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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
한나라 즉 국가의 최소 구성단위는 가정이다. 달리 표현하면 가정이 모여서 나라가 되는 것이다.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사람들이 제 자신 처신이나, 자식이나, 형제간이나, 마누라 등의 행실이 국민의 조롱을 받는 사람들이 꽤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추석거리고 악취를 풍기며 나선다. 그리고 선거에서 바람을 타고 운 좋게, 그런 결점이 많은 사람들이 각종 선거에서 당선이 된다. 한 나라의 대통령, 시도지사, 시군구의 단체장에 당선된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는 자기 자신과 제 집을 먼저 닦아야 한다. 수신이 되면 가정을 이끌 수 있고 그런 연후에 지역과 나라를 위해 나서야 한다.
전 북한 영국 공사 태영호란 사람을 알아보려면 그의 뿌리를 봐야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명천 사는 태 서방으로 1918년 생, 무학에 농민이고, 대대로 농사를 짓던 빈농의 둘째다. 증조부는 큰 할아버지에 땅을 더 주고 작은 아들은 자갈논, 죽지 않을 만큼 세업을 받아 농사를 짓는데, 일제부터 좌익사상의 신봉자로 1935년 조선일보에 보도된 일경의 노조운동 탄압 시 명천농민조합에 가입한다. 김일성 공산당의 농지개혁으로 없는 사람들이 땅을 받아 농사를 지어 소출이 많아지자. 그 조부는 소를 사려고 장에 나가 한잔 마시고는 노름에 팔여 탕진한 좀 엉뚱한 기질이 있다. 그리고 정신 차려 반성하여 다짐을 한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 다음해 소출로 소를 장만한다. 6.25전쟁 전에는 북한도 개인에 준 땅에서 개인이 소출하여 각자 살았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35년 생 태형길이다. 그는 공부를 잘하여 고등 교육을 받고 평양건설재대학 시공강좌 교원이 됐고, 모친은 서문인민학교 교원이다. 태영호는 1962년 생으로 평양에서 공부를 곧 잘하여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1974년 인민학교를 졸업하자, 교사인 어머니의 혜안이 발휘된다. 그가 영어를 잘해야 잘 살 수 있다고 평양외국어학교에 넣는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엘리트 교육은 있다. 북한도 엘리트 양성은 중학교 단계에 시작된다. 북한은 만경대혁명학원, 평양외국어학원이 엘리트 코스인 모양이다. 그리고 핵심 빨치산 출신 가문에 장가를 간다. 빈농의 손자가 교원인 부모를 바탕으로 공부를 잘해서 북한 최고 집안에 장가를 간 전형적인 개천에 용이 난 사례다. 장인은 인민군 중장 오기수로 당시 김일성정치대학 총장이다. 오기수는 김일성과 빨치산을 같이한 오백룡의 조카다. 왕조시대의 공신자손으로 요즘 말로하면 금 수저 집안인 셈이다.
가정을 이루면 부부가 같이 살고 자식을 키우는 것이 인륜인데, 문제의 발단은 북한의 정책은 외교관 아들을 북한 정권이 안일하고 얄팍하게 인질로 북한에 잡아두는데 있다. 여기서 문제와 갈등이 심각하게 발생한 것이다. 외교관은 자식이 둘이면 하나를 북한에 두고 떠나야 한다. 태영호는 큰 아들이 폐결핵이 있어 영국에서 치료를 하고 완쾌한다. 그리고 둘째가 영국에서 태어나 큰 아들을 북한으로 들여보내면서 큰 실망을 한다. 그러자 김정은이 들어서면서 70~80대 늙은이들과 정치를 하다 보니 말귀도 못 알아듣고, 실권을 쥔 60대들도 대화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인지라 . 젊은 일꾼을 양성시키라고 명령을 내린다. 젊은 인재를 외국에 많이 보내서 교육시키라! 외국에 유학 보내려하니, 급한 대로 외교관 자식들은 외국물을 먹었으니 국내에 잡아 둔 인질들을 모두 부모 주재국에 보래라 명령을 한다. 하늘이 준 기회다. 아들이 영국으로 들어와 2년 정도 지난 상태에서 학교 졸업도 전에 다시 볼모로 귀국시키려 명령한 것이 탈북의 가장 큰 이유이다.
