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박영보 | 날짜 : 14-06-17 12:34 조회 : 1492 |
| | | 머니 추리 (Money Tree)
조그만 화분에 심겨져 있는 나무의 가지 마디마디에 매달린 파릇한 종이 잎새들. 일불, 이불, 오불, 십 불짜리 지폐들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더러는 이십 불짜리도 있었다. 작은 키의 나무였지만 가지는 유난히 많았고 그만큼 매달린 돈의 숫자도 많았다. 혹시 일부러 가지가 많은 나무를 골라 심은 것은 아니었을까. 카드에는 간단한 한마디씩의 석별을 아쉬워하는 인사말과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웃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캘라한 씨 부부를 통해 전해온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떠나는 길에 소다라도 사 마시고 필요한 데 쓰라”며 끌어 안고 흐느끼던 캘라한 씨 부부. 미국에 이민 와서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된 첫 번째 사람들이다. 고인이 된지 십 년도 훨씬 더 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그들의 모습이 수시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인구 고작 이 삼만 명에 불과한 테네시 주의 컬럼비아라는 조그만 타운이었다. 그곳엔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이라고는 달랑 우리 세 식구가 전부였다. 그곳에 도착 후 근 한달 만에 찾은 직장에 자주 드나드는 현지의 일간지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취재 인터뷰를 위해 집에 찾아 오겠다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오직 하나뿐인 동양인 가족에 대한 희소가치 때문이었거나 호기심에서였을 게다. 추수감사절 아침신문의 일면에는 큼직한 가족 사진과 함께 ‘컬럼비아에 둥지 튼 한국인 가족’이라는 제하의 우리 가족에 관한 소개 기사가 나와 있었다.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이 땡스기빙 모닝페이퍼에 나온 미스터 박이 아니냐"며 인사를 해오곤 했었다. 직장에서 퇴근을 하고 집에 와보면 현관문 앞에는 이곳에 이주해 온 것을 환영한다는 카드와 함께 많은 선물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음료수 박스며, 케잌 상자, 유리컵이나 접시 세트 같은 생활용품 등도 있었다. 우편함에는 호텔, 미장원, 식당, 세탁소, 극장 같은 데에서 환영카드와 함께 무료 선물 권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한 두 달 이상 계속 되었다. 카드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 일일이 감사인사를 드리기라도 하면 주말 같은 때 찾아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친구가 되었다. 캘라한씨 부부도 이때 만난 분들이다. 신문을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곳에 와서 어렵거나 걱정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부부가 일을 해야 하는데 한 살 반짜리 아들을 돌봐줄 곳을 찾고 있는 중이며 그런 곳을 찾게 되더라도 교통편이 걱정되어 해결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내일 아침부터 와서 아이를 데려가서 음식도 해 먹이며 돌봐주다가 저녁때 데려다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매달 지불해야 할 금액이 얼마가 될지에 대한 걱정에 앞서 우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생기기도 했었다. 하나님의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일 뿐인 이었다. 한 달이 돼 갔다. 당초에 매월 지불해야 할 액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처음부터 얼마냐 라는 식의 돈 이야기를 선뜻 내놓지 못한 것도 어쩌면 우리 식 정서의 차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지역의 베이비센터에 지불하는 금액을 감안하여 이분들에게는 그들보다 약간 많은 액수를 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그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게 무엇이냐. 우리는 돈을 받기 위해 돌봐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이 아이는 천사이다. 오히려 이런 천사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일이 아니냐”며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단 일 불도 받지 않고 만 삼 년 동안을 돌봐 주신 분들이다. 그 동안 태어난 둘째 아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출산 때는 마치 한국인인 친정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역할까지 해 주신 분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갖가지 옷가지며 장난감들을 비롯 좋아하는 음식과 음료를 사주기도 했다. 돈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받으면서 아이들을 맡기게 된 셈이었다. 그들이 아이에게 선물로 준 락킹 체어는 삼 십대 후반이 된 아들의 귀중품 목록에 포함돼 있다.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나 네 식구의 생일 때 직접 요리하여 준비한 푸짐한 저녁상을 마련해 주는 것은 단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직접 만든 콘 브레드 머핀과 머스터드 그린의 맛은 그 이후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곳 이웃들이 한 마음이 되어 만들어 준 머니 추리. 그것은 단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함께 모아 담아 우리에게 건네준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고 사랑이 아니었겠는가. |
| 김권섭 | 14-06-17 18:04 | |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름값을 하는 나라이군요! 美國을 일부 세력들은 배타적으로 보고 적대시하는 층이 있는데 참으로 훌륭한 나라 국민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미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신 박영보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美國 축복이 있을 지어다!~^^ | |
| | 박영보 | 14-06-24 12:14 | | 3년 넘게 저희 두 아이를 단 1센트의 돈도 지불하지 않고 카울 수 있었다는 것이 제가 이나라와 이나라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아무런 댓가 없이도 사랑과 베품을 주는 나라의 사람들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선뜻 나서지 못하게 될 때면 생각이 떠오르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 |
| | 정진철 | 14-06-18 18:22 | | 박선생님이 처음 가실때 미지의 세상에대한 두려움이 있었을텐데, 귀인들을 만나서 다행이었네요. 저도 미국에 놀러가서 몇달 있어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선량하고 순수했던 인상을 받고 왔지요. 하기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테고,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것 같습니다. | |
| | 박영보 | 14-06-24 12:18 | | 한국인은 고사하고 그 지역에서 동양인이라고는 오직 우리 식구 뿐인 곳, 마치 무인 고도에 표류돼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웃들의 따뜻한 눈릭, 표나지 않게 다독여주는 손길이 있어 외로움이나 두려움 같은 것에 대한 달램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일만성철용 | 14-06-20 04:13 | | 베픈 대로 받는 것이라고 그분들께 Korea를 심고 있는 것에 경하 드립니다. 커다란 배움을 주시늘 글로 읽었습니다. | |
| | 박영보 | 14-06-24 12:20 | | 받기만 했지 베풀지 못한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뿐이랍니다.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캘라한씨 부부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희 주변에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 |
| | 최복희 | 14-06-20 15:58 | | 감동을 주는 가슴 따뜻한 글입니다. 그 먼 타국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실 때 오죽이나 힘드셨을까요. 그럴 때 힘이 되어준 미국인들이 참으로 고맙군요.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 | |
| | 박영보 | 14-06-24 12:23 | | 마음으로는 힘든 것을 모르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따뜻한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