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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8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8(1)
8 그러나 두려워하는 者들과 믿지 아니하는 者들과 凶惡한 者들과 殺人者들과 淫行하는 者들과 占術家들과 偶像 崇拜者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者들은 불과 硫黃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死亡이라
But the cowardly, the unbelieving, the vile, the murderers, the sexually immoral, those who practice magic arts, the idolaters and all liars--they will be consigned to the fiery lake of burning sulfur. This is the second death."
Timidis autem, et incredulis, et execratis, et homicidis, et fornicatoribus, et veneficis, et idolatris, et omnibus mendacibus, pars illorum erit in stagno ardenti igne et sulphure : quod est mors secunda.
τοῖς δὲ δειλοῖς καὶ ἀπίστοις καὶ ἐβδελυγμένοις καὶ φονεῦσιν καὶ πόρνοις καὶ φαρμάκοις καὶ εἰδωλολάτραις καὶ πᾶσιν τοῖς ψευδέσιν τὸ μέρος αὐτῶν ἐν τῇ λίμνῃ τῇ καιομένῃ πυρὶ καὶ θείῳ, ὅ ἐστιν ὁ θάνατος ὁ δεύτερος.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신자라 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이 올 때 육적인 고통과 죽음이 겁나서 주님과 복음을 저버리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돌밭에 뿌려져 뿌리가 나지 않는 씨앗처럼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바로 넘어지는 교인들이다. 이들은 육체와 영혼을 모두 멸하실 수 있는 주님보다 단지 육체만 죽일 수 있을뿐인 사탄의 권세를 더 두려워한다.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은 애굽 왕 바로를 두려워하여 갓 태어난 아들들을 스스로 물에 던져 죽였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진격하라는 주님의 명령보다 네피림 같은 거대한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하였고 이로 인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여호와의 백성이었어도 블레셋 군대와 골리앗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보다 바벨론을 더 두려워하여 애굽과 동맹을 맺고 항전하다가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장님 거지 바디매오의 부모는 아들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세를 더 두려워하여 증언과 진술을 아들에게 떠넘겼다. 두려워하는 자로서 성경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은 사람은 베드로 뿐이다. 베드로가 무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서도 용서받고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특별하신 은혜 덕분이다. 그러나 이는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한 혜택이고 그 이후에는 두려움에 한 번 신앙을 저버린 자들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다시 땅으로 끌어내려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저지른 것이므로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맞게 된다. 오늘날에는 이런 물리적이고 육체적이며 직접적인 환난과 핍박 대신에 자기들의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님과 복음과 신앙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진학을 위해서, 취업을 위해서, 생계를 위해서 주일 예배를 비롯한 신앙 모임과 활동을 뒤로 하고 자기 일에만 전념하는 것은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보다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일으켜 세운 두 짐승의 권세를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지출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마땅히 드려야 할 소득의 십일조를 취하는 것은 재물을 주시는 주님보다 재물을 휘두르는 바다 짐승의 권세를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란 신자라 하면서도 어떤 일에 손해를 보지 않으려거나 이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복음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자들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가시떨기에 뿌려져 가시덤불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씨앗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신앙이 열매맺지 못하는 교인들이다. 교회에서 전대미문의 사건과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담임목사가 책임있게 수습하지 않고 부교역자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어떻게든 쉬쉬하며 묻어두고 넘어가려 하는 것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회사 사장이 엉터리 제품을 만들고 탈세를 저지르며 임금을 체불하는 것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법조인이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따라 기소나 변호나 재판을 아전인수 격으로 이현령비현령 하는 것이 믿지 않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청년이 음욕을 채울 간음의 기회를 요셉처럼 저버리지 않고 다시 없을 천재일우로 여기며 취하는 것이 믿지 않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여자가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 믿지 않는 것이다.