북한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김일성이 죽기 10여 년 전부터 이미 김정일에게 넘어가 있었다. 김일성은 허수아비가 다름이 없었다.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붕괴를 한다. 중국은 남한의 노태우 정부와 수교를 하니, 북의 김일성은 남조선과 미국이 조선을 공격하면 우리의 힘만으로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한번 솔직히 말해보라우! 군 간부들과 항일혁명투사들에 묻는다. 모두 답변을 주저하고 있는데 김정일이 일어나 “수령님 우리가 전쟁에서 지면 이 지구를 깨버리겠습니다” 답변을 하자, 김일성이 책상을 탁지면서 “내가 듣고 싶었던 답변이다. 우리가 없는 지구는 필요 없다” 김일성이 대 만족해한다. 즉 핵이 거의 다됐다는 얘기다.
제네바 핵합의로 시간을 번 북한은 한국과 미국이 약속한 경수로만 지어주면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것이 조미 기본합의문이다. 경수로만 지어주면 무슨 돈으로 변전소와 송전설비, 핵 연료봉, 구입을 할 것인가의 대책은 없다. 외무성은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우! 우리는 시간을 벌기위한 사기를 치는 중이니! 대응한다.1994년 북한은 홍수로 식량피해가 심각해진다. 국제기구에 식량지원을 호소하자 실사단이 북한을 방문한다. 영양실조와 걸린 아이들이 병원과 유치원 탁아소에 누어 있은 아이들을 보면서 태영호는 눈물을 흘린다.
태영호는 덴마크 적십자사로부터 덴마크 회사가 이란을 위해 생산한 ‘페타치즈’가 유럽연합의 대 ‘이란’ 수출 금지로 묶여 북한에 무상으로 주겠다는 연락을 주 덴마크 북한대사관에서 받는다. 태공사는 우리는 귀사의 무상협조에 사의를 표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송할 배도 자금도 없다. 영양실조에 걸린 수많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주민들은 귀사의 지원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아이들이 굶주린다고 생각하고 제발 도와 달라 읍소를 한다. 1kg에 10달러가 넘는 3,200톤을 수송비 합치면 3,300만 달러의 치즈가 태영호의 외교로 북한에 보내진다.
김정일은 매번 인민군 군대를 현지지도하면서 걱정이 식량 사정도 말이 아닌데 ,그냥 빈손으로 가 폼을 잡고오기도 민망하여 태영호가 보낸 치즈를 들고 격려하며 인심을 쓴다. 굶는 아이 주라는 치스가 군 보급품이 된 것이다. 김정일은 태영호를 본국에 호출하라 지시한다. “그가 원하는 것 다 해 줘라” 통 크게 지시한다. 북한은 심화조 사건으로 광풍이 불자 연루자, 백승철과 태영호를 같이 호출한다. 태영호는 호송하는지 호송을 당하는지 모르고 귀국 비행기에 탄다. 두 명이 해외여행을 해도 한 명을 단장을 임명하는 것이 북한이다. 백승철이 북경에서 평양에 전화를 하여 통화를 하더니 백승철의 동서가 “언제 공항에 오느냐”며 아내와 마중 가겠다고 하니 얼굴에 화기가 돈다. 그러자 태영호가 불안해 진다. 백승철은 공항에서 김영남에게 소식을 듣고 하늘을 보면서 눈물만 흘린다. 연좌 죄가 있는 북한은 백숭철의 잘 나가던 아버지가 숙청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용소로 보내진다.
