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의사도 정부도 환자 고통 외면해선 안 된다
중앙일보
입력 2024.02.24 00:14
전공의 78.5% 사직에 재난경보 ‘심각’ 격상
접점 없는 극단 대립 속 환자 피해 자꾸 커져
증원 불가피하나 규모, 방법 놓고 대화 필요
정부가 어제 보건의료 재난경보 단계를 최상위인 ‘심각’으로 끌어올렸다.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설치했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사태 이외에 보건의료 위기로 인해 ‘심각’ 단계에 들어선 건 처음이다.
의대 입학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 사태는 악화일로다. 중대본에 따르면 지난 22일 기준 주요 94개 병원에서 전공의의 약 78.5%인 8897명이 사직서를 냈고 7863명이 근무지를 이탈했다. 고열 증세를 보인 신생아가 폭설 속에 응급실을 전전해야 했다. 일부 병원에선 “응급상황 발생 시 상급병원 전원이 불가할 수 있어 사망, 건강 악화 등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까지 받고 있다.
전공의들도 환자들의 고통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저항은 의사로서의 기본 윤리를 망각한 행동이다. 한 대형병원의 인턴 대표는 “감옥에 갈 각오도 되어 있다”면서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이 과일 장사를 준비하고 일자리 센터를 간다고 했다. 의사가 환자를 이렇게 쉽게 내팽개칠 수 있는 것인가.
정부는 집단행동이 끝날 때까지 비대면 진료를 전면 허용하는 등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를 추가했다. 경찰이 진료 방해를 부추기는 글이 올라온 사이트를 압수 수색하는 등 강경 대응도 이어가고 있다. 의사들의 불법 행위 엄단이 필요하지만, 위기에 몰린 환자 치료가 당장 문제다. 비상 대처 와중에 걱정스런 징후까지 나타난다. 전공의 업무를 떠맡은 진료보조(PA) 간호사가 치료 처치나 수술 봉합 같은 불법 진료에까지 내몰린다는 증언이 나왔다. 일손 부족으로 환자 소독 주기는 4일에서 7일로 악화했다고 한다.
더욱이 2~3월에 병원마다 인턴과 전공의가 새로 합류하는 구조에서 이탈한 의사를 대체할 인력 확보가 비상이다. 어제 졸업한 전남대 의대생 122명 중 상당수가 인턴 임용 포기서를 제출했고, 전공의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전임의 다수가 이달 말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의료진 복귀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절실하다.
현재 가장 큰 쟁점은 2000명이라는 의대 증원 규모다. 일반 국민은 물론 의사들 사이에서도 의대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만 숫자와 방식에 이견이 많다. 정부 증원 방침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연구자들조차 2025학년도엔 750~1000명을 늘리는 방안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정부도 한꺼번에 2000명을 고집하기보다는 증원 규모와 방식에서 열린 자세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선 접점이 보이지 않는 갈등의 출구 찾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의사도 그렇지만 정부 역시 환자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된다. 어제 박민수 복지부 2차관과 김택우 의협 비상대책위원장이 TV토론에서 의견을 교환한 만큼 계속 차이를 좁혀가야 한다.
이번 기회에 의대 증원 얘기만 나오면 병원을 마비시키는 우리나라의 전공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병원 전공의가 전체 의사의 46.2%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40.2%에 이르는 현실은 전공의 비율이 10.2%에 불과한 일본 도쿄대 의학부 부속병원과 대비된다. 전공의 비중을 낮추면 이들이 진료 현장을 떠나도 환자의 안전을 지키기가 수월해진다. 향후 상당 기간 의대 증원이 불가피한 만큼 국민 생명을 볼모로 하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차단하기 위한 근본 처방이 시급하다. 매번 의사들의 실력 행사에 막히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온 선례를 이번엔 확실히 차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