흉악한 자들이란 교회에서 음흉한 계획을 꾸미거나 험한 말과 위협적인 행동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자들을 말한다. 담임목사가 아들 목사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위해 교인들을 장악하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교회 재정을 빼돌리려는 담임목사와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협조한 장로들이 흉악한 자들이다. 교회 목사가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여자 교인들을 교묘하게 세뇌해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그것이 드러났을 때 교인들이 피해여성의 행실을 문제삼고 목사를 두둔하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교회에서 불법과 불의가 드러났을 때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를 알아보려 하거나 바로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들을 윽박질러서 부당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목사나 장로가 자기 권위를 남용해서 교인들을 꼼짝 못하게 휘어잡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와 교회의 정당한 사역과 가르침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왜곡하며 작은 트집거리를 잡아 침소봉대 하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교회 내에서 다른 말로 교인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정치 권력에 맛들린 목사가 교인들과 추종자들을 선동해서 불법적인 대규모 집회를 열고 국가전복을 꾀하며 정부와 국가 지도자를 향해 온갖 욕설과 비방과 저주를 퍼붓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타인의 건강과 생명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반드시 현장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부러 방역지침을 무시하는 것이 흉악한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통령에게 누가 될까봐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저주하고 조롱하고 비방하고 악담을 퍼붓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흉악한 것들이다. 이념 논리에 빠져서 목사가 북한 주민 2천만명을 하나씩 끌어안고 죽어 남북통일을 이루자고 선동하는 것이나, 신학교수가 일베나 메갈 같은 반 사회적 패륜 사이트의 게시물을 퍼나르는 것이나, 단지 일 잘한다는 것만으로 불륜과 패륜과 범법과 횡령과 사기를 저지르는 정치인을 마치 의인인 양 옹호하며 두둔하여 혹세무민 하는 것이 흉악한 짓이다.
#20210828
#신명기 #Deuteronomy 30:3-10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1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회개하고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 다시 이런저런 복을 주시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은 사실 어떤 점에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바사 왕 고레스의 명으로 순적하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서도 그 이후 그들이 과연 이전 자기들의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고 잘 살게 되었는지는 동의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기들만의 독립된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 등의 강대국들의 속국이 되어 지배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개하고 순종하는 이스라엘이 받을 여호와의 복을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보기에도 껄끄러움이 생기는데, 이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여호와께서는 어지간하면 이스라엘에게 순종의 대가로 이 땅의 형통과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아직 이스라엘이 회개와 순종의 상급으로 여호와께로부터 받게 될 이 땅의 육적인 번성과 형통과 복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예수님을 잡아죽인 죄로 인해 수십년만에 로마에 의해 철저히 파멸을 당하였다. 그 이후로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고집불통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왕성하게 퍼져나가며 영향력을 끼치는 동안 나그네가 되어 흩어져 더부살이 하고 있는 지역에서마다 온갖 차별과 핍박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예수님을 잡아죽인지 거의 2천여 년이 다 되어가던 때에도 그 죄책은 여전히 발휘가 되어서 그들은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6백만여명이나 끔찍한 학살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서 어찌어찌 간신히 나라를 이루어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와 민족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지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을 이 말씀의 성취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회개와 순종의 대가로 형통의 복을 주시는 것인데,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여호와께 가장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언약과 명령이 사도 바울이 예언한대로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민족적 회심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영적 상태만 본다면 여전히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포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마귀의 포로가 된 것은 다른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치 아담이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땅을 다스릴 권한을 마귀에게 넘겨준 것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여호와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권리를 마귀에게 내어죽 그의 포로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사도가 가르친 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회심과 다시 살리심은 신자 스스로의 의지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므로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셔서 민족적으로 부르시고 돌이키시며 다시 살리실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복음의 원리가 아니라 땅의 논리에 의거해서 자기들만의 나라를 이루고 있지만, 그들이 민족적으로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거주하건 타지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건 상관없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한 마음 한 뜻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마귀의 포로됨을 거부하고 그 사슬을 끊으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단단히 붙들어 맬 것이다. 