외무성 강당에서 받은 표창은 김일성 존함이 들어간 존함시계다. 그리고 그가 원한다고 한, 마누라의 화선입당을 했다. 화선입당이란 전시에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큰 무공을 세운 군인을 전선에서 공산당 당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1997년 8월, 경수로 기초공사가 시작된다. 이 경수로 공사는 대우건설 기술진이 파견되어 나의 3년~ 9년 후배들이 우리 안기부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북한에 넘어갔는데, 못 간 나는 그 후배들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1997년 12월 김대중 선생의 당선으로 햇볕정책이 발표된다. 그러자 김정일은 포용정책을 각국 대사관에 지시하여 적극적으로 비난하라 시킨다. 북한외교관들은 누가 누구를 포용하다는 것이냐? 포용정책은 결국 흡수통일정책이 아니냐는 논리로 선전 활동을 펼친다. 그리고 김정일은 무력시위로 대포동 1호를 발사한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위성발사 성공여부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 미국은 북한의 인공위성은 궤도진입에 실패했다. 북한은 이번 발사를 통해 먼 거리의 지상 목표물을 향해 탄두를 운반할 능력을 보여 주었다 평가한다. 소련은 북한이 첫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한다. 북한은 우리의 인공위성이 지금도 궤도를 돌고 있다 주장한다.
1999년 영국 대사관에 평양 삼층 서기실의 암호 전보지령이 떨어진다. 이스라엘 대사를 만나 극비리의 미사일 거래협상을 진행하라는 지시다. 대사가 영어가 안 되니 태공사가 통역으로 데리고 가 만난다. 이스라엘 대사는 여성 경호원 4명을 데리고 나왔다. 북한은 우리의 미사일 기술에 관심이 많은 나라가 이란을 비롯한 중동국가다. 이들이 우리의 기술을 넘겨달라고 하는데, 우리의 형편이 어려우니 미사일 기술을 팔아서라도 우리 체계를 유지해야 할 지경이다. 우리가 미사일 기술을 팔면 당신의 나라도 안전에 위협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있지만 이스라엘은 아랍국의 적대 위협에 있지 않은가? 만약 이스라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우리는 미사일 기술을 중동에 수출하는 문제를 제고할 수 있다. 이스라엘 대사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달라는 것이냐?” 묻자, 북조선은 10억 달러를 현금으로 달라는 선에서 중동과 협상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답을 한다. 이스라엘은 10억을 현금으로 주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고 식량이나 비료 식료품으로 줄 수 있다 답을 한다. 현금은 안 된다, 만약 준다 해도 미국이 반대한다. 미국은 우리의 동맹국임을 북한도 이해 바란다.
10억 달러를 이스라엘로부터 받아내려는 북한 김정일의 시도는 거절된다. 이란에 이 기술을 팔았는지 여부도 태영호는 모른다. 과연 김정일은 이스라엘로부터 10억 불을 받을 것으로 믿고 그런 협상을 했을까? 아니다. 그는 미국에 이스라엘을 통해 정보를 주어 심리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 김정은과 트럼프의 협상의 밑거름, 정보가 되었다면 김정일 정책도 대단한 것인데, 아직은 모른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이나 정치지도자가 만만한 사람들인가? 지금도 심심찮게 이스라엘 공군 폭격기가 북한의 핵 시설, 선제 폭격설이 흘러나오게 한, 실수도 여기서 비롯된다.
2000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 원쑤인 남조선군 최고사령관 김대중이 북조선 인민군명예위병대 사열을 받는다. 공동선언이 발표된다. 중요한 것이 한반도와 유라시아를 철도로 연결하는 것인데, 이는 북한에 엄청난 경제적 혜택이 돌아올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줘도 못 받아먹는 것은 북한 체제의 한계 때문이다. 문제는 북한의 동해안 방어부대가 철도를 따라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종단철도가 현대화로 진행되면 대대적인 부대 이동이 불가피하다. 그러면 철도비용이야 남측에 손을 벌린 다해도, 군부대 이설비용을 달랄 수는 없으니 김정일도 실세군부의 결사반대로 철도 제안이 묶었던 것인데, 지금 문재인과 김정은이 다시 연결한다고 남북장관들이 협상을 벌리고 있다. 이 중요한 관점을 어찌하는지 국민들이 눈 뜨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개성공단도 군부대 이전으로 엄청난 비용을 인민군이 고생으로 때웠다. 북한의 열악한 교통인프라는 북한에 크고 작은 비행장을 만들었는데 북한의 동해안에 크고 작은 군비행장이 많다.
