워 시간을 단축했다.
워낙 강원도 홍천에 있는 팔봉산이 유명해서 이곳 팔봉산은 앞에 서산 팔봉산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또한 이곳은 봉이 9개인데 제일 작은 봉을 제외하고 팔봉산이라 하였으며 그래서 매년 12월 말이면 그 작은 봉우리가 자기를 끼워주지 않았다고 해서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10시 45분 일행은 팔봉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1천m 내외의 산을 오르는 산우들이라 362m의 팔봉산 산행을 얏잡아 보기 쉽지만, 너른 해미평야에 우뚝 솟아오른 팔봉산은 해수면 표고로 부터의 362m이기에 보통 4-500m 고지대에서 산행기점이 시작되는 일반산행과 별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깍아지른 듯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주봉 3봉을 올려다 보면서 지난 두륜산 가련봉 등반과 같이 만만치 않음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산행이 시작되는 입구로부터 울울창창히 곧게 뻗은 소나무 숲길 사이로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오르는 산행객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기만 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르면서 그간에 못다한 이야기 나누는 친우들의 면면은 정겨웁기만 하다. 1945년 일제치하에서 해방을 맞아 독립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민족상잔의 비극 6. 25를 초등학교 졸업반에 시각에서 맞아야 했던 아픔의 세대들은 35-39년생의 5년 터울로 동급생이 되었다.
해방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으로 갓 입학한 우리는 "가 갸 거 겨"와 "ㄱ ㄴ"의 우리말, 우리글의 한글세대로서 갖는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칭 "대한민국 1기생"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기생들의 활약은 그 어느 동창들 보다 유별나며 튀어 오른다.
민주화의 눈길을 뜨고 조국근대화 산업의 한축을 맡은 4. 19세대이기에 우리의 자부심은 영원하다.
산행시작 얼마후 약수터에서 흐르는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고 1봉과 2, 3봉으로 갈라지는 능선에 오른다. 모두 함께모여 기념촬영을 한후, 일부는 1봉을 등반후 하산키로 하고 산우들은 정상을 오르기 위하여 오른쪽 주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2봉을 오르면서 중간중간 잘 다듬어진 철제 난간과 계단을 오르면서 가쁜 숨을 토해낸다. 눈을 들어 서쪽을 바라보니 황금들녁 넘어 서해안의 섬들이 보이는 듯 하나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시야가 그리 밝지만은 않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인천 앞바다에 섬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한숨을 돌리며 계속 오르니 암벽사이로 동굴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 오른쪽 암벽에는 팔봉로타리 클럽에서 세운 나무현판이 잘 다듬어져 걸려있고 -정상까지 61m. 동굴입구(길이 12m)-라고 쓰여저 있다. 동굴안으로 들어서니 철제 사다리가 나타나며 상부는 사람 몸하나 겨우 빠저 나갈 수 있는 통로에서 영롱한 아침 햇살이 비처 내리고 있다.
2봉을 지나 암벽 사이로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몇 번째, 드디어 우리는 3봉 정상에 섰다. 시간은 11시 40분,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시간상 거리로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정상비 제단에서 田河鎭 등반대장을 위시한 몇몇은 산행을 기원하는 산제를 드리고, 모두는 각자 바위에 걸터 앉아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눈을 들어 동남쪽을 바라보니, 4 / 5 / 6 / 7 / 8봉이 연연이 아름다운 능선의 모습으로 이어저 닥아온다. 언제보아도, 어디서 보아도 우리의 산하는 정말 아름답다. 그래서 산자수명한 금수강산이라 하지 않았던가?
정상에서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고 하산길을 재촉한다.
오르는 길이 직벽으로 험해서 하산길은 반대편 등산로를 택했다. 혹시 내려가는 길도 어렵지 않겠나 염려 했지만, 이게 웬일! 완만한 경사로가 산허리를 돌며 이어저 있어 콧노래 부르며 편안히 내려 오기를 한 30분쯤. 우리는 1봉과 2, 3봉의 갈림길 능선에 도착했다. 전에 우리가 올랐던 직벽 등반이 어려운 산행객들은 하산 등산로를 이용하면 손쉽게 3봉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12시 40분, 일행 모두는 주차장에 모였다.
일찍 1봉을 다녀온 친구들은 더덕무침, 새우구이를 안주삼아 동동주 파티가 한창이다. 그래 좋은 세월! 마음껏 드시고 즐겨 보시게나!
자 이제는 일민거사 생가 방문이다. 이곳으로부터 10여분 상거에 있는 일민 생가는 1봉 산자락 끝에 호젓이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서산시 팔봉면 양길리 2구, 머리가 하얀 노인 내외분이 우리를 반겨 맞아 주신다. 일민거사의 숙부님께서 조모님을 모시고 단촐하게 살고 계신다. 젊은이들은 모두 서울, 대전등 대처로 나가있고 이렇게 우리의 시골은 노인들만이 남아 지키고 있다. 앞으로가 큰 일이다. 누가 우리의 농촌을 지킬 것인가?
앞뜰에는 누렇게 익은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마당 앞 연못에는 연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연못 속에는 붕어/메기가 노닐고 있을터이고, 연못 바닥에는 미꾸라지들이 제 세상인 듯 바닥을 헤집고 있겠지! 감나무, 대추나무가 휘돌아 서있는 뒤편 자락에는 고추, 마늘 생강과 호배추가 저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시골 풍경은 내 어릴적 고향을 보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안마당에 들어스니 마당 가운데 차려있는 교자상에는 찐감자, 옥수수, 밤, 대추등이 수북히 쌓여 있고, 무공해 콩으로 만든 두붓모와 풋김치가 맛깔스럽게 입맛을 돋운다. 한편에는 캔맥주, 땅콩, 마른안주등이 산행에 메말랐던 입안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한편에서는 이곳 특용작물인 생강을 사느라 분주하다. 비닐봉지 하나 가득히가 일금 2천원, 그것 한봉지면 족히 몇 년간 김장. 생강 걱정은 없을것이다. 빈 내손을 본 韓相根동문이 한봉지를 건넨다. 한편 林榮善총무는 살림꾼답게 고구마 줄기 말린 것 한부대를 거금 1만원에 사서 봉다리 봉다리에 담아 차내에서 나누어 주고............ 그래 고맙네! 친구!
한바탕 북새통을 치루는 동안 몇몇은 뒷동산에 모신 일민 부친 묘소를 찾아 참배한후 마을 앞길을 따라 동구밖을 나선다.
자 이제는 기다리던 본격 식도락의 시간, 버스에 승차후 10분 거리에 있는 舊島港 포구에 다달으니 마침 썰물때라 갯벌의 모습이 길게 나타나 있고, 포구옆에 늘어서 있는 식당중 우리는 구도횟집 2층으로 안내 되었다.
sbs 모닝와이드/ mbc 화제집중 TV에 방영 되었다는 현판에는 "서산에 명물
박속 밀국 낙지탕" 자연산 회 전문집이라는 옥호가 선명히 쓰여저 있다.
냄비 육수에 박을 잘게 썰어 바지락과 함께 펄펄 끓인 후, 포구앞 갯벌에서 잡은 산낙지를 넣어 샤브샤브로 먹는 또 다른 먹거리로써 후참은 밀가루 수제비/칼국수등을 넣어 먹는 별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