회심한 이스라엘은 그들의 선조들이 육적인 나라를 이루며 육적인 번성을 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신령하게 부강하게 될 것이다. 또한 회심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이방인들은 영적인 부모와도 같은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모세를 통해서 먼저 여호와의 율법을 맡았던 장자로서 이방인 성도들이 이뤄놓은 복음의 진리들로부터 더욱 넓고 높고 깊은 복음의 정수를 밝혀놓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민족적 회심을 한 이후부터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까지는 그 어느 시기보다 복음에 대한 지혜와 지식이 생수의 강처럼 흘러 넘치게 될 것이어서 그만큼 사탄이 결박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가히 일종의 천년왕국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지시하셔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편지를 써보내시는데, 그 중 두 교회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교회들은 크고 작은 죄악들로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었다. 그 다섯 교회 중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다른 세 교회들보다 더 죄악의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사데 교회에서는 마치 아합 치세의 북 이스라엘에서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자가 단지 7천 명에 불과했듯이 눈에 띄지 않는 극소수의 성도들만 흰 옷을 입고 주 예수님과 함께 거닐 수 있을 뿐이었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복음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두 교회를 내버려 두셔서 사탄의 회당이 되어버리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도 서신을 보내셔서 늦게나마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촉구하신다. 아무리 교회답지 않은 개차반스러운 교회라 하더라도 주님의 교회인 이상 반드시 언젠가는 자기들의 지난날 저지른 죄악들을 낱낱이 회개하고 첫 회심에 준하는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것을 합리화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 그런 회개와 순종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아무리 목사의 미성년자 성범죄가 발생했고 이를 은폐했고 성범죄 피해 여학생이 성인이 되어 교회에서 자살을 했고 이를 은폐했고 진실 규명을 주장한 교역자들을 내쫓고 당회가 담임목사만을 지키려고 수많은 교인들을 낙심시켜 교회를 떠나게 하는 극악한 중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가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참된 교회라 한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유대 민족을 회심시키시듯이 그 교회 구성원 전체에 회개와 순종의 영을 부어주셔서 죄악을 씻어내고 돌이키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가 언제까지고 회개와 순종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멸 된 예루살렘 성전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20200828
#레위기 #Leviticus 19:27-28
27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28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 규례에서 금하신 이방 풍속들은 아마도 내 생각에는 군대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이방 족속 중에서 다른 것보다도 군사력을 가장 우선시 하고 주변을 무력으로 점령하기에 주력하는 나라의 풍습인 것 같다. 머리 주변을 둥글게 깎는다는 것은 요즘처럼 남자가 머리를 단정하게 깎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해병대처럼 머리 윗부분만 짦게 남기고 옆과 뒤는 삭발한 그런 머리를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전투에서 접근전이나 백병전을 할 때 적군에게 머리채를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과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각각 12명의 용사들을 추려서 싸우게 했을 때 서로 각자 상대편 용사들의 머리 뒷통수를 부여잡고 동시에 배를 찔러 한꺼번에 쓰러져 죽은 헬갓핫수림(날카로운 칼의 밭) 전투가 있었다. 그만큼 군인에게는 긴 머리는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짧게 깎을 수 밖에 없다. 수염 끝을 손상한다는 것은 장수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기 위해서 긴 수염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싹둑 잘라 흔드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 게다가 수염 또한 머리털과 같이 전투 중에 적군에게 잡히면 생명이 위험하므로 전투에 임하는 모든 군인들은 수염도 짧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윗이 옆 나라 왕이 죽어서 신하들을 보내 조문했을 때 죽은 왕의 아들과 그 나라 신하들이 다윗의 신하들을 간첩 취급하여 옷을 찢고 수염을 잘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 다윗은 수치를 당한 신하들에게 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격리할 것을 명했는데 이는 이 규례에 의거한 것 같다. 죽은 자 때문에 문신을 한다는 것은 전투 중 사망한 전사자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비장한 의식을 뜻하는 것 같다. '북두의 권'이라는 고전 격투 만화에서는 주인공 켄시로가 수라도를 다스리는 카이오와 대결할 때 죽어간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 왔다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풍습들이 금지되는 것이라 해서 군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군사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단지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은 전장에서나 있을법한 군대만의 특수한 문화를 일반적인 것으로 확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군대를 일반화 시킨다는 것은 국가 전체를 군대화 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영토 확장을 위한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주변 이방 족속의 어떤 왕은 호화로운 궁궐의 편안하고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철로 만든 거대한 침대에서 잤는데 이는 그 족속이 철저히 군국주의를 표방했음을 의미한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도 군국주의 국가였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강력한 군사력만 믿고서는 히스기야가 다스리는 유다 왕국을 침략하고 여호와를 비방했다가 단 하루만에 여호와의 천사에 의해 18만 5천이나 되는 군대가 전멸 되었고 그 자신은 두 아들들에게 살해 당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막대한 영토 점령에만 치중하다가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장에서 술독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스파르타는 군사력을 최우선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서 정한론을 앞세워 군국주의로 침략전쟁을 벌였으나 원자폭탄 두 개를 맞고 항복하였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은 예외없이 무력하게 만드셨다. 