한국은 미전향장기수 인민군 장교 ‘김선명’을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돌려보낸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는 6.25 때 의용군으로 들어가 51년 포로가 되고 53년 간첩죄가 추가되어 무기징역을 44년 살았는데 인권변호사들이 당시는 간첩죄 적용 법률이 존재하지 않으니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라 권유한다. ‘김선명’은 북송을 앞두고 고민을 한다. 배상금을 받고 북에 갈지, 북한에서 판결을 기다릴지 인데, 그의 변호사들이 재판에 이기면 배상금을 북한으로 송금해주겠다 하니 그는 북한으로 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조국의 아들”이 만들어지고 영웅대우를 받는다. 그가 평생을 바쳐 믿었던 북한과, 실제로 북한 생활해 본 북한의 차이는 느낀 그는 북한으로 송금될 배상금을 그토록 기다린다. 평양주제 영국 대사관 직원이 그를 찾아온다니 그는 배상금을 전달하려고 온줄 알다, 그와 상관없는 다른 일로 온 것을 알자 그는 실망하고 북한에서도 돈의 귀중함을 알았는지 어떤 말로 남기지 않고 2011년에 죽는다.
평양 관현악단 지휘자 ‘장용식’을 우리는 tv에서 봤다. 그가 삼지연관현악단을 지휘한 아이보리 색 연미복을 입은 50대 중키의 마른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가 2015년 4월 김정철의 영국 ‘에릭 클랩톤’ 공연 관람 선발대로 영국에 온다. 그가 김정은의 모든 공연을 최종 심사하는 인물이다. 장용식이 런던에서 구입할 음반 목록을 들고 왔는데, 콘서트, 노래축제 , 뮤지컬 등이다. 덕분에 태공사도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을 BBC교향악단이 공연한 것을 보는 호사를 누린다. 남한에 사는 나야, 모두 본 공연인데 이 것을 보려고 김정철이 6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왔다는 것이다. 장용식은 북한에서 못 구하는 음악을 구입하려한다 하니, 태공사가 인터넷으로 ‘유튜브’에서 다운 받으라 말해줘도 그는 이 말을 이해 못한다. 그리고 다운 받는 법을 알려주니, 하루 2~3시간 자면서 수십 편을 복사한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우수에 젖은 말로 “내 북한 사무실에 인터넷만 있어도 세계적인 공연 자료를 모두 열랄 할 수 있는데” 중얼거린다. 김정은 예술담당 보좌관인 그가 인테넷을 처음 접했다하니, 이번에는 태공사가 놀란다. 그리고 그의 처지가 가련해 보인다.
김정철이 공항에 도착한다. 그는 미니바에서 위스키를 꺼내 수행원과 태공사에게 한잔 부어 주면서 “쭉 내라”한다. 원샷의 북한 말이다. 그는 악기점에서 기타를 산다. 그는 평양에서 개인 벤드를 만들어 연주를 하는 조직이 있단다. 그런데 이 악기 사는 장면이 일본인 기자들에 걸러들어 인터넷에 도배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때 색안경을 낀 김정철과 잘 생긴 공산당 같아 뵈지 않는 태공사를 처음 tv에서봤는데, 아무튼 요즘 tv뉴스의 ‘최선희’처럼 약삭빠른 이기주의자 형 같지 않고, 백령도를 공격했던 ‘김영철’같이 머리가 텅 빈 꼴통 외고집형으로 생기지도 않고, ‘리선권’ 같은 무지막지한 조폭 행동대 똘마니 형 얼굴도 아니고, 북한 김정은의 지시를 공책에 받아 적는 걸음걸이도 불편한 늙은이 ‘에스맨’ 형도 아닌, 태영호는 깔끔한 ‘에리트’ 형 얼굴이 눈에 뛴다하는 느낌을 받던 인물이다, 저런 잘생긴 인물이 북한에 태어나 아깝다고, 내가 생각했던 태공사의 인물평이었다? 공연관람이 끝나자 언론기자들이 난리법석으로 몰려들자, 영국 정보부에서 경호원을 대어, 김정철 일행을 기자와 분리시키고 짐을 푼 호텔로 가지 않고, 다른 한적한 호텔로 투숙시킨다. 그리고 대사관 직원이 짐을 공항으로 옮긴다. 기자들이 모스크바 행 비행기 통로를 점거하자 VIP라운지를 이동하여 이륙 직전에 탑승시킨다.
