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석촌
모델 : 올디 님
촬영 장소 : 두물머리
대선배 올디 님과 함께 출사를
집을 나서면 역사나 문화의 숨결이 깃든 이런저런 볼거리들을 만나게 된다.
얼마 전엔 어느 글벗과 북한강 줄기를 따라가다 양평 서종면에 이르러
화서 이항로선생의 생가를 만나게 됐지만,
지방의 지인이 서울로 올라오면 먼저 무엇을 보여줘야 좋을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엔 서슴없이 안내하는 두어 곳이 생겼으니,
그중 하나가 두물머리 언저리라고나 할까 보다.
어제도 카페의 선배 한 분을 모시고 느닷없이 달려간 곳은 두물머리였다.
(1929년 뱀띠 기사생 올디 님)
겨울이라고는 하나 아침그늘 밑으로 간밤의 잔서리가 내려 깔려있을 뿐
포근하기만 했지만
연대 꺾여 숙어지고 연잎들 널브러진 연밭을 들여다보니
살얼음이 살짝 앉아 반짝거리며 발걸음을 조심하라 이르는 듯했다.
예의 그 느티나무 아래 발자국을 남기고 물 위에 뜬 나룻배 한 척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카메라에 그 영상을 담아봤지만
본시 배는 방향성이 없는 것이다.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니 그런 것이요
노를 젓는 방향에 따라 앞으로도 뒤로도 가는 것이니 그런 것이다.
동력을 이용하는 배라 하더라도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방향에 따라
앞으로도 뒤로도 가게 되니 그런 것이라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배라 하면 용골은 튼튼해야 한다.
이물(船首)에서 고물(船尾)로 이어지는 척추가 부러지면
배는 절단 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배의 바닥은 반드시 이중구조로 되어야 한다.
그래야 암초에 부딪혀 바닥에 구멍이 나도 가까운 곳에 닻을 내릴 때까지는
온전히 항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더 멀리 항해하기 위해서는 무게중심과 부력중심이 서로 밀고 댕기며
균형점을 맞춰야 하느니
그러지 아니하고는 작은 풍랑에도 배가 전복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따금 지나가는 순찰보트에 흔들거리는 배를 뒤로하고
물길 따라 오리쯤 내려가 다산(茶山)의 묘소와 여유당(與猶堂)이 있는
마현에 이르렀지만
이곳은 천 칠백 년대 후반에 태어나 천팔백 년대 전반에 타계할 때까지
숱한 고난을 겪으며 3천 수에 가까운 시부와 5백여 권의 저술을 남긴
18세기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 서려있는 곳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진구렁을 메우지만
그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다산이 저술한 <목민심서>의 한 구절이다.
다산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의 중세적 농경사회에서
근대적 상공업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였으므로
중세적 농경사회에서나 어울렸을 성리학은
더 이상 시대적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상공업사회로의 변환에 따른 사상적 지주로서
실학이 요구되던 때였으니
다산은 종래의 유교적 통념을 비판하고
기술이 치지 하는 중요성을 강조함은 물론
서양의 근대기술문명을 받아들일 것을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에 말려 장장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되며
유배가 해제된 이후에도 등용이 막힘으로써
향리에 묻혀 저술에만 전념하다 일생을 보냈으니
민족의 도약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 되었다.
몇 년 전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다산과 같이 천 칠백 년대 후반에 태어나 천팔백 년대 전반에 타계한 그는
미국의 헌법을 기초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민주주의 틀을 완성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향리 버지니아에 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으로서 영재 양성에 주력하여
독립 직후에 국가의 기초를 단단히 다진 사람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커다란 재목인 다산은 자신의 큰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정신적 에너지가 왕성했을 시기에 유배지에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을 뿐이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는 그의 사상을 목민의 지침으로 삼아왔으며
서울을 방문하는 이 있으면
다산의 흔적이 서려있는 여유당으로 안내하곤 한다.
다산이 정조대왕의 사랑을 받으며 학문을 논할 때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정조 왈
“ 같은 자 세 개로 구성된 한자를 늘어놓아보아라
내가 알기로는 맑을 정 晶,
간사할 간 姦,
물 가득할 묘 淼,
나무 무성할 삼 森,
돌무덤 로이 磊가 있는데
그대는 더 찾아낼 수 있겠는고? “
이때 다산은 말하기를
“그것만은 전하가 저를 못 따라오십니다.”라고 했다 한다.
정조가 이르기를
“그럼 그 글자가 무언고?” 하니
다산이 답하기를
“그것은 석 삼자(三) 이옵니다.”라고 했다 한다.
이것을 보고 정조는 참 영특하다고 여겨 귀히 여겼으나
벽파의 미움에 밀려 귀양 가게 되고 말았으니
하늘이 그 영특함을 시기함이었던가?
(이것 말고도 彡터럭 삼, 畾밭골 뢰, 品물건 품이 있기는 하다)
다산은 목민관의 자세로 청(淸)과 신(愼)을 중히 여겼으나
여유당을 돌아가는 어제의 한강수는 녹조현상이었던지
누런 松花 가루를 풀어놓은 듯 탁하기만 했다.
여기서 다시 물줄기를 따라 오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두물머리의 그 배에 닿는다.
이제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테지만
머잖아 마땅한 조타수도 올라타 방향을 잘 잡아주길 바라면서
나들이를 마쳤다.
첫댓글
기사생 올디님과 함께 두물머리로
출사 하시고 오셨네요.
올해로 94세 인 것 같은데
건강하신가 봅니다.
저는 십여년 전에 길동무에서 두어번
뵈온것 같습니다.
가끔 제글에 댓글도 올려 주시던걸요.
같은 글자가 세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轟 울릴<굉> 자 하나 올려 놓겠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검소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고즈넉한 조선 선비의 생가가 두물머리에
자리하고 여유당이 함께 하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94세신데 평안하신지~~
다산과 정조의 교류는 참 인상적입니다.
29년생 올디님도 대단하신 분이군요.
네에 평안하신지 모르겠네요.
사람이 문제이고
욕심이 사람을 부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균형잡기가
참 어렵구나 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맞아요.
사람이 문제죠.
강과 나룻배는 떼어 놓을 수가 없지요
대 선배님과 출사한 작품이군요
두물머리 풍경은 어디서 찍어도 멋져요
오늘도 건강한 하루 보내십시요
네에 고마워요.
올디 님이 아직도 정정하게 활동하시나요?
오랜만에 그 분 소식 접한 것 같습니다.
내내 평안하세요.
글쎄요.
보고싶은데 활동이 없으시네요.