따라서 오늘날 여전히 군국주의의 망령을 떨지지 못하고 침략 야욕을 품고 있는 일본이나, 세계 최대 최고 최강의 군사력을 내세워 세계의 조폭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미국이나, 대부분의 국비를 핵무기를 만드는데 써버리는 북한 등은 주님의 섭리에 의해서 세력이 약해지거나 소멸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군사 쿠데타로 부당하게 정권을 침탈한 박정희는 장기 독재를 꾀하다가 부하 김재규 장군에게 사살되었고 육사 장군 출신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 시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가 실형을 살기도 하였다. 솔로몬은 병거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군사력을 불필요하게 확장했다가 말년에 여러 대적들을 상대해야 했고 급기야는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가 나뉘는 꼴을 당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군국주의를 금하신 이유는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를 사람에 비유하먼 자기 육체의 탁월한 능력만을 믿고 방자히 행동하는 것과 같다. 자기 힘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교만하여 안하무인하기 때문에 하나밈께서 미워하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오로지 군사력만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군국주의 국가는 하나님께서 버리실 수 밖에 없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단지 318명의 가신만을 데리고 5개 족속 연합군을 무찌르고 조카 롯을 구해낼 수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시에 군대가 없었어도 자기들을 추격하는 애굽 군대의 전멸을 볼 수 있었다. 여호수아는 아무런 전투 없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기드온은 단 3백 멍만으로 미디안 군대를 이겼으며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만 가지고 블레셋 군인 6백명을 죽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땅에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으로 주신 도덕과 윤리를 갖춘 지도자도 흔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군사력 증강에 혈안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국가와 정부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각자가 속한 정부가 군국주의로 치닫지 않도록 기도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때문에 걸핏하면 북한에 강경한 군사적 대응을 내세우고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이유로 오로지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에만 의존하려는 적지 않은 기독진영들의 사상은 성경적이지 않다. 하물며 2천만 국민들이 북한 주민 한 명씩만 끌어안고 같이 죽으면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희대의 망언은 감히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사의 입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써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목사가 아니라 악한 영에 미혹 된 거짓 선지자임을 증거한 것이다.
#20190828
#에스겔 36:1-38
이스라엘의 범죄를 바벨론의 손을 빌어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치유와 회복을 예언할 것을 지시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심판을 예언할 때는 백성들과 장로들에게 하라고 하신 반면에, 치유와 회복은 백성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산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산들에 대하여 선포하라 하신 첫번째 이유는 지금 멸망을 당한 이 시기에 아무도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와 회복을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지금 이스라엘은 아무런 희망을 바랄 수 없는 절망에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도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을 아시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산들에게 선포하라 하신 것이다.
둘째 이유는 치유와 회복의 언약은 백성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의 상황에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의미한다. 재앙의 심판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이유는 물론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이 듣지 않을지라도 혹여나 그 심판의 예언을 듣는 소수의 백성들이 있을까 하여 그리 하신 것이다. 그러나 치유와 회복의 말씀은 이미 망할 자들은 다 망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남기실 자들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은 소망을 갖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하나님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심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산들과 높은 곳들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그 울창함이 없어지고 사람이 거기서 어떤 유익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황폐해졌다. 그런 산들을 보면 어떻게 여기가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회복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 멸망과 폐허의 증거를 치유와 회복의 증거로 삼고자 하신다. 그래서 만민이 이스라엘의 산들을 다시 볼 때 이는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하신다.