김정철은 태공사에게 “공사 동지, 이번에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귀국하시면 제가 꼭 한 턱 내겠습니다. 저를 찾아주십시오” 상당히 겸손한 인사말을 한다. 집에 오자 태공사, 아들이 아버지가 며칠 간 어디 가셨나 했더니 김정철을 안내하셨더군요. 아이의 눈은 적확하다. 아들은 말하기를 “일반 북조선 주민에게는 썩어빠진 자본주의 음악은 들으면 안 된다고 하고, 외국 노래를 들으면 대학에서 추방까지 시킨다. 인민들에게는 고난의 행군을 강요하면서 김 씨 가문은 하고 싶은 일이란 다 한다. 런던에서 하루 저녁에 몇 천 달러를 탕진하면서 퇴폐적인 서방 음악을 감상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아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한다. 태공사는 노예가 노예주의 뒷바라지나 한 꼴이다.
2016년 북한은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것을 예측하나 공화당 트럼프가 된다. 영국에서 바라본 북한은 숙청과 처형의 나라다. 태공사는 수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분노가 차츰 높아간다. 반당분자 장성택 일행을 고사포로 처형한 김정은은 장성택이 평양에 만든 평양민속공원을 없애버리라 지시한다. 평양시민과 군인이 몇 년을 투자하여 만든 대규모 시설인데 , 궁궐이 없는 북한은 주민의 관광 명 코스로 아마 우리나라 경복궁이나, 최소 덕수궁 규모는 되었을 것이다. 이 민속공원의 홍보자료 대외 선전물과 사진을 모두 없애라고 지시가 내려온다. 서울의 고궁처럼 외국관광객이 민속 문화를 체험하는 명소인 이 곳을 모두 철거한 김정은의 ‘뒤끝’을 보여주는 성질을 부린 것이다.
공사 생활은 회한의 나날이다. 은하수 악단이 처형되고, 정성택이 처형되고, 마음은 망신창이가 되었다. 그 정권아래 하수인이 된 것이 수치스럽다.
북한도 한미 합동훈련을 남한이 하면 어쩔 수 없이 대응훈련을 해야 한다. 그 때 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과 물자가 소모된다. 북한의 군부는 외무성에 합동훈련의 중지시켜 달라는 요청을 해댄다. 태공사는 정리를 시작한다. 더 이상 북한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맏이만 평양에 다시 들어 보랠 수는 없다. 당국의 지시에 순응해야만 했던 지난날이 한스럽다. 이제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로 했다. 더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지금까지 노예로 살아온 것 만해도 충분하다. 나는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탈북하면 우리 형제와 가문이 큰 불이익을 당하겠다만 우선 우리 먼저 자유를 찾자. 그들을 위해 열심히 살면 된다. 아버지로서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유산은 자유다. 한국에 간다 해도 우리가 바라는 바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너희만이라도 자유롭게 살 수는 있을 것이다”. 태공사가 말을 하자 아내가 말한다.“기회가 있을 때 너희를 다시 북한으로 데려간다면 우리는 후회할 것이고, 너희도 두고두고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 우리가 탈북하면 나 때문에 할머니와 친척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할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죄는 엄마가 다 받겠다. 자류를 찾아 먼저 떠난 우리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길 날이 언젠가는 꼭 오리라 믿는다. 그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자.”
2018.06.29.
태영호 증언
삼층 서기실의 암호
기파랑 刊
첫댓글 태영호 공사의 증언을
자세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메온 선생은 참 부지런하십니다
그리고 정리도 잘하시고 노고에 사의를 표합니다
김정은 치하에서 잘 나오셨습니다 !
송석주 선생
해박하신 한 시에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