그러나 그 회복의 원리는 겉사람은 낡아지고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롬게 되는 것이다. 즉, 멸망 가운데서 다시 회복되는 이스라엘의 외형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왕조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것이다. 또한 에스라의 지도로 재건한 두번째 성전은 주변 나무들로 얼기설기 지은 것이라 그 초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솔로몬의 크고 웅장한 성전을 보았던 장로들은 그 초라한 둘째 성전을 보고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어 통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그 웅장했던 성전보다 이 초라하게 재건한 성전을 더 귀하게 여기시며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백성들은 그 초라한 성전에 과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만한 큰 믿음을 가져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회복된 백성들의 육체는 초라하게 하신 반면에 그 영혼은 이전보다 더욱 새롭게 하신 것이다.
이 원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것은 둘째 성전의 초라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비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것이, 그렇다고 고귀한 신분으로 나신 것도 아니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나신 것이 그러하다. 이 땅에 나신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까지의 모든 순간이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비참함을 직접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성전이시다. 그 초라한 육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이 회복의 원리는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성령을 보혜사로 주신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날마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는 점점 육체의 소욕을 없애나가는 것이므로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낡아지고 후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을 없애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할 수록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채우며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게 되는 육적인 것들을 아쉬워하거나 아까워 할 필요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의 겉사람이 낡아질수록 하나님 나라에 그만큼 가까이 진전하게 되는 것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가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고난을 견고히 인내할 수 있는 원리와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아무렇게나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지는 않으신다. 회복 전에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들을 배은망덕한 음란한 여인에 비유하셨다. 그만큼 백성의 죄악은 제거할 수 없는 추악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피와 같이 주홍처럼 붉은 죄를 새하얀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깨끗하게 씻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오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신령한 정결함을 일방적으로나 강압적으로 행하지 않으신다. 죄지은 백성들에게서 금강석과 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떼어내시고 하나님께 회개하고자 하는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의 죄사함이 우리의 회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사함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면서도 마치 우리가 먼저 회개했기 때문에 죄사함을 주시는 것처럼 역사하신다. 우리를 기계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시며 설득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신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참으로 신묘막측하고 오묘하기 때문에 섣부른 자들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구원의 공로가 인간에게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점점 더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일깨워주시게 되면 구원의 표면적인 방식이 마치 인간의 회개라는 행위에 기인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는 실상 성령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는 우리로 교만하지 못하게 하시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최고의 상급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일타쌍피 방식인 것이다.
이는 교회와 신자들이 모종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거의 멸망의 심판에 가까운 징계를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누가 보기에도 교회가 위태위태하고 절단날 상황에 직면해 있는데도 그 교회에 회개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없다면 이는 성령께서 회개의 영을 주시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수 년 새에 이 작은 교회에 교역자 성범죄와 은폐, 피해자 청년의 자살, 부교역자 집단 퇴출, 급기야는 담임목사 중도 사임까지, 교회를 휘청이게 하는 큰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는데도 표면적인 문제만을 해결하려 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찢는 일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들의 방식으로 바벨론의 포로를 벗어나고자 하는 불법적인 움직임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교회는 장로들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 교회의 상황이 마치 바벨론에 멸망당한 예루살렘과 같이 황폐한 상황임을 직시하고 가장 먼저 교회에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 어떤 범죄를 무심코 저질러 왔는지를 최근의 것부터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회개할 목록을 마련하였으면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들을 행해야 한다. 교회가 내쫓은 교역자들, 교회를 떠난 교인들에게는 교회의 이름으로 당회가 나서서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들이 용서를 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그리 해야 한다. 제도적인 미흡함은 계획을 세워 보완해 나가야 한다. 이런 활동들이 우리 교